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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철학)도 神도 무한히 발전해 가는 존재라고 본다....그리고 그 발전의 헤겔식 원숭이 사유방식인 변증법이 과연 진리의 정합발전적 형태인가? 나는 단연코 아니라고 본다.)
그러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것은 자신의 이상적인 모델이 완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것은 단지 그 단계에서의 의식의 내면성이자 생명이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진정한 관념론적 사고는 현실과 직접 관련맺는 것이다. 관념론적 사유가 현실의 외부로부터 설명적 틀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 생명을 주는 합리적인 논리를 복구하고 다시 펼치는 것 아닐까?
헤겔의 대표작으로는 동시대 철학자들을 비판하는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체계의 차이 1800-1801)와 1807년에 발간된 의식의 발달과정을 서술한 (정신 현상학), 존재, 본질,개념의 3부로 나누어 존재론을 다룬(대논리학) (철학강요) (미학) (법철학) 등이 있다..... 또 헤겔은 (1837년 역사철학 강의)라는 저서를 통해 오늘날 거의 모든 마르크시스트들에게도 마르크시스트적 역사관을 제공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독자들이 (아놀드 토인비)나 영국의 대 역사가 (E.H. 카아 박사)의 역사서술이 아닌 (미하일 일린) (마르크스) (사마천의 사기를 재해석한 좌파 역사)들을 읽는다면 역시 헤겔의 사유방식이 눅눅히 녹아든 좌파 원숭이들의 관념적 도그마 선 팍팍 긋기와 동일한 역사 서술을 아시게 될 것이다.
지구가 둥글고 인터넷으로 정보가 마구 왔다갔다 하는 시대에 “동양”과 “서양”을 구분한 헤겔식 역사서술을 읽는다면 그것만큼 웃기는 원숭이 공부가 또 있을까? 인간의 문명과 역사가 과연 무슨 무슨 시대를 팍팍 나눈 헤겔식 사고처럼 아무런 개연성과 명암없이 그렇게 나뉘어져 왔을까? 이것은 우리도 우파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볼때 박정희 시대에 “박중흥”처럼 역사를 서술한 웃기는 원숭이 작태일수도 있고, 지금 이 시대 좌익들을 공격하는데 “경제성장”을 뺀 박정희 시대의 역사서술이나 사고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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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헤겔은 무엇이 문제인가?>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구상하면서 이중적 과제를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한편으로는 경험적 의식을 절대지로,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절대적 관념론의 체계(자기의식과 대상의식이 그 속에서 동일화되는 체계)인 철학으로 나아가려고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 자아를 인류적 자아로 즉 개별적 의식을 시대정신으로 고양시키려고 하였다. 이것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한국의 원숭이 좌파들이 무슨 맨날 “시대정신”이다 라고 하면서 과대망상, 몽상증상을 보이는 것이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헤겔철학속에 내재하여 있는 문제점들을 비판해 보아도:
1) 하이데거가 지적한 바와 같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절대자의 현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미 살펴본 바대로 헤겔은 의식의 경험적 구조 즉 인식의 계기와 진리의 계기에 관하여 절대자의 현현을 목표로 서술하여 가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의식의 논리적 전개과정은 실제로 역사속에 나타나는 의식의 형태로서 그 과정의 마지막에는 절대자가 완전히 현실 역사속에서 자기자신을 현현하게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서술되어 있다.
아마도 헤겔이 의도하고자 하는 것은 근대유럽의 사조적 경향에서 보면 인간의 지식이 점점더 풍성해져서 종내에는 인간이 신이 된다는 뜻일 것이고 또한 역사의 주체가 인간 정신이고 그 궁극 목적이 자유라는 것을 밝힘으로서 종내에는 인간이 역사의 지배자가 된다는 뜻일 것이다.
헤겔이 이토록 인간의 지식이나 당시 자유사상의 증가를 과도하게 평가한 것은 "인간능력의 발달이 인간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신념에 있다."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역사적 진보는 서서히 인간 상황을 변화시켜 종내에는 인간이 신이 되고 그리하여 인간이 역사적 운명의 지배자가 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유한적인 동물이다. 인간의 지식이 아무리 증가하여도 인간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역사적 발전에 의해서도 극복될 수 없는 유한성의 한계가 인간에게는 있는 것이다. 인간의 유한적 제한은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지만 그 결정적인 증거는 죽음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상황의 역설의 생생한 표현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지식의 증가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근대문화는 이러한 일정한 한계를 부인함으로서 자기자신을 신으로 만들려고 하며 신의 절대성을 부인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인류의 역사는 오만과 건방진 노력으로 꽉차있고 이러한 경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문화와 철학과 종교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오만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 자신을 모든 상황을 통어할 서서히 진보하고 있는 신으로 간주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헤겔 자신도 이러한 오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헤겔은 인간 타락의 신화에 언급하면서 신처럼 되려는 오만한 욕망을 통해서 자신의 조화를 잃은 인간은 절대지를 향한 철학적 탐색을 통해서 제 2의 조화를 성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오만에 의해서 인간은 떨어졌지만 오만에 의해서 인간은 다시 올라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이 아무리 증가하여도 인간의 상황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신이 되고 신의 자리에 올라서서 역사적 운명의 지배자가 되려는 신념은 "상상력의 허영" 이라 할 수 있으며 인간 속에 내재한 이러한 허영심을 기독교적 사상에서는 "죄의 근원" 으로 보고 있다.
2) 헤겔은 이처럼 초월적인 신을 부인하고도 보편적인 역사관 즉, 시초에서 종국에 이르는 한 가지 목적 있는 진행으로서의 세계사를 구축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상에 의하면 초월적 신에 대한 신앙이 없이는 역사를 통일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가 없다. 역사에 군림하는 신의 주권개념은 역사의 구조와 사건속에서는 직접적으로 명백하지는 않지만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 차원을 수립하는 것이며 역사의 사실들은 논리적 필연성으로는 의미깊게 해석되어지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의 말갔다 붙혀 뉴라이트주의자들이 좋아하는 R. Niebuhr도 "역사적 제 현상의 변화를 하나의 원리에 따라 설명하기에는 그것은 너무도 간다하다." 라고 하였다. 역사의 의미의 구조에 대한 관계점은 관찰할 수 있는 역사의 구조나 접합적 연관의 경험적 분석에 의해서는 명백하게 발견되지가 않는다.
요컨대 보편적 역사관은 초월적 신의 섭리에 대한 신앙에 의하지 않고서는 간단히 수립되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어느 정도 알아차린 헤겔은 "신"이나 "이성의 간계"(List der Vernunft) 등을 이야기함으로써 "중세기의 신학적 사상, 계몽사조의 역사가와 Kant의 은밀신학적 견해" (Crypto-Theological view)에 종종 빠지는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헤겔은 "다만 섭리가 존재한다는 일반적 규정으로 나아가나 그것과 아울러 구체적 사적에 나아가려 하지 아니하는 한갓된 추상적, 무규정적 신앙에 만족할 수가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헤겔은 역사에 있어서 인간 밖의 하나의 자주적 존재를 부인한 것을 알 수가 있다.
헤겔은 섭리관념을 파괴하고 대신 진보개념으로 살짝 대체시킨 오류가 있다. 그리하여 역사에 대한 비현실적 통일을 부여하는 역사의 드라마를 구상했다. 즉, "이 드라마는 자연적 필연성 안에 무의미한 위협을 발견하고 역사적 통일의 관념을 수립하기 위하여 역사적 세목들을 왜곡 관련시켜 그 시대의 유럽 문명에 있어서 어리석은 정점에 도달한 것이다."
역사에 있어서 일반적 진보는 초월적 신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있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보다 나은 방향으로의 견실한 진보가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가 흐를수록 인간의 부패성이 고조 될 것으로 예견한다. 따라서 진보에 의한 역사의 완전한 실현을 기대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가 항상 악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매하게 하는 것이다. 세계가 항상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 없음과 아울러 또한 세계가 일반적으로 악화된 방향으로 퇴보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악의 세력 못지 않게 선의 세력도 점차적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끝까지 선과 악의 가능성을 지속한다는 것이 성경의 개념이다.
이러한 선과 악의 이율배반은 역사적 과정에서 감소하기 보다는 증가할 것이나, 그러나 결국에는 선이 승리한다는 것이 기독교적 기록이며 사상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역사의 본질에 대해서 가지는 바 매우 넓은 의미의 구조의 심볼이다. 그것은 그 틀(frame)안에서의 이율배반과 모순과 비극적 현실에 직면하면서도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아무튼 신의 섭리 문제는 인간의지를 초월하는 것과 인간자유와의 역설적 관계에 있으므로 역사속에는 심오하고도 의미 깊은 신비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관조 (sight)에 의해서는 역사적 형태들의 복잡성과 역사적 사실의 광범위한 다양성을 통일적으로 올바르게 풀이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초월적 섭리에 대한 신앙으로 역사의 통일관념을 수립하려는 성경적 개념은 역사의 사실들을 너무도 간단한 형태에 끼워 맞출려는 모든 미숙한 노력을 경계하는 것이다."
요컨대 역사의 의미는 심원한 역사철학에서 인지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했던 것이 사실 아닌가?
각양의 문화와 문명은 서로 연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는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는 요소가 개입하여 있으므로 경험적 상호관게에 의해서 간단히 통일되지 아니한다. 초월적 신의 섭리에 대한 신앙은 그것이 단순한 원시적 개념이 아니라 그것은 여전히 보편사의 개념을 위해서 영구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고도로 세속화된 근대 문화에 있어서도 섭리에 대한 신앙에 의하지 않고서는 보편적 역사의 신념을 보존하는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3) 헤겔이 인간의 보편적 섭리관념을 파괴하고 진보개념을 대체시켜 올바른 보편사관을 수립하였다고는 할 수 없을 지라도 인간의 역사를 합리적으로 조명하여 인간의 사회를 합리적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는 그의 열망은 인간의 삶의 하나의 적극적인 태도로 볼 때 긍정적인 점도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 자신의 개념적으로 파악되었다고 여겨진 역사를 통해서 종교를 대신하려고 하는 태도는 바람직스럽다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헤겔에게서는 개념적으로 파악된 역사가 신학을 대신한다."고 Kaufmann이 지적하였듯이 헤겔은 당시 그의 조국, 독일 분열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종교가 현실의 분열을 단지 초월해서 도피할 뿐이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님을 통찰하고 그 역할을 철학에서 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에게서는 철학 그 자체가 종교적인 것이고 철학이 종교로 지양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헤겔은 종교의 형태는 표상 또는 감정,철학의 형태는 사유 또는 개념이라고 하여 종교에 있어서의 표상이라는 형식은 철학에서의 개념의 형식으로 고양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는 철학이 최고의 완전한 진리이므로 종교보다 더 높은 신적생활이 바로 철학이라는 의미가 된다.
종교의 철학에로의 고양의 결과 Kierkegaard, Bauer, Kojeve 등은 헤겔이 무신론으로 전락되었음을 주장하고 Feuerbach,Theunissen등은 헤겔이 기독교의 신학을 정초하여 주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쪽에서든지 헤겔의 철학은 정통적인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전연 용납될 성질의 것이 못된다. 아무튼 헤겔은 개념화된 역사의 파악이라는 자신의 철학으로서 기독교의 계시종교를 극복하려고 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이런 의미에서 J.Maritain은 헤겔의 철학을 "근대판 그노시스주의"(modern Gnoticism)이라고 비난한다. 그는 말하기를 "헤겔의 철학은 지상의 일부 생각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인류의 신학적 유산을 합리적 용어로 재조명함으로서 신학적 전 유산을 삼키려고 한 것이다...... 헤겔의 형이상학과 역사철학은 근대판 그노시스주의이다"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철학이 종교의 흉내를 냄으로써 스스로 이단종교가 되기 보다는 철학은 스스로의 제한된 영역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철학이 의식적으로 종교의 앞잡이가 되려고 하는 것 보다는 철학은 오히려 그 자신의 길을 바로 걸어가야 종교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들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헤겔의 정신현상학분석과 함께 그 속에 내재한 문제점들을 기독교적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조명하여 보았다.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헤겔은 인간이성이 점점 진보하여 결국에는 인간이 모든 상황을 통어할 수 있는 신적인 수준에까지 도달하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인간이 역사의 지배자가 되려는 신념을 나타낸 것인데 이것은 기독교적 입장에서 볼 때에 인간의 상상력의 허영을 나타낸 것일 뿐 인간은 결코 신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고 인간이 역사의 지배자가 될 수 없음을 통찰한다.
둘째로 헤겔은 신의 섭리대신에 소위 진보관념으로서 보편적 역사철학을 구축하려고 하였으나 그 결과 잘못된 역사철학을 구축하였던 점을 고찰하였다.
셋째로 헤겔은 자신의 철학으로 종교를 대신하려고 하였던 바 이것은 결국 철학이 종교의 앞잡이 노릇을 하려고 한 것인데 헤겔의 이런 태도야말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요컨대 헤겔의 철학은 권위주의를 배척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고조된 근대유럽의 사조적 경향에서 생긴 하나의 산물로 볼 때 그것은 헤겔 자신의 말대로 "각 개인은 그 시대의 아들이다...... 따라서 철학이 그 동시대를 뛰어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개인이 자신의 시대를 뛰어 넘을 수 있다고, 로두스섬을 뛰어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 없는 일일 것이다."가 될 것인가? 즉 헤겔의 철학도 한 시대의 산물에 불과한 것 아닌가?
이처럼 만약 미국 건국초기의 무식한 코흘래 보안관이 “헤겔”을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하등 웃기는 원숭이의 잡설일 수 있다.....
우리는 역사속에서 각각의 사실들은 생각할 수 있어도 그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점에서는 역시 헤겔이 턱도없이 “절대정신”이라고 말한 것 보다 늘 무한한 가치를 두고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헤겔처럼 변증법의 선긋기 도그마의 원숭이 사고로 현실과 미래의 인간을 모두 역사라는 관념의 붓장난으로 장난하고 재단할 것이 아니라 역사속에서의 사실에서 교훈은 얻되 역사가도 아닌 헤겔이 엉뚱한 사유의 철학으로 재단 농락한 역사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그 역사관을 폐기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둥근 지구에서 헤겔을 따라가는 무식한 원숭이 놈들이 판을 치는가? 神이 내린 육류라는 양고기 갈비 세대를 뜯으며 나는 그 감질 맛 나는 육즙과 포도주 한잔으로 동지들에게 화기애매하게 이것을 말하고자 한다......
“어느날 어느 원숭이 한마리가 나에게 ”그대는 칼을 뽑아라“고 하며 자신의 손을 칼집으로 가져가는 폼을 잡았다. 그때 나는 바로 허리의 총을 뽑으며 ‘빵 빵’ 이라는 원숭이 사냥을 해버린 꿈을 꾼다....
“후우...하며 총구의 화약연기를 불어 버리며........”
“그리고 원숭이는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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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애국우익 동지들.....좋은밤 되세요........................ 맑은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