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예수께서는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가 생물학적으로/육적으로 죽고 사는 일이 아니고
현재 살아있는 우리가 영적으로 죽고 사는 일을 뜻하고 있다.
영적으로 죽고 사는 문제이므로 우리가 말씀(영) 안에서 죽고자 하면
말씀(영) 안에서 살게 된다는 뜻이며
또한 말씀(영) 안에서 살고자 하면 말씀(영) 안에서 죽게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기존의 율법적 “구 말씀” 에서 죽게 되면
오늘의 신령한 “새 말씀” 에서 다시 살게 됨을 뜻하여
우리의 영적으로 죽고 사는 일을 말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전혀 받지 아니한
저 이방인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고 오로지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받은
하나님의 최초의 백성(처음 언약백성,기성교단)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기성교단에게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하신 것이다.
이는 초림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에서 죽게 되면
재림 예수님의 진리의 새 말씀에서 살게 되고(죽고자하면 살고),
초림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에서 계속 살고 있으면
재림예수님의 진리의 새말씀에서는 죽게 된다는 뜻이다(살고자하면 죽는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가?
그리고 이런 현상은 어디서 유래했는가?
즉 하나님은 왜 이 같은 역사를 행하시는가 이다.
다시 말해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왜 단 1회가 아니라 초림 예수님과
재림 예수님, 이렇게 2회에 걸쳐서 역사하실 수 밖에 없는가 이다.
초림 예수님은 말씀을 비유로만 주셔야 했다. 때문에 비유가 아니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고 했던 것이다. 비유이기 때문에
말씀을 받긴 받았어도 아무도 그 말씀의 뜻을 깨달은 자는 없었다.
말씀을 비유로 받아서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부정한 자이므로
계시록에서는 기성교단을 일컬어 “음녀” 라고 했던 것이며,
빛과 어둠이 섞인 혼잡한 자이므로 “큰 바벨론” 이라고 했던 것이며
아무도 그 내막을 종잡을 수 없이 가리워진 자이므로 “비밀” 이라고
했던 것이다(계17:1~).
한마디로 말해 음녀, 큰바벨론, 비밀 등은 이것과 저것이 섞여 뒤엉켜진
카오스(혼돈)를 말한다.
태초 이전의 하나님은 이 같은 카오스로 존재하시다가
태초인 창조 첫째날에 “빛이 있으라” 라고 일성을 발하셨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태초 이전에는 빛이 아닌 카오스 상태였기 때문에
창조세계를 열개된 태초에는 마침내 빛으로 급부상하시게 된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근본이시다.
근본이신 하나님이 카오스 이므로 우리에게도 그 근본된 카오스로
와주신 것이 초림 예수님이셨다. 즉 초림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비유로 주심으로 말미암아 단박에 우리로 하여금 음녀, 큰바벨로, 비밀 등으로
만들어버리신 것이다. 하나님이 근본이 그러하고 우리의 근본이 그러하기에
그것을 인지하도록 맨 처음엔 말씀을 비유로 주시게 된 것이다.
말씀을 비유로 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기성교단의 우리를 향하여 음녀, 큰 바벨론, 비밀 등으로
호칭한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렇게
의도적으로 만들어버리신 뜻을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
이제 하나님이 초림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비밀인 우리의 근본을 알게 하심을 인지했다면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근본된 토지로 다시 돌아가면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란 쉬지 말고 앞으로 계속 강행군을 해야 하는 것이지
과거의 무속신앙 애굽으로 돌아가면 안되는 것이다.
쉬지 말고 계속 강행군을 하면 마침내 진리의 새말씀을 가지고 오시는
재림예수님을 만나뵙게 된다는 논리이며 그 같은 흐름이 창조의 진행이다.
오늘날 비유문자가 해독된 진리의 새말씀만이 진정한 구원을
이루는 참 빛이기 때문이다.
초림 예수님의 말씀은 비유이기 때문에 빛과 어둠이 섞인 음녀(카오스)
상태이다. 음녀(처음 아내)에서 죽어야지 정결한 신부로서 다시 살 수 있다.
초림주의 비유(율법)에서 죽어야지 재림주의 신령한 새말씀(구원)으로
다시 살 수 있다.
큰바벨론(처음 예루살렘)에서 죽어야지 새 예루살렘에서 다시 살 수 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에서 죽어야지 새하늘과 새땅에서 다시 살 수 있다.
물 세례에서 죽어야지 성령세례로 다시 살 수 있다.
이와 같이 처음 것에서 한번 죽고 두 번째 것으로 다시 사는 것이
부활의 개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것이 곧 이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독들은 이 같은 처음의 자기 생명에서 죽기를 무척 두려워한다.
썩은 동아밧줄을 붙들고 그게 생명줄인 줄 알고 무식하게 오직
예수천당만 외치고 있다.
살아서 온갖 기복신앙으로 행복하고, 죽어서는 천당에 간단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천당에 가서 호의호식한다 한들 배부른
꽃돼지 밖에 안되는데 답답해서 어이 살 것인가?
그게 무서운 지옥일터임에도 아무 의문이 없는가 보다.
아니 성경말씀이 모두 비유인데 왜 의문이 없으랴.
의문이 없는게 아니라 산더미처럼 밀려오는 의문이 너무나 두려워서
귀를 막고 눈을 감고 가슴을 닫고 양심에 철빗장 걸어 잠그고
무뇌아, 무영혼으로 살기로 작정했는가 보다.
예수께서는 죽어야 산다고 했는데 기독인들은 승승장구 새파랗게
처음 것에서 배부른 돼지로 살고 있다.
첫댓글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다보면 상처를 받는 일도 많겠지만
그 선한 마음에 깃든 아름다운 영혼은 곧 치유되어 더 나은 삶으로 발전하므로
연정이 동정이 아닌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깊은 연민을 갖으시길 바랍니다.
선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행복하답니다.
늘 건강 하고 즐겁고 풍요하게 삶을 이어가시는 행복한 하루 되시길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