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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Royal Na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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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항복했을 때 홍콩의 곳곳에는 중국의 국기인 청천백일기가 휘날렸다. 전체 인구의 95% 이상이 중국인인 데다, 항일 투쟁을 거치며 여느 때보다도 민족주의 의식이 고취되었던 홍콩 주민들은 마땅히 중국으로 돌아가리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장제스 정권의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처칠의 고집과 강대국들 간의 복잡한 역학 구도 속에서 결국 중국의 품으로 반환되지 못한 채 영국의 식민 통치가 재개되었다.
하지만 홍콩을 되찾은 영국도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약 3년 반에 걸친 일본의 통치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는 데다,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해외 무역로가 차단되면서 홍콩 경제는 완전히 마비되었다. 연합군의 폭격으로 수만 채의 가옥이 파괴되고 난민들이 몰려들어 거리에는 20여만 명이 걸식을 하고 있었다. 또한 식량과 의약품 부족에 허덕이는 등 전란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직후의 홍콩. 게다가 국공 내전으로 많은 난민이 유입되면서 홍콩의 인구는 1949년에 200만 명을 돌파했고, 수만 명이 낙후되고 비위생적인 난민 캠프에서 살아야 했다. 게다가 식량과 의약품 부족, 기아에 폭동으로 한동안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다.)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 도시이자 금융 중심지는 상하이였다. 홍콩은 상하이에 비한다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작은 항구 도시였다. 그럼에도 영국이 어떻게든 쥐고 있으려고 했던 이유는 도시 자체의 가치보다 인도와 말레이, 미얀마 등 다른 식민지의 독립 운동에 기름을 붓는 일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태도는 다른 나라의 식민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가 조선의 즉각적인 독립을 요구하자 루즈벨트가 동의했음에도, 처칠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적당한 시기"로 바뀐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처칠이 아무리 노력해도 대영제국의 해체는 이미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1947년 2월 12일 미얀마가 독립을 선언했다. 영국 최대 식민지였던 인도 또한 8월 15일 델리의 총독 관저에서 유니언잭이 내려지고 인도 국기가 올라갔다. 중동에서도 요르단을 비롯하여 여러 국가들이 차례로 독립했다. 제국은 해체된 데다, 재정적으로 완전히 파산 상태였던 영국은 극심한 경제 불황까지 겹치면서 미국의 원조로 간신히 지탱했다.
이런 와중에 만약 장제스 정권이 전후 부흥에 주력하면서 미국과 손을 잡고 외교적으로 영국을 압박했다면 틀림없이 영국은 백기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제스는 그럴 경황이 없었다. 국공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1945년 10월 10일 이른바 쌍십협정의 체결에도 불구하고, 내전이 점점 격화되면서 결국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장제스 측이 압도적인 군사적 우세로 쉽게 승리할 것처럼 보였던 내전은 1947년이 되면서 교착 상태가 되었고 1948년 말 중국 북부에서 벌어진 세 차례의 전역에서 대참패를 당하면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1949년 4월 21일 마오쩌둥의 명령에 따라 약 30만 명의 공산군이 일제히 창장을 도하했다. 국민군의 방어선은 3일 만에 붕괴되었다. 공산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10월 14일에는 광저우를, 11월 30일에는 충칭을, 12월 3일에는 광시성의 성도인 난닝을 점령했다. 12월 10일, 장제스는 청두 비행장을 출발하여 대만으로 도망쳤다. 1950년 3월 27일 대륙에 남은 국민 정부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시창이 함락되었다.
영국은 급변하는 중국의 정치적 상황을 주시하면서 중립을 유지했다. 마오쩌둥은 영국에 대해 미국과 똑같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로서 온갖 비난과 매도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뒤로는 자유 무역항인 홍콩을 통해 각종 필요한 물자를 확보했다. 저우언라이는 공산당 간부들을 홍콩으로 몰래 파견하여 외국 국적의 선박을 빌린 후 공산당 통치 구역에서 생산된 돼지털, 콩, 모피 등을 판매하고 의약품과 기계류, 타이어 등을 구매했다. 국공 내전이 격화되고 중공의 영역이 확대될수록 중공과 홍콩의 무역 규모 또한 갈수록 커졌다. 또한 전쟁을 피해 중국 기업가들이 대거 홍콩으로 이주하고 전쟁 특수를 누리면서 중국 본토의 내전과 상관없이 홍콩은 단기간에 전란의 상처를 치유했고 경제는 급격하게 성장했다.
따라서 영국 외무부는 장제스 정권이 무너지더라도 중공이 영국을 적대하거나 홍콩을 무력으로 점령할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내전이 끝나고 중국이 안정을 되찾으면 홍콩은 대륙 무역의 거점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영국 어니스트 베빈(Ernest Bevin) 외무 장관은 1948년 12월 9일 중국 내전에 대한 보고서를 다음과 같이 내각에 제출했다.
"중공이 내전에서 승리한 뒤 무력이나 다른 방법으로 홍콩을 귀속시키려고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세계 최대의 경제적 잠재력을 가진 중국에 무역 근거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홍콩을 보유해야 하며 중공과의 무역이 가능한지를 조사해야 한다."
하지만 장제스의 패배가 초읽기가 되고 홍콩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준동하자 영국 내각도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공산군이 창장을 도하하는 도중에 거류민 철수를 위해 항해하던 영국 군함 애머시스트(Amethyst)를 공격하여 나포하는 사건이 빚어졌다. 영국은 공산군이 중립국 선박을 공격했다며 강력하게 비난했지만, 마오쩌둥은 장제스처럼 서방에 타협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전 총리이자 보수파의 거두인 처칠은 당장 항공모함을 파견해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애틀리는 거절하고 중국에 배치된 모든 군함과 병력, 자국 국민의 철수를 결정했다. 공산군에게 억류된 애미시스트 호와 승무원들은 3개월이 지난 7월 30일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슬루프 함 HMS Amethyst. 1,350톤급의 호위함으로 2차 대전 당시 독일 유보트의 공격으로부터 상선단을 호위하기 위해 대량 건조된 군함 중의 하나였다. "애머시스트 호 사건"으로 100일 가까이 억류당하다 7월 30일에 풀려나 홍콩으로 갔다.)
한편으로, 애틀리도 홍콩만큼은 내줄 생각이 없었다. 만약 홍콩에서 물러난다면 아직 영국령으로 남아 있는 말레이에도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었다. 그는 즉각 전차 부대와 포병을 포함한 4개 여단을 홍콩에 배치하여 수비를 강화했다. 또한 8월 29일에는 "홍콩의 미래에 대한 결정은 영국에 우호적이고 통일된 중국 정부와 할 것이며, 이러한 정부가 중국에 출현하기 전까지 영국 정부는 홍콩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공산군이 본격적으로 홍콩을 침공한다면 과연 막아 낼 수 있을 것인가? 영국 단독으로는 어떻게 해도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미국이 도와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국공 내전 중 장제스와 마오쩌둥에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트루먼 행정부는 장제스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로 결정했다. 또한 애치슨 국무 장관과 스튜어트 주중 대사는 중공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 하물며 영국의 식민지 정책을 시대착오적이라고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던 그들이 영국을 위해 개입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신중국, 즉 '중화 인민 공화국'의 건국이 선언되었다. 1950년 1월 5일 영국은 서방 국가로서는 첫 번째로 장제스 정권과의 관계를 끊고 신중국을 승인했다. 물론 이는 홍콩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정권을 잡은 마오쩌둥은 서방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전 세계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전파하는 데 앞장설 것을 선언했다. 1950년 2월 14일에는 모스크바에서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되어 공산주의 진영의 두 대국의 결속을 강화했다. 한때 중공을 '아시아의 티토'로 만들어 소련에 대한 대항마로 활용하리라 기대했던 미국과 영국으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중공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였다.
더욱이 소련의 베를린 봉쇄, 그리스 내전 등 미국과 소련의 이념 갈등은 점점 격화되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한국 전쟁의 발발이었다. 이로써 세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졌다. 한국 전쟁 동안 영국은 2개 여단(제27여단, 제29여단), 제41코만도 부대 등 연인원 약 56,000명이 참전했고 이들은 홍콩을 거쳐 한반도로 향했다.
(1950년 9월 영국군 병사들을 싣고 한반도로 출동 준비 중인 영국 경순양함 실론(HMS Ceylon))
국공 내전에서 마오쩌둥의 승리, 그리고 한국 전쟁의 발발과 중공군의 참전으로 영국은 상당히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영국은 홍콩의 안전 때문이라도 중국을 적대할 생각이 없었다. 중국의 태도 또한 애매모호했다. 통상 내전으로 정권이 교체되어도 이전의 정권이 외국과 체결한 모든 조약과 협정을 계승하는 것이 국제법의 관행이지만, 마오쩌둥은 그 관행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홍콩은 영국이 강압에 의해 점거한 불평등 조약이므로 마땅히 중국에게 반환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오쩌둥이 당장 행동으로 옮긴 것도 아니었다. 1949년 10월 17일 공산군이 홍콩 접경 지대까지 진출했지만 더 이상 전진하지 않은 채 멈추었다. 영국 항공기와 군함이 수시로 경계선을 침범했음에도, 묵인했고 불법 월경하여 체포된 홍콩 수비대원을 돌려보내기도 했다. 또한 홍콩 식민 당국이 공산주의자를 탄압하는 것에 대해서도 입을 다문 채 경제 봉쇄를 하거나 실질적인 무력 행사를 취하지 않았다. 영국 또한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중국에 수출이 금지된 전략 물자를 암암리에 수출하는 한편, 미국의 대중 봉쇄 정책을 비판하고 여기에 따르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중국에 대해서는 독자 노선을 취하겠다는 의미였다.
(한국 전쟁 중 홍콩 앞바다에 정박한 영국 해군 항공모함 유니콘(HMS Unicorn))
1952년 7월 25일, 마카오에서 포르투칼 초병들과 중국군 사이에 소규모 무력 충돌 사건이 벌어졌다. 중국군은 마카오를 봉쇄하는 한편, 포르투칼군을 격퇴했다. 하지만 그 여세를 몰아 그대로 마카오를 점령하지도, 사태를 더 이상 확대하지도 않은 채 이전 상태로 되돌렸을 뿐이었다. 적어도 당장은 홍콩과 마카오를 회복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였다.
중국은 대외적으로는 소련을 제외하고 서방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사실상 외부와 고립된 상태에다, 내부적으로는 오랜 전란과 기근, 정치적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마오쩌둥은 대륙 곳곳에 잔존하고 있는 장제스 군대의 잔당과 토비를 소탕하는 한편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정치 투쟁을 벌였다. 당장 홍콩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만약 홍콩을 봉쇄하거나 무력으로 점령했다면 서방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따라서 영국이 대중 우호 제스쳐를 먼저 취하는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홍콩을 영국령으로 인정하지도, 그렇다고 반환을 요구하지도 않은 채 적어도 잠시 동안은 내버려두면서 실리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으로서는 어차피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홍콩을 점령할 수 있는 데다, 서방과의 연락 창구이자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1957년 4월 저우언라이는 상하이 상공계와의 좌담에서 "홍콩은 영국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화가 불가능하고 또한 사회주의화되어서도 안된다. 홍콩에서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것은 중국에게도 유리하다"고 말했고 마오쩌둥 역시 홍콩은 서두를 필요가 없고 장기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도부 사이에서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이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를 용인하겠다는 뜻이므로 모순이라며 비판하는 목소리도 컸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적당한 시기가 되면 홍콩과 마카오를 평화적으로 반환받을 것이며 그동안 두 도시를 번영시키는 것이 중국의 장래에 기여할 것이라고 여겼다. 중국은 홍콩에 식량과 연료, 원자재를 국제 가격보다 20% 이상 값싸게 공급했고 홍콩은 완제품을 중국 내지로 판매했다. 또한 많은 화교들이 홍콩을 거쳐 중국을 오갔다. 마오쩌둥의 판단대로 홍콩은 중국과 서방의 교량이자 중계 무역의 거점이 되어 급속도로 발전했다.
(1960년대 홍콩 시가지의 모습. 상하이는 쇠락한 반면, 홍콩은 아시아에서 가장 풍요롭고 발달한 도시가 되었다. 한편으로, 홍콩 식민 정부는 중공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도록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노조 활동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언론을 통제했다.)
1971년 핑퐁 외교와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으로 미중 관계가 정상화되면서 영국 역시 1972년 3월 정식으로 국교를 체결했다. 하지만 홍콩 문제는 여전히 비켜 갈 수 없는 현안이었다. 영국으로서는 미적지근한 중국의 속셈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더욱이 1898년 주룽 신계조차조약에 따라 홍콩 식민지의 92%를 차지하는 신계는 1997년이면 조차 기한이 만료된다. 신계에는 홍콩 산업의 대부분과 농토, 카이탁 비행장(啓德飛行場)과 철도, 항만 인프라가 있었다. 홍콩 섬과 주룽반도 남단은 비록 영구 할양지이지만 겨우 8%에 불과하여 도저히 자립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신계의 반환 문제는 홍콩의 장래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1972년 10월 저우언라이는 런던 타임지의 편집인인 루이스 헤런(Louis Heren)과의 인터뷰에서 "홍콩은 조차 기간이 끝나면 협상을 통해 중국에 반환되어야 하며, 중국은 이 문제를 서두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당장은 놔두겠지만 언제까지고 영국이 홍콩을 쥐고 있도록 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전달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적당한 시기에 홍콩과 마카오 문제를 다룰 것"이라면서도 막상 그 "적당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1970년대 말 조차 만료 기간이 20년 앞으로 다가오자 영국도 애가 타기 시작했다. 1979년 3월 29일 베이징을 방문한 머레이 맥클리호스(Murray MacLehose) 홍콩 총독이 덩샤오핑을 만나 홍콩 반환 문제를 처음으로 언급하면서 조치 기간 연장을 요청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홍콩의 주권은 중국에 있다"면서도 "중국은 홍콩의 특수한 지위를 존중할 것이다. 1997년 이후의 홍콩에 대해 2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홍콩을 접수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현재와 같은 지위를 허용하는 것"이라며 모호한 대답으로 회피했다. 또한 "설령 중국에 귀속되더라도 중국 정부는 홍콩을 특별구로서 자본주의 방식으로 운영할 것이므로 각국 투자자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개혁 개방을 시작하고 있었던 중국으로서는 서방과의 관계 회복과 경제 협력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덜 중요한 홍콩 문제를 서두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다급한 쪽은 영국이었다. 영국에게 홍콩은 더 이상 일개 식민 도시가 아니었다. 홍콩이 보유한 예금은 9억 파운드로 전체 외환 보유액의 27%를 차지했고, 영국 파운드 신용의 절반은 홍콩이 뒷받침했다. 홍콩은 대만과 싱가포르, 대한민국과 함께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지역 중의 하나였으며, 1975년 기준으로 홍콩의 1인당 GDP는 2,308달러로 일본과 싱가포르 다음이었다.
(1970년대 주요국가들의 1인당 GDP 현황
※ 자료 출처: http://macroeconomics.kushnirs.org/index.php?indicator=gdp&lang=en)
홍콩이 금융과 제조업, 관광 산업의 중심지가 되면서 경제 불황을 겪고 있던 영국이 누리는 경제적인 이익도 매우 컸다. 또한 정치적, 군사적인 가치에서도 대단히 중요하여 아시아와 호주를 연결하는 연락망이기도 했다. 영국 입장에서 홍콩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하지만 홍콩의 반환이 가까워지자 외국인 투자자들이 홍콩에 대한 장기 투자를 꺼리게 되면서 번영을 누리던 홍콩 경제도 점차 침체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영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차 기간을 연장하여 홍콩을 21세기에도 쥐고 있을 생각이었다.
1980년 7월 영국은 신국적법을 발표했다. 이는 홍콩 주민들이 영국으로 이민하는 권리를 빼앗아 홍콩의 중국 반환을 앞두고 홍콩인들이 영국으로 대거 탈출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중국 정부에 대해서 신계를 반환하되, 토지 사용권을 획득하는 식으로 영국이 계속 통치하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영국이 선택할 수 있는 또 한 가지 선택은 조차 조약을 무시하고 반환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마가렛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 총리는 포클랜드 섬을 두고 아르헨티나와 벌인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한창 자신감에 들떠 있었다. 그녀는 홍콩에 대한 주권은 결코 포기할 수 없으며, 중국 정부가 홍콩을 회수하고 싶다면 청나라 시절 체결한 조약의 효력을 먼저 인정한 다음 영국과 협의를 거쳐 조문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중국이 강제로 홍콩을 접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처의 생각은 현실성이 없었다. 아편 전쟁으로 중국을 핍박하던 150년 전과는 처지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결국 남은 방법은 중국과 직접 협상을 벌이는 수밖에 없었다.
1982년 9월 23일 대처가 탄 비행기는 베이징 공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홍콩 반환을 놓고 양국의 첨예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덩샤오핑 부주석과 대처의 만남. "위대한 철의 여인"에게도 산전수전을 겪은 덩샤오핑은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출처: 네이버 욱이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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