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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브금이 잘 안나오기도 해서 시험삼아서 바꿔봅니다. 유튜브 삼국지 5 오프닝 자동재생! 되면 좋겠는데 안되나
해봤더니 안돼서 그냥 브금으로 올립니다 뉴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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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화 마지막 : 아나톨리오스의 선전포고. 형제의 난 시작.
속된 말로 형제의 난이라 일컬어지는 '나폴리-시실리 전쟁'은 초반 시점을 정하기 모호한 면이 있다. 전쟁의 성격 탓인데, 이중여왕 앙주의 마리의 사망이나 시실리 왕국 아나톨리오스 옹위 반란, 이사키오스의 선전포고 등 많은 순간이 있지만, 대체로 1365년 8월 29일 아나톨리오스의 나폴리 왕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기점으로 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전까지 시실리 왕국 일부에서 벌어지던 소요사태로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이탈리아 북부 및 아카이아 지방까지 벌어지게 됐으며, 이 전쟁으로 당시 지배가문이었던 랄리스-라울 가문 안 형제 모두가 전쟁에 참여하게 됐고, 그 결과 형제간의 서열이 확실히 매겨졌다. 이 전쟁은 그 이전 아즈텍 제국의 정복전쟁이나 이후 비잔티움의 전쟁들에 비하면 중요성은 떨어지는 편이다. 하지만 아즈텍 제국과 몽골군단 사이에서 유럽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던 1300~1400년대 갈리아-발칸 일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그 일대를 무대로 한 드라마의 주역 중 하나던 랄리스-라울 가문의 성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태이다.
나폴리-시실리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초반 나폴리 왕국의 내전이다. 시실리 왕국은 반란의 주축이 공작령 하나만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그만큼 중요성은 떨어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나폴리 왕국 내전은 아나톨리오스가 직접 장남 이사키오스에게 도전한만큼 그를 따르는 무리도 많았는데, 이를테면 지금도 풍부한 먹거리로 사람들을 이끄는 프로방스부터 시작하여 교역도시 브레시아, 지금의 그리스 일부도 아나톨리오스를 지지하였다. 이들이 개인적으로 아나톨리오스의 반란군에게 준 군대는 당시 이사키오스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지지의 근원은 아나톨리오스의 명분이었다. 아나톨리오스는 반역의 기치를 올리며 선거제를 통한 왕위계승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본인의 왕위 욕구에 맞는 결과였지만 그만큼 그리스인보다 이탈리아인 왕을 선호하던 여타 공작들에게도 구미에 맞는 일이었다. 그 결과 아나톨리오스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 둘 이상을 못보는 전쟁을 시작했다.
나폴리왕 이사키오스 1세도 순순히 당하지는 않았다. 당시 이사키오스 1세가 가지고 있던 군사는 아말피 등지에서 나온 3000명 가량의 병사였다. 단순비교로 따지면 나폴리왕이 힘든 상황이었으나, 이사키오스 1세가 거느린 군사력의 장점은 당시 시실리 반란 진압을 도와주기 위해 사기충천한 군대를 이미 집중시켜놨다는 점이었다.
반면 아나톨리오스는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반란이 일어난 지방이 분산되어있던만큼 힘을 집중하기 힘든 처지였다.
이 차이가 나폴리 내전의 방향을 좌우하게 됐다.
최초로 반란군과 정규군이 맞붙은 소렌토 전쟁에서 아나톨리오스는 이미 1800명을 넘는 사상자를 내며 대패하게 된다. 반면, 이사키오스 측의 사상자는 300명 가량 되었는데, 이는 평원에서 힘 대 힘으로 붙는다는 반란군의 얕은 군략에 의해 가능한 결과였다.
소렌토 전투로 반란군의 예봉을 꺾은 이사키오스 1세는 그대로 각개격파를 명했다. 아나톨리오스 입장에서는 초반부터 틀어지기 시작한 셈이었다.
초반 승부가 유리해지자, 나폴리 내의 유력자들도 이사키오스 1세를 돕기 위해 사병을 보내는 모습을 보인다.
이 점에서 이미 유력자들은 이 전쟁이 단순한 선거제 싸움이 아닌 나폴리 왕국에서 치러야 할 권력다툼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당시 영주도 아닌 식자층들이 전쟁에서 영향을 충분히 줄만큼 부르주아지의 힘이 강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내려오는 야사에 따르면, 이사키오스 1세는 증원군의 대장이었던 '포레스티노'라는 이름을 듣고, 사형을 명하려 했다는 얘기가 있다. 당시 신하들에 간청에 의해 자제하였다고 하나, 당시 민중들에게 이사키오스라는 인물이 어떻게 비춰졌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소렌토 전투는 아나톨리오스에게 치명타였다. 그 전투로 아나톨리오스는 자신의 힘의 근원인 프로방스를 지킬 병력을 모을 수도 없었으며, 이후 상륙하던 소규모의 군대들은 이사키오스의 대군 앞에 지속적으로 무너졌다.
만약 아나톨리오스의 소렌토 주둔 병사들이 살레노 등 산지로 가서 적을 맞이했다면 아나톨리오스의 정복이 일어났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못했다는 점에서 짧은 식견이 드러나며, 이후 많은 실수를 하지만 이사키오스 1세가 동생들보다는 나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적어도 이사키오스는 어느정도 대등한 입장에서는 유리한 지형에서 싸워야 한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그 무렵, 이탈리아 내부를 강타한 소식이 있었다. 베네치아에게 콘스탄티노플이 강탈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비잔티움의 상징이었으며, 이탈리아에 살았던 노르만, 혹은 시실리의 무슬림에게도 언젠가는 정복하고 싶었던 도시였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자랑이자 결코 뺏겨선 안될 소중한 곳이었을 것이다. 랄리스-라울 가문에게도 그러한 면이 강했으리라 추측된다. 이 사건은 이후 그들이 나갈 방향을 정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됐을 것이다.
1366년 9월, 이사키오스 1세의 군대는 이탈리아 북부 카스텔루치오까지 진격했다. 이제 아나톨리오스의 반란은 하나의 소요사태로 조용히 마무리 지어지는듯 했다. 이사키오스 1세도 그리 생각했으리라.
베니스 공화국의 선전포고가 있기 전까지는 그랬을 것이다.
1366년 10월 9일 베니스 공화국의 선전포고는 전쟁의 범위를 일시적이나마 이탈리아 전역과 발칸-소아시아 일대까지 늘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이후 이사키오스 1세의 행동에 상당히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들에 대한 랄리스-라울 가문의 뿌리깊은 불신은 이 시기에 형성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이후 랄리스-라울 가문은 베니스와 좋으면 전쟁만 하지 않으며, 나쁘면 전쟁인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이사키오스 1세는 시실리 왕 바르톨로마이오스에게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시실리 왕이 받아들이면서 이 전쟁은 아나톨리오스- 나폴리/시실리 - 베니스라는 삼각 구도가 완성된다. 다만, 이 삼각구도는 힘의 균형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베니스와의 전쟁 이전 전초전에서부터 이사키오스 1세의 군대는 삐걱거렸다.
2400명 대 2000명의 전투에서 숫적 우세를 믿고 산지에서 싸운 이사키오스 1세는, 1500여명의 사상자를 두고 도망치는 추태를 보였다.
이 전투에서 잃은 병력은 아나톨리오스의 반란에서 잃은 병력의 배는 되었다. 이 전투는 이사키오스 1세가 이후 베니스와의 전투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일관하는 계기가 된다.
시실리 왕국측은 나폴리 왕국보다 훨씬 사정이 나았다. 아나톨리오스 공작을 왕으로 옹립하려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며 바르톨로마이오스의 권력기반은 탄탄해졌다. 재밌는 가정으로 이때 바르톨로마이오스의 나이가 성인식을 치를 나이를 지났다면 어떤 행동을 했을까. 아니면 아나톨리오스가 시실리의 왕이었다면?
하지만 시실리 왕은 미성년이었으며, 반란 진압만으로 만족한 상태였다. 그 결과 시실리 왕은 자신의 힘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을 놓쳤다.
당시 베니스의 부는 지중해 세계에서도 최고의 수준이었다. 레반트 무역으로 돈을 벌어들이던 베니스는 이후 소아시아 땅을 직접 점령하며 중계무역의 이윤을 더욱 높일 수 있었으며, 1204년 이후 일어난 콘스탄티노플의 재정복은 베니스 공화국을 위상면에서도 교역량 면에서도 지중해 세계에서 비교할만한 세력이 없을 정도로 강성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베니스는 용병만으로 수만명을 부릴 수 있을 재력을 갖추게 됐다. 이미 베니스는 작은 왕국정도는 간단히 이길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추고 있었다.
그 많은 베니스 군대 중 대표적인 군대는 이탈리아 내부로 들어와 점령을 시도한 아풀리아 주둔 용병단이었다.
1367년 9월, 당시 이사키오스 1세는 베네치아 용병단을 이유로 수도를 아말피로 옮기는 결단을 내린다.
여기서 의문을 가질 점은 과연 이 때 베니스의 군대만을 노렸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왕국에서 반란도 일어난 상태라 용병을 유지할 돈이 적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유로 부유한 포캐키 지방을 두고 이탈리아 남부의 소규모 영지로 들어가는 것이 납득할 수 있는 결정이었을까. 또한 이후 베니스와의 전쟁 양상을 보면 수도를 옮긴 이유를 알 수 없기도 하다.이 점에서 이사키오스 1세는 이미 다른 맘을 품고 있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다만 이 점에 대해서는 이사키오스 1세에게도 사정이 있다는 반론이 만만찮다. 실제로 당시 용병단들은 돈을 상당히 많이 챙겼으며, 그만한 재력이 나폴리 왕국에는 없었다. 또한 베니스는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강호로 손꼽히는 국가였다. 아나톨리오스 반란처럼 아직 군대가 전부 모이지 않았을때 각개격파를 하기 위해 용병을 고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이론 모두 용병의 구입이 이후 이사키오스의 행동을 정했다는 점에서는 의견을 같이하는 편이다.
당시 남아있는 기록으로는 이사키오스 1세가 구입한 용병단은 15000명 가량으로, 당시 나폴리 왕이 모을 수 있는 군대의 배 이상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사키오스가 건곤일척의 수를 띄운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1367년과 1368년 사이, 베니스와 랄리스-라울간의 유서깊은 갈등의 서막이 클라이막스를 맞이한다.
15000명 대 11000명, 장소는 루세라로 지금의 아풀리아 지방에 있는 산지였다.
두 국가 모두 승부를 자신하는 전투였다.
서막의 결과는 나폴리 군의 참패였다. 숫적 우위를 믿고 들어간 나폴리 군은 산지와 좌익 쪽 범장과 명장의 차이로 인해 박살나 버렸다. 그 당시 기록에 의하면, 이를 들은 이사키오스 1세는 그의 아버지처럼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고 한다.
단 한번의 격돌로 이사키오스 1세는 베니스와의 전쟁을 포기했다. 코르푸 도시를 주는 댓가로 얻은 10년의 불가침조약이었다.
이사키오스는 용병을 이용해 어디선가 이득을 얻어야 될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리고 당장 이득을 얻을 곳이 있었다. 그는 아나톨리오스 반란을 끝내기 위해 아카이아 지방으로 원정을 결심하였다.
이미 이 당시 왕위를 노릴 수 있던 아나톨리오스는 사망한 상태였으며, 아카이아 공작 앙주의 필리페만이 남아 항전을 하고 있었다.
야사에 따르면, 이사키오스는 대체로 그의 아내 시모니스에게 충실했으나, 그의 정욕은 시모니스로 만족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는 전쟁상황에서 불안에 떨수록 심해졌다고 하는데, 과연 그 이유만으로 다루기 쉬운 농노를 만났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이를테면 시모니스의 임신 같이 예외상황도 생각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전쟁의 경과와는 반대로 왕가의 피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1368년 5월, 반란군의 최후의 저항이 아르고스에서 일어났다.
아르고스 전투는 반란군이 뒤늦게야 산지에서 저항하였으나, 숫적열세를 극복하기는 힘들었다.
아르고스 전투가 반란군의 패배로 끝나면서, 전쟁의 판도는 정해졌다.
아나톨리오스부터 시작해 필리페로 마무리 짓는 반란은 실패하게 되며, 필리페의 작위 회수로 마무리 짓게 된다.
이사키오스는 반란의 결과 비록 돈은 좀 썼으나, 포로방스 공작위와 아카이아 공작위를 얻으며 나폴리 왕국의 혼란을 가라앉혔다.
그의 왕위는 당시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그제서야 이사키오스 1세는 밖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당시 시실리 왕국은 반란과 어린 군주로 인해 평상시보다 힘이 약해진 상태였다.
이 기회를 이사키오스 1세는 놓치지 않았다.
1368년 8월 21일, 나폴리 왕국의 이사키오스 1세는 시실리 왕국의 바르톨로마이오스 1세에게 시실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선전포고 하였다.
여왕의 상속으로 인한 형제간의 갈등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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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반란 하나로 1화가 넘어갈 줄이야. 저도 심각하네요(...)
저번에 쓴 걸 제가 읽어보니 장면마다 글이 끊기는것 같더라고요. 전쟁 장면은 그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역사책이나 연대기처럼 써봤습니다. 괜찮나요? 필력이 부족해서 제대로 먹히는지 모르겠네요. 재미는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ㅜㅜㅜ
지난번에 카이저와 결혼했는데 왜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부르지 않았냐고 궁금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결혼이 안됐습니다. 제 생각엔 카이저가 죽은게 아니라면 안될리가 없으니 죽은게 아닐까 싶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참 안됐습니다. 처음엔 공작과 결혼시키려니 거절, 카이저와 결혼시키려 했건만 반란 때문인지 취소.
결국 아라곤 왕을 콜투암 할수 있대서 그쪽 공작에게 시집 보냈습니다. 그런데 콜투암이 안됩니다. 알렉산드리아 불쌍해요 ;ㅅ;
아무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ㅋㅋㅋ
ps. 자꾸 처음 글 작성 올릴때 튕기네요. 저만 그런가요?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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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무리 동맹으로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지만 노인에게... 알렉산드리아 안습ㅜㅠ
모든걸 대신 해결해주는 해결사 신롬과의 동맹은 필수인데 말이죠..
그거 쉽지 않더라고요. 설마 안될거라곤 ;ㅅ;
으아아 콘스탄디누폴리가 ㅠㅠ
모든 도시들의 여왕이 저런 공화국에ㅜㅜ
@통장 진짜 백년전쟁 시나리오 공화국은 깡패 of 깡패..
공화국들 털어줄 동로마가 없으니까 진짜 미쳐 날뛰더군요..
안드로니코스 3세로 시작했는데 무슨 시작부터 베네치아+제노바+오스만이 짜기라도 한건지 계속 선전포고.. 으아아..
@콤니노스 후기 시나리오 공화국은 이길 생각을 못하겠더라고요ㄷㄷㄷ 어디서 이리 튀나오는지 ㅜㅜ
삭제된 댓글 입니다.
베네치아놈들ㅜㅜ 삼치님은 뭐 안쓰시나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