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고를 쓰면서 : 다소 길어졌지만 언론실무를 보시면 논설문, 수필, 언론기사 작성법하고는 달리 칼럼은 매우 자유롭게 써도 됩니다....읽고 싶은 저의 애독자들은 편안하고 향기로운 시간에 읽어 주시기를.....
*감상음악 :1.모짜르트 오페라 아리아 피가로의 결혼중 이중창 (산들바람 불어오며,
che soave zeffiretto.) 노래 : Izzy 팝페라 가수)
2. (피가로의 결혼) 1막 중Non piu andrai(더 이상 날지 못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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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샘의 신좌익사상비판 18. : 거리의 지식인 장 폴 샤르트르 ..>
구국결사대의 맑은샘
법학연구에 몰두하면서 가끔 쉬는 시간에 시(詩)를 썼는데 이 시(詩)를 쓰는 사람이 보들레르나 말라르메, 쉬르 리얼리즘의 앙드레 부르통, 랭보 , 요즈음 얼치기 좌익 문학도들이 보는 파블로 네루다등을 모른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어 진다....
필자는 원래 문학도는 아니지만 법학을 하면서도 요즈음 뭐 (법문학 ? ^*^)이라는 학문도 생겨서 참 우익운동을 하면서도 인생이 그리 무미 건조 하지만도 않고 재미있는 면도 많다고 생각이 든다....
일요일 날 가끔 숲에서 시(詩)를 쓰면서 중학교시절인가 이모님의 방에서 본적이 있는 여류 수필가 고 전혜린 여사의 젊은 시절 글이 생각이 나기도 한다.
필자는 이 전혜린 여사의 글을 매우 좋아하고 사랑하기도 하는데 당시로써는 여류 수필가이면서도 매우 정열적으로 공부하고 정신적인 의식이 뚜렷한 흔적이 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전여사님도 “괴퇴”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또 재미있는 것은 전여사가 자살 하기 전(일설은 자살했다 하지만 필자가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밤샘하며 글쓰기에 몰두하다가 육신이 피곤에 쩔어 따라가지 못한 것이 아닌지?) 부군이 바로 우리 헌법학계의 큰 족적이 계신 김철수 박사이다...
당시에 독일 유학하기도 힘들었거니와 두 한국의 젊은 남녀가 독일이라는 낯선 땅에서 만나 (???? !!!! ^*^ 하셔 가지고)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한 분은 한국 현대 헌법학계의 태두로, 한 분은 한국 현대 문학계의 큰 별로 자리매김했으니 보통 부부는 아닌 것 같다....
전혜린 여사를 대개 잘 모르는 사람들은 1960년대 현대초기의 수필가이며 여권운동가 아니냐? 하고들 알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요즈음의 되먹지도 않은 폐미니스트는 아니고 법학을 하다 염증을 느껴 독일로 문학을 공부하러 떠난 굉장히 정열적인 정신의 소유자이리라 하고 생각이 든다.
그녀의 자살이라는 죽음도 사람들은 무슨 심각한 사회인식에 대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써 개인적인 불만이 있어 자살한 것 아니냐?고 하지만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은 정열적으로 글을 써 보는 사람들만이 아는 비애 일 것이라고 유추하고 있다.
대개 제대로 된 시(詩) 한 수를 써 보면 밤샘하기가 여사다...새벽 두, 세시의 고요한 밤에 술 한잔을 살짝 걸치고 강한 집중력을 요구해야 자신만의 그 무엇이 나오기 때문인데 그것은 경험한 사람만이 안다.
이는 정말 피를 말리는 신경 집중과 고통이 따를 때도 있다....때로 이것은 글쟁이들만이 아는 깊은 병이 되기도 한다. 독자들에게 쉬운 이해를 돕자면 영화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 나오는 늘 술취해 머리헝클어뜨리고 작곡에 몰두하고 있는 모차르트를 연상하면 된다....
전혜린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면 여성이라서 육체가 혹시 못 따라간 것은 아닐까?
필자는 전혜린을 연구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사상가가 있는데 그가 바로 문제의 “쟝 폴 샤르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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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장 폴 샤르트르 그는 누구인가?)
좌파들이 말하기를..... 샤르트르는 일생을 통해 기존 지배계급을 비판하고 고발하면서 지식인과 작가와 함께 일선에 서서 싸워 온 사람이다. 샤르트르야 말로 참된 지식인이 되고자 노력한 사람이다.“ 라고 말한다.
많은 현대철학자들이 샤르트르를 실존주의자라고만 알고 있지만 사회사상사, 법사상사, 정치학을 좀 읽어 본 필자의 눈에는 “쟝 폴 샤르트르” 역시 좌파로 보인다.
이런 종합적 시각의 사상분석이 없는 한 철학사만 가지고 볼 때 그를 실존주의자로만 보는 착시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필자의 학부시절 많은 문학도들이 이를 모르고 맑스주의 사회과학의 오류만을 접해서 참 훌륭하고 학문하기에 근기가 좋은 젊은이들도 자신도 알게 모르게 사회주의의 길로 빠져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샤르트르가 왜 사회주의자인가?는 나중에....)
1905년 6월 21일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의 명문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서 수학했다. 졸업하고 병역을 마친 후 프랑스 북부 항구도시 르아브르의 고등학교 철학교사가 되었다. 1933년 베를린으로 1년간 유학 , 후설과 하이데거를 연구했고 소설 (구토)로 세상의 주목을 끌어 신진작가로써의 기반을 확보했다.
장편소설 (자유의 길 Les Chemins de la libert 1945-1949)의 대부분과 (쉬티아시옹 Situations, 1947-1965)에 들어 있는 수많은 독창적인 문예평론도 전시하의 산물이었으나 특히 1943년에 발표한 대작 철학논문 (존재와 무 1949)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전개한 존재론으로써 결정적인 작업이었고 세계적으로 보아도 제2차대전의 전중부터 전후에 걸친 그 시대의 사조를 대표하는 노작은 노작이다.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메를로 퐁티의 협력을 얻어 (르탕 모테른(Les Temps Modernes)지를 창간하여 전후의 문학적 지도자로서 다채로운 활동을 했다.
샤르트르의 문학적 주장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밝혀졌는데 그가 말하는 “문학자의 사회참여”란 그 이전의 (구토)나 (존재와 무)에서 볼 수 있었던 니힐리즘의 그림자가 짙은 작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역시 전쟁의 체험에 따른 샤르트르 자신의 주체적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1964년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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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어떤 저작이며 샤르트르의 문제는 무엇인가?)
a: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어떤 저작인가?
샤르트르가 1965년 9월과 10월에 걸쳐 일본 도쿄와 교토에서 행한 세 차례의 지식인과 관련된 연속강연을 모아서 1972년에 펴낸 책이다.
이 책은 3부로 되어 있는데 제1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에서 ‘지식인이 처한 상황’과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로 구성되어 있다. 샤르트르의 지식인관이 잘 드러나 있다.
제2부 (지식인의 기능)에서는 ‘모순’과 ‘지식인과 대중’ 그리고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논하고 있다. 지배계급과 민중 사이에서 비판받고 갈등하는 지식인의 모순된 상태로부터 자신의 역할을 찾아 나서는 길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끊임없는 자기비판과 기층민중과의 철저한 연대를 통해서 모든 권력에 대항 할 때만이 가능하다....
샤르트르 자신의 미화에 의하면 지식인은 고독한 민주주의의 옹호자인 것이다.
제3부는 (작가는 지식인인가?)이다.
샤르트르는 작가에게서도 지식인으로써 근본적인 특성들을 많이 볼 수 있지만 창조적 예술가인 작가는 보편화와 실용적 지식을 그 목적으로 하는 교육자나 학자, 의사와 같은 지식인들과는 다른 점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문학작품의 의미, 작용 내용은 객관적 세계인 동시에 주관적 세계인 것이다.
또한 작가가 작품을 쓰는 의도는 어떤 지식을 전달하는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작가가 포착한 세계를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샤르트르는 작가도 지식인이며 작가의 참된 기능은 인간의 가치를 억압하고 파괴하는 모든 기존의 가치질서를 폭로하고 고발하는 것이라고만 보고 있다. 이점이 문제다.
후에 “폭로는 진실을 말하게 하지만 가치를 떨어 뜨린다”라는 언어가 어느 사회학자에 의해 태동 하게된 문제가 있기도 하지 않겠는가?
그는 1966년 일본에서 행한 일련의 강연에서 지식인을 자신 및 사회속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실제적인 진리 사이의 대립을 인식하는 전문가라고 정의했는데 , 그의 이 지식인 개념에서는 특히 다음의 세 가지 점이 주목을 끈다.
첫째, 지식인은 전문가로부터 나온다.
둘째, 지식인은 보편주의적인 지식 및 기술의 추구와 지배계급이 요구하는 당파적 이해관심 사이의 모순을 경험한다.
셋째, 지식인은 소외계급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보편주의와 당파주의 간 모순 때문에 소외계급의 보편화운동에 참여 하지만 비록 소외계급을 위한 이론가가 될 수는 있어도 이들의 유기적 지식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샤르트르의 사상과 특히 지식인관을 엿볼 수 있는 이 책은 비록 20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지식인이 처해 있는 특수한 상황과 모순을 분석하고, 그 모순의 극복을 통해 지식인의 참다운 기능은 무엇인가?를 샤르트르 특유의 생각으로 밝히고 있다.
a: 샤르트르의 장점은 무엇일까?
필자는 샤르트르 사상의 일부분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실존주의적인 측면이 지식인으로써 단점도 있지만 많은 장점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그의 지식인 자체를 돌아본 냉철한 시각은 어떤 면에서는 상당한 시사점을 우리에게 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의 (지식인론의 특징)은 바로 “참여”라는데 있다.
사실 이 참여지식인이라는 말은 지식인에게 잘 먹으면 약이 될 수도 있고 잘못 먹으면 독이 될 수도 있다고 필자는 보기 때문이다.
남의 생각이나 이론들만 보면서 서재에서 파묻혀 지내는 멍하게 되는 지식인들에게는 게으름을 타파하고 자신의 생각을 소화하고 정리해 가는데 실질적 보조를 만들게 하는 좋은 자극이 될 수도 있지만 이론적 배경이나 자신의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엄청난 거리투쟁에만 매몰되어 보았자 무엇을 먹는지도 모르고 거리의 모든 불량식품을 죄다 먹거나 분별력이 없는 상태에서는 사회는 무조건 잘못되었고 단점이 많은 일부의 생각만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미친 짓으로 흐르게 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를 필자는 많은 우익거리투쟁을 통해서도 보아왔다.
요즈음 우익진영에서 문제가 되는 아무런 정치학, 법학적 정도(正道)개념이 아닌 영국의 중도좌파 앤서니 기든스나 이탈리아 좌파 수정 법률가 로베르또 보비오의 중도와 섞는다던지, 전에 좌익을 했던 사람이 갑자기 우익에 나타나 설래방래 하는데도 전향여부의 검증도 없이 같이 집회를 한다던지, 위장 뉴라이트들의 문제라던지, 많은 소형우익단체들이 연대하자고 모였다가 별것도 아닌 사건으로 연대가 깨어진다던지 하는 일 등등이 좋은 예가 된다 하겠다.
사실 참여를 하던, 하지 않던 그것도 지식인의 자유이겠거니와 한쪽도 하지 않은 쪽도 실은 다 자기 전략에 기인하기도 하는데 무조건 지식인은 거리로만 나와야 한다는 것도 이런 상태로는 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문제이지 않겠는가?
그것을 모르면 지식인 자격도 없다.
여하튼 샤르트르는 당시의 게으른 귀족적, 봉건적, 부르죠아적 지식인들의 단점을 깨우치고
각성시키는데는 한 몫을 했다. 이 참여 지식인의 문제는 우리에게도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사실 우리도 우익이 정권을 빼앗긴 이유가 노무현 정권이 출범할 당시 우익이 게으르고 이론에만 매몰되어 있던 서재 지식인이 많았기 때문 아니 겠는가?
어쨌던 우리는 정권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요즈음은 거리에 좌파들 보다도 아무것도 모르다가 한이 맺혀서 억울해서 하나 둘 나왔는데 떠드는 우파가 더 많게 되었으며 결국 전체적인 분위기를 우파가 다시 회복하고 좌파 정권은 맥을 못 추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아직 여러 가지 우리 내부문제들과 우려도 많지만...)
샤르트르를 설명하는 데 또 좋은 점은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것이 있다.
*드레퓌스 사건이란? :
1894년 10월 프랑스의 포병 A. 드레퓌스 대위가 독일 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비공개 군법회의에서 종신유형의 판결을 받았다.
그 후 군부에서는 진범이 다른 사람이라는 확증을 얻었는데도 진상발표를 거부하고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다.
그러나 소설가인 E. 졸라가 1898년 공개적으로 이를 “나는 탄핵한다.”라는 논설을 발표하여 군부의 음모를 논박하면서 프랑스 전체가 “정의” “진실” “인권옹호”를 부르짖는 세력과 “군의 명예와 국가질서”를 내세우는 세력으로 나뉘어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몇 차례의 법정투쟁 끝에 결국에는 무죄판결을 받아 , 자유주의적 지식인과 사회당등 좌파 세력이 교회, 군부등 보수세력을 누르고 승리했다.
이후부터 드레퓌스 사건은 권력에 대항하여 양심과 정의, 진리가 승리한 대표적 사건으로 프랑스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드레퓌스 사건은 대중이 원하는 진실이 무엇이고 일부 정치세력이 아무리 숨기고 왜곡하려고 해도 <진실과 정의가 승리해야 한다>는 당시 프랑스 국민들의 당위를 취득했다는 점이고 이는 맹렬한 거리투쟁의 산물이었다.
b: 샤르트르가 우리에게 문제되는 점은 무엇인가?
<이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샤르트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드레퓌스 사건 이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위기가 도래하고 있다.” “부르주아지에서 태어나 그 가운데서 자라고 교육받은 ‘철학자’들이 자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키 위해 투쟁했던 이 시기는 참으로 황금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먼 옛날이다.
오늘날 부르죠아 계급은 권자에 올랐고 그 누구도 이들을 보편적인 계급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의 휴머니즘을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말할 근거는 충분하다. 이 이데올로기는 가족 자본주의 형태의 시대에는 적합했을런지 모르나 , 독과점 자본주의 형태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별로 맞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르죠아들은 아직도 이 사상을 고수하고 있다. 즉 ”부르죠아는 휴머니스트며 서구세계는 자유로운 세계다.“ 라고 고집하는 오류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19세기말 드레퓌스 사건이후 이 철학자들의 손자는 지식인으로 변모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이것은 실존주의자라고만 알려진 샤르트르가 사회주의자라는 명확한 증거이다..
샤르트르의 이 말에서 우리는 자본가계급이나 부르죠아의 좋은 점 휴머니즘을 소외, 배격시키고 교묘하게도 부르죠아는 나쁜 것 낡은 것이라고만 말하며 자신들만이 진보라는 변증법적 사고구조에 머물러 있다는 좌파라는 것을 명확하게 간파해야 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샤르트르는 “(지식인의 모태는 전문 기술가 집단이다.) (중간층 전문가는 부르죠아지부터 잉태된다.) (실용학문의 전문가들이 부르죠아 이데올로기를 생산한다.)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는 보편적 계급인 부르죠아를 도운 이데올로기다. : 자연법의 개념 (그로티우스의 이성 자족론)을 경제에까지 연장시킴으로써 부르죠아지들은 경제를 속화시켰다는 엄청난 오류를 안고 있다.) (계급의식의 필요성으로부터 조직적 지식인이 탄생한다.) (학자는 지배계층의 불가분의 존재이면서 수상쩍은 존재이다) (전문 기술자는 잠재적 지식인이다.) (지식인은 그 사회의 모순을 내재화한 역사적 산물이다.) 라는 등등의 말과 특유의 이론으로 프랑스 대중을 선동했다.....
이는 사상전문가들이 보기에는 철저히 현대가 아닌 당시의 프랑스 브르죠아지에 대한 실존주의의 잦대로만 애써 부르죠아와 자본가 계급을 옹호하는 일을 교묘히 비판선동하는 것 아니겠는가?
자본주의 속에서 자본주의의 은택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좌파들에게 나는 묻고 싶다...
도대체 자기힘으로 돈을 벌어 자기 자유를 누리는 일이 왜 나쁜가?
이렇게 물으면 얼치기 좌파들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방해하고 깨뜨릴 수 있다고 답할 것이다. 일부 맞기도 하지만 또 생각할 점은 이 대답을 하면서도 그들은 계속 시장경제의 은택을 입고도 자기 집을 허물어뜨리는 오류를 범한다는 공익을 장악한 오만하고 교만한 착각의 악랄한 죄는 철저히 숨겨야만 하는 것이기에 아예 자본주의사회를 뒤엎고 파괴시켜버리자는 공산주의자보다 더 얼치기인 것이다.
남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 범위의 자기 자유 향유는 성스러운 축복이고 인간이 가질 변함없는 천부적 기본권이다.
샤르트르의 지식인론 사상을 한마디로 한다면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이 자본가나 부르죠아 계급에만 봉사하는데 이것을 소위 ”민중“에게 돌리고 그 편에 서라...”) 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민중이 과연 자기 노력없이 여러 분야의 독자적이고 전문적인 지식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이는 결국 오늘날 현대사회의 썩어빠진 표퓰리즘만 불러 왔다는 점을 샤르트르에 대해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현대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이 사라지게 만드는 근본적인 좌파적 사회파괴행위에 동조할 수 있다....
이는 결국 1968년 프랑스 좌파의 5월혁명의 영향 때문이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프랑스 사회는 좌파들의 준동 5월 혁명을 슬기롭게 극복했고 국민들은 좌파에게 정권을 내주지 않았지만 그 폐혜는 프랑스 사회에 실로 엄청났다.....
나는 또 다른 면을 우리 좌파에게도 물을 수 있다고 본다.
좌파인 샤르트르 수준에서만 보아도 과연 “김대중의 썩은 비자금 1조와 그의 국정농단과 반역,” “노무현의 국정파탄” “땅굴은폐” "전자개표기 비리와 폭로 은폐“ ”정치인 테러“ ”북한 대다수 주민들의 인권신장과 해방, 김정일 정권 종식“ 등등 수많은 두 정권 동안의 폭정과 비리에 대해서 너희들이 진정 양심이 있다면 그동안 수구꼴통이라고 부른 세력들에 대한 비리폭로와 마찬가지로 역시 똑같은 잦대를 들이대야 하는 것 아닌가?
왜 말을 못하고 철저하게 숨는가?
그래서 니놈들은 감히 샤르트르를 입에 올리지도 못하는 좀생이 얼치기 양아치들인 것이다.
샤르트르는 그래도 좌파 실존주의자라고 해도 그나마 자기 자존심이 있어서 준다는 노벨문학상을 가감히 거부하는 존재위대성을 발휘하기도 했는데 도대체 왜 시인 “고은” 이라는 작자는 원본을 보는 실력도 없으면서 무슨 노벨 문학상을 타겠다고 주지도 않는 상에 대해 설레방 설치다가 온 나라 문인들의 자존심과 명예에 먹칠을 하는가?
그것이 바로 양아치 짓거리이지 무엇인가?
대답해 보라.....
니들이 황금같이 받들고 팔아먹는 샤르트르를 제대로만 알아도 너희들은 폭로해야 한다.
그런데 왜 꿀먹은 벙어리인가?
나는 하에예크를 좋아하고 대한민국의 경제발전과 인권신장을 원하는 우익이면서 자유주의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좌파들을 두들겨 패기 위해서 샤르트르 이상으로 가열차게 투쟁해야 한다.
꼭 거리에서만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고발한다 연방제 꼼수를”......(필자의 오래전 졸고)
“나는 고발한다 너희들의 가증스러운 사고구조들을......비리를......사기의 비인간성을.............너희들의 모순을............얼치기 좌파 놈들아아..............
아직도 60년대 마로니에공원 시대인줄 알고 막걸리 마시고 계집애들이나 꼬시던 얼치기가 샤르트르를 좋아한다고 파리의 택시 운전사가 되었다....
파리의 택시 운전사가 대한민국 국정을 논하는 시대라고? 한국의 택시기사들이 가소롭게 웃겠다......
거리의 시각만이 무슨 첨단의 세계의 경쟁국정을 논하고 이끌 수 있는가?
제발 저 파블로 네루다 똥휴지 가지고 저 브라질 아르헨티나의 뒷골목에 가서 쓰레기통 뒤지면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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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졸고를 마치면서 오늘날 되먹지도 않은 좌파 페미니스트와 양아치 트랜스젠더들을 보면서 한 천상의 연인에게 편지를 쓴다....
이를 독자들에게도 소개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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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의 이유 (현대시)>
맑은샘 지음.
아직도 불꽃은 없다
*그녀를 어설픈 말장난으로
패미니스트로 해석하지 마라
1965년 1월 마감한 생에서
내가 아는 여자들 중에서도 아직까지 그녀같은 아리따운 불꽃은 없다
이후의 "불꽃" ?
감히 흉내를 내고픈 어설픈 단어일 뿐
괴퇴 동상앞에서의 사진에 영혼은 비오는 이 새벽,
몸서리칠정도로 영혼은 닮았을 뿐
토요일 밤에서 일요일 새벽 사이에 죽은 삶
자살하고픈 충동도 아니고 의도된 시나리오도 아니고
다만 영혼은 같은데 몸이 여성이라
육체가 정신을 따라가지 못한 것일 뿐
한잔의 술과 진한 커피와 다량의 수면제
자신의 불꽃을 피우지 못했기 때문
그녀는 몸으로 온 정신으로 말했을 뿐
불꽃 피우기를 보여주기 위한 순간에 펜의 사랑을 그리다
아, 그리고 말이 없었을 뿐
아직도 불꽃은 없다
활활 타는 불의 혼(琿)이여
슈바빙의 노을이 불탈 때
같은 언어라는 군상이라서 감히 같은 단어들도
한 열정의 예술가와 노을을 따라가지도 못하는구나
그녀가 죽은 이유는 다만 당대의 의식과 주위가 너무 무식하고 열악했기 때문
죄가 많았기 때문
그녀는 다만 표현을 위한 몸부림의 열기였을 뿐
열정의 천사가 너무 힘겨웠어도
몸서리치도록 사랑해 가는 순간, 의식의 구분을 몰랐기 때문
지금도
죽어가는 시대의 이 더러운 새벽에
천상의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아직도 불꽃은 없다하고
불꽃의 선율만 흐르는 채로
새벽에 내리는 비는 나에게 주는 그녀의 눈물
천사의 음악을 힘찬 목소리로 바꾸라는 슬픈 그녀의 눈물
선율은 흐르고 커피향이 진할 때
그리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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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그녀 : 전혜린
전혜린 : 전혜린(田惠麟,1934.1.1 - 1965.1.11.)
한국의 수필가, 번역문학가.
1.영혼의 집시 일생
그녀는 1934년 1월 1일 평남 순천에서 전봉덕(변호사) 의 장녀로 출생하였다.
1952년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법대에 입학하여 동대학 재학중 독일에 유학하여 뭔헨대학 독문과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에칼트 교수 조교로 있다가 귀국하여 서울법대, 이화여대 강사와 성대 교수를 역임하였고, 펜클럽한국본부 회원이기도 했다.
그녀는 철새처럼 한 계절의 꿈을 앓다가 31세의 젊음을 포기했다. 그녀는 영원한 지적(知的) 방랑아인양 관념의 고뇌를 겪다가 생의 한가운데에서 죽음의 한가운데로 항해해 가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천재성과 미학 그리고 스스로의 모랄을 이룩하고자 벽돌공처럼 성을 쌓아 올리다가 어느날 문득 자기도 한낱 평범한 여인으로 변신해 감을 느끼자 죽음으로 천재성을 반증(反證) 했다.
날개 옷을 도난 당한 선녀처럼 천국에의 향수(鄕愁) 에만 젖어 있다가 그 옷을 찾지도 못한 채 육신은 대지에다 묻고 영혼만이 승천해 가버린 여인이 그녀였다. 1934년에 태어나 1965년에 죽기까지 그녀는 법학, 독문학, 연극, 불문학, 수필, 번역 등을 편력했다. 마치《생의 한가운데》의 여주인공 니나처럼 모든 문제를 생 그 자체에다 밀착시켜 환희와 고뇌에 도취하는 것이 그녀의 생활 방식이었다.
번역이 아닌 그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번역작품의 진한 포도주 같은 문체에 취한 술꾼(독자) 이 양조장의 창고나 부엌을 넘겨다보는 것처럼 흥미있고 약간의 탐정적인 요소까지 겸한 스릴을 느끼게 한다. 그렇건만 정작 그녀가 남긴 수필들을 다 읽고나면 독자들은 무언가 자꾸 허전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바로 이 허전함 때문에 그녀의 글은 젊은 세대에게 아필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녀의 수필은 아래와 같은 다섯가지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첫째 가장 빈번히 나오는 이야기요, 그녀 자신의 영혼의 고향이기도 한 유럽적인 것(특히 뮌헨)에 대한 광적(狂的) 인 애착과 향수를 들 수 있다. 《다시 나의 전설 슈바빙》을 비롯하여 《알프스 산정의 차집》《엄지 손가락 여인》《집시처럼》 등이다. 유럽의 자연과 인간들을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수놓아 준 글들이다.
...신선한 바닷바람 같은 자유의 냄새로 사람을 매혹하고 마는 곳━학생시절을 슈바빙에서 보내고 일생 동안 그 추억을 잊지 못한 토마스 울프가 「뮌헨을 말하려거든 뮌헨은 독일의 하늘이다 라는 말을 빼놓지 말아라」라고 말한 것도 이런 뜻일 것이다.
「뮌헨의 몽마르뜨르」에서
그녀에게는 뮌헨을 비롯한 유럽의 선진국이 물질 문명 때문이 아니라 예술과 정신적인 독립성 때문에, 그리고 동경심과 이국적인 정취 때문에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였다. 가로등 하나 하나에서 부터 얀개, 더위, 거리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그 먼 이방지대를 시화(詩化) 시키고 미화해 주었다.
두번째 그녀의 수필이 지닌 특징은 자의식(自意識) 의 풍만으로 무슨 사건에 대해서나 결론을 쉽사리 끄집어내지 않고 그녀가 지닌 온갖 천재성을 다 동원해서 추리와 연역과 귀납적 사고를 되풀이 한다는 점이다.
세째로는 여성다움, 여성의 속성, 여성의 한계 등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저항하려는 깊은 내면의 의지가 엿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탈(脫) 아내, 탈모(脫母), 탈 여인 등으로 집약될 수 있는 이 몸부림은 요즘 흔히 말하고 있는 여권(女權) 신장이나 남녀평등, 여성 상위 운운하는 것과는 물론 차원이 다르다. 이렇게 현세적인 이유 때문에 여성의 숙명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선택된 천재」로서 많은 재능이 여성적 숙명으로 퇴화해 가는 것을 아까워 한 것이다. 그녀는 짧은 일생을 공식과 도식화된 삶, 인습적인 윤리와 미의식 등에 도전하여 외로이 싸우다 승부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여인이었다.
네째의 특생으로는 관념적인 사고의 흐름을 지적할 수 있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소재 삼아 글의 서두를 꺼내었다 할지라도 그녀는 곧 이를 서구적인 문학론이나 철인들의 경우를 예로 들어 추상적인고 관념적인 문제로 다루게 되어 버린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은 일반 독자들이 전연 예기치 못했던 그녀의 내실을 우리는 수필 속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다. 술과 사랑과 여행을 이야기해도 끝이 없으련만 그녀는 수필이라는 자기 고백을 통하여 상당량의 사생활을 공개해 주고 있다.
그것은 유학생활의 이면에서부터 남편과 딸에 대한 섬세한 관심과 하잘것 없는 자신의 소지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각도에서 자신을 노출시켜 주고 있다. 그녀의 글 전편에 흐르고 있는 이상과 같은 몇가지 특징을 요약하면 서구에의 향수(鄕愁)와 비범성(非凡性) 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1964년 여름. 만리포》《홀로 걸어온 길》외 몇편을 제외하고 나면 거의 모든 글이 서구의 자연과 경험을 쓴 글들이라는 점만 보아도 그녀가 서구적 향수에 얼마나 강한 집착심을 가졌던가를 알 수 있다. 더구나 만리포에서 까지도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면《폭풍의 언덕》을 연상하면서 히스크리프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고 할만큼 이국 정서에 도취해 있었다.
《홀로 걸어온 길》에서는 압록강에서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 글인데 역시 이국 정서를 느끽0ㅔ 해주고 있다. 그녀 자신이 말하기를 「내 속에는 집시의 피가 몇 방울 흐르는 것 같다」<먼곳에서의 그림움>고 한 것처럼 숙명적인 방랑혼이 그녀의 천재성을 자극했는지도 모르겠다. 비범성의 문제 역시 그녀의 영혼을 괴롭힌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선민(選民) 의식과 자신의 천재성을 항상 인식함녀서 산다는 것은 마치 법의(法衣) 를 입고 시장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고통을 수반하는 행위일 것이다. 더우기 개방사회가 미처 되지도 않았던 연대에 살았던 그녀인지라 자아의 욕망과 여성의 숙명이 빚어낸 갈등은 더 한층 치열했을 것이다.
그녀의 일기를 보면 영혼의 고뇌보다 평범한 모성애에 얼마나 많은 미련과 매력을 가졌던가를 일기는 보여준다. 비범 속의 평범이라고나 할 이런 부분은 따지고 보면 역시 그녀의 비범을 반증해 준 결과 밖에 안 된다. 왜냐하면 정말로 그녀가 평범한 여자로 살았다면 아예 일기에다 그런 사소한 문제를 크게 고민스럽게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젊은 세대의 우상
한때 전혜린은 젊은 세대의 우상이었다. 그녀는 자살이라는 마력과 요절이라는 숙명으로 더욱 젊은 세대들에게 절실성을 부여해 주었다. 시대적인 배경을 보면 그녀가 감수성이 민감할 때는 분명히 외래사조로 들뜬 때였다. 모든 문화의 가치 적도에는 서구의 눈금이 새겨져 있었고 한국적인 것, 향토색, 전통, 민족성은 공개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서구적 향수에 도취한 비범한 글을 썼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많은 재미 있는 그녀의 글들 중에서《남자》라는 곳에서 제시한 이상적인 남성상은 예리한 그녀의 투시안을 느끼게 해 준다. ①초속 ②재산 ③사회적 자유 ④광적인 로만티시즘이 한국 남성에게 많이 결여되어 있다고 한 그녀의 지적은 오늘까지도 남성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안전판이 되고 있다. 뛰어난 여류들, 특히 여류 예술인 중에는 속칭 「신들린」사람들이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이란 무당이나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녀들의 천재성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들린 사람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화가 천경자 여사가 그렇고 전혜린이 그렇다.
물론 둘은 서로 다른 문체와 예술관과 인생관. 생활관을 가지고 있으나 신이 들렸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혜린이 오늘까지 생존해 있었다면 어떻게 그녀의 미학관을 변모시켰을까 하는 점이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재능과 욕망을 유감없이 발휘한 후에 느끼는 허탈감으로 자살했고, 마야코프스키는 역사적으로 자신의 임무가 끝나자 자살했다. 예술인의 자살이란 대개 이와같은 두가지 유형이 있는데 전혜린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녀는 한 시대의 젊음을 환희와 고뇌로 아름답게 수놓다가 미완성품을 그대로 남겨둔 채 조용히 떠나버린 여행자라고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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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자살을 두고 설왕설래 여러말이 많으나 필자는 모두 허황한 이야기, 전혜린을 잘 모르는 이야기라고 본다. 경험은 해보는 사람이 가장 잘 알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자유를 열정적으로 그리면서 법학과 문학을 동시에 공부하는자만이 알 수있다
전혜린의 죽음은 무슨 장난스러운 사상의 편력이나 장난스러운 패미니즘적 자기잘남의 낭만이 아니다. 위 졸시에도 나타났듯이 나는 전혜린의 죽음이 글을 쓰다가 불행히도 조용히 가 버린 것이라고 본다. 더이상 방송의 장난스러운 왜곡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남녀불문하고 자존심이 있다면, 가치가 있다면, 불알이 달려 있다면................젊은 시인들이여.......
3. 주요 작품
- 「어떤 미소」(F. 사강) , 1956.
- 「한 소녀의 걸어간 길」(E. 시나벨) , 1958.
- 「압록강은 흐른다」(이미륵) , 1959.
- 「파비안」(E. 케스트너) , 1960.
- 「에밀리에」(H.게스턴) , 1963.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H.뵐) , 1964.
- 「태양병」(H. 노바크) 1965.
- 유작집「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66.
- 비장일기「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1968.
(출처 : '불꽃같은 삶, 전혜린의 일생과 작품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