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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폭 수정 + 내용 추가)
제로러브 01
W. 렌지
당연하게 그저 있는 존재가 있다. 내 경우엔 김정우가 그랬다.
관계라는 건 노력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유지되는 건데
"정우 밥 먹었대?"
"몰라."
"그럼 와서 먹으라 해."
"웅."
절친 아들이라고 살뜰히 챙겨준 우리 엄마가 있었고,
"이여주 수학여행 버스 누구랑 앉아."
"몰러. 암데나 앉아 가는 거지... 원래 그런 걸 미리 정하나?"
"그럼 나랑 앉자. 나 같이 앉을 애 없음."
쿨병 걸린 찌질이 자존심 지켜주던 김정우가 있었다.
김정우 얘는 말수가 적어도 타고나길 사람 자석인데다 지 좋다는 사람은 싫지 않아하는 성정이라,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주위는 늘 시끌벅적했고
"밥 먹으러 가자."
"니 친구들이랑 안먹어도 됨?"
"밥은 원래 니랑 먹잖아."
둘러싼 군중 뚫고 나와 멈춰서는 목적지는 항상 나였다.
처음엔 그냥 밥 혼자 안먹어도 되니까 고마웠는데 점점 짜증도 났던 것 같다. 니 땜에 불필요한 시선 한번씩 더 받잖아 괜히. 근데 티 내자니 내가 봐도 속이 존나 좁아서 참았다.
"여주야, 너 혹시 정우랑 사귀어?"
"아니. 그냥 친구야."
"그럼.. 나 소개 좀,"
익숙한 상황. 적응은 됐지만 매번 배알은 또 꼴렸다. 누구 주긴 싫었다. 아까웠던 걸지도.
"나 걔랑 친해서 아는데 걔 남친으론 별로야."
"....."
"연락하고 찝쩍대는 언니들이랑 여자 애들 개많아. 너만 힘들걸?"
"아.. 그럼 좀... 못들은 걸로 해줘!"
개구라였다. 여자 공포증 있나 싶을 정도로 이성 앞에서 뚝딱 대는 사춘기 소년이 김정우였다. 미안하긴 했다. 이후에 이실직고 하고 사과했다. 별 신경 안썼다 걔는. 어쩐지 나 존나 째려보는 여자 애들이 좀 있었어.
그리고 김정우가 나 좋아하는 거는 좀 일찍이 알았다.
처음엔 그냥 우리집 와서 밥 먹고 과일 먹고 티비 보는 걸 좋아하나보다 했는데 그냥 날 좋아하는 거였다. 사빠정 (사랑에 빠진 김정우, 우린 김정우의 짝사랑 시절을 사빠정 시기라 한다.)은 진짜... 어지간했다. 일부러 나더러 알아달라 티낸 줄 알았는데 온 힘을 다해 숨긴 거랬다.
대충 평일 10시 방영하던 드라마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난 우리 가족이 양치며 세수며 분주하다. 다급함 못 숨긴 김정우는 눈동자 굴리다 만만한 이제노를 붙잡는 거다.
"제노야, 요즘도 옵치 해?"
"나 옵치 한 적 없는데...."
"... 그럼 형이 알려줄게. 가자."
"웅."
형 좋아. 저항 없이 형을 컴퓨터로 안내하는 이제노.
"야 늦었어. 얘 내일 학교 가야 해. 닌 뭐 자퇴라도 했냐?"
"제노가... 알려달래."
".... 좀만 하고 가 그럼."
모른 척 넘어가 주는 나. 이제노 핑계는 그렇게 댔다. 이제노가 훨 잘할텐데... 지들 게임하는 동안 난 내 방 들어가서 자면 그만인데. 실속 못 챙기고 그냥 밤새 게임만 하다 눈 벌개져서 학교 오는 거다.
이제노: 누나... 형 게임 진짜 못해.... 옵치가 문제가 아니라 걍.. 다 못해...
이런데 내가 모를리가. 다 알면서 모른 척 하고 언제 고백하나 기다렸다.
찌질한데 비겁하기 까지 했다.
"여주야... 넌 나 사랑해?"
얘는 고백을 이런식으로 하네...
이 바보는 용기가 없는 편은 아니라, 내가 받아주면 김정우의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응... 사랑하지."
나는 거짓말 안한다.
"너 없음 못살아."
사실이었다.
김정우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안아온다. 나도 팔로 걔 등을 감싼다.
"이여주."
"....."
"죽어도 니가 먼저 용기 내긴 싫었던 거지."
"....."
얘는 항상 다 안다. 내 지독한 방어기제 이미 다 파악한 지 오래였다.
김정우나 나나 서로는 못 속인다. 김정우가 내 감정 눈치 못챘을 리 없다. 쌍방 삽질을 끝내는 건 덜 비겁한 사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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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는 못하는 게 뭐야."
"엥... 뭐래."
"겸손하기까지 해. 완전 자랑스러워 자기야."
"정우야 그만행..."
여주 얘는 잘 모르는 게 하나 있는데, 여주는 진짜 대단한 애다. 고졸 전 마지막으로 참가한 대회였다. 전국 단위 대회에서 무려 대상을 받았다. 학교가 뒤집혔다. 쌤들은 졸업 전 마지막까지 학교 명예를 드높였다며 치켜 세웠고 여주 얘는 자꾸 운빨이라며 부끄러워 했다.
여주는 어릴 때 부터 그림 좋아했고 잘 그렸다. 여주 집 거실 한 쪽 벽이 죄다 여주가 어릴 때부터 그려 온 그림들이다. 나이 차면서는 상이며 트로피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여주네 이모가 학원쌤이랑 상담한 바로는 천재 쪽에 가깝댔다. 개쩐다 내 여친....
여주는 진작에 원하던 대학 시각 디자인과에 합격했다. 나는... 정우는... 그냥 여주랑 같은 대학 가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했다. 경영학과에 최초합 했다. 성인 돼서도 여주랑 같이 학교 가고, 밥 먹고, 집에 올 수 있다. 지금까지 빠짐 없이 해 온 일들이고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연함을 뺏기기 싫어서 무단히 노력했던 시절이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여주랑 함께 할 캠퍼스와 더 먼 미래. 다른 동력이 필요 없었다. 감사합니다, 정승제 쌤.. 이지영 쌤...
졸업 기념 처음으로 단 둘이 여행도 갔다. 강릉이었는데, 설원에 드러눕고, 눈싸움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녔다. 뽀뽀도 엄청 했다. 눈꼴 시린 짓은 아주 다 한 것 같다. 경포대 앞에서 여주가 겨울마다 같이 여행 다니자고 했다. 여주는 겨울을 제일 좋아했다. 사귀기 시작한 때도 열일곱 겨울이라 더 좋다고 했다. 아 그리고 내 생일도 겨울이라서 좋다고 했다....진심 감동해서 울뻔한 걸 여주 앞이라 참았다. 어쨌든 대답 대신 온 얼굴에 쪽쪽거렸다. 좋아하는 계절이 나와 맞닿아 있는 거, 그 계절을 나와 함께 하려 한다는 거 다 너무 행복했다. 아 이여주 진짜....
"아악 사람들 보잖아!"
"사랑해 너무너무 사랑해 자기야."
"언제까지?"
"뭘 언제까지야. 당근 영원히지!"
"뻥치시네...."
진짠데... 난 완전 자신 있는데 여주는 아닌가?
나도 나지만 여주도 분명 날 너무 사랑했다. 여주는 일단 뭐든 숨기고 보는 애라 사랑 역시 그랬다. 한참 전에 면역 생긴 부분이라 섭섭하고 그런 건 없었다. 내가 다 아니까 괜찮아. 여주가 날 덜 사랑하는 듯이 구는 이유를 안다. 니가 날 사랑하는 만큼 내가 널 안 사랑할까봐 그러지. 난 내가 더 사랑해도 상관 없는데... 내 사랑 너 아니면 누가 가져? 하나도 안 아까우니까 니가 다 가져 가.
계속 확인시켜 줄게. 너도 널 사랑할 때 까지 계속 속삭여 줄게. 이여주 진짜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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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우가 날 사랑한다. 사귀니까 당연하지. 라고 남들은 말하겠지만 난 좀 병신 같은 버릇이 있어서
너 나 진짜 좋아? 왜? 정말로 사랑해? 너 사랑이 뭔지 알아? 그게 뭔지 알아도 날 계속 사랑할거야?
절대 입 밖에 안내는 말이라도 반복적이면 부주의해지는 법이다. 다투다가 나도 모르게 말해버릴 때가 있다.
"넌... 날 왜 좋아해?"
"그런 말 하지마."
"...."
"내가 잘못했어."
그런 얼굴은 처음 봤다. 얘 얼굴에서 이런 표정 이끌어 낸 사람이 다름 아닌 나란 사실에 죄책감이 미친듯이 일었다. 그 후론 절대 입 밖에 안냈다.
내가 나를 안 사랑하는데, 넌 왜 날 사랑해? 정우 니가 뭘 몰라서 그런걸 거야...
김정우가 10만큼 날 사랑하면 딱 그만큼 그 사랑 갉아 먹어서 없애 버렸다. 내가.
나 정우를 사랑해. 정우도 나 사랑해. 우린 같이 사랑하는데 넌 플러스 알파에 있고 난 항상 제로야.
이건 다 내가 모자란 탓. 누가 봐도 그랬다.
"너 오늘도 술 마셨어?"
"응... 선배들이 자꾸 불러서... 너무 끈질겨서 거절을 못했어."
"근데 거기... 여자 애들도 있고..."
"여주야"
"응."
"난 너 밖에 없는데... 그런 걱정 하면 내가 속상해."
"커플들 싸우는 게 다 이런 이유야. 너 믿는 거랑 그거랑은 별개야."
"그게 왜 별개야. 내가 너한테 항상 확인시켜 주잖아."
"입장 바꿔 생각해봐. 내가 남자 동기들이랑 술 마시고 다니면 좋아?"
억지였다. 사귄 동기도 없으니 애초에 비교대상이 안됐다. 언제부턴가 사람 사귀고 가까이 지내는 게 어려웠다. 어렵다 생각하니 성가셨다. 친해지자 다가오는 사람들을 내 시원찮은 반응 때문에 불편하게 했고 내가 먼저 다가간 적 물론 없다. 그런거 다 놓고 작품에만 몰두하고 지낸 지 좀 됐다.
"난 너무 좋을 것 같아, 여주야."
"....뭐?"
"니가 동기들이랑 술도 마시고, 취하면 내가 데릴러 가도 되고... 너 엠티도 가고 그러면 난 너무 좋을 것 같아."
김정우는 날 정말 사랑하는 구나. 감격보단 쓰라렸다. 너 안보는 데서도 잘 지내고 행복하길 바라는 니 마음의 크기가. 그 크기만큼 나는 또 나를 죽인다. 난 나 없이 재밌는 니가 짜증나던데. 내 뒤틀린 심보를 넌 아니? 김정우 말이 너무 진심이라 더 비참했다.
"....아닐걸. 너도 싫을거야. 어쨌든 다음엔 가지마."
"날 못 믿어?"
"내가 널 왜 못 믿어. 내가 너 못 믿어서 이러는 것 같아?"
"니가 날 언제 믿었어."
"뭐라고?"
"너 내 마음 항상 재고 의심하잖아. 한 순간도 완전히 믿은 적 없잖아."
"....."
"내가 계속 확인 시켜 주고 표현하면 될 거라 생각했어.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 없어. 근데 우리 사귄 지가 3년이 다 돼가. 알고 지낸 지는 10년이고. 그런데도 마음이 안 놓여? 불안해?"
"......"
"여기서 뭘 더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여주야, 내가 너 사랑한다니까? 너 어렸을 때 일 때문에 이러는 건 아는데,"
"그만... 그만해."
"....."
"일단 오늘은 가줘. 내일 연락할게."
정우는 말 없이 내 자취방을 나갔다. 나가자마자 울었던 것 같다. 걔 앞에서 울긴 싫어서 꾹 참다가 주저 앉아 울었다.
흔하지만 지독한 버릇 하나가 있다. 손톱 잘 자라는 꼴 못보고 물어 뜯는 버릇. 내 손엔 멀쩡히 붙어 있는 손톱이 없어. 근데 사랑도 마찬가지야. 다 물어 뜯기고 망가져도, 넌 날 사랑할래? 넌 그거 다 알면서도 계속 나한테 줬던 거지. 지난 3년동안, 그 보다 더 오래. 보기 싫게 망가져서 돌아오는 니 사랑 보고 넌 무슨 생각을 했어? ..... 헤어져야 겠다. 내가 널 놔주는 게 맞아.
창에 바람 부딪히는 소리가 공포스러웠다. 금방이라도 다 깨버릴 기세였다. 창 밖을 보면, 늘 너와 함께이기만을 기도했던 겨울이 와 있다. 겨울도 헤어짐도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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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도시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개강총회>
내가 여길 왜...?
날 설득해 억지로 참석시킨 2학년 과대의 명분은 이거였다. 1학년 내내 과탑하셨잖아요, 언니. 1학년 애들한테 팁이라도 전수해주면....
그러니까 이제 막 입학한 새내기들한테 시험이 어떻고 과제가 어떻고.... 꼰대 노릇을 하란 소리였다. 너 대학 일년 다니지 않았니? 누가 개총에서 그런 얘길 해....
차마 입 밖으론 못 내뱉고, 거절도 못하고 꼼짝 없이 앉아 있다. 저마다 인사를 나누고 시도 때도 없이 건배하고 난리였다. 가만히 있어도 에너지가 갈려나갔다. 기 빨려서 더 이상 못있겠다 싶어 튈 각만 재고 있었다.
"누나."
"응? 아, 안녕하세요..."
"저 재민이요. 나재민."
"응?"
"제노 친구요. 저 몇번 집에 놀러갔는데..."
"아!"
기억났다.
이제노 너 어디가? 피방. 누구랑. 재민이.
나 독서실 다녀올게. 혼자? 아니 재민이랑.
넌 친구가 재민이 밖에 없어? 누나도 정우형이랑만 놀잖아. 이 새끼가....
이제노 가는 곳에 나재민 있고 나재민 가는 곳에 이제노 있었다. 집에도 몇 번 놀러왔고 짧은 대화도 몇 번 나눴을 거다. 올해 이제노가 대학을 갔으니까... 넌 우리 대학을 왔구나. 그것도 시디과를.
"헐 오랜만이다... 너랑 제노 고등학교 기숙사 들어간 이후론 거의 못봤네."
"네. 시디과 붙고 누나한테 연락하려다 말았어요. 복학을 올해 하실 줄 몰랐거든요."
"아... 응. 2년 했음 할만큼 했지."
휴학 2년. 그 때 떠올리면 가슴이 꽉꽉 막힌다. 나에겐 20년과 맞먹는 게 그 2년이다. 2년 전, 1학년 말에 우리가 헤어졌다. 걔나 나나 상처만 잔뜩 나눠가지고 2년을 생 이별 해버렸다.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얼굴 못보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자꾸 꿈에 나왔다. 꿈에서 깨면 그 김정우가 내 인생에 더 이상 없단 걸 또 깨닫는거다. 그 순간이 못내 견디기가 어려워 잠 드는게 무서웠다.
"그래도 졸업반이면 누나 보기 더 힘들었을 텐데. 이렇게라도 만났으니까 됐어요."
"그러게... 나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데, 다행이다. 넌 동기 많이 사귀었어?"
"별로요. 낯선 사람 대하는 거 어려워 해서."
언젠가 이제노에게 들은 말이 생각난다. 재민이 걔는... 나랑 진짜 비슷해. 아니 그냥 똑같은 애야.
이제노도 나만큼은 아니지만 낯을 엄청 가렸다. 집에 데려오는 친구도 나재민이 다였으니 알만했다. 엄마는 누구한테서 저런 소심쟁이들이 나왔냐며 속 터져 했지만. 그 말 들으면 할 말이 없었다. 말 잃은 나를 보면 엄마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어릴 때부터 알던 동생 친구를 만나니 속이 좀 편했다. 사람이랑 대화할 때 할 말 없어서 머쓱해지는 빈도도 훨씬 적었다. 그래도 넌 친구 사귀어야지... 새내긴데... 말 꺼내려다 실패했다. 입구 들어서는 익숙한 얼굴에 말문이 꽉 막혔다. 김정우다. 눈 못 떼고 계속 본다. 결국 눈이 마주치고.... 웃음기 싹 가신 김정우 얼굴 마주한다. 시간이 멈추는 듯한 감각을 느꼈지만 아마 2초도 안되어 먼저 시선을 피했다. 술... 술이 필요해.... 짠치기도 없이 냅다 소주 들이 붓는 거 보고 나재민이 경악한다. 누나 왜 혼자 마셔요!
정우야, 안 와? 일행 중 한명이 정우를 챙긴다. 정신 든 김정우가 예약된 테이블에 착석한다.
"오늘 경영학과도 여기서 개총하나 봐요."
"아.... 응, 그런가 보네."
"김정우 형 맞죠?"
"...."
"헤어진 거에요?"
"응... 너 쟤 알아?"
"제노 집 놀러 갈 때 몇 번 만났으니까요."
그 형은 볼 때마다 누나만 쳐다보고 있던데요. 근데 누나도 그 형만 보느라 나한텐 눈길도 안줬잖아요. 나는 기회조차 없었잖아요, 저 형 때문에.
3월의 개총은 허울 좋은 사냥터다. 갑갑한 수험생활 청산하고 갖는 스무살과 대학생 신분. 못하는 게 아니라 미뤄왔다 믿어 온 연애 그거 꼭 다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눈에 훤히 보이는 수작도 스무살들 앞에선 청춘 로맨스의 빌드업 단계일 뿐이다. 근데 얘네는 왜 사냥은 안나가고 개화석인 내 앞에서 이러고 있는걸까. 그 새 친한 동기가 생겼다던 나재민이 소개시켜 준 이동혁, 황인준이란 애들이다. 분명 분위기 못 어울리는 게 티났을텐데 별 신경도 안쓰고 티엠아이 푸는 이동혁이랑 묘하게 내 눈치는 살피는데 이동혁 딜 먹이는 게 더 먼저인 황인준이다. 그러니까... 이동혁이 고삼 때 사귄 여친 아프다고 죽 사서 현관 앞에 놓고 갔다던 썰을 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냥 배민 아님? 문 앞에 놓고 가는 거 미안한데 존나 같잖아...."
"뭐래 애 아픈데 집에 들어가는 게 더 민폐임. 오지는 배려였던 거임."
"나 진심 토 나와. 참고로 나 비위 개 쎈편."
"인준이 혹시... 동혁이 싫어하니?"
암만 들어도 서로를 극도로 싫어해야만 나눌 수 있는 대화내용임에... 진심 궁금해서 물었다. 영혼 나간 눈으로 듣기만 하던 내 입에서 나온 캐진지한 말에 셋이 웃음이 터졌다.
"누나, 얘네 맨날 붙어다녀요. 시디과 부부예요. 근데 한 30년 같이 산..."
"아냐. 근데 누나 눈에 그렇게 보였으면 어느정도 신빙성 있는 걸지도. 너 나 싫어하는데 뭘 노리고 억지로 붙어 다니는 거냐? 뭐 필요해?"
"응 지랄하지마. 니가 가진 것 중에 필요한 거 아무것도 없음. 어디 고물상 아저씨도 니보단 멀쩡한 물건 갖고 다니실 듯."
요즘 애들의 애정표현에 새삼 경악하며... MZ세대 바이브 이런건가? 둘의 애정 어린 티키타카를 보자니 무슨 콩트를 관전하는 듯해 놀랍게도 점점 편해지는 중이었다. 혼자 덩그러니 있는 개뻘쭘한 상황을 피해서 다행이기도 했고. 이런적이 있었던가... 사람들 사이에 어울렸던 경험들을 통틀어 제일 덜 불편한 자리긴 했다. 애초에 이렇게 셋 이상 어울려 본 적이.... 아니 김정우 말고 다른 사람이랑 함께해 본 기억이 아득했다. 성인 되고 처음 아닌가? 무의식적으로 저 끝 테이블을 힐끗 보다 다시 고개를 바로 한다. 눈 마주치면.... 뒷 일은 상상만 해도 철렁한다. 준비가 안됐다. 처음보는 후배들 앞에서 전남친과의 재회로 오열하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없지. 근데 나 자꾸 김정우 생각하네....
재민은 동혁과 인준을 테이블로 데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간혹 얘네는 어떻게 대학을 왔을까 의구심이 드는 유치한 언행을 자랑하지만 일단 둘은 개웃기다. 이제노를 불러다 넷이서 술자리를 가져본 적 있는데 이제노의 말 수가 늘진 않았지만 분명 제노는 실실 웃으며 즐거워 했다. 웃음코드에도 유전이 있다고 믿어보며... 둘을 데려다 놨다. 여주 누나 분명히 아까보단 훨씬 편해보였다. 진짜 그랬다. 근데 이 누나...입꼬리 올려 웃다가 갑자기 개정색하고 경영 테이블을 힐긋 거리다 혼자 놀라면서 고개를 원위치 시킨다. 그냥 경영에 전남친 있다고 공지를 때리세요... 말은 안해도 이동혁 황인준도 눈치 챘을거다. 하긴 여주 누나는 옛날부터 비언어적 표현에도 전달의 효과가 있음을 잘 알지 못했다. 대화 몇 번 안해본 내가 이 누나의 짝사랑 타임라인을 읊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근데 이건 김정우 형도 마찬가지였다. 세상 물렁한 바보 커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누나. 눈 마주치면 윙크 한번 해줘 봐요."
동혁과 인준이 담타 가지러 갔을 때 슬쩍 말 꺼내봤다. 슬슬 자리가 지치는 중 인지 허공 바라보던 누나의 동공이 확장된다. 내 얼굴 보더니 바람 빠진 웃음 소리 낸다.
"티 났어...?"
"네. 누가 봐도 경영이랑 사연있는 사람으로 보여요. 동혁이 인준이도 예의상 말을 안하는 거지 다 ...."
"누나! 재민아 인사행. 우리 동아리 형이야. 김정우 형"
울 깜찍한 초코볼이....♡
현실 감각이 빠르게 돌아왔다. 이동혁 황인준이 이여주의 절절한 시선 따위 눈치 챘을 리 없다.
이 누나 비언어적 행동에 신경쓰는 사람은 나 뿐이었단 걸 이제야 인지한다.
김정우는 쳐다도 안보고 누나 얼굴을 본다. 가만 보면 누나 감정은 표정이 아니라 눈빛으로 읽힌다. 눈에 온갖 놀람 당혹 그리움 다 있었다. 이렇게 티가 나는데... 이걸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나 밖에 없다고? 아.... 한명명이 더 있을 터. 이동혁 일행 다 알고 따라왔을 거면서 당혹스러운 척 하는 김정우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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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여주가 자존감이 보통 낮은 게 아니죠. 마음도 많이 아픈 아이고요. 그치만 여주의 예술적인 감각이나 영감은 이 예민함과 곤두선 신경에서 나오기도 해요. 집중력도 엄청나서 작업할 땐 누가 건드려도 모르고요. 어떤 사연으로 여주의 지금 성격이 만들어졌는지, 둘이 찐 이별하게 된 사연은 뭔지 차차 밝혀집니다! 부족한 글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해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2.06 18:14
첫댓글 아니ㅠㅠㅠㅠㅠ 여쥬...ㅠㅠㅠ왜그래써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