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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운동의 구원, 성화, 그외에 대하여.. / 김규욱목사의 "기독교 윤리학"에서 발췌함
이 글은 자유게시판 10036번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의 문제점"과 관련하여 올림을 참고바랍니다.
읽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아래 글의 내용을 네가지 색으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 보라색은 저자가 보수신학(전통적 개혁신학)의 율법과, 성화와 관련해 문제점들을 비판한 글이고
- 빨강색은 저자가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 입장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 파랑색은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에서 본 김규욱목사의 견해에 대한 저의 지적입니다.
- 검은색은 일반적인 내용과 인용글로 보시면 됩니다.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 윤리학"
말씀운동 산하의 광야의 교회, 저자:김규욱목사, 출판사:진리의 말씀사, 2004년 8월1일 초판발행
저자소개: (책 내부표지에서 발췌)
저자는 1956년 대구에서 출생, 고등학교 시절 교회를 다녔으나 전혀 신앙에 눈을 뜨지 못했다.
경북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면서 대학시절 정신적 방황을 거친 후 졸업직전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을수록 성경의 진리에 대한 의문과 갈증이 심했고 도피처로 신학교를 생각하던 중
말씀운동을 접했다(1981)
서울대에서 교육학 석사를 마치고 총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M.div).
그 후 서울대에서 교육학박사학위를 받았다(2001)
또한 말씀운동 산하 교육기관인 로고스 성도대학과 로고스 신학원을 졸업했다.
뉴질랜드 바이블칼리지(BCNZ)에서 방문 학자로 1년반 동안 연구(2002~2003)
현재 18년동안 광야의 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으며 로고스성도대학장과 로고스신학원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http://www.logos.or.kr/theology_03.html)
성화와 관련부분
2.2.2 신학의 원칙 확립
(114p) ~~~ 4. 신학은 일반학문과 달리 이성적 분석 작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에 의한 일이다.
신학은 도대체 일반 세속학문과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특별한 위상을 지니고 있는가? 이는 신학의 정체성의 확립을 위하여 매우 중요하다.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에 의하면 신학은 도무지 타락한 인간의 이성적인 작업에 의한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신학은 오직 진리의 영(요14:17)으로 오신 성령 하나님의 깨닫게 하는 사역으로 말미암는 특수한 학문으로 봄을 주장한다. 오늘날 신학은 성령론의 혼란으로부터 말미암아 엄청난 혼돈을 빚고 있다. 오순절주의자 혹은 신비주의자는 성령을 성경과는 분리시키고 인간 체험의 신비적인 경험으로 간주함으로 올바른 성령론으로부터 빗나가고 말았다.
보수신학은 근본적으로 성령을 구속사적 틀 안에서 논의한다. 즉 인간의 구원을 위한 사역으로 간주함으로 성령 사역의 편협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예수님의 약속대로 오시는 주권자이시다. 성령은 스스로가 기록하게 한 성경의 진리를 성도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사역을 하신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성령의 사역이시다.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사역을 통해 교회를 세워 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신학적인 작업은 성령께서 오직 성경의 도구를 통해 중생한 이성을 주체로 삼아 이루어 가시는 사역이시다. 진정한 신학, 즉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인간적인 작업이 결코 아니라 오직 진리의 영되시는 성령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으로 말미암는다.
3.1.2 기독교 윤리의 주관자
(176p) ~~~ 그렇다면 성령의 사역을 올바르게 설명할 수 있는 성경의 기본 틀은 과연 무엇인가?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언약과 성취의 골격이라고 본다. 성경은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주권적인 능력으로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되어 있다. 이 틀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오심도, 그리고 목하 논의 중에 있는 성령의 오심과 성도생활의 문제도 하나님 중심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에 의하면 성령의 오심은 인간 구원의 적용이라는 지엽적인 목적이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오순절 성령의 오심은 근본적으로 구약의 언약과 예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기약된 날짜에 오신다(행1장). 그 언약의 성취를 통해서 하나님이 여호와이시며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는 것이 근본 목적이다. 놀랍게도 오늘날 성령론에 이런 언약과 성취의 성경적인 틀에 대한 논의가 부재하다. 성경의 기본 구조가 언약과 성취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의 선포라는 것이라면, 마땅히 성령의 오심도 이런 기본적인 틀에 의하여 설명이 되어야 하나님 중심의 설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에 의하면 성령 하나님이 오순절에 오시는 근본 목적은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 여호와를 계시하는 것이다. 그런 근본 목적 하에 종속된 부차적인 목적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으로써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진리의 책인 성경을 기록하게 하고 그것을 통해 성도가 진리를 깨달아 가도록 인도한다. 그런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사역을 통하여 구원의 확증과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으로서의 교회를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장엄한 영광이 드러난다. 정리하자면 성령은 인간의 구원을 적용하는 것이 근본이 아니라, 언약대로 오셔서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하심으로 성도로 하여금 구원 얻은 백성임을 깨닫게 하시고, 더 나아가 교회로 세워가도록 하시는 사역을 이루어 가심으로 하나님이 여호와이시고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확증하는 데 그 근본적인 목적이 있다.
이런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에 의한 성령론에 의하면 성도의 생활은 전적으로 언약대로 오신 성령의 사역에 지배된다. 타락된 옛사람은 스스로 결코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영이신 성령을 보내셔서 지체인 성도 안에 거룩한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사역을 통해 새사람으로 변화되게 하신다. 즉 거룩한 생활은 전적으로 거룩한 영이신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말미암는다. 성경은 그것을 ‘성령의 열매(갈5:22)라고 명백하게 말한다. 이를 분명히 깨달을 때 성도는 거룩한 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되고 감사가 넘치게 된다. 이런 성령론의 정립에 의해서라야 성도생활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은구원의 적용을 위하여 성령이 사역하신다는 인간 본위적인 주장을 비판하고 약속대로 오신 성령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성도의 삶을 거룩하게 주관하신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정리할 때,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에서 단순 명료하게 정리하는 명제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행위를 하게 하신다”라는 하나님의 주권중심적인 기독교 윤리학이 성립되는 것이다.
3.3.1 기독교 윤리의 과정
(208p) ~~~ 기독교 윤리학이란 성도의 삶 전반에 대한 신학적 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성도의 삶의 총체적인 과정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보수신학이든 자유주의신학이든 막론하고 현존의 기독교 윤리학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거의 부재하거나, 설령 간혹 있다고 하더라도 성경의 논리에 근거한 체계적인 접근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전통적 조직신학의 접근 방법이 가지고 있는 평면적이고 형식 논리적인 진술 때문이다. 보수신학의 구원론 혹은 기독교 윤리학에 나타나는 소명, 칭의, 성화, 견인, 영화 등의 개념들은 그 자체로는 중요한 신학적인 개념들이지만 신앙적 삶의 구체적이고 과정적인 맥락과 특징 그리고 전모를 설명하는 데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그런 개념들은 성도의 삶의 과정을 담아내기에는 너무도 빈곤하며 그것들에 의해서 규정되는 신앙인의 삶은 죄악된 현실에서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구체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개념들의 조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기독교 윤리의 논의는 성경 자체의 살아있는 진리의 흐름과 맥락을 끊어버리게 됨으로써 성도의 삶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생동감 있는 섭리 과정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 보수신학의 구원론을 지나치게 폄하하고 있습니다. 강단에서의 설교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경신학은 하나님을 증거하되 언약과 성취라는 역사적인 과정을 계시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신앙인의 삶의 과정적인 면모를 구체적이고도 실감나게 드러내 준다. 성경신학적인 접근 방식에 의하면 신앙인의 성숙은 단면적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계기를 두고 접근하고 있으며 따라서 매우 구조적이고 단계적인 과정으로 그려지고 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 삶은 애굽을 거쳐 광야생활, 그리고 가나안 점령, 그 후 사사시대를 거쳐 왕정시대, 바벨론 포로와 회복이라는 계기들을 거치면서 하나님을 더욱 절실하게 발견하고 깨달아 가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신약에서는 교회의 기초, 설립, 양육, 무장, 투쟁, 승리라는 성숙의 과정을 가지고 묘사한다. 이 점은 제4장 '기독교 윤리의 성경신학적 논리'를 검토하는 자리에서 본격적으로 취급하기로 하겠다. 우선 여기서는 성도생활의 과정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에 실패하고 있는 현존 기독교 윤리의 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성경신학적인 논의의 우월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현존 기독교 윤리학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성도의 삶의 과정 전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을 총체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결과주의적 혹은 단순 행위차원의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를 믿고 구원 얻은 백성이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한 삶인가에 대한 결과주의적인 논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 논의의 틀에 의하면 비유컨데 한 그루의 살아있는 나무를 구성하고 있는 뿌리와 줄기, 그리고 가지와 열매 가운데서 주로 가지에 매달리는 열매에 주된 관심을 지니고 있다. 문자 그대로 지엽 말단적인 논의를 하고 있다. 그리하여 실제적으로 열매를 가능하게 하는 뿌리의 중요성과 그 열매를 맺히게 되는 과정에 해당하는 줄기에 대한 논의가 탈락되는 피상적이고 당위론적인 논의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더 나아가서 뿌리가 튼튼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토양과 그것을 키우는 농부에 대한 안목은 더더욱 없다. 밑거름이 잘 되어 있는 토양과 튼튼한 뿌리 그리고 견실한 줄기의 성장이 없이 어떻게 가지에서 탐스런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그러나 현존의 기독교 윤리는 이 점에 대한 충분하고 정당한 논의를 하고 있지 못하다. 이 때문에 열매를 강조하긴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열매는 맺히지 않는다. 이른바 성령의 열매를 언급하며 생활에서 그것이 있기를 강조하지만 실상 그 열매가 맺히기까지의 과정적인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이 부재한 것이다.
(215p) ~~~이런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성숙한 삶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약 성숙한 삶이 궁극적인 목적이요 가치라면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성도를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계신다. 아니 근본적으로 성도를 지금도 유혹하고 도전해오는 어두움의 세력을 일거에 없애버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에 대한 정확한 성경적 해명이 분명하게 밝혀질 때 우리는 비로서 기독교 윤리, 즉 성도생활의 전 과정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를 온당하게 밝혀낼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바로 신앙생활의 최종적인 열매로서 나오는 성숙한 삶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이 이 죄악 많은 세상 가운데 성도를 두신 이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발견케 하려는 것이다. 은혜를 진정 은혜로 절실하게 깨닫기 위해서는 탕자처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만신창이의 삶을 살아가는 것도 필요하다. 더 정확한 표현을 쓰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섭리하신 것이다.
-- 죄악많은 가운데 성도를 두신 이유가 하나님 은혜의 영광을 발견케 하려고 그랬나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성도를 죄가운데 두셨다는 의도로 보이는데, 하나님이 영광을 그렇게 원하셨을까요?
1. 칭의의 복음에 나타난 기독교 윤리(로마서)
(320~321p) ~~~성도의 생활을 논의하는 가운데 "성령이 도우시지만 그러나 인간도 노력해야 한다"든지 "그것이 인간의 의무이다"라는 주장은 로마서 전체에 관통하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지혜의 섭리와 절대주권적인 능력을 간과한 오류이다.
결국 성도의 생활을 통해서도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 드러나는 것이다. 성도는 자신의 생활에서 과거와는 다른 신령하고 아름다운 삶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도우심을 발견하게 되고 그 아름다운 삶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된다.
-- 아름다운 삶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아름다운 삶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다'로도 해석되어질 수 있는데,,
제 5장 성경신학적 기독교 윤리학의 독자성과 우월성
(355~398p)
5.1 성경신학적 기독교 윤리학의 독자성
5.1.1 성경의 고유한 논리적 틀의 사용
5.1.2 모든 삶에 대한 하나님 주권적 섭리의 논리
5.1.3 기독교 윤리학의 근거로 영원성을 도입
5.2 성경신학적 기독교 윤리학의 우월성
5.2.1 논리적 우월성
5.2.2 목적상의 우월성
5.2.3 실제적 우월성
5.2.1 논리적 우월성
(380~382p) ~~~성경신학적 기독교윤리학은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발견되는 성도생활의 국면들을 취급하고, 그 생활을 인도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영광을 발견하는 것을 목적 삼는다. 따라서 여기에는 성도생활의 방법론적 제시나 상황적인 처방이 주제로 떠오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게 하시는 일이며 무엇이 결과적으로 이루어지더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갈 뿐 아니라 그 향방도 근원적으로 말해서 인간들의 선택권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특정의 상황에서 어떤 쪽으로 선택하느냐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주권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현상적인 인간의 선택 뒤에 이미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이 있는 것이다.
-- 말씀운동은 예정론을 숙명론과 같이 극단적으로 믿고 있으며, 또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주권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줄친 부분과 같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자기 논리의 모순에 빠져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현존 기독교 윤리학은 철두철미 인본주의적인 철학의 영향에 의해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을 핵심 논의에서 제거시키고 인간의 선택권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기독교 윤리학의 대부분의 내용이 그러한 특정 상황 속에서의 방법론적인 선택의 문제를 중시하며 구성된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절대적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만홀히 여기는 처사이다. 특정의 상황에서 어느 쪽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작정대로 된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면 평안함 가운데 선택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이 어리석은 가운데 두시면 욕망으로 선택하게 된다. 어느 쪽이든 간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대로 이루어져 가며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
-- 먼저 올린 김승일목사의 창세기 강론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였드시 흥해도 하나님 뜻, 망해도 하나님 뜻, 그야말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논리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대로 이루어져 가며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잘못해 놓은 것도 "하나님의 섭리이다" 라고 합리화 하면서 회개조차도 않는 결과도 다분히 나올 수 있고 현실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신도들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우려의 설교도 가끔 합니다.
이런 관점을 취하는 성경신학적 기독교 윤리학은 온갖 상충되는 상황적인 처방과 행위 방법론으로 가득찬 파편화된 현존 기독교 윤리학의 난맥상을 벗어난다. 오직 성경의 구조적인 논리인 언약과 성취에 의해 그 논리의 맥을 잡는다. 이는 참으로 중요하다. 현존의 기독교 윤리학의 지도를 받는 오늘날 성도들은 온갖 상충된 행위의 처방과 방법론의 미로를 헤매이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현존 기독교 윤리학은 오히려 모든 성도의 생활 가운데서 찬연하게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영광을 보는 눈을 가리우고 있다. 요컨데 성경신학적 기독교 윤리학은 파편화된 전통적인 논리를 극복하고 성경의 구조적 논리를 따름으로써 생활 가운데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맑은 눈을 허락하였다. 이 점에서 성경신학은 현존의 기독교 윤리학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우월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허울좋은 말로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5.2.2 목적상의 우월성
384~385p ~~~현존의 기독교 윤리학에 의하면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구원을 해 주셨고 그 구원을 적용하려고 성령을 보내주셨으므로 이제는 너희가 노력해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예수를 통한 구원과 성령의 오심이 성도의 거룩한 생활을 위한 수단이 된다. 이는 철저한 주객 전도이다. 이 논법에 의하면 하나님이 예수와 성령을 보내시는 사역이 인간의 구원과 더 나아가서 인간의 거룩한 생활을 위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그릇된 논법인가! 성경신학적 기독교 윤리학은 이런 주객이 전도된 현존 기독교 윤리학의 논법을 전면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성경신학적 기독교 윤리학에 의하면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시는 궁극목적은 인간의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심도 인간의 구원을 적용하시려는 것이 근본 목적이 아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한 성취를 통한 하나님 영광의 선포에 있다. 그런 궁극목적의 성취가운데 성령은 성도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여 거룩한 생활을 하게 하신다. 따라서 성도가 거룩한 생활을 하면 할수록 성령 하나님이 행하시는 사역의 영광이 더욱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면이 있다. 성도가 거룩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옛 구습을 따라 죄악된 생활을 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것은 상투적인 용법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인가? 참으로 그러한가?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성경적인 신관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며 현존 기독교 윤리학이 쉽게 빠져 들어가는 오류이다. 성경신학적인 기독교 윤리학에 의하면 모든 성도의 생활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광이 드러난다고 본다. 성도가 죄악된 생활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대로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성도를 어둠의 권세에 맡겨 놓으시는 주권적인 영광이 드러난다. 사단 권세는 과정적으로 성도를 괴롭히며 죄악된 삶으로 이끌어 가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더욱 나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모든 만사와 만물을 주관하시는 일원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이다.
-- 하나님의 주권을 이런데 남용하니 읽기조차 거북합니다. 성도가 거룩하여가는데 하나님과 사단과의 합작품 ?
성도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하나님은 사단이 하는 일을 간과하시거나 사단을 수단으로 활용하시는 경우는 있어도,
사단의 권세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더욱 나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식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정말 재고해봐야 할 문제점입니다. 사단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끊어 놓으려고 호시탐탐하는데.. 위 주장을 들어보면 우리는 구태여 말씀으로 전신갑주를 입을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위와같이 전도할 때, 특히 불신자에게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면 바로 하나님을 욕할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의 위상도 실추되는 것을 불보듯 뻔하지요. 이러한 것을 떠나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훼손시키는 언사는 있어서도 안됩니다.
5.2.3 실제적 우월성(388~398p)
397p ~~~성경신학적 기독교 윤리학은 현존의 기독교 윤리학과는 달리 성도의 생활의 근거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도입하였다. 이는 기존 기독교 윤리학이 드러내지 못한 독자적인 논리일 뿐아니라 이는 실제적인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언제나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그 해결의 실마리는 언제나 영원의 차원에서 확보한다. 앞에서 인용한 말씀대로 바울은 현재 받는 고난은 영원한 중한 삶에 비하면 잠시 잠깐이요 경한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영원을 바라보게 하는 진리야말로 현실의 어려운 삶을 이겨나가는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된다.
이 점에서 영원에 근본적인 토대를 두고 있는 성경신학적 기독교 윤리학이야말로 오늘의 삶에 작용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보게 함으로써 실제적인 삶을 힘 있게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양식이 된다. 이를 통해 성경신학적 기독교 윤리학은 이론적으로 일관성을 가지는 진리성을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이론이 실제 삶에 생명력을 공급함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인 차원에서도 진리성을 입증한다. 이른바 이론과 실제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신학적 윤리학이 지니고 있는 실제적인 우월성이다.
-- 현존의 기독교 윤리학에서 작정을 예기하지 않는가요? 이는 기존 기독교 윤리학이 드러내지 못한 독자적인 논리이라는데 말씀운동이 얼마나 독특한 작정론을 믿고 있길래,,, 말씀운동은 위의 줄친 말대로 이론적으로 일관성을 가지는 진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운동의 말씀을 들음으로 삶에 생명력을 공급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제 삼자가 직접 확인해봐야 하겠지요. 이에 대해서 확인자료를 다음 글에 올리겠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록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 윤리(421~473p)
V. 기독교 윤리에서의 구체적인 모습
2. 거룩한 생활의 구체적인 과정(454~456p)
첫째 단계가 "생각의 변화"이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에서 생활의 문제를 교훈하면서 먼저 1~4절에서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또한 로마서 12장2절에도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권면한다. 인간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에 관심하느냐에 따라 그것의 반복 과정이 반드시 의지결단과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무엇에 대한 생각과 관심은 그것에 가치를 느꼈을 것이다. 성경은 땅에 것에 궁극적인 가치를 두지 않는다.
~~~둘째는 "죄된 생활 속에서의 연단"이다. 성도는 원리적으로 완전히 죄에서 해방되었으나 실제로 아직도 옛사람의 소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셋째는 "말씀을 통한 승리생활"이다. 성도는 죄된 세상에서 죄된 몸을 가지고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죄의 권세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오로지 성령의 검 즉 말씀의 힘을 통해서만 승리생활이 가능함을 알게 된다. 진리의 말씀을 들음으로 성령의 소욕 즉 하나님 영광 중심으로 살고 싶은 생각이 반복되고 그 생각의 반복은 구체적으로 의지결단을 가능하게 한다. 그 의지결단이 성도로 하여금 구습을 버리게 하고 거룩한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 위에 줄친 부분들은 '인간에게 의지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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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관련부분
- 삼대언약 -
위의 글들에서 보셨드시 말씀운동에서는 개혁신학의 구속사관을 폄하하면서 자신들의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언약사상은 칼빈에 의해서도 이미 알려진 이론입니다.
하지만 말씀운동에서 말하는 언약은 다음과 같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28절)를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어진 삼대언약이며 이 삼대언약은 하나님의 복을 의미하며 이 복은 인간이 수행하고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김규욱목사 저서: "기독교윤리학" 122p~123p, 신학의 혁명159p)
2. 언약 중심의 논리에서
언약을 중심으로 구성된 구약의 내용은 첫 아담과 세우신 언약을 축으로 하여 논리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전개되고 있다. 그 내용은 섭리와 찬양 그리고 예언을 통한 언약으로 정리되어 있다. 창세기 1장28절에서 아담에게 세 가지의 복을 주신다 이복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담에게 세우신 언약이다.(김승일목사의 저서 "성경해석 기초" 87p)
위의 본문에서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의 '~~하라' 라는 명령문은 '~하게 하다'라는 사동표현으로서 '~으로 하여금 ~하게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하여금 생육번성하게 하시며, 땅을 정복하게 하시며, 다스리게 하신다는 명령문이다.(김승일목사 "성경해석 기초" 37p)
-- 위의 두 목사가 한 목소리로 이야기 한 것처럼 삼대언약이라고 하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많은 약속중 하나인데 유독 이 약속에 집착하며 이것을 언약성취의 구조적 큰 틀로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 전체를 오해하게 되고 곡해하게 됩니다. 이 구절이 과거 화란권에서 문화명령으로 이해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약속의 성격을 가진 위임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 성경해석의 문제점 -
“로마서 12장 이후에 나타나는 문법적 차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성경은 인간의 문법을 사용하시되 근본적으로 신학적 차원의 책이다. 바울이 성도의 생활을 권면하는 명령형의 문법은 인간행위의 자율적인 주체를 강조하는 도덕적 권면이 아니다. 그것은 언약대로 오신 성령이 수행하는 신학적 차원으로 승화시켜 해석 되어야 한다.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명령형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신다고 하는 일방적이고 주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성도의 생활을 논의하는 가운데 “성령이 도우시지만 그러나 인간도 노력해야 한다”든지 “그것이 인간의 의무이다”라는 주장은 로마서 전체에 관통하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지혜의 섭리와 절대주권적인 능력을 간과한 오류이다."(기독교윤리학 320p)
2. 성경계시의 언어분석에서
구약의 주어는 '하나님', 신약의 주어는'예수'이다. 그리고 사역동사는 '~하게 하신다' 이다. 라고 주장
직설법: 행1장8절의 '~되리라' -> '~이 되게 한다' 로 해석(의지미래완료로)
명령법: 창1장28절의 '번성하라, 다스리라' 등 -> ‘~하게 하다’로 해석(사역동사로)
창12장2절의 '~될지라' -> '~주리라, ~주시겠다'로 해석(미래완료시제로)
가정법: 신15:5절에 '만일~이면' -> ‘~이므로’, ‘~때문에’, ‘비록~일지라도’ 라고 해석(조건문이 아닌 일반문으로)
접속사: 신5:15절에 '그리하면' -> ‘~하기 위하여‘, ‘~할 목적으로‘ 로 해석(조건문 형식이나 다른 의미로)
(김승일목사의 저서 "성경해석의 기초" 26~48p에서 발췌) 위 논리는 박용기목사로부터 처음 나온 논리입니다.
강남노회 목사들의 설교나 자료들을 보면 위에 처럼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을 일률적으로 해석합니다만 이것은 극단적인
예정론을 믿으며, 하나님의 주권성을 강조하고,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는 논리의 뿌리에서 기인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 사도행전1장8절에 '되리라 -> ~이 되게 한다' 같은 경우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있지만 인간의 의지를 배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작용이 포함되어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인간의 의지적 작용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강조될 경우 하나님의 주권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을 기계나 로봇으로 전락하게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 창1:28절, 창12:2절에 '번성하라, 다스리라' -> ‘~하게 하다’, ~될지라' -> '~주리라, ~주시겠다' 등 성경에 나오는 명령형을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권적 역사로만 해석하는 것도 지나치게 극단적인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셔 놓고 인간의 의지적 작용을 배제한 채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으로 이루신다면, 명령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그냥 혼자 다하시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참된 인격적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우리가 그 명령에 순종할 때까지 기다리시며, 성령님을 통해서 설득하시면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 말씀운동의 신관 -
"성경적 기독교" (기독교란 무엇인가?) 저자: 박용기목사 출판사: 진리의 말씀사 발행: 1991년8월 초판, 1998년10월 재판
목차: 1. 서론 2. 기독교 성경관 3. 기독교 신관 4. 기독교 인생관 5. 기독교 역사관 6. 기독교 세계관
3. 기독교 신관 1) 하나님의 속성(1.전능성, 2.성실성, 3.주권성, 4.영원성, 5.자비성)
2) 하나님의 사역(1.하나님은 모두를 작정하셨다. 2.하나님은 인간을 예정하셨다.
3.하나님은 작정을 이루신다 4. 하나님은 예정을 이루신다.)
결국 신.구약성경은 하나님 스스로를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로 계시하신 내용을 성령 감동으로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구약은 하나님께서 스스로가 여호와이심을 증거하시고, 신약은 예수께서 스스로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다시한번 총정리한다면 하나님께서 여호와이신 증거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라는 결론이다.(기독교 성경관의 결론부분 66p)
-- 위의 책이 유일하게 '기독교 신관'(69~94p)을 다루는데 여기에 삼위일체에 관한 내용의 언급이 없습니다.
말씀운동에 출간된 책들에도, 설교를 통해서도 삼위일체의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구약의 주어는 '하나님', 신약의 주어는'예수'이다. 그리고 사역동사는 '~하게 하신다' 이다.
이렇듯 말씀운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시대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양태론이 아닌지요..
구약- 하나님, 신약- 예수 그리스도(성자님), 현재- 성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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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운동에선 박용기목사가 제창한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이라는 검증이 안된 논리들을 신도들에게 가르치는데 전심이고,
그에 반해 보수신학(개혁신학)에서 범용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중요 교리들은 비판만 하면서 거의 가르치고 있지 않는 실정입니다.
말씀운동 목회자들의 강론이나 저서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드시 말씀운동은 극단적인 예정론과 하나님의 주권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율법은 예수님이 다 완성하셨기에 신도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며 하나님의 은혜쪽만 강조하는 무율법주의에 있고,
구원론 없는 언약성취의 논리와,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말씀들은 사역동사, 의지미래완료, 조건문이 아닌 일반문으로
해석하여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이 하게 하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여러 가지 총체적인 문제로 말씀의 본질을 벗어나게 하여 신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에 복종하고 순종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게 하는 우를 범하고 있고, 그에 파급되는 문제점은 신도들의 간증이나 질문을 통해 하나하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그들에게 신앙을 체크할 시금석이나 도전적인 것들이 없다보니 신도들은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을 듣고난
후부터 '마음이 편안하다', '이제 죽어도 원이없다'고 하는 것이 교회에 등록한 지 얼마 안되는 신도들의 중론입니다.
저도 한 때는 마음이 편하다고 했었지요.
그들은 말씀운동 밖의 기독교 서적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물론 기독교 TV에 나오는 목사들의 설교는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이 원인은 말씀운동의 독특성과(어디서 듣도 보지도 못했던 말씀이기에) 목사들에게 가르침을 그렇게 받았기 때문입니다.
신도들은 기독교서적이나 다른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 보게하면 '시시하다, 싱겁다' 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 이런 말씀 어디서 들어' 라고들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신도들은 자기들이 대단히 깊은
성경지식을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우월감을 가지고 자족하고 있습니다.
말씀운동 단체에서 나오면 신앙적으로 크게 잘못되는 줄로 알고들 있습니다.
말씀운동은 생명력 없는 지나친 지식주의에 빠져있고, 성령의 인격적 변화 역사를 거의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씀운동 밖에서는 속속들이 잘 모르는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 여러가지 문제가 많습니다. 정말 경계해야 할 논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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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 그리고 자유의지 문제에서 편협한 사고, 또는 일방적인 사고로 일관하는 군요.. 하나님이 우리보다 크시기에, 우리가 마땅히 알지 못하는 부분들을 논리로 추측해 어거지로 맞추다보면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이런 현상이야말로, 그들이 말하는, <인간의 주체적인 사고방식>때문에 기인하는 문제들이죠. 즉, 그들이 누구보다도 더 인간중심의 시각을 잣대로 하나님을 판단/평가 하는 것입니다. 모순적이죠? ㅎㅎㅎ) 문제가 없지는 않은데 미묘한 표현들로 줄타기를 하고 있으니.. 느티님의 답답한 심정과 고생하심이 느껴집니다..
느티님의 글을 읽고 이런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한국교계에 계시구나하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솔직히 저의 세계관 (성경관 인생관 가치관) 과 일치하는 내용이 많히 있습니다 (느티님이 올린 글의 한도내에서). 그런데 '언약성취' 라는 그 출발점 (언약의 핵심) 을 창세기 1장 28절로 잡은 것에는 저는 동의치는 않습니다. 저는 창 3장 15절의 말씀이 하나님 언약의 그 근본이라고 보거든요. 아무튼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예, 떨림님 말씀 이해합니다. 저 역시도, 이 분들 글중에서 보이는 주장들 가운데, 제 믿음과 동일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다만, 그 결론적인 부분(예정론, 인간의 목적=하나님께 영광 등)에 도달하는 논리의 전개과정에서의 편협한 시각(자유의지 완전히 없음, 죄를 작위적으로 만드신 하나님)과, 또는 바른 논리의 기본(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등)을 사용하여 도달하는 비약된 결론 (예수님 유죄설 등) 들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지요.. 인간의 이성을 무시하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힘껏 인간의 이성을 사용하는 등의 모순을 수없이 거듭하는 방식들이, 이분들의 <운동>의 기본적인 오류를 드러내 준다고 봅니다..
사실, 이단들의 설파내용 중에도, 옳은 것이 많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옳은데, 모아놓으면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거지요.. 혹은, 세부내용은 기막히게 사이비성인데, 결론은 그럴 듯하던가요.. 우리가 마땅히 모를 수 밖에 없는 부분은 그냥 몰라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전부 알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보다 크거나, 적어도 동일한 크기여야 하는데요 (작은 원, 큰 원.. 부분집합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벧후3:16 의 성경을 억지로 푸는 일은, 이렇게 <꿰어 맞추기>를 계속 하는 일입니다.. 말씀운동하시는 분들이 아직 그렇게까지 가신 것 같지는 않으니, 지금이라도 방향을 잘 잡으시면 좋겠습니다..
지니님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좋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원을 그리자' 라고 하셨지요? 예. 우리는 원을 그려야 합니다. 그런데 저의 '원' 은 작은원 큰원이 아니라 딱 한나의 원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성경입니다 (ㅋ 또 저의 이 말에 뭐라하실분들이 많으시라 봅니다) 작은원 큰원을 그리다보면 그보다 더 큰원을 그리는 것이 우리인간의 심뽀입니다. 아무튼 그 '원' 안에서는 우리는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 봅니다. 그러나 이 원안에서 그 테두리에 근접하면 경고음을 울려야 하는 것이고 그 테두리를 벗어나면 "아니다!' 라고 과감히 말하여야 한다 봅니다.
그런데 느티님이 올려주신 글로만을 보아 그 '말씀운동' 이라는 곳에서 그 '원' 을 벗어난 곳은 아직은(아직은) 딱히 없다고 봅니다. 물론 그 예수님이 죄가 있다 없다 라는 부분도 그분들이 말하는 바의 진의를 좀더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 봅니다. 설마 그분들이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니라" 라는 그 성경본문을 읽어보지도 않고 이런 주장을 하시겠습니까?
ㅎㅎㅎㅎ 예, 여러 성경말씀으로 많은 분들이 말씀드렸어도, 이상한 논리(언약성취학적 신학??)를 통해 도달한 엉뚱한 결론(예수 유죄설)을 바꾸시지 못 하시더군요.. 떨림님 말씀이 옳습니다. 원 테두리에 너무 근접해가면 경고음 발사.. 원밖으로 뛰어나가면 종잡을 수 없으니, 놓아 드려야지요.. 빠이빠이~ 하면서요.. ^^ (제가 말씀드린 큰 원은 하나님, 작은 원은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시지만, 작은 원은 자신의 모든 이해의 한계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양식을 당연히 다 알 수 없다는 뜻이었어요.. ^^)
제가 찬바람님을 제명시킨 일을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이트가 그것을 만든신 분들의 취지에 어긋나면 제명되게 되어 있지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이곳에 느티님이 올린 그 '말씀운동' 이라는 곳에서 말하는 바가 결코 (제가 느티님이 올린 글을 읽은 바로는) 비성경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좋은 공부자료가 될 듯싶습니다. 하나하나 짚어가는 것도 좋을 듯 싶은데요?
예, 찬바람님 제명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잘 압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도 이해합니다. ^^
분별력이 있는 좋은 의견들입니다. 그런데~우리가 왜? 이런 저런 믿음에 대하여 분석하고 파악해야하는 지? 갑자기 쌩뚱맞은 생각이 문득 듭니다. ^^
그 어느 인간이 자신의 그 믿는바 대로 살지 않는 인간이 있겠습니까? 다 모두가 자신의 소신, 신념 그 믿는 바대로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각각의 결과는 다르다고 성경은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바로 자기 자신의 그 "믿음' 이라는 것부터 이것이 과연 그러한것인가? 에 대해 분별하여야 하는 것 아닐까요?
자기신앙에 대한 점검은 필요하겠지만~, 온갖 론들을 다 읽고 분별해야함에 대한 피곤함이라고 할까? 그렇습니다. 벗어나고 싶기도 합니다.^^
세상의 영은 성도를 가만놔두지 않는다 하십니다. 삼킬자를 찾는 우는 사자라 표현하지요? 네. 피곤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깨어있으라 하시는 것같습니다.
어이구~! 곤고한 인생이여!
좋은 지적과 좋은 의견들이십니다. 특히 지니님의 말씀이.. 제가 말씀운동 신학의 문제점들을 중점적으로 이야기 드렸지만 개혁신학에서 소홀히 하였던 부분을 일깨우는 배울 부분들도 물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접근방법이 너무 지식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속담도 생각케 하며, 제가 크게 우려하는 것은 그들의 신학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집착하면서 개혁신학의 주요 교리들에 소홀히? 관심이 없는 것이 큰 문제라고 봅니다. 말씀운동 신학이 아무리 논리적으로 훌륭해도 중요 교리를 빼놓는다면 앙꼬없는 찐빵인 셈이죠. 귀한 좋은 의견들 감사합니다.^^
마지막 글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것만 올리고 정리하겠습니다. 저도 글을 올리면서 미안한데, 다음엔 답답한 이야기 안하고 은혜가 되는 글을 가끔 올리겠습니다. 회원님들 모두 즐거운 주말과 은혜충만한 주일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말씀 운동이 중요한 교리를 빼놓았다고 주장하시는데. 느티님이 주장하시는 중요한 교리는 무엇인지 밝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처음부터 글들을 읽어 보셨을텐데요.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독해 능력이 부족해서 요약을 안해 주시면 이해를 잘 못합니다. 말씀운동이 어떤 교리를 부정하시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맨님, 무슨 독해능력까지 운운하시는지요. 교리를 제대로 안 가르친다는 이야기는 제 첫글에 한두줄 읽으시면 되는데..
그러니까, 보라색, 오랜지색의 글이 김규욱 목사님의 글이고 또한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의 말하는 바와 다르지 않은 것이죠? 찬바람님이 계실 때 그 쪽 글을 몇 번 접했었고 이 글도 보면서 느끼는 점은.. 기성교회들이 (선교단체들을 포함하여) 진정한 열매, 성화가 어디서로부터인가를 놓지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 그리고 열매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그 뿌리, 나무가 되는 주님에 촛점을 맞춰야 한다는데에 에 매우 동감합니다. 그런데 솔루션에 대해서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어째든 현재 많은 교회들이 성경을 치우쳐서 적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전환을 제시한다는 점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균형적인 시각이십니다.
광야에서님, 좋은 말씀입니다. 제가 말씀운동의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한 부분은 수용해야 겠지요.
물론 말씀드린 것처럼 문제의식은 주었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이 답이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또 많은 분들이 보시는 바와 같이 주님의 섭리를 확대/왜곡 적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잘 지적하신 것 같습니다. 죄, 악, 사단의 정의나 해석에서 보셨드시 말씀운동에선 지나친 확대해석과 무리한 해석들이 다반사입니다. 박용기목사는 "무엇인가?" 3권의 책자에서 30개의 기독교에서 중요한 용어들의 정의를 새롭게 쓰다시피 했습니다. 그들의 말씀운동 계간지를 보면 우리 선진들의(루터, 칼빈 등) 귀한 글들을 자신들의 잘못된 잣대로 비판한 글들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보는 시각, 성경을 보는 관점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옳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