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1일(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 하늘나라는 무엇보다 먼저 평화의 나라다. 거기에는 다툼과 경쟁이 없다. 서로 사랑하는데, 도와줄 마음이 늘 있고, 나를 내어줄 준비가 돼 있는 영혼들이 모여 있는데 언쟁이나 다툼이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이 다스리시고 모두가 하느님과 함께 있는 거 말고는 바라는 게 없으니 부족함이 있을 리 없다. 하늘나라에 아직 빈자리가 많은 이유는 그곳이 한없이 넓어서가 아니라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적기 때문일 거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나는 그런 나라, 그런 공동체를 열망하는가? 그 이전에 내가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기를 바라는지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부터 그렇게 살기 시작한다. 언제나 도와주고, 그에게 시간을 내줄 준비가 돼 있고 혹시라도 내 생명을 희생해야 할 상황에 놓였을 때 상상 속에서라도 그렇게 하는 연습을 한다.
우리나라 선수와 다른 나라 선수가 벌이는 운동 경기를 본다. 손에 땀을 쥐고 마음을 조린다. 우리 선수가 이기면 긴장에서 풀려난다. 그런데 두 선수가 악수하고 서로 등을 두드리며 웃으며 말을 주고받는 모습에서 직전까지 마음 졸였던 시간이 머쓱해진다. 승자를 축하 해주는 패자가 더 커 보인다. 그것은 싸움이 아니라 놀이였다. 이제는 저급한 경쟁 구조에서 벗어나고 싶다. 공부도 싸움이나 전쟁에 비유하고, 함께 놀고, 경기에서 졌을 때 어떻게 하는 건지 배우지 못했다. 세상은 내게 진정으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은 것 같다.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평준화라는 말로 깎아내리려고 한다. 성공이 곧 행복이라고 호도한다. 멋진 패자의 아름다움을 억지로 외면한다. 하지만 경쟁이나 우승이 아니라 모두 다 잘 사는 게 우리 모두의 바람이라고 믿는다. 너무 이상적이고 위험한 발상일까? 그래서 예수님이 살해당하신 걸까? 세상은 참 좋으신 하느님, 차고 넘치게 베푸시는 아버지를 믿지 못한다. 처음으로 파견받은 사도들은 특별한 교육과 훈련을 받지 않았다. 스승이 그들에게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과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다는 말씀을 믿었을 뿐이다. 우리의 하늘나라이신 예수님이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한다. 최소한 교회 안에서만이라도 함께 더불어 살고, 멋지게 지고, 앞다투어 희생 봉사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사는 기쁨이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 모두가 주님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폭행을 당합니다. 도전과 반대는 하늘나라 시민의 동반자이고, 역설적으로 자신이 하늘나라에 가까이 있다는 표지가 되기도 합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 마음이 어머니가 계신 하늘나라를 더욱 그리워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