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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지도학
기계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들
Common Prejudices About Machines
1. 모든 기계는 경직된 기계이다
그런데, 기계지향적 존재론(machine-oriented ontology, MOO)를 전개할 수 있으려면, 기계의 본성에
대해 우리가 지니고 있는 몇몇 편견 또는 가정들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이런 편견들 가운데 첫 번째 것은 "경직된 기계(rigid machine)"가 기계의 존재 자체를 포괄한다는 견해
이다.
경직된 기계는 고정된 물질적 부분들로 구성된 기계로서 규칙화된 기능 실행으로 특징지워지고, 그래서
학습, 성장 그리고 발달 능력이 없다.
경직된 기계의 사례들은 자동차, 원시적인 컴퓨터, 휴대폰과 램프뿐 아니라, 바위, 죽은 행성과 유성, 원자
입자 등도 있다.
경직된 기계는 자체 조작에 있어서 변화를 겪을 수 없으며, 그것의 유일한 운명은 엔트로피, 즉 궁극적인
해체이다.
그렇지만,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들이 기계라는 점이 참이라면, 경직된 기계들이 존재하는 기계들의 아종을 형성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자동차와 달리 식물은 성장하고 발달한다.
나비 같은 많은 곤충들은 자체 존재의 상당한 부분을 애벌레 같은 매우 상이한 유기체들로서 산다.
살아 있는 행성은 자체 조작들이 시대마다 상이한 매우 확연히 다른 기후적 단계들을 겪는다.
아이, 수달, 조직체 등은 학습할 수 있으며, 그렇게 배운 것의 결과로서 자체의 행동과 조작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게다가 모든 기계가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언어적 존재자들은 존재하기 위해 말과 글의 형태로 물질적 육체가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긴 시간 동안 휴면 상태인 채로 존재하다가 다른 한 시기가 되어서야 다른 존재자들에게 작용하기 시작
할 수 있게 하는 무형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한 국가의 정체는 휴대폰 같은 고정된 물질적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기계이다.
조리법은 자체적으로는 아무 재료도 없지만, 여전히 재료를 조작하기 위한 기계이다.
소설은 자체적으로는 사람, 바위, 히스, 동물, 폭탄 또는 공기로 전파되는 유독한 사건을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모든 종류의 방식으로 사람, 제도, 경제 같은 다른 기계들에 작용한다.
부채는 세계에서 물질적인 것으로 식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수십 억 명의 사람들의 삶을 조직하는
기계이다.
나무는 비행기에 못지 않게 기계이고, 정체도 VCR에 못지 않게 기계이다.
이런 존재자들 모두가 기계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경직된 기계는 다른 많은 기계 유형들 가운데
한 가지 기계 유형일 뿐이다.
기계를 규칙화된 형식으로 물질의 흐름을 조작하는 경직된 물질적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자라고
간주하는 개념보다 훨씬 더 넓은 개념이 필요하다.
또한 메커니즘과 기계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관념도 실질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다.
십육 세기에서 물려받은 메커니즘에 대한 친숙한 관념들은 기계적인 것을 창의적인 것에 대립되는 것
으로서 규칙화된 활동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것으로 다루는 반면에, 학습 능력을 갖춘 인간과 동물, 나무
그리고 예술 작품 같은 사례들은 창의적 메커니즘에 대한 이론을 시사하는데, 많은 유형의 기계들에
대해 우리는 기계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리고 사실상, 생물학, 복잡계 이론, 혼돈 이론 등과 같은 다양한 과학을 살펴볼 때, 우리는 모든 곳에서
유물론은 세계를 "기계적인 것"으로 특징짓기 때문에 창의성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하는 유물론에 대한
낡은 규정이 부족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대신에, 지난 백 년 동안, 유물론은 모든 곳에서 물질이 영성적 또는 초자연적 보충물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은 채 대단히 창의적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듯 보인다.
어쨌든 기계지향 존재론은, 이런 상이한 유형들의 기계들이 공유하는 본성을 포착하기에 충분히 넓은
기계 개념과 더불어, 동물학 및 식물학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기계, 무형의 기계, 예술적 기계, 정치적
기계 등과 같은 상이한 유형들의 기계들의 본질적 특징들을 탐구하는 "기계학(mechanology)"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야를 필요로 한다.
현재로서는 어떤 상이한 기계의 유와 종이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조차 없다.
2. 모든 기계는 설계된 것이다.
두 번째 큰 편견은 기계가 설계된 것이라는 점이다.
기계의 설계자는 인간 같은 지적인 합리적 존재자이거나, 아니면 일신교적 전통들의 유일신 또는 플라
톤의 <티마이오스>의 데미우르고스 같은 어떤 종류의 신성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면,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의 유명한 설계 논증을 생각할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자연
속 질서와 목적의 존재로부터 신성한 설계자의 존재를 추론할 수 있다.
다윈 혁명의 여파로 신의 존재에 대한 목적론적 논증에 계속 설득당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만, "기계"
라는 술어를 들을 때인간 설계자를 연상하지 않기가 어렵다.
여기서 우리는 "객체"라는 술어에 대해 일어나는 것과 비슷한 의인화 위험을 대면한다.
"객체"라는 술어가 즉각적으로 그 객체를 파악하고, 상정하고, 의도하거나 대면하는 주체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기계'라는 술어는 그 기계를 설계하고 제작한 인간, 합리적 존재자 또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네덜란드 풍차를 대면하면 그 풍차를 고안하고 제작한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그 풍차를 이런 사람들의 설계와 작업의 흔적으로 대면한다.
"기계"라는 술어 덕분에 우리는 독립적인 육체로서 조작하는 존재자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객체"
라는 술어의 인간중심주의적인 연상들을 피할 수 있고, 그래서 주체에 의해 간주되거나 의도되는 것
으로서의 객체에 대한 집중을 피할 수 있다.
그런데 기계를 고안하고 제작한 사람들에 대한 연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기계"라는 술어도 나름의
위험을 품고 있다.
객체 개념을 기계 개념으로 대체할 때에도 여전히 의인화 위험을 직면하는 듯 보일 것이다.
그런데 모든 존재자들이 기계이며, 그리고 다윈의 여파로 신의 존재에 대한 목적론적 논증들이 붕괴되어
버렸다고 안전하게 말할 수 있다면, 당연히 기계들의 작은 부분집합만이 인간 또는 우주 어딘가에 존재
할지도 모르는 지적인 존재자들에 의해 설계된 것이다.
이런 존재론내에서는 나무, 살아 있는 행성 그리고 구리 분자들은 모두 기계의 사례들일 것이지만, 그럼
에도 이 기계들 가운데 어느 것도 누군가에 의해 설계되지 않았다.
오히려, 마누엘 데란다(Manuel DeLanda)가 표현할 것처럼, 이 기계들은 창발을 유도하는 그 어떤 지향
성도 없이 다른 기계들로부터 창발되었다.
사실상, 냉장고와 예술 작품 같은 인간들에 의해 제작된 기계들의 경우에도, 성찰은 이런 기계들이 인간의
모형과 의도의 단순한 산물이라는 점에 중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테크네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인공물은 우선 장인의 마음 속에서 고안된 다음에 그의 행위주체성을 통해 수동적인 물질에 부과되는 모형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설명은 철학사 전체에 걸쳐서 예술과 기술에 관한 논의들을 많이 지배한 창조에 대한 질료형상론적
설명이다.
"질료형상론(hylomorphism)"이라는 술어는 "물질"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힐레(hyle)와 "형상"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모르페(morphe)에서 유래되었다.
이런 제작 모형에 따르면, 장인은 먼저 자신이 만들어내고 싶은 것에 대한 일종의 청사진을 구상하고
(형상), 그 다음에 그 모형을 질료에 부과하여 그것에 형상을 부여한다.
나는 먼저 내가 만들어내고 싶은 칼에 대한 심적 모형을 마음 속에 품은 다음에 주변 세계의 물질들을
그런 형상으로 만드는 데 착수한다.
그런데 예술 작품, 도구 또는 기술을 제작하는 실제 활동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다른 일이 일어난
다는 점을 알게 된다.
확실히, 예술가는 요소들로부터 집 같은 것을 만들고자 하는 어떤 종류의 의도를 품고 있으며, 이 의도는
건축가의 청사진의 경우에서처럼 다소간 정교한 모형을 포함할 수 있지만, 여기가 질료형상론적 모형과의
유사점들이 끝나는 지점이다.
인공물이 생산되는 방식에 대한 질료형상론적 모형과 관련된 문제는 그것이 생산 시기와 세계의 물질과의
관계 시기 둘 다를 망각한다는 점이다.
생산 시기와 물질과의 관계 시기에 대한 주의집중이 드러내는 것은 그 어떤 인공물의 생산도 수동적인
물질에 어떤 형상을 단순히 부여하는 활동이 아니라 협상하는 활동에 훨씬 더 가깝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든 협상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협상의 최종 결과 또는 산물은 선재하는 잘 규정된 계획
의 결과라고 말할 수 없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에서 물질에 대해 논의하면서 샤르트르(Sartre)는 이 점을 예시하는 시사적 사례
들을 제시한다.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를 좇아서 샤르트르는, 증기 기관은 화부와 기술자들에 의한 끊임없는
돌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것이 대규모 산업 시설을 향한 경향을 부추겼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증기 기관을 유지하는 작업의 노동집약적인 특징으로 인하여 대규모 산업 시설이 소규모 산업
시설보다 더 효율적이고 비용이 절감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단순하다.
증기 기관을 제작하고자 한 의도는, 예를 들면, 벌목용 톱을 가동하기 위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것이 전부다.
이 목적 또는 목표 자체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대규모 산업 공장을 만들어내는 목적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런데 증기 기관의 어떤 요구, 유지되는 데 많은 일을 필요로 하는 노동집약적 본성이 그런 기관들이 최대
한의 경제적 및 물질적 효율성으로 작동하도록 설치될 수 있는 대규모 공장의 건설을 부추겼다.
물론 이것은 다양한 톱을 가동시킬 수 있는 대형 증기 기관의 생산도 의미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계 자체가 설계자의 의도를 벗어나는 어떤 명령들을 설계자에게 내리는 사례를 갖게
된다.
결국 기계 자체가 설계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설계에 기여하게 된다.
여기서 대규모 공장을 부추기는 증기 기관에 대해 샤르트르가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물질은 모든 층위에서 설계자에게 명령을 내린다.
증기 기관의 사례와 더불어 기차의 발명을 고려하자.
기차의 크기, 그것의 바퀴, 속력 등의 특질은 부분적으로 입수 가능한 재료들의 함수일 것이다.
지금까지 생산된 강철과 금속이 철로로 사용되었을 때 기관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가?
사하라, 알래스카 또는 시베리아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두드러진 온도 변화를 겪을 때 그런 금속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보일러의 강철은 몇 도까지 견딜 수 있는가?
기관을 작동시키는 데 어떤 에너지원들―석탄, 가솔린, 전기 등―을 이용할 수 있으며, 이런 상이한 에너
지원들이 기관의 배치와 그것의 능력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기차의 설계자는 이상적인 청사진을 구상하고 있을 것이지만, 열차가 작동할 환경, 현존하는 기술 그리고
야금학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같은 제작된 입수 가능한 재료들의 물질적 특징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함에
따라, 그가 애초에 의도했던 것을 변형시키는 요구 사항들이 설계에 부과된다.
사실상 이런 고려들은 경제적 타당성과 재료의 입수 가능성이라는 쟁점들에는 접근조차 하지 않는데,
이것들도 마찬가지로 기차가 최종적으로 취할 형태에 기여한다.
기차의 설계자는 그가 기차를 설계하는 것에 못지 않게 기차에 의해 설계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샤르트르는 설계자의 지성과 목적이 아니라 사물들 자체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기술적
지향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물질과 현존하는 기술이 자체의 특성과 경향들의 결과로서 "의도"하거나 지향하고
있는 것과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것 사이의 드라마, 즉 지향들의 투쟁에 붙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중에 샤르트르는 인간들이 어디에 살던 간에 도구가 우리에게 자체의 기법들을 부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여기서 도구에 관해 샤르트르가 말하는 것은 환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참이다.
도구와 환경은 어떤 문제들을 해결되어야 할 명령으로 제기한다.
물론 이런 명령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그에 못지 않게 끈덕지다.
이것들이 일어나는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한다.
첫째, 도구 또는 환경은 습관적으로 육체를 조직하게 된다. 잉크 펜은 어떤 파지 방식들을 요청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하여 사용하는 과정에서 근육과 뼈 형상이 취하게 되는 형태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결국 다른 파지 방식들을 차단하는 다양한 신경학적 파지 도식 또는 경향들도 생성한다.
이것은 환경적 인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참이다. 뉴저지 주의 다리를 건설하며 평생을 바다에서
보낸 내 조부는 다리를 약간 벌리고 어깨를 약간 구부리는 이상한 걸음걸이로 걷는다.
그는 자신이 작업했던 바지선과 끌배들의 흔들리는 표면의 결과로서 이런 걸음걸이의 도식을 형성한
일종의 체화된 파도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걸을 가능성이 높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언급한 난초와 말벌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의 육체도 나름의 방식으로 다른 기계들을
특징들을 내부화한다.
둘째,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들은 우리가 대응해야 하는 사회적 요구들도 생성한다.
사회적 명령들은 우리가 생산한 사물들의 세계에서 비롯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시계, 특히 개인 시계의 발명일 것이다.
시계와 계시기의 발명과 더불어 사회 생활 전체가 변하기 시작한다.
시계가 발명되기 이전에 태양의 위치뿐 아니라 빛과 어둠으로 판별되었던 시간은 사람들이 언제 만날지에
대해 얼마간의 느슨함을 수반했다.
모두가 입수할 수 있는 정밀한 계시 장치들의 발명과 더불어 생활과 노동은 새로운 방식으로 줄무늬가
새겨지게 된다.
점차적으로, 모든 사람이 시계를 입수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에 따라 자신의 노동,
일상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조직하는 것이 정언 명령이 된다.
"당신은 특수한 이 시각에 여기 와야 한다." "이 모임은 특수한 이 기간 동안 열릴 것이다."
"당신은 이 만큼의 시간 동안 작업할 것이다."
"당신의 음식은 이 시각에 제공될 것이고 당신은 저 시각에 깰 것이다."
확실히, 계시기의 전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것은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서야 가능
하다.
모든 사람이 계시기에 속박되어 있는 한, 일단의 사회적 의무와 기대들, 즉 총체적인 생활 방식이 이
기술에서 비롯된다.
전기 조명, 신문, 텔레비전, 자동차 그리고 나아가서 휴대폰의 발명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기술들은 모두 우리의 사회적 관계들의 본성과 관련된 규범들의 집합을 생성한다.
여기서 요점은, 그 어떤 인공물의 생산도 단순히 어떤 모형을 구상한 다음에 그 형상에 따라 물질을 구성
하는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인공물을 생산하는 데 있어서 장인의 의도와 지도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지만, 사물 자체, 사용되는 재료,
인공물이 생산되는 환경이 모두 장인이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최종 산물에 기여한다.
생산되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장인의 의도와 마찬가지로 물질의 요구 사항들의 결과물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정신현상학>에서 이루어진 "객관적 정신"에 대한 헤겔의 분석에 절반만 동의할
수 있다.
헤겔은 이렇게 진술한다.
[...] 사물을 만들어낼 때, 노예 자체의 부정성, 향자재성은 오로지 그가 대면하는 현존하는
모양을 무시함으로써 그에 대한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런 객관적인 부정적 계기는 그 앞에서 그것이 떨고 있던 이질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그는 이런 이질적인 부정적 계기를 파괴하고, 스스로를 사물들의 영원한 질서 속
에서 부정적인 것으로 상정하며, 그래서 즉자, 그 나름대로 존재하는 누군가가 된다.
헤겔의 요점은, 세계의 이질적인 물질을 자신이 원하는 형상으로 만들어낼 때, 노예의 정신은 그가 만들
어내는 인공물이 물질적 사물 속에서 지속하는 한에 있어서 객관적인 영원성을 띠고, 세계는 그 자신의
정신, 존재 또는 의식을 반영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물질을 만들어낼 때, 노예 주변의 세계는 그 자신의 의식(부정성)을 반영하게 된다.
그런데, 전술한 바에 의거하여 이제 우리는 상황이 전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물질은 결코 우리의 형상 부여 또는 새김을 기다리고 있는 수동적인 질료가 아니라, 그 대신에 모든
종류의 뜻밖의 방식들로 우리 설계를 수정한다.
기차의 설계자는 기차가 정확히 이런 모양을 갖출 것이라고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의 요구
사항들이 열차의 최종 설계가 이런 특수한 모양과 배치가 되도록 이끌었다.
시계의 발명자는 시계가 삶의 모든 측면에 줄무늬를 새길 것이라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시계가 생성되어
널리 입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일상 생활과 사회적 관계들은 매우 다른 구조를 띠게 되었다.
비인간 기계 또는 물질들이 우리 자신의 의도와 계획들만큼이나 설계에 기여한다.
그리고, 시계의 사례가 시사하듯이, 이런 물질들은 설계가 취하는 형상에 제약을 가하는 명령들을 내릴
뿐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을 구성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우리를 설계한다.
내 삶, 목적 그리고 의도의 특질은 시계 같은 것의 발명으로 변하게 된다.
"매체가 메시지다"라는 유명한 주장을 제시했을 때 매클루언(McLuhan)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이 이것이다.
매클루언이 적고 있듯이,
[...] 빛이 뇌 수술을 위해 사용되느냐 아니면 야간의 야구 경기를 위해 사용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전깃불이 없으면 뇌 수술이나 야간 경기가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뇌 수술이나 야간 경기가 전깃
불의 "내용"이라는 주장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은 "[매체]가 메시지다"라는 점을 강조해 줄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 관계와 행위'의 '규모와 형태'를 형성하고 제어하는 것이 바로 [매체]이기 때문
이다. [마셜 매클루언, <미디어의 이해(Understanding Media)>(김상호 옮김, 커뮤니케이션
북스, 2011), pp. 32-3]
매체―여기서 내가 "기계"라고 부르고 있는 것―는 인간들 자체에서 결코 비롯되지 않는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 행위, 사회적 관계 그리고 설계들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공물의 생산이 인간들의 의도와 더불어 비인간들의 특징들에서 비롯된 결과인 한에 있어서
도대체 설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오해을 낳을 소지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내가 서론에서 "중력"이라고 언급한 것의 적절한 일례를 만난다.
세계의 기계들의 특징들은 우리가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우리 행위와 목적을 끌어들이는
어떤 중력을 우리에게 행사한다.
예를 들면, 우리 자신들의 소망과 목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삶이 점점 더 시계를 둘러싸고 조직화
되도록 시계의 중력적 끌림에 붙잡히게 된다.
3. 기계는 어떤 목적 또는 용도를 지니고 있다
기계와 대한 세 번째 큰 편견은 기계는 어떤 목적 또는 용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은 기계를 구성하는 것의 범형으로서 전동칼과 전기면도기 같은 경직된 기계들을 다루는 데서
비롯된다.
전동칼의 목적은 칠면조 또는 빵을 자르는 것이고 전기면도기는 수염을 깎는 데 사용되는 것이라고 말
하며, 이런 용도와 목적이 기계의 고유한 특징인 것처럼 여긴다.
그런데, 모든 존재자, 사물 또는 객체들이 기계인 것이 참이라면, 명백히 이것은 맞지 않다.
뉴트리노, 블랙홀, 씨앗, 관목 그리고 토끼 같은 다양한 존재자들이 모두 기계인데, 그럼에도 명백히
이런 기계들은 전동칼이 목적 또는 용도를 지니고 있다는 그런 의미에서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다.
블랙홀은 그 어떤 것을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것은 어떤 특수한 방식으로 조작하거나 작동한다는 점에서 기계이지만, 자체를 넘어서는 그
어떤 특수한 목적, 목표 또는 용도도 없다.
아마존의 설치류 동물 카피바라는 확실히 자체적으로 목표와 목적은 있지만, 악어와 표범을 위한 먹잇
감이거나 다른 식물들을 위해 비옥한 토양을 만들기 위해 어떤 식물을 소화함으로써 그 식물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 같은 자체를 넘어서는 고유한 목적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카피바라는 악어, 표범 그리고 식물 같은 다른 기계들에 의해 이런 용도들로 이용될 수 있지만, 이런
용도들은 기계로서의 카피바라의 존재의 일부가 아니다.
여기서 블랙홀과 카피바라 같은 기계들에 대해 언급되는 것은 볼펜과 자동차 같은 경직된 기계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참이다.
어떤 특수한 목적을 위해 설계되고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유형들의 경직된 기계들도 어떤
용도로 사용될 수는 있지만 어떤 목적을 자체 존재의 고유한 특징으로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에 대한 이유는, 인간들에 의해 제작되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모든 기계는 다능성 존재자들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에서 다능성 세포는 줄기세포처럼 간세포, 근육세포 또는 신경세포 같은 다양한 상이한 유형들의
세포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세포이다.
다능성 세포는 다중의 생성 역능을 갖춘 세포인데, 말하자면 그것은 다양한 상이한 방식들로 자체를
현실화할 수 있다.
그 어떤 존재자의 다능성도 무제한적이지는 않지만―그 어떤 존재자도 모든 상이한 유형의 존재자가 될
수는 없다―그럼에도 모든 존재자들이 다능성이라는 점, 즉 별개의 형태와 기능들을 생성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태를 지니고 있다는 점은 맞다.
바위 같은 단순한 경직된 기계의 사례를 고려하자. 자체가 처해 있는 환경 조건에 의존하여 다양한 상이
한 상들을 나타낼 수 있다―바위는 가열되면 마그마가 되고, 냉각되면 취성을 띠게 되며, 기타 등등―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이한 용도를 떠맡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도 바위는 다능성 존재자이다.
바위는 문진, 문 버팀장치, 투석 무기, 가열하여 물 속에 담구는 물끓이기 장치, 벽돌 등으로 사용될 수
있다.
바위는 어떤 용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용도로 사용된다.
이것은 볼펜의 경우에도 바위와 마찬가지로 참이다.
명백히 볼펜은 글쓰기라는 목적을 위해 설계되고 제작되었지만, 그런 의도가 볼펜의 존재를 규정하지도
못하고 그것의 다능성의 기반을 약화시키지도 못한다.
바위가 다양한 상이한 기능 또는 용도들을 떠맡을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볼펜도 찌르는 무기, 침
덩어리를 내뱉는 튜브, 소다수를 마시는 빨대, 콩 식물을 지지하는 기둥, 기관 절개용 공기 도관 등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들에 의해 제작된 인공물 같은 경직된 기계의 용도의 역사는 설계보다 굴절적응(exapt
ation)이라는 생물학적 개념으로 더 잘 설명된다.
생물학에서 굴절적응의 현상은 그것이 애초에 수행한 기능과 다른 기능을 떠맡는 특질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폐는 애초에 호흡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유기체들 경우에 공기를
가득 채운 부레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흔히 제시된다.
마찬가지로, 흑색 화약은 총과 대포를 발사하는 용도에서 광산의 암반을 폭파하는 용도로 전환되었다.
기술의 역사는, 다양한 기술의 잠재 능력들이 탐구되는 굴절적응의 역사이자 그런 기술들이 새롭게
사용될 때 발생하여 해결책을 요구하는 문제들의 역사로 간주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광산에서의 흑색 화약의 사용은, 화약을 장전한 광부들이 폭발에서 대피할 수 있도록 충분한
지연 시간을 갖춘 채 화약을 폭발시키는 방법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다.
이 문제는 1831년에 윌리엄 빅포드(William Bickford)가 안전 퓨즈를 만들어내고 나서야 완전히 해결
되었다.
굴절적응은 새로운 유형들의 존재자들의 구성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문제들을 생성한다.
기계는 어떤 목적 또는 용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기계들과 구조적으로 접속할 때
어떤 목적 또는 용도를 떠맡게 된다.
구조적 접속(structural coupling)이라는 개념은 서로 섭동함으로써 서로 연계되어 발달하는 존재자들
사이의 상호작용 관계들을 나타내기 위해 생물학자이자 자기생산 이론가인 마투라나(Maturana)와
바렐라(Varela)에 의해 도입되었다.
구조적 접속의 관계들은 일방적이거나 아니면 쌍방적일 수 있다.
한 존재자가 다른 한 존재자의 반응 또는 활동을 촉발하는 한편, 그렇게 촉발된 반응이 이어서 첫 번째
존재자의 반응을 촉발하지 못할 때, 구조적 접속은 일방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꽃과 태양 사이의 관계를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태양은 꽃이 광합성에 관여하는 속도에서 꽃과 잎이 향하는 방향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반응들을
꽃에게서 촉발하지만, 꽃의 반응들은 이어서 태양에게서 아무 반응도 촉발하지 않는다.
요약하면, 존재자들 사이의 모든 상호작용들이 호혜적인 것은 아니다.
나중에 이것이 정확히 왜 이러한지 알게 될 것이다.
반면에, 기계 A의 작용이 기계 B의 반응을 촉발하고, 이어서 기계 B의 반응이 기계 A의 반응을 촉발할
때, 구조적 접속은 쌍방적인 것이 될 것이다.
생물학적 진화는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듯 보인다.
돌연변이, 자연선택 그리고 유전이라는 과정들을 통해서 한 유형의 존재자가 포식자들을 피할 수 있게
하는 갑주, 위장 또는 속도를 발달시킨다.
포식자의 역능이 선택 압력의 창출을 통해서 그 종에게서 어떤 반응을 촉발했다.
이런 선택 압력 때문에 결국 그 종은 특수한 벡터를 따라 진화하거나 발달하게 되었다.
그런데, 포식자들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의 이런 진화적 적응책들은 자체적으로 포식자들에 대한 선택
압력을 창출한다.
더 잘 식별하는 시력을 갖춘 포식자들, 약간 더 빠른 포식자들, 먹이의 갑주를 찢을 수 있게 하는 날카
로운 발톱과 이빨을 갖춘 포식자들은 결국 더 오래 살 수 있게 할 먹이 사냥의 성공 가능성이 더 클 것
이고, 그래서 생식하여 자기 유전자를 물려줄 가능성이 증가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쌍방적인 구조적 접속에서는 두 종의 생성에 서로 영향을 미치는 그런 식으로
서로 얽혀 있는 포식자와 먹이 사이에 일종의 무기 경쟁이 이루어진다.
유형의 기계 대 무형의 기계
[...] 기계 유형들 사이의 첫 번째 큰 구분은 유형의 기계(corporeal machine)와 무형의 기계(incorpore
al machine)로 이루어진다.
물질로 만들어지고, 이산적인 시간과 장소를 차지하며, 어느 기간 동안 지속하여 존재하는 기계라면
무엇이든 유형의 기계이다.
아원자 입자, 바위, 풀, 인체, 기관 그리고 냉장고는 모두 유형의 기계이다. 반면에, 무형의 기계는 반복
가능성(iterability), 잠재적 영원성 그리고 자체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상이한 시간과 장소에
동시에 나타날 수 있는 역량으로 규정된다. 조리법, 악보, 숫자, 방정식, 과학 이론과 철학 이론, 문화적
정체성, 소설 등이 모두 무형의 기계에 대한 사례들이다.
무형의 기계를 논의할 때는 이런 존재자들이 어떤 다른 영역에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일종의 플라톤적 이원론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모든 무형의 기계들은 세계에 존재하기 위해 유형의 육체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면, 숫자는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 뇌, 컴퓨터 데이터 뱅크, 흑연, 분필 등에서 일어나야 한다.
무형의 기계는 항상 어떤 종류의 유형의 육체를 필요로 한다면, 도대체 왜 이런 기계를 무형의 기계라고
일컫는가?
무형의 기계의 무형성은 비물질적인 유령이라는 것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기계가 자체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다중적으로 예화되고, 반복되거나 복제될 수 있는 능력에 놓여 있다.
울프(Woolf)의 소설 <파도(The Waves)>는 여전히 동일한 소설이면서 여러 부수로 인쇄될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이 구비하는 유형의 육체에 상관 없이 그것은 여전히 바로 그 소설이다.
그것의 유형의 육체는 칠판 위 분필, 종이, 탁월한 기억력을 갖춘 어떤 사람의 생각, 컴퓨터 데이터 뱅크
등이 될 수 있다. [...]
비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체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반복 가능하기 때문에 무형의 기계는
무형적인 것이다.
무형의 기계에 잠재적 영원성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런 반복 가능성이다.
새겨진 것이 그대로 남아 있거나 아니면 무형의 기계가 복제되거나 반복되는 한, 그것은 존속한다.
이런 영원성이 현실적이라기보다 단지 잠재적인 까닭은 무형의 기계가 자체의 반복을 중지하게 만들
도록 반복 조작이 항상 중단될 수 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새겨진 것이 항상 상실되거나 지워져서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무형의 기계는 자체의 무형성에 있어서 유형의 존재자들과 확연히 다른데, 오직 이 시간, 이 장소,
존재하는 지속 기간 동안만 존재하는 후원의 나무와는 달리, 무형의 기계는 거듭해서 동일한 것으로 나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나무가 죽어서 썩으면 그것은 결코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지만, 숫자나 방정식은 동일한 존재자로
끊임 없이 반복될 수 있다.
무형의 기계는 인과성에 대한 이해를 상당히 복잡하게 만든다. 바
위 같은 생기 없는 무형의 기계의 경우에, 어떤 결과는 항상 바로 직전 사건의 결과물이다.
여기서 선행하는 사건은 새로운 사건의 발생으로 사라진다.
E1 → E2 → E3 → E4 ... En
위에 나타낸 인과적 순서에서 E2는 E3의 원인이며, 그리고 E2는 E3의 발생으로 사라진다.
생기 없는 무형의 기계의 경우에 원인은 바로 직전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E1이 E4를 직접적으로 유발하는 환경은 얻을 수 없다.
E1은 시간의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무형의 기계의 경우에는 상황이 전적으로 다르다.
무형의 사건은 어떤 매체에 새겨지고 보존되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과거가 목전의 현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면, 성서는 현대 문화에 엄청난 영향력을 계속 발휘하고 있다.
그리스인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투스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윤리적 삶을 조직하려고 결심할 수 있다.
멀리 떨어진 과거에 발달된 DNA가 현재 유기체의 발달에 계속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게다가 잠자는 또는 휴면 중인 무형의 기계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
이것은 유형의 육체를 통해 계속 존재하지만, 더 이상 활동적이지 않거나 아니면 그 어떤 의식 있는
기계에 의해서도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 무형의 기계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해 문서나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같은 잊혀진 텍스트 또는 수신자
에게 결코 전달되지 않는 편지를 생각할 수 있다. [...]
그것은 마치 이런 무형의 존재자들이 동면 상태 또는 활동이 일시 중지된 상태로 존재하면서 현재를
변형시킬 수 있도록 재활성화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하다.
스티븐 그린블랫(Stephen Greenblat)은 루크레티우스의 저작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재발견과
관련된 바로 그런 일을 서술한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그 책을 파괴하고자 하는 시도들의 결과로서 수 세기 동안 잊혀졌었다.
십오 세기에 다시 발견되었을 때 그 책은 재빨리 모든 종류의 광범위하고 심대한 방식으로 유럽의 사상,
예술, 과학, 철학, 신학 그리고 정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 우리는 무형의 기계가 현재의 역사적 결정을 교란하여 그 순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유와
삶의 새로운 길을 개방한다.
유형의 기계와 무형의 기계는 다양한 복잡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한다.
그러므로 유형의 기계는 무형의 기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가정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면, 월터 옹(Walter ong)같은 이론가들이 주장하듯이, 통신 기술은 어떤 종류들의 무형의 기계
들이 가능한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기하학, 미적분학 그리고 다른 수학 형식들이 오직 구술로, 즉 쓰기와 아무 기호도 없이 수행되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쓰기-기계는 무형의 기계와 유형의 기계 둘 다의 조합물이다.
사용되는 상징들, 그것들의 구문론 또는 조합 규칙 등은 모두 무형의 기계들이다.
그렇지만, 종이, 연필 그리고 잉크와 흑연으로 새겨진 글귀들 자체는 유형의 기계들이다.
인지과학자이자 철학자인 앤디 클락(Andy Clark)가 지적하듯이, 이런 유형의 기계들은 자체적으로
인지적 기여를 한다.
단기 기억의 한계점들 때문에 우리 마음은 일반적으로 길고 복잡한 일련의 추리를 행할 수 없는데,
우리 머리 속에 기하학적 증명이나 계산 문제의 모든 단계들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클락이 주장하듯이, 우리가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종이와 흑연 자체이다.
종이와 흑연이 우리 대신에 증명의 단계들을 말하자면 기억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전 단계들을 무시하고
현재 수행하고 있는 연산들에 집중할 수 있는 한편, 나중에 그것들을 참조할 필요가 있을 때 이전의
단계들로 여전히 돌아갈 수 있다. [...]
여기서 우리는 물질적 매체가 무형의 기계에 영향을 미치는 사례를 검토했다.
상황은 역으로도 작동한다.
무형의 기계가 유형의 기계에 두드러지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식사 규정, 조리법, 교육의 교과과정, 양육 정보 등과 같은 것들은 모두 무형의 기계이다.
활성화되면 이런 무형의 기계들은 유형의 신체의 발달에 작용한다.
1950년대 식사 규정으로 양육된 사람의 신체는 현대의 식사 규정으로 양육된 사람의 신체와 다를 것
이다.
신체가 어떻게 발달할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확실히 음식 자체이지만, 그럼에도 이런 특수한 음식들을
선택하고 다른 음식들을 배제하는 것은 무형의 기계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특수한 교과과정으로 배운 뇌는 저런 교과과정으로 육성된 뇌와 다를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올바르게 주장하듯이, [...] 인간의 성은 생물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형의 사회적 기계들과 유형의 생물학적 기계들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된다.
[...] 유형의 기계와 마찬가지로 무형의 기계도 다양한 정도의 경직성을 나타낸다.
수학 방정식은 절대적으로 경직적인 기계이다.
관료적 규칙과 절차, 완고한 도덕적 관례, 헌법 등은 경직적인 기계이지만 수정될 수 있다.
그리고 소설, 음악, 문화적 정체성과 성적 정체성, 이론 등과 같은 가소성이 대단히 큰 무형의 기계들도
존재한다.
이런 무형의 기계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되고 수정된다.
유형의 기계들에 관하여 말하면, 세 가지 다수 종은 무생물 기계(inanimate machine), 생물 기계(anim
ate machine) 그리고 인지 기계(cognitive machine)이다.
무생물 기계는 외부 원인 또는 자체 내에서 전개되는 내부 과정들을 통해서만 변화를 겪을 수 있는 기계
이다.
예를 들면, 바위는 온도 변화 같은 다른 한 기계를 만나지 않는다면 변화를 겪지 않는다.
항성은 자체 내에서 전개되는 핵반응 과정들의 결과로 변화를 겪는다.
무생물 기계는 자체의 조직을 유지하려고 시도하지 않으며, 성장하지도 않는다.
생물 기계와 달리, 바위가 깎이면, 그것은 상실되고 있는 부분을 자체적으로 치유하는 조작들에 착수하지
않는다.
무생물 기계와 달리, 생물 기계는 자체의 조직을 보존하기 위한 조작들에 관여한다.
예를 들면, 고양이가 베이게 되면, 그 상처 부위는 그것의 신체가 이전에 갖추고 있던 배치와 다소간 동일
하게 치유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지 기계는 자체 행위를 정향할 수 있는 유형의 기계이다.
고양이는 불로부터의 거리를 조정함으로써 자체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다.
새는 포식자를 자기 새끼들에서 떨어지게 하는 활동에 착수할 수 있다.
개, 돌고래, 문어, 인간, 기관 그리고 어떤 기술물들은 학습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목표지향적이라는 점에서 인지 기계는 단순한 생물 기계와 다르다.
또 다시, 이런 구분은 중첩될 수 있고, 그래서 이런 상이한 기계 유형들 사이에는 정도에 있어서 모든
종류의 차이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돌고래는 인지 기계이자 생물 기계이다.
돌고래는 학습할 수 있으며 목표에 의거하여 행동할 수 있는데, 그러므로 인지 기계이다.
돌고래의 신체는 스스로 치유하고, 그래서 생물 기계이다.
정부 같은 다른 기계들은 무형의 기계, 생물 기계 그리고 인지 기계들의 조합물이다.
정부는 법률, 시행령 그리고 절차 같은 모든 종류의 무형의 기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리고 목표지향
적이고, 학습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은퇴할 때 자체의 요소들을 보충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특수한 유형의 기계가 어디에 속하는지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면, 바이러스는 자체를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생물 기계를 닮았지만, 또한 스스로 치유하지 못하고
원인들에만 반응하여 행동하는 듯 보인다는 점에서 무생물 기계를 닮았다.
탈인간적 매체 생태학
[...] 매체에 관한 매클루언의 관념은 매체가 인간 소통과 의미의 특수한 나르개라는 제약을 폭파시키
는데, 그래서 우리는 매체를 다른 기계들의 생성, 움직임, 활동 또는 감각을 수정하는 기계들 사이의
구조적 접속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된다.
요약하면, 매체라는 개념은 기계들 사이의 관계와 상호작용들에 대한 이론의 개시를 제공한다.
매체를 연구하는 것은 그저 기술, 도구, 인공물 그리고 통신 형식들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들이 개입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기계들이 서로 구조적으로 접속하여 서로 수정하는 방식을 탐구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매체 연구는 일반적으로 "매스 미디어"로 불리는 것에 대한 탐구보다 생태학에 더 가깝다.
게다가, 인간들이 개입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기계가 매체로서 작동할 수 있는 한, 다양한 존재자들이
인간들에 대한 매체로서 작동하는 방식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런 매체 이론은 탈인간적이다.
비인간 기계들이 다른 비인간 기계들에 대한 매체로서 작동하는 방식과 인공물 기계들이 비인간들에
대한 매체로서 작동하는 방식에 주목하는 것에 덧붙여, 그것은 인간들이 비인간들에 대한 매체로서
작동할 수 있는 방식도 탐구한다.
그래서, 그것은 인간들의 왕국과 비인간들의 왕국 사이에 그려진 그 어떤 근본적인 구분도 없애는 기계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생태적 견해를 제시한다.
기계는 조작한다
Machines Operate
기계는 윙윙거린다. 기계는 웅웅거린다. 기계는 회전한다.
기계는 덜커덩거린다.
세계는 기계들의 구조물이다.
기계들은 경직된 기계들로 망라되지 않으며, 설계도 목적도 용도도 기계의 본질적인 특징이 아니다.
수정 결정, 조리법, 소설 그리고 동남아시아산 개도 커피 메이커와 불도저에 못지 않게 기계들이다.
그렇다면, 기계란 무엇인가? "객체"라는 술어의 한 가지 단점은 그것이 그 객체를 상정하거나 관찰
하는 어느 주체에 관해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객체를 주체에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래서 객체는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와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다고 여긴다.
기계라는 개념으로 이런 연상들은 피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이 전혀 없어도 어떤 기계가 세계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계라는 개념은 객체와 주체를 둘러싸고 높이 퇴적된 철학적 전통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객체라는 개념의 다른 한 결점은 그것이 주체와 속성의 견지에서 생각하도록 고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객체를 속성의 주체 또는 그것을 현재의 주체로 만드는 일단의 성질들 또는 특성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객체로 간주될 때, 저쪽에 존재하는 저 나무는 속성의 주체로서 가지와 잎의 색깔, 모양, 가지들의 배치,
질감, 냄새 등과 같은 성질들을 소유하고 있다.
나무가 무엇인지라는 물음을 접하면 우리는 이런 특성들 또는 성질들을 나열한다.
나무를 이 주체로 만드는 것은 이런 특성들 또는 성질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성질들 가운데 일부가 변하더라도 나무는 여전히 저 나무 또는 주체로 남는다는
것을 인식한다.
예를 들면, 가을에 잎은 색깔이 변하고 나무에서 떨어진다.
나무는 어떻게 저 나무인 동시에 변할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나무의 본질을 구성하는 불변적 특성들과 나무의 우연적인 것들을 구성하는 가변적 특성
들을 구별짓기에 착수한다.
이제 나무의 존재는 자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이런 불변적 특성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기계로서의 객체 개념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존재자들을 고려하게 만든다.
기계를 대면할 때 떠올리게 되는 첫 번째 생각은 그것의 특성이나 성질이 아니라 그것의 조작이다.
기계는 조작하는 무언가이다.
이언 보고스트(Ian Bogost)가 표명했듯이, "...조작은 하나 이상의 입력물을 취하여 그것에 변형을
수행하는 기본적인 과정이다."
여기에 나는, 입력물에 변형을 수행하면서 기계는 출력물을 생산한다는 점을 덧붙인다.
조작을 통해 변형되는 입력물은 기계의 외부에서 비롯되거나 아니면 기계의 내부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그래서, 예를 들면, 한 특수한 세포가 다른 세포들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화학물질을 방출할 때 입력물은
내 육체 내부에서 비롯된다.
이 세포는 그 화학물질을 생산하는 일단의 조작들을 수행했고, 그 다음에 출력물로 방출된 그 화학물질은
다른 세포들이 흡수하게 됨으로써 그런 세포들 속에서 새로운 조작들을 촉발한다.
그런 다른 세포들은 결국 이 화학물질에 조작들을 수행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토양에서 수분을 끌어올리는 꽃의 경우에서처럼, 그것이 어딘가 다른 곳에서 유래할
때 입력물은 기계의 외부에서 비롯된다.
기계는 입력물에 변형 작업을 수행하여 출력물을 생산하는 조작들의 체계이다.
나무의 예로 돌아가서, 우리는 나무를 기계로 간주하면 그것을 매우 다르게 간주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나무를 어떤 주체에 내재하는 성질들 또는 특성들의 구조물로 간주하는 대신에 우리는 변형 작업을
수행하는 조작들의 체계로서 그것에 접근한다.
이제 우리는 나무에 의해 어떤 조작들이 수행되는지 묻고, 나무가 의존하는 입력물, 그것이 수행하는
변형 작업들과 그것들이 구성되어 있는 방식, 그리고 이런 변형 작업들의 결과로서 그것이 생산하는
출력물에 주의를 기울인다.
요약하면, 우리는 나무가 지니고 있는 성질들이 아니라 오히려 나무가 행하는 것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무를 통과하는 물, 토양 영양소, 빛 그리고 이산화탄소의 흐름들, 그것이 이런 흐름
들을 조작들을 통해서 변형시키는 방식, 그리고 이런 변형 작업들의 결과로서 이런 입력물들로부터
그것이 생산하는 출력물들에 주목한다.
그냥 저곳에 놓여져 있는 정적인 덩어리이기는 커녕 기계는 철저히 과정적인 존재자이다.
기계 존재론 내에서 존재자는 기계로 이해된다.
세계는 위에서 아래로 줄곧 기계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느 기계에 대해 물어야 하는 첫 번째 질문은 "그것의 특성들은 무엇인가"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무엇을 행하는가?"라는 것이다.
"이 기계는 어떤 조작들을 수행하는가?"
조리법은 요리사에게 조작을 수행하는 기계인데, 결국 그 요리사는 다양한 요리 도구와 재료에 어떤
조작들을 수행하게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책 자체가 작은 기계이다..."라고 진술한다.
그들은 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주목하라고 충고한다.
그것은 언어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등장인물들은 서로에게 그리고 주변 세계에 거주하는 나머지 다른 기계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사건들은 등장인물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그 소설은 독자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업튼 싱클레어(Upton Sinclair)의 <정글(The Jungle)>의 경우에서처럼 그것은 사회적 제도와 실천
들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과학 논문은 참 아니면 거짓으로 판단되어야 될 일련의 진리함수적 명제들이 아니라, 어떤 조작들을
제안하고 있는 기계이다.
이런 점에서, 과학 논문은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와 같은 철학자들을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그런
명제들보다 조리법에 더 가깝다.
그것은 우선 관찰의 조작들을 제안하는 기계인데, 그것은 세계의 혼돈에서 관찰 가능한 것들의 흐름들
을 선택하여 "이것에 주목하라!"라고 명령한다.
과학 논문은 가이거 계수기, 궤도 망원경, 입자 충돌기 등과 같은 환상적인 감각 기관들의 제작을 제안
하는 기계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저런 실험에 착수하고, 이런 저런 식으로 이런 저런
기계에 작용하며, 상황이 이런 식으로 조작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하라고 요청한다.
개구리는 파리와 곤충을 잡기 위해 모든 종류의 조작에 관여하는 기계이다.
그것의 육체는 강의 조류와 와류를 능숙하게 건너가는 조작들에 관여하는 기계이다.
개구리는 공기라는 입력물을 짝을 유혹하고 주위가 갑자기 조용할 때 포식자들을 경고하는 기묘한
노래들로 변형시키는 조작들에 관여한다.
그것은 이산화탄소와 다른 폐기물 같은 어떤 출력물들을 생산하는 기계인데, 그것들은 조류 식물,
수련 꽃잎 그리고 부들 같은 기계들에게 다른 조작들을 위한 입력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생식을 통한 출력물로서 자체의 사본들을 생산하는 기계이기도 하다.
기계는 표현적이지 않고, 기계는 표상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기계는 생산적이다.
도처에서 세계들은 무한히 다양한 형태로 생산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공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무의식에 관하여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정신분석의 거대한 발견은 욕망 생산, 무의식 생산의 발견이었다.
그런데 일단 오이디푸스가 그림에 들어왔을 때, 이 발견은 곧 새로운 종류의 관념론 아래에
묻히게 되었다.
고전 극장은 공장으로서의 무의식으로 대체되었다. 표상은 무의식의 생산 단위들로 대체되
었다.
그리고 자체를 표현할 수 있을 뿐―신화, 비극, 꿈에서―인 무의식은 생산적 무의식으로 대체
되었다.
프로이트의 위대한 발견은 생산적 무의식 또는 공장으로서의 무의식이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무의식은 욕망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제작하거나 생산한다.
무의식의 구성물은 억압된 욕망의 표상이 아니라, 그 대신에 새로운 욕망의 생산물이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이론을 도입할 때 이 모든 것이 배반당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제 무의식은 무의식의 모든 구성물들이 오이디푸스 드라마를 가리키는 표현의 견지에서 이해되는
표상의 극장이 된다.
극장 대 공장. 표현 대 생산. 표상 대 조작.
여기서 무의식과 관련하여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것은 모든 기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참이다.
기계는 표현하지 않고, 표상하지 않으며, 극장을 구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기계는 자체 조작을
통해서 출력물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기계는 구조적으로 열려 있고 조작적으로 닫혀 있다
Machines Are Structually Open and Operationally Closed
기계는 조작을 수행하기 위해 입력물 또는 흐름들에 의존하지만, 세계에서 입수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입력물에 의존할 수는 없으며, 흐름으로 작용하는 그런 기계가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그런 식으로 그것
이 의존하는 입력물과 관계를 맺을 수도 없다.
첫 번째 점에 대해, 기계는 자체가 열려 있는 흐름 또는 기계들을 "특정"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기계는 자체를 넘어서는 세계에 "구조적으로 열려" 있다.
그렇지만, 기계가 세계에서 입수할 수 있는 모든 흐름에 열려 있다는 것은 맞지 않다.
오히려 기계는 현존하는 흐름들의 작은 부분집합에만 열려 있을 뿐이다.
이런 부분집합은 기계마다 다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은 맞지 않으며,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도 맞지 않다.
바로 이런 단순한 이유 때문에 기계들은 다른 기계들에서 비롯되는 모든 가능한 흐름들에 구조적으로
열려 있지는 않다.
바라건대, 몇 가지 예가 이 점을 예시하는 데 충분할 것이다.
갯가재는 인간보다 훨씬 더 고등한 시각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갯가재가 더 명료하개 또는 더 먼 거리에서 사물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갯가재는 인간이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삼원색의 조합만을 볼 수 있는 반면에, 갯가재는 열한 가지 내지 열두 가지 원색들을 볼 수 있다.
갯가재는 원형으로 편광된 빛을 포함하여 편광된 빛을 볼 수 있는 반면에, 인간은 그럴 수 없다.
마찬가지로, 갯가재는 적외선과 자외선 빛을 볼 수 있는 반면에, 인간은 그럴 수 없다.
요약하면, 갯가재는 인간에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전자기장(빛)의 흐름들에 열려 있다.
자체의 눈과 신경 체계가 결합되어 있는 방식 때문에 갯가재는 인간에게는 전적으로 보이지 않는 흐름
들에 열려 있다.
그래서 갯가재는 인간이 할 수없는 방식들로 세계에 거주하는 다른 기계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인간과 관료적 체계 경우에서 선택적인 구조적 개방성(selective structural openness)이라는 비슷한
현상이 목격된다.
어떤 관료적 체계를 위해 일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자신이 [...]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관료-기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여느 다른 기계와 마찬가지로, 관료-기계는 어떤 종류들의 흐름들에만 열려 있을 뿐이다.
가장 일반적으로, 관료-기계가 열려 있는 흐름은 서류 양식이다.
관료적 체계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서류 양식을 빠짐없이 작성하여 그것을 기관에 제출해야 한다.
서류 양식은 자체적으로 어떤 입력물들―더 일반적으로, 세금, 의료 문제, 건축 허가, 면허 취득, 지원금,
전문가 평가 등을 둘러싸고 돌아가는 우리 삶의 환경들―에 작용하는 하나의 기계인데, 그것은 이런
입력물들을 어떤 구조화된 소통 매체로 변형시킨다.
다시 말해서, 서류 양식은 우리와 관료적 체계 사이의 매개자-기계이다.
서류 양식은 인간의 소통을 일단의 미리 규정된 매개변수들로 정제하는 기계이다.
흔히 우리는 서류 양식이 우리가 관여하고 싶은 그런 종류의 소통에 관련된 매개변수는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챌 것이다.
우리는 서류 양식에서 자신이 속한 존재 유형을 나타내는 곳을 전혀 찾아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류 양식 역시 사람들을 특수한 방식으로 간주한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떤 종류들의 존재자들만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장애자 지원을 찾으면서 서류 양식이 자신이 겪고 있는 장애 종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만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인간은 볼 수 없지만 갯가재는 지각할 수 있는 빛 형태들과 마찬가지로, 관료적 체계는 이런 유형들의
존재자들을 깨닫지 못한다.
또한 서류 양식은 특히 상황들의 특이성을 깨닫지 못하는데, 그것은 세부 내용을 걸러서 상황들을 일단의
유적 범주로 환원시킨다.
마지막으로, 서류 양식의 언어는 모국어인 듯 보이지만, 그것은 흔히 사실상 외국어이다.
이것은 서류 양식의 언어가 낯선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관료적 체계의 언어이지 인간의 언어가 아
니다.
세금 양식과 계약서 양식에 대해 우리는 이 점을 예민하게 경험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자신이 올바른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는지 여부를 끊임없이 생각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흔히 번역가들―회계사와 변화사로 알려져 있는―에게 우리 대신에 서류 양식
을 준비하도록 의뢰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관료-기계에 대한 경험이 흔히 매우 격심하게 고통스럽고 절망스럽다. 말이 통하지
않는 [...] 외국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경험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한 사람에게 말을 건네지만,
미리 규정된 기준에 따라 서류 양식에 존재하는 것만을 전달하도록 허용되어 있기 때문에 소통하는
동안 자신이 누구인지와 자신이 처한 상황이 관리에게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
소통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서류 양식이 우리로 하여금 소통할 수 있게 허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격, 상황, 삶은 서류 양식에 의해 미리 규정된 범주적 맷돌, 체로 환원된다.
관료-기계가 구조적으로 열려 있는 것은 이것이지 우리의 언설이 아니다.
나머지 것은 단순한 소음으로 걸러진다.
<심판>과 <성>에서 카프카가 매우 뛰어나게 극화한 것이 바로 이런 비소통이다.
그래서 기계는 다른 기계들과 선택적으로 관계를 맺을 뿐이다.
이것은 가장 소박한 입자에서 지각과 인지 능력을 갖춘 복잡한 존재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해
참이다.
예를 들면, 중성의 전하 때문에 매우 작은 뉴트리노는 일상 생활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대부분의 물질과
상호작용할 수 없다.
그것은 이런 물질이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통과한다.
그래서, 존재지도학적 분석의 주요한 목적들 가운데 하나는 특수한 기계가 열려 있는 흐름들과 이 기계
가 이런 흐름들에 열려 있는 방식, 즉 그것이 이런 흐름들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구조적 개방성에 대한 보충물은 조작적 폐쇄성(operational closure)이다.
구조적 개방성은 어떤 기계가 열려 있는 흐름들을 가리키는 반면에, 조작적 폐쇄성은 어떤 기계가 자체를
관통하는 흐름에 대해 작업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조작적 폐쇄성은, 기계는 흐름과 결코 있는 그대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항상 자체의 조작들
에 따라 그 흐름을 변형시키고 자체의 내부 구조의 견지에서 그 흐름을 "가공"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창이 전혀 없는 잠수함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을 가상적 예로서 고려하자.
잠수함이 구조적으로 열려 있는 흐름들은 바다 속 다른 기계들에서 반사되는 수중 음파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발신음들일 것이다. 그런데 명백히 이런 수중 음파 발신음들은 해저 산맥, 흰긴수염고래, 상어
그리고 바다에 거주하는 다른 존재들과는 전혀 같지 않다.
이런 다른 기계들은 모두 수중 음파 발신음들에 기록되지 못하는 내부 구조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음파를 통해서 기록될 수 없는 모든 종류의 다른 성질들도 지니고 있다.
수중 음파 발신음에서 얻게 되는 유일한 정보는 다른 존재자의 크기, 모양 그리고 속도이다.
그래서 첫 번째 요점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기계인 흐름은 그것이 비롯되는 사물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수중 음파가 돌아오면, 잠수함 내에서 그것은 반사된 다른 기계에서와는 다른 기능적 지위를 맡게 된다.
잠수함 내에서 수중 음파 발신음은 특수한 의미를 띠게 될 것인데, 그것은 잠수함에게 장애물을 피하기
위해 왼쪽, 오른쪽, 위쪽 또는 아래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라고 말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수중 음파가 반사된 기계―상어, 흰긴수염고래, 해저 산맥이나 계곡, 다른 잠수함 등
―는 그 잠수함이 그것에 귀속시키는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다. 예를 들면, 상어는 그저 바다를 탐사하여
먹이를 발견하거나, 또는 물이 끊임없이 아가미에 흘러서 계속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흐름이 어떤 기계에 들어가면, 그것은 자체가 비롯된 기계와는 다른 상이한 기능적
가치―인과적으로 또는 의미의 견지에서―를 띠게 된다.
이것이 조작적 폐쇄성의 의미이다.
다른 한편으로 조작적 폐쇄성은, 한 기계가 다른 한 기계에서 비롯되는 흐름을 만날 때 그것은 그 흐름
을 있는 그대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조작들이 그 흐름을 변형시키는 방식의 견지에서
만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런 것이 다음과 같은 칸트의 주장의 의미일 것이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모든 우리의 인식은 대상들을 따라야 한다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대상들에 관하여 그것을 통해 우리의 인식이 확장될 무엇인가를 개념들에 의거해 선험
적으로 이루려는 모든 시도는 이 전제 아래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번, 대상들이 우리의 인식을 따라야 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가 형이상학의
과제에 더 잘 진입할 수 있겠는가를 시도해 봄직하다....
칸트의 테제는, 마음은 세계의 거울이 아니라, 세계가 마음에 작용할 때 마음은 자체의 내부 구조의 견지
에서 이런 흐름을 재구성하여 이런 흐름에 형상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것의 결과는 우리는 마음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표상하는지 여부를 결코 알지 못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조작들이 흐름을 변형시켜 버리는 방식이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그런 조작들을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계를 맺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조작들에 의해 가공되어버린 사물이다.
여기서 인지-기계에 대해 칸트가 말하는 것은 모든 기계들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바위, 뉴트리노, 보험회사 그리고 카피바라도 우리 마음에 못지 않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만나지 않는데,
우리 마음과 꼭 마찬가지로, 세계의 다른 기계들도 자체를 통과하는 작용 또는 흐름에 대해 자체의 조작
들을 통해서 작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기계는 "방화벽" 뒤에서 서로 관계를 맺을 뿐이다.
그 어떤 존재자도 다른 한 존재자를 직접 만날 수 없고―하만과는 대조적으로, 나는 존재자들이 서로 직접
영향을 미칠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그래서 이런 이유 때문에 모든 기계는 방화벽 뒤에서 서로 만난다.
여기서 제시되는 기계지향 존재론적 틀 내에서 이런 방화벽은 각 기계의 조작들이다.
조작적 폐쇄성이라는 이 현상은 도처에 퍼져 있어서 모든 기계의 일반적인 존재론적 특징으로 간주될
자격이 있다.
두 개의 원자가 하나의 분자를 형성할 때 한 원자 요소가 다른 한 원자 요소와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이 현상을 만나게 된다.
아원자 입자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이 현상을 만나게 된다.
바위가 가해지는 열에 대해 반응하는 방식에서 이 현상을 만나게 된다.
동물이 주변 환경으로부터의 다양한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에서 이 현상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 사이의 대화와 사람과 기관과의 상호작용에서 이 현상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항상 흐름을 변형시키는 조작, 즉 그런 조작을 수행하는 기계에 대해 흐름을 다른 것으로 만드는
조작을 발견한다.
다른 한편으로 조작적 폐쇄성은, 일단 어떤 흐름이 어떤 기계에 진입하게 되면, 그것은 상이한 기능적
가치를 띠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을 예시하기 위해, 사설 보험사 같은 관료-기계의 사례를 다시 고려하자.
보험사 같은 기계에 서류 양식을 제출하는 사람은 보험 처리될 필요가 있는 의학적 치료를 받기 위해
그렇게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보험사는 매우 다른 목적을 갖고 있다.
그것은 사적인 사업이기 때문에 그것의 목적은 보상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주주들과 기업 자체를
위해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보상을 제공하는 것은 이런 목적에 대한 수단일 뿐이다.
사람이 작성하는 서류 양식은 보험-기계에 진입하는 흐름이다.
일단 그것이 보험-기계에 진입하게 되면, 조작적 폐쇄성의 결과로서 그것은 그 흐름을 송출한 사람의
경우와는 매우 다른 기능적 가치를 띠게 된다.
그 흐름을 송출한 사람은 건강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보상을 추구할 것이지만, 보험-기계의 방화벽
(조작들)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범주적 환원이 이런 상황에서 보상이 이윤을 극대화할지 여부의 견지
에서 그 서류 양식을 받아들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서류 양식은 사람의 경우와는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그 서류 양식은 "불필요한 치료"(번역: 손해보는 절차)로 간주되어 거부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표준적인 종류의 보상만 제공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치료에 대한 요구가 사실상 부정한 요구이거나, 또는 환자가 심신증 증상을 겪고 있어서 돌볼 필요가
없다고 보험-기계가 주장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보험-기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문제는 치료와 보상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지출 절감을 통해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일단 보험-기계에 진입하게 되면, 서류 양식은 그것을 제출한 사람의 경우와는 매우 다른
의미를 띠게 되고, 그래서 애초에 그 흐름을 제공한 사람이 의도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결과로 이어지
게 된다.
조작적 폐쇄성의 자기준거적 본성 뿐 아니라 구조적 개방성의 선택성 때문에 각 기계는 세계 대부분을
알아채지 못한다.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Liklas Luhmann)이 서술하듯이, 기계는 "... [자체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는
없다".
갯가재와 인간의 서로 다른 시각적 체계들의 경우에서와 같이 한 기계가 열려 있는 흐름들이 다른 한
기계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두 기계가 동일한 유형의 흐름에 열려 있을 때에도 이 흐름은 그 기계들의 조작적 폐쇄성의 조직에 있어
서의 차이 덕분에 해당 기계에서 매우 다른 유형들의 인과적 및 의미론적 역할들을 맡게 된다.
우리는 서류 양식이 그것을 제출하는 환자와 그것을 받는 보험-기계에 대해서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
검토함으로써 이 점을 이해했다.
환자의 경우에, 그 서류 양식은 자신의 건강과 자신이 필요로 하는 돌봄과 치료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에 관련된 것이다.
보험-기계의 경우에, 그 서류 양식은 수익 또는 손해의 잠재성의 견지에서 평가되어야 하는 경제적
신호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소통은 오해이다"라는 라캉의 아포리즘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들뿐 아니라 모든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들에도 적용되는 매우 실제적인 의미가 있다.
인간에게 미소는 선의의 몸짓이지만, 침팬지는 미소를 공격적인 악의를 품고 있는 것으로 대면한다.
기계들 사이의 의미 있는 관계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인과적 관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참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이미 모든 존재자들이 인과적으로 서로 상호작용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자체의 전기적 중성 덕분에 뉴트리노는 대부분의 다른 물질과 상호작용할 수 없으며, 인간의 시각적
체계는 자외선과 적외선 빛을 기록할 수 없다.
이것의 결과는, 루만이 지적하듯이, 기계의 환경은 그 환경에 대한 기계의 개방성보다 훨씬 더 복잡하
다는 것이다.
유기적 기계와 인지적 기계의 경우에, 이것은 개방성은 항상 위험을 포함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유기적 기계 또는 인지적 기계가 열려 있는 방식보다 더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기계 환경에
서는 기계가 알아채지 못하지만 기계를 파괴시키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
유기적 기계와 인지적 기계의 경우에 구조적 개방성의 선택성은 항상 일종의 도박이다.
다른 한편으로, 동일한 인과적 흐름이 그 흐름을 수용하는 기계들에 매우 상이한 방식들로 작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철의 경우에 산소는 녹을 만들어내지만, 동물의 경우에 산소는 영양소를 일 또는 활동을
위한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점들은 명백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흐름에 열려 있는 기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각 유형의 기계는
공유하는 흐름에 대해 상이한 조작들을 수행한다는 것을 강조할 가치가 있다.
루만은 이렇게 진술한다.
"실재는 그것을 지각할 때 지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지각은 우리에게 작용하는 흐름에 의해 촉발되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는 세계를 지각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경험하는 것―그리고 모든 지각 있는 존재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조작들을 통해서
변형된 흐름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를 지각하지 못한다.
주체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세계에 대한 체험은 세계 자체와 구별할 수 없다.
이것은 각 기계가 자체의 내부 세계에서 만나는 조작적으로 변형된 흐름에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흔히 어떤 정치적 집단과 조직들을 괴롭히는 인식론적 폐쇄성(epistemological closure)과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위험을 초래한다.
예를 들면, 정치적 집단은 자체의 이데올로기적 세계관을 역투사하는 매체만을 소비하기 때문에 다양한
경제적, 국가적 그리고 국제적 사건들의 진짜 원인들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집단은 이런 사건들에 대응할 수 없게 된다.
그런 것이 인식론적 폐쇄성의 본성이다.
인식론적 폐쇄성을 겪는 기계는 세계와 관련된 자체의 조작적 전제들을 반영하는 정보 흐름들에만 구조
적으로 열려 있다.
이것의 보충물이 확증 편향인데, 이 경우에 기계는 자체의 조작적 가정들을 강화하는 정보 흐름들만을
선택한다.
물론, 이런 현상들로 인해 기계가 자체의 조작적 세계관에 맞지 않는 환경적 사건들에 반응할 수 없게
되는 한, 그것들은 기계를 중대한 위험에 처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인식론적 폐쇄성과 확증 편향은, 세계에 대한 자체의 조작적 이해에 어긋나는 환경적 사건
들을 그저 거르거나, 비난하거나 또는 무시해야 할 소음이 아니라, 오히려 기계의 체험 세계는 세계
자체와 다르다는 징표들로 간주함으로써 부분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
그렇지만 구조적 개방성과 조작적 폐쇄성이 모든 환경에서 지워지지 않게 고정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
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유기적 기계와 인지적 기계들―가소성 기계들―은 자체의 구조적 개방성과 환경-기계와의 접촉점들을
증식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들은 주변 환경에서 비롯되는 흐름들에 대한 자체의 조작적 반응들을 변형
시키고 새로운 조작들을 도입할 수 있다.
유기적 기계에서 이런 과정들은 진화, 즉 돌연변이, 자연선택 그리고 유전 과정들을 통해서 일어난다.
진화는 한 종의 육체적 형태 또는 모양의 진화일 뿐 아니라, 흐름들에 대한 구조적 개방성과 조작들의
상이한 형태들의 진화이다.
진화 과정들을 통해서 어떤 기계 계보는 주변 환경에 대한 새로운 개방성 형태들과 기계를 통과하는
흐름들에 작용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발달시킬 수 있다.
돌고래, 문어, 개, 인간, 다양한 컴퓨터 그리고 사회적 조직 같은 인지적 기계의 경우에는 학습을 통해서
새로운 형태들의 구조적 개방성과 새로운 조작들이 발달될 수 있다. [...]
조립체로서의 기계
단순한 기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기계는 자체적으로 하나의 단위체 또는 개별적 존재자인 동시에 다른 기계들의 복합체
또는 조립체이다.
요약하면, 기계는 기계들로 구성되어 있다. [...] 물질은 기계들로 충만하고 각 기계 자체는 다른 기계
들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면, 내 육체는 자체적으로 하나의 기계인 동시에 다양한 장기들로 구성된 기계들의 조립체이다.
그 다음에 그런 장기들은 다른 기계들, 즉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다음에 그런 세포들은 여전히 다른 기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근본적인 또는 기본적인 기계들―그리스적 의미에서 "원자"라고 부르는 것들―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경험적으로 결정되어야 하는 미해결의 문제이다.
그래서 하만은 계속 말한다.
"모든 객체는 하나의 실체이자 관계들의 복합체이다."
모든 기계는 자체적으로 하나의 단위체 또는 자율적 존재자인 동시에 자체의 부분들을 구성하는 기계들
사이의 관계들의 복합체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유형의 관계들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진행해야 한다.
흔히 기계는 작동하거나 조작하기 위해 다른 기계들과 접속해야 한다.
예를 들면, 텔레비전은 작동하기 위해 전기 소켓에 플러그를 꽂아야 한다.
그 다음에 전기 소켓은 전기 케이블, 퓨즈함 그리고 댐, 풍차, 태양전지판 또는 화력 발전소 같은 다른
기계들에 접속된다.
마찬가지로, 개구리가 조작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산소와 파리 흐름 같은 다른 기계들에 연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기계를 관계들의 복합체로 다룰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유형의 관계들이 아니다.
잔인한 과학자가 개구리를 진공 용기 속에 집어 넣어 산소로부터 단절시킬 때에도 여전히 그 개구리는
관계들의 복합체 또는 기계들의 조립체이다.
벽 소켓에 더 이상 플러그가 꽂혀 있지 않은 텔레비전도 여전히 관계들의 복합체 또는 기계들의 조립체
이다.
그런 종류의 관계들은 외부-관계(exo-relation)들인데, 말하자면 그것들은 어떤 기계가 여전히 그
기계이면서 단절될 수 있는 다른 개별적 또는 독립적 기계들과 맺는 외재적 관계들이다. [...]
산소로부터 단절되었을 때도, 최소한 잠시 동안, 개구리는 개구리이다.
따라서 기계가 관계들의 복합체 또는 기계들의 조립체라는 주장은 기계는 자체의 내부-관계(endo-
relation)들로 구성된다는 주장이다.
내부-관계들은 하나의 새로운 기계를 구성하거나 생성하는 기계들 사이의 내재적 관계들이다.
그것은 기계의 부분들―그것들 자체가 기계들인―과 자체의 부분들을 넘어서는 별개의 기계인 창발적
전체 사이의 관계이다.
텔레비전은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 또는 다른 기계들이 없다면 기계일 수가 없으며, 카피바라 역시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없다면 기계일 수가 없다.
물론 기계의 부분들 가운데 일부는 그 기계에 필수적이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카피바라는 다리 하나를 잃고서도 여전히 그 카비바라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텔레비전은 플라스틱 틀이 없더라도 여전히 그 텔레비전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부분들과 비본질적인 부분들 사이에 구별짓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기계는 자체의 존재를 구성하는 기계들 사이의 내재적 관계들로 이루어진 내부-구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계들은 다른 기계들에서 창발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개별 기계들 사이의 외부-관계들과 새로운 기계를 구성하는 내부-관계들을 어떻게 구별하
는가? [...]
기계는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역능에 의해 개체화된다.
게다가 [...] 기계는 그런 역능을 행사하든 하지 않든 간에 자체의 역능을 갖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전기 소켓에 플러그가 꽂혀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텔레비전은 영상과 소리를 제공하는
역능, 즉 작동 능력을 갖추고 있다. [...]
이 가설을 인정하면, 결합되는 기계들에서 발견될 수 없는 새로운 역능이 기계들의 결합에서 창발할
때마다 새로운 별개의 기계가 생성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조립체가 자체의 부분들이 작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계 속 다른 존재자들에
작용할 수 있을 때, 그 조립체는 새로운 기계 또는 단위체를 구성한다.
이 점을 예시하기 위해 물 분자(H2O)의 사례를 고려하자. 간
단히 말하자면, 물 분자는 세 개의 다른 기계들―두 개의 수소 원자와 하나의 산소 원자―로 이루어진
하나의 기계이다. [...]
물 분자가 그저 기계들의 집합체 또는 덩어리가 아니라 별개의 기계를 구성한다면, 이것은 이런 더
작은 기계들 사에서 형성된 내부-관계들이 구성 부분들 사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역능 또는 역량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은 불을 끄는 역량을 갖추고 있는 반면에, 별개로 존재하는 산소와 수소는 연소성이 매우
강하다.
물의 밀도는 산소나 수소의 밀도보다도 더 크다.
물은 수소나 산소와는 다른 온도에서 얼고, 다른 온도에서 액체나 기체로 바뀐다.
목록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 여기서 창발은 흔히 전체가 구성 부분들에 의해 설명될 수 없을 만큼 전체는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크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신중하게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창발은 "환원주의"에 대한 보루로 환기되는데, 그것은 내부-관계들의 형성을 통해서 아무튼
자체의 부분들과 아무 관계도 공유하지 않는 불가사의한 특성들이 창발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이 테제를 옹호하지 않는다.
명백히 H2O는 구성 부분들의 역능들 덕분에 그것이 행하는 것을 행할 수 있을 뿐이고, 그것이 지니는
역능들을 나타내게 될 뿐이다.
요점은 이런 부분들이 물의 역능들이 창발하도록 이런 식으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관계들이 없다면, 이 역능들은 생성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물리학과 화학 법칙들을 전혀 위반하지 않는다. 물의 역능들을 이해하고 싶다면, 수소와
산소의 역능들과 그것들이 결합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해야 한다.
기계들이 새로운 기계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결합될 때, 어떤 결합들은 가역적인 반면에 다른 결합들은
비가역적일 것이다.
결합된 기계들로 구성된 기계가 구성 부분들이 자체의 기계적 존재와 역능들을 유지하는 그런 식으로
해체될 수 있을 때 기계 생성은 가역적이다.
예를 들면, 자동차 같은 많은 기술품들뿐 아니라 H2O 같은 존재자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
여기서 구성 부분들과 그것들의 역능들은 기계적 결합을 통해서 파괴되지 않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결합된 기계들이 기계 생성 과정에서 파괴되거나 다른 것으로 변형될 때 기계
생성은 비가역적이다.
예를 들면, 육체가 음식을 대사하는 경우에 그렇다. 육체가 발달할 때, 섭취하는 음식은 육체가 갖출
다양한 역능에 기여하지만, 이런 음식 자체는 대사 과정에서 변형되거나 파괴된다.
육체는 그것이 섭취한 옥수수, 고기, 음료 등으로 분해될 수 없다.
그 상황은 항성에서 일어나는 핵 융합 과정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기계 생성이 가역적인지 비가역적인지는 사례별로 대답할 수 있는 경험적 문제이다.
게다가, 이런 문제들의 경우에 매우 흔히 그런 것처럼, 가역적인 것과 비가역적인 것 사이에는 다양한
정도 차가 흔히 존재한다. [...]
기계는 자체 역능들에 의해 개체화된다는 기계에 대한 조립체 이론은 기계는 다양한 상이한 척도 층위
들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수반한다.
예를 들면, 정부 기관은 그것을 구성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구성하는 장기들, 그 장기들을 구성하는
세포들, 이 세포들을 구성하는 원자들, 그 원자들을 구성하는 입자들에 못지 않게 기계이다.
이런 기계들 각각은 구성 부분들 사이애서 찾아볼 수 없는 역능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런 연쇄에서
모든 유형의 기계는 마찬가지로 실재적이다.
예를 들면, 정부 기관은 그 기관에서 일하는 개인들이 갖추고 있지 않은 역능들을 갖추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자유주의자들이 원하는 것과는 달리, 사회적 기계들은 개인들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므로 기계 존재론은, 세계는 우리가 가끔 추측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존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기계는 다른 기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모든 기계는 기계적 문제들을 겪는다.
어떤 기계를 구성하는 기계들은 흔히 기계 생성 과정에서 파괴되거나 변형되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잠깐 동안만이라도 자체의 구조적 개방성과 조작적 폐쇄성을 유지한다.
그래서 이런 구성 부분들은 나름대로 흐름들에 선택적으로 개방되어 조작할 뿐이다.
그러므로 기계의 구성 부분들은 결코 전적으로 조화를 이루지는 못한다.
모든 기계는 하나의 단위체인 동시에 고양이들의 집단 또는 무리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 어떤 기계도 자체의 부분들을 결코 전체화하거거나 지배하지 못한다.
오히려, 구성 부분들은 여전히 나름의 삶을 살아간다. [...]
정부 기관은 자체의 조작들을 실행하는 동시에 그 속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의 계획이나 목적들과 다투
어야 한다.
대학은 자체의 조작들에 관여하는 동시에 학생, 교수 그리고 행정원들이 각자 자기 목적을 추구하는
내부로부터의 갈등에 직면한다.
육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세포와 장기들의 활동과 항상 다투어야 하는데, 그것은 세포들이 나름의 삶을
떠맡고 육체의 목적에 기여하기를 거부하는 노화 과정과 암 같은 더 극적인 사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위 같은 존재자들도 구성 분자들이 다른 분자들과 접속할 때 그 분자들에서 비롯되는 불화에 직면
한다.
기계적 문제들은 하나의 통일된 존재자 또는 기계를 형성하려고 노력하는 결과로서 기계 내부에서 창발
하는 문제들을 가리킨다.
아무튼 창발되는 기계는 그 기계의 구성 부분들로 작동하는 다른 기계들을 단일한 기계의 요소들로 통일
하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이런 부분들은 나름대로 구조적으로 열려 있고 조작적으로 닫혀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자기 길을 가기를
"원한다".
구성 부분들 또는 다른 기계들 사이에는 모든 기계를 붕괴되거나 해체될 위험에 항구적으로 처해 있는
한 편의 브리콜라주로 만드는 긴장과 마찰이 존재한다.
때때로 구성 부분들은 산뜻하거나 매끈한 방식으로 완전히 딱 들어맞지는 않는데, 이것은 그 기계에 대해
체계적 문제들을 초래한다.
예를 들면, 생물학적 육체들의 경우에 그렇다.
진화는 브리콜뢰르이고, 그래서 과거에 다른 기능들을 수행했으며 동원된 새로운 기능들에 완벽하게 복무
하지는 못하는 선재하는 생물학적 구조들 위에 항상 세워진다(굴절적응). [...]
우리의 모든 기술적, 문화적 그리고 지적 발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호미니드 조상은 여전히 남아 있고,
그래서 우리는 건강에 유독하거나 건강을 해치는 방식으로 가능한 한 많은 지방성 음식을 계속 섭취하고
있다. [...]
모든 기계는 자연과 문화의 익명의 맥가이버들에 의해 임시 방편으로 짜 맞추어진다.
[...] 기계는 자체의 구성 부분들을 통일하기 위한 항구적인 조작들에 관여하여 본질적인 구성 부분들이
하나의 단위체로 여전히 결합되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매 순간 모든 유형의 기계는 해체될 위험에 처해 있다.
또한 이런 이유 때문에 그 어떤 기계도 자체에 대해 결코 전적으로 책임질 수는 없다.
구성 부분들 자체가 나름의 국소적 표현 또는 차이들에 기여하는 한, 기계가 무엇이 되는지는 전적으로
그것의 조작들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모든 장군은 이것을 알고 있다.
그가 명령을 내리면, 이 명령은 장교, 군대, 지원군, 군사 기술, 날씨 그리고 주변 지리등에 의해 거의
무한한 뜻밖의 방식으로 번역되거나 해석된다.
그래서, 그 어떤 명령의 결과도 결코 의도된 것과 전적으로 동일하지는 않다. [...]
이런 이유 때문에 지배는 결코 전적으로 완전하지는 않다.
기계는 구성 부분들을 파괴할 수 있지만, 구성 부분들이 나름의 어떤 기계적 존재성을 유지하는 한,
그것들은 항상 나름의 은근한 역능들을 유지하고, 그래서 어느 때라도 분출될 우려가 있다. [...]
많은 기계들―특히 다양한 사회적 기계들과 유기적 기계들―은 구성 부분들을 유순한 육체로 변환시키
려고 노력할 것이지만, 이것은 사실상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이상으로 영원히 남게 된다.
구성 부분들 사이에는 은근한 계획, 기계적 음모, 작은 반역 행위 그리고 은밀한 불복종 행위들이 항상
존재한다.
완벽한 질서화의 실패는 근절될 수 있는 것이기는 커녕 기계의 창의성의 일부이다.
역능과 표현
철학자 조지 몰나르(George Molnar)를 좇아서, 기계라면 무엇이든 갖추고 있는 잠재적 조작(operation)
체계를 "역능(power)"이라고 부를 수 있다. 몰나르는 역능에 다섯 가지 특징을 귀속시킨다.
첫째, 역능은 그것이 발휘될 때 특수한 결과물 또는 생산물을 산출함에 있어서 방향성(directedness)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예를 들면, 식물은 광합성이라는 조작을 통해서 이산화탄소로부터 산소를 생산한다.
이런 점에서 역능은 수학적 함수와 비슷하다. [...]
조작 또는 역능이 정향되는 생산물은 그것의 "표현(manifestation)"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어떤 조작 능력은 조작할 때 그것이 마침 생산하는 표현들보다 훨씬 더 많은 표현들을 생산할 수 있다. [...] 이런 이유 때문에 역능은 잠재성(virtuality)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역능은 항상 어떤 특수한 시점에 그것이 마침 생산하는 표현보다 더 많은 표현들을 생산할 수 있다.
둘째, 역능은 자체 표현들로부터의 독립성(independence)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역능은 [...]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전적으로 표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성냥은 연소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을 보유하기 위해 이 역능을 표현할 필요는 없다. [...]
따라서, 표현은 항상 역능에 의존하지만, 역능은 표현에 의존하지 않는다.
기계는 그것이 휴면 상태이거나 억압 상태에 있을지라도 자체 역능을 보유하고 있다.
나는 발휘되지 않은 역능을 "잠재적"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셋째, 역능은 현실성(actuality)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여기서 "현실성"은 표현을 생산함에 있어서 역능의 발휘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계가 지니고
있는 특징을 가리킨다.
역능은 그것이 발휘되든 되지 않든 간에 기계의 실재적 또는 현실적 특징이다.
그래서, 넷째, 역능은 그것을 갖추고 있는 기계에 고유한(intrinsic) 것이다.
진공 속 성냥의 경우처럼 다른 기계들의 존재 또는 부재의 결과로서 기계의 역능은 억압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상 참이지만, 그럼에도 불꽃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은 성냥의 고유한 특징이다.
따라서, 다섯째, 역능은 객관적(objective)이다. 기계가 보유하고 있는 역능은 그것에 대해 알고 있거나
관찰한 사람이 있든 없든 간에 그 기계의 특징이다. "역능"이라는 술어와 "조작"이라는 술어는 동의어
이지만, "조작"이라는 술어는 역능의 실제 발휘라는 함의를 불러 일으킨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역능"이라는 술어를 그것이 발휘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기계가 갖추고 있는
역량(capacity)에 대해 유보할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조작"이라는 술어는 표현을 생산할 때 역능의 발휘에 대해 유보한다.
[...]
조작의 생산물이 표현이다. 표현은 누군가에 대한 또는 누군가를 위한 표현이 아니다.
그것을 지각하는 다른 한 존재자가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표현은 자명할 것이다.
오히려, 표현은 조작의 생산물 또는 결과물일 뿐이다. 산화에서 비롯되는 철의 녹은 하나의 표현이고,
누군가가 이 녹을 관찰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실존한다. 표
현, 생산물 또는 결과물은 세 가지 형태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한편으로, 조작의 결과물 또는 생산물은 정성적 표현(qualitative manifestation)일 수 있다.
정성적 표현은 색깔, 모양, 결 등과 같은 기계의 어떤 성질을 변형시키는 표현이다. [...]
어떤 사람의 피부가 햇빛에 노출되면, 그것은 햇빛에 탄 형태로 정성적 표현을 나타낸다.
매우 추운 공기에 노출되면, 피부가 팽팽해지고 수축되는 모양 변화가 나타난다. [...]
매우 차가운 강철은 취성을 나타내게 되어 쉽게 깨진다.
그러므로 어떤 기계의 성질 또는 특성은 그 기계가 본질적으로 보유하고 있거나 지니고 있는 것이라기
보다 그 기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조작들에서 비롯되는 활동이다.
[...]
색깔은 물이 지니고 있는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파동 작용과 바람을 통해서 물 내부에서 일어나는
조작들의 결과이다.
물의 색깔은 어떤 조작들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표현이다. [...]
둘째, 행위적 표현(agentive manifestation)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
행위적 표현은 특수한 조작들을 거치는 내부 또는 외부로부터의 입력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기계의
활동 또는 행동의 변형이다.
우리 몸이 추위에 반응하여 떨게 될 때 우리는 행위적 표현을 나타낸다.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 겪게 되는 행동과 우선 순위의 변화는 행위적 표현의 일례이다.
브릭스-로셔 반응(Briggs-Rauscher reaction) 또는 화학적 시계에서, 요오드화 칼륨, 말론산, 과산화
수소 그리고 황화 망간의 혼합물이 가열되고 뒤섞이면 그 혼합물은 일정한 간격으로 청색과 황색 사이를
진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열과 원심력이라는 입력물이 없다면, 이런 새로운 형태의 활동은 출현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셋째, 물질적 표현(material manifestation)이 존재한다. 물질적 표현은 문제가 되는 기계
에서 방출되는 출력물을 생성하는 조작에 의해 생산되는 표현이다.
학위를 취득하는 학생은 고등학교 또는 대학 같은 교육적 기계의 물질적 표현이다. [...]
광합성 과정에서 나무에 의해 생산되는 산소는 그 나무 기계의 물질적 표현이다.
어떤 질문에 대한 언설 행위는 물질적 표현이다. 물질적 표현은 그것을 생산하는 기계와는 별개로 전
세계를 순환하는 생산물이다.
기계의 표현이 국소적 표현이라면, 이것은 기계가 특성, 활동 그리고 물질적 출력물을 타나내는 방식이
그 표현이 발생하는 조작들과 조건의 함수로서 가변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
바다 색깔은 바람과 조명 조건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무는 강수량, 대기 질, 일조량, 토양 조건 그리고
곤충들에 따라 다르게 성장할 것이다.
해마다 포도 수확은 상당히 다르고, 그래서 대단히 다른 와인을 산출한다. [...]
어떤 기계의 잠재적 고유 존재(virtual proper being)를 구성하는 역능들이 불변적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확실히, 많은 기계들이 시간에 걸쳐 지속하는 꽤 안정된 역능들의 체계를 보유하고 있고, 그래서 꽤
규칙적인 국소적 표현들을 생성한다.
강한 열 또는 압력을 받지 않는 한, 다이아몬드의 모양은 비교적 안정한 상태를 유지한다.
다이아몬드가 상이한 형태들의 빛과 상호작용할 때 다이아몬드의 색깔은 춤을 추고 반짝이지만, 빛과의
이런 만남들이 이 기계의 역능을 수정하는 것 같지는 않다.
다른 한편으로, 역능은 강해지고 약해질 수 있다[...].
배가 고프거나 잠이 부족할 때, 행동하고, 환경에 대응하며, 사유하는 우리의 역능은 약화된다. [...]
그런데 [...] 또한 기계는 다른 기계들과의 만남뿐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나는 조작들의 결과로서 역능을
획득하거나 상실할 수 있다. [...]
인간 같은 매우 복잡한 기계들은 피아노 연주자, 수학자 또는 그래픽 미술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유형들의 기계가 된다.
이런 유형들의 기계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역능, 즉 새로운 조작들을 위한 역량을 획득하는 것을 수반
한다.
인지과학자이자 철학자인 앤디 클라크(Andy Clark)는, 마음이란 뇌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뇌,
육체 그리고 외부 세계의 존재자들 사이에 맺어진 일종의 관계라고 주장한다. [...]
따라서, 예를 들면, 지팡이 또는 맹도견을 사용하는 맹인의 경우에, 지팡이와 개는 문자 그래로 그의
마음의 일부이다.
이것은 기계의 역능이 그것이 맺게 되는 결합들의 결과로서 변하기 떄문이다. [...]
마찬가지로, 번데기에서 나비로 변신할 때, 어떤 역능은 획득되는 동시에 어떤 역능은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대단히 낮은 온도에서 강철은 전성(malleability) 역량을 상실하고 취성을 갖추게 되어
파괴되기 쉽다.
모든 기계는 가소성(plasticity)에 의해 다소간 특징지워진다. [...]
확실히, 내부에서 현재 전개되고 있는 조작들과 처해 있는 조건의 안정성의 결과로서 어떤 기계들은
더 견고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객관적인 고유한 가소성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기계들이 무한히 소성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명백히 바위는 나비가 될 수 없고, 나비는 자동차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각 기계는 존재하는 종류의 기계에 고유한 가소성을 갖추고 있다. [...]
주어에 내재하는 술어들의 견지에서 존재자를 이해하는 존재론적 견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어떤
기계에 작용하고 그것이 다른 기계들과 맺는 관계를 변화시킨 결과로서 어떤 국소적 표현과 생성들이
발생하는지 식별함으로써 그 기계의 존재, 즉 역능들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존재지도학: 기계와 매체의 존재론(Onto-Cartography: An ontology of Machines and Media)>
(2014), 1장 "탈인간적 매체 생태학을 향하여(Towards a Post-Human Media Ec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