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이나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감상할 때, 마치 9개의 교향곡을 하나의 테두리로 묶은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김문경은 브루크너와 말러의 차이점을 두고 "말러는 교향곡 1곡을 들어도 교향곡 9곡을 들은 느낌이라면, 브루크너는 교향곡 9곡을 들어도 교향곡 1곡을 들은 느낌입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일견 공감한다.
반대로 말러의 전 교향곡을 1곡으로 풀이할 수 있진 않을까 하는 물음을 떠올려 보게 되었다. 마이클 틸슨 토마스는 키핑 스코어에서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56마디 동안 진행되는 A 하모닉스로 막을 여는 교향곡 1번, 갑자기 몰아 붙이는 A플렛 단조의 코랄 총주에 이어 3도 간격으로 불협화음에 이어 트렘펫의 A음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A로 시작하여 A로 막을 내린다.
보다 폭을 넓혀 보자. 1번과 10번 사이에 낀 교향곡 6번을 통해 우리는 시작과 끝을 같게 한 말러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헤아려 볼 수 있을 것 같다.
6번은 말러가 처음으로 4악장 형식을 취한 첫 작품이다. 1번은 블루미네를 삭제하여 4악장이 되었고, 4번은 6개의 악장으로 착상된 작품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4악장 형식을 고수하려 했던 첫 작품이라는 점, 이전 5개의 교향곡을 이해한 사람만이 6번을 소화할 수 있다고 한 점, 이전 작품을 인용하지 않은 점이 6번만이 갖는 성격이다. 그리고 또 하나, A로 시작하여 A로 끝을 맺는다. 시작과 끝, 이질적인 대상이 나란히 연결되어 있다.
6번은 말러의 모든 작품을 잇는 연결고리이자 작은 축소판이 아닐까? 일견 생각없이 지은 듯한 인상을 풍기는 <말러화, 머리말>이란 제목은 이러한 맥락이 깔려 있다. ('말'러화, 머리'말, 시작과 끝을 같게)
56마디 동안 이어지는 A 하모닉스는 '긴 겨울잠에서 막 깨어나려는 자연'으로 묘사된다. 반면 아도르노는 '산업 혁명 이후 소란스러운 증기기관 소리'로 풀이하고 있다. 예술을 행하는 이와 풀이하는 이의 상반된 견해가 흥미롭기까지 하다.
처음 접했던 말러의 교향곡이 1번인 만큼, 이 A 하모닉스는 나에게 처음으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과연 저 부분은 무엇을 의미하고,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 그리고 이 질문에 답을 내릴 수 있는 키워드는 앞서 <말러화, 머리말>에서 언급한, 생산방식이 삶 그 자체를 결정한다(마르크스)는 문구로 해석이 가능하다.
우리가 무대에 올라 처음으로 접하는 소리는 바로 튜닝이다. 콘서트 마스터를 중심으로 A음이 지속된다. 소리를 점검한다는 의미와 함께 음악에 몰입해야 하는 시간이 도래했다는 것을 말없이 알려준다. 이윽고 지휘자가 등장하고 박수 갈채가 쏟아진다. 관중을 위한 무대에서 튜닝만큼은 지휘자 소견이 아니다.
나는 말러가 이 발상을 뒤집었다고 생각한다. 가령 존 케이지가 4분 33초에서 관중의 소리를 음악화 한 것처럼, 음악 이전의 행위인 튜닝을 음악으로 끌어들인 셈이다. 이로써 말러는 지휘자 밖에서 벌어지는 행위를 자신의 것으로 끌어 들였다. 물론 포디움 위에 선 이후 말러는 루비콘 강을 건너 되돌아 올 수 없게 되었다. 말러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포디움에 섰고, 또한 작품에 몰두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착상은 말러가 지휘자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보고 있다.
튜닝마저 자신의 음악으로 표현하려 했던 발상에서 말러의 지배욕을, 돌이킬 수 없는 불안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적날함을, 익숙한 튜닝을 낯선 표현으로 둔갑시킨 그의 기지를, 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자 발버둥 치는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단순하게 반복되는 작법 속에 말러를 이해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키워드가 숨어 있는 셈이다.
첫댓글 점점 연재가 기대되는 글입니다. 마지막 문장에 공감이 갑니다. 인제 본문만 남았는데 무슨 이야기가 전개될지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몇 가지 정해둔 게 있는데, 셜록 홈즈와 말러를 비교하는 걸 염두해두고 있고, 제 자전적인 스토리와 연계시켜서 쓰려고 계획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