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8일 다가오시고 서성거리시는 하느님 하느님이 인간에게 다가오셨다. 하늘에 계신 고귀하신 분이 땅에 있는 벌레 같은 존재에게 내려오셨다. 인간은 하느님을 잘못 닮아 자신이 최고이고 뭐든 제 마음대로 하고 싶어하지만 하느님에게는 기어다니는 벌레 같고 제힘으로는 아파트 3층도 날아오르지 못하는 모기 같다. 천문학 지식이 아니더라도 산이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하느님에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다. 벌레 같은 인간에게 내려오신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 관계를 연인과 부부로 비유한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호세 2,21).” 그것도 부정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그를 영원한 아내로 부른다. 지독히 가부장적인 시대에 만들어진 예언이라서 성차별적인 요소가 거슬리지만 그 의미만은 분명하다. 하느님은 인간을 찾아오시고, 당신에게 돌아오게 하시고, 절대 버리지 않으신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님은 사람 사는 세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셨다. 기도는 산속에서 홀로 하셨지만 생활은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서 하셨다. 대통령이나 유명 연예인들은 경호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사람들 곁을 스치듯 지나가지만 예수님은 사람들과 뒤섞여 사셨다. 그 당시 율법에 따르면 나병환자나 시체처럼 접촉 불가한 이들을 만지셨다. 그런 이들이 당신에게 다가오고 당신을 만지게 하셨다. 전례 때에 흰 장갑을 끼라고 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을 맨손으로 집어 입 속으로 넣게 하신다. 하느님이 나와 가까워지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시는지 헤아릴 수 없다.
하느님이 이보다 더할 수 없이 내게 가까이 오시는 이유는 전능하신 하느님도 내 마음의 문을 당신 마음대로 열고 내 안으로 들어오실 수 없기 때문이다. 문밖에서 등불을 켜 들고 서성대는 예수님 그림이 이를 잘 설명한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고해소에서 자신의 죄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때로는 자신을 참회하는 거룩한 영혼으로 보이게 하려고 한다. 예수님 뒤에서 몰래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려는 그 여인과 같다. 열두 해나 앓았으니 그가 하혈한다는 걸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도 그걸 감추려고 한다. 동네 사람도 아는데 하느님이 그걸 모르시겠나.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놓으시는 하느님이 얼마나 그를 회복시켜 주기를 바라시겠나. 죄를 적발하고 벌을 주시려고 사람이 되셨겠나. 그러실 거였으면 하늘에서 그냥 법대로, 인과응보 상선벌악 원칙대로 인간 세상을 대하셨으면 되고, 그러셨으면 인간들의 원망도 듣지 않으셨을 거다. 이제는 그분의 손을 잡을 수 없고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댈 수 없지만 그 대신 그분이 내 안으로 들어오시게 할 수 있다. 그분이 우리 동네에 오시기를 기다리고 군중 틈을 비집고 그분께 다가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마음을 열어 주님을 내 안으로 모셔 들이면 된다. 죄는 더러운 게 아니라 아픈 거다. 부끄러운 게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드러나는 곳이다.
예수님, 유혹에 빠져 죄를 짓고, 그것을 감추라는 유혹을 또 받습니다. 제가 회복되기를 저보다 더 바라시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안으로 들어오셔서 유혹하는 자가 제 집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름보다 하느님을 닮은 이름은 없고, 실제로는 이보다 더 좋은 분인 줄 믿습니다. 무한한 신뢰를 가르쳐주십시오. 아멘.
이종훈(macario)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