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동계종택(居昌 桐溪宗宅)은 조선 중기의 문신 정온(鄭蘊)이 태어난 집으로
1820년(순조20)에 중창(다시 지음)하였으며, 국가민속문화재 제205호이다.
조선 후기 사대부 가옥의 원형을 살필 수 있는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거창 동계종택 사랑채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의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이며, 조선 중기 문신이며, 시호는 문간(文簡) 이다.
남명 조식의 학맥을 이었으며,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경칩이 지났는데도 설산인 금원산
1610년(광해군 2) 진사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사서·정언 등을 역임,
1614년 부사직으로 재임하던 중 영창대군의 처형이 부당함을 상소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 대정에서 10년간 위리안치 유배생활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권되어 사간·이조참의·대사간·경상도관찰사·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동계종택 솟을대문의 정려문(旌閭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이조참판으로서
청나라에 굴복하는 화의가 이루어지자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르며 자결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자,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거창군 북상면
농상리(모리재)로 낙향하여 은거하다가 5년 만에 사망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광주 현절사, 제주 귤림서원, 함양 남계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은거했던 농상리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 모리재가 있다.
문간공 동계 정온지문(文簡公 桐溪 鄭蘊之門)
숭정기원후 을묘 사월 일(崇禎紀元後 乙卯 四月 日) ~ 1675년 4월
정려문(旌閭門)은 충신, 효자, 열녀에게 나라에서 내리는 표창으로
정온(鄭蘊)의 정려문은 충절의 공(功)으로 인조 임금이 내린 정려문이다
사랑채와 매화나무
수령 350여년의 사랑채 누마루앞의 매화나무(동계매) ~ 아직 봉오리상태로 3월 말쯤 개화할듯
동계종택 사랑채에 걸려 있는 편액들
충신당(忠信堂)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고,
매화옥(某華屋)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글씨이며,
모와(某窩)는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의 글씨이다.
학암(鶴庵) 글씨는 미상이다
*충신당(忠信堂)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동계 정온 선생의 높은 학덕과 절의와
곧은 품성을 칭송하는 제주민들의 전래 이야기를 듣고 감동되어 귀양에서 돌아와
동계고택을 방문하여 충신당(忠信堂)이란 현판을 적어주고 갔다고 한다.
*모와(某窩)는 의친왕 이강께서 2개월간 정온고택에서 머물며
항일독립의병을 양성하면서 내려준 현판이다.
사랑채 측면의 눈썹지붕
중문채
사랑채에서 중문채를 거쳐 안채로 들어 가는곳
안채 앞마당과 사랑채 뒷편
안채
정온의 동계종택 15대 종부는 경주 최부잣집의 맏따님으로
올해(2024년)로 100세가 되신다고 하는데, 이제 고령으로 정신이 맑지 못해
서울에 거주한다고 하며, 종부는 17살에 시집와서 첫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올해 83살의 노옹(老翁)으로 이집을 혼자 관리하고 있다.
참고로 종부의 여동생은 하회 류성룡종가의 종부라고 한다.
옆집인 반구헌에서 담너머로 보는 안채 측면
안채 뒷편과 사당 사이
옆집인 반구헌에서 담너머로 보는 동계종택 사당
동계종택 사당에는 정조 임금이 동계 선생의 지조를 높이 사
손수 지어보냈다는 제문(祭文)과 시(詩)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세월이 흘러도 푸른 산이 높고 높듯 / 일장산색벽차아(日長山色碧嵯峨)
천하에 떨친 정기 여전히 드높아라 / 종득건곤정기다(種得乾坤正氣多)
북으로 가거나 남으로 오거나 그 의로움은 같으니 / 북거남래동일의(北去南來同一義)
금석같이 굳은 절개 가실 줄이 있으랴. / 정금견석불회마(精金堅石不曾磨)
곳간채
사잇문(집안)
고방채
대문채(안쪽)
사잇문(바깥쪽)
금원산 설경
동계종택 옆의 반구헌(反求軒) 대문
반구헌은 조선 헌종과 철종 때 영양 현감을 지낸
야옹 정기필(野翁 鄭夔弼, 1800~1860) 선생이 기거하던 주택으로
반구헌이란 스스로 자신을 뒤돌아보고 반성한다는 뜻이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2호이다.
반구헌 사랑채
야옹 선생은 목민관 재임 시 청렴한 인품과 덕행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재산과 거처가 없자,
당시 거창 안의 현감의 도움으로 반구헌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안채(최근에 복원)
안채앞의 우물
사랑채 뒷편
반구헌 사랑채 측면
사랑채와 안채 사이 앞의 담장너머로 보이는 건물은 동계종택이고,
멀리는 금원산이다
안에서 보는 반구헌 대문채
강동마을
동계종택 담장
강동마을의 동계종택(왼쪽)과 반구헌(오른쪽)
첫댓글 먼길 수고하셨읍니다
코로나 전에 답사 한적이 있는데
마침 종손께서 계셔서 인사를나누고
사당에 참배한일이 기억납니다
일반 사가에서는
사당을 쉽게 개방하지 않은데
일행중에 명문가
후손들이 많다면서 사당문을 열고 설명도 듣고 참배하고 알묘도 하였습니다
본 종택 사랑채의 누마루의 구조가 특이 함을 느꼈읍
다녀 오셨었군요.
그 종손이 올해 83세인데 혼자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노모는 17살에 본인을 낳아 올해로 딱 100세인데
치매증세가 있어서 요즘은 여기 있지않고 서울 동생들집에 있다고 합니다.
이런 광경 볼때마다 사람도 별로 없고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아 서글프고 앞으로 더 하겠지요 ~~
지금까지는 그래도 나이든 후손들이 엣 향수에 젖어
집을 지키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데 그분들이 가고나면
정말로 개인들은 집을 관리할 사람들이 없을것 같습니다.
안천님, 송강님, 병률님, 반갑습니다. 모두 잘 계셨지요.
안천님의 종회무진한 여정으로 이름있는 종택까지도 잘 감상하고 있어, 감사드립니다. 옛날 건축물인 종택은 물론이고 지금 우리나라의 농촌이 급속도로 내려 앉고 있어 멀잖아 초토화 현상이 오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가까운 경상도 의성, 상주, 청송 등지만 해도 초등학교에 학생이 없답니다. 전교생이10명 미만이라니 학교라 할 수 있겠어요. 우리 대구시에 편입된 군위군 모 초교에서도 같은 현상 10명 미만으로 학교행사로 부모님을 초청했더니 딱 한분이 왔더랍니다. 가까운 경산만 하더라도 5~6학년에 아이들이 급속도로 없어진답니다. 그래도 옳은 중학교에 배정받으려고 일찌감치 대구 수성구 쪽 전입이 그 원인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그런지 이곳 수성구 범어4동은 학원수가 벌써 1,000개가 넘어섰고, 아파트 건물은 조용, 학원건물은 활성화, 도로변 건물철거후 거의 학원으로 도배를 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저출산 고령화가 나날이 늘어나고, 합계출산률이 0.6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반응없는 정치권은 여야가 한가롭게 다투고 있는 TV화면을 외면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처럼, 시골 종택은 물론 조상을 기리는 행사조차도 눈녹듯이 사라지고 있음이 현실이 되었네요...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라가 너무 잘 사는것도 하나의 원인이 되겠지요.
모두들 편한것만 찾으니 외국에도 비슷한 양상들이 있는것 같습니다.
어느 한두가지 지원만 하고 제도만 바꾼다고 될것 같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