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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광연세 글씨는 1840년 김정희가 55세 나이에
제주에 유배온 직후, 추사체가 시작될 무렵 쓴 것.
김만덕 사후에 김만덕의 후손에게 써준.,객주의 현판.
1786(정조 10)∼1856(철종 7).
조선 말기 문신·실학자·서화가.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을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던.,추사 김정희.
.
그가 객주의 현판을 쓴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기도 하다.
秋史 金正喜(1786~1856)
의녀(義女) 김만덕(1739∼1812년).
조선을 뒤흔들었던 기생을 꼽는다면
16인 중 의녀(義女) 김만덕도 들어간다.
진주성에서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한 진주 관기 '논개',
구한 말, 매국노 이지용을 꾸짖었던 진주 기생'.,산홍'
군복을 입고 결사대를 조직한 가산 기생.,'연홍',
죽음을 두려워 않고 상소를 올린 용천 기생.,'초월'
임금도 맘대로 할 수 없었던 보천 기생.,'가희아'.
열정으로 조선을 뒤흔든 송도 기생.,'황진이'
남자들을 치마 앞에 무릎 꿇린 한양 기생.,'초요갱'.
뭇나비에 짓밟히지 않는 삶을 산 함흥 기생.,'김섬',
사랑하는 이와 생이별을 하였던 부령 기생.,'영산옥'
가슴에 오직 한사람을 새긴 영흥 기생.,'소춘풍'.
천재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부안 기생.,'매창',
사흘간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산 성주 기생.,'성산월'
퇴계 이황과의 로맨스를 그려낸 단양 기생.,'두향'.
율곡 이이와 정신적 사랑에 빠졌던 황주 기생.,'유지',
'천재시인과 가슴 아픈 이별의 주인공' 함흥 기생.,'취련',
백성들을 질곡의 삶에서 구해낸 제주 기생.,'만덕'
'조선시대 의녀반수 관직을 누린 유일한 기생이며.
왕실은 물론 조정 대신들을 뒤흔들었던 의녀 김만덕.
오늘날, 그녀는 의녀(醫女)가 아닌 의녀(義女)로 불린다.
의녀는 일반 궁녀와 달리 결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의녀들은 관비 신분이었고
일반 관비보다 천시해 결혼 생활이 쉽지 않았다.
결혼 전 이미 정절을 잃은 경우가 허다했고
아비 없는 자식을 키우는 경우도 다반사였고,
세간에서는 관기 못지 않은 추잡한 여자로 취급,
결혼을 여러 차례 하기도 했으며
결혼해 구박받거나 버림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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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녀를 첩으로 삼을 때는
의녀 대신에 여종 한명을 바쳐서
관비로 넣으면, 의녀는 양인이 되었고
자녀는 '서출' 양인 신분으로 살 수 있었다.
조선시대 신분 상 천인일 수밖에 없었지만 ,
체계적인 전문 교육을 받았던 최초의 여성들.
왕실 및 명문가 며느리 간택에도 동원된.,의녀.
의녀는 여성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생겨났지만,
이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환자를 돌보았다.
남녀유별이 적용되지 않는 천민 여종이기 때문이다.
의녀 집안은 양인 천민에게 부과하는 조세나
요역의 부담으로부터 감면 받거나 면제 받았다.
즉, 그녀들은 공로에 따라 물질적 포상을 받았다.
포상 중 으뜸은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는 면천
기회는 드물었지만, 의녀는 신분상승 기회가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의녀는 내외법 시대적 요구에 의해 탄생
천민 여성이지만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유일한 집단.
의원을 보조하고, 본업 외 수사관, 기생 역할까지 했다.
의녀 최상위 등급은 한시에 능통해
중국 사신과 시로 문답할.,한문 실력.
갓 과거에 급제한 관리보다 출중했다.
그당시 중인 신분인 남자 의원보다
한문실력이 월등했던 의녀도 있었다.
조선시대 "약방기생"이라고도 불리웠던.,의녀.
내의원은 약방이고, 관비는 기생이라 붙여진 이름.
궁녀에게 침을 놓아 주거나, 비빈 해산에 조산원 노릇.
특히, 조선 5백년사에서
여자 의사로 평가 받았던
제주 의녀.,김만덕(金萬德)
치과, 이비인후과.,명의.
1739년 영조 15년~1812년 순조 13년)
조선시대 여자 상인이자 기녀이자.,의인.
기근이 닥치면 재산을 풀어.,민초를 구제.
기생이면서도 의원이었던 김만덕은
약재가 부족하자 <본초강목>에 따라
약재 캐러 다니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약재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자
약재상이 되고, 거상이 된.,김만덕.
여생은 제주도에서
의원으로 지냈는데
정조가 어의수반 임명.
의원 일을 하는 여자들의 총책임자
어의수반으로 가난한 제주도 도민들을
치료하고 돌보며 여생을 마쳤다고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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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때 왕의 부름을 받아
'제주 의녀 김만덕이 상경을 하자
마치, 외국인이 표류하여 온듯.,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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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생(妓生)이 아니면서.,행수기생.
기생 출신 거상이지만., 전직은 의녀(義女).
현직 의녀(醫女)가 아니면서도.,관직 '의녀반수'.
조선이 개국한 이후 처음으로
제주도민 여성이 한성에 입성한 것.
그당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
당시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때문일까?'
'정조가 파격적으로 내린 관직 때문이었을까?
약방기생 미천한 신분이지만 '거상'인 때문일까?
'아니면, 김해 김씨 양반 가문이면서도
천민 관기로 전락한 과거 때문이었을까?'
그당시 그녀는 장안의 화제거리로 급부상.
금강산 유람까지 다녀오자 유명인사로 급부상.
구휼미 500석 기부로 1천1백 생명을 구한.,김만덕.
조선 정조때 문신이며 실학자, 저술가, 시인이자
철학자, 과학자, 공학자.,다산 정약용(1762~1836).
김만덕(1739∼1812)을 기리는 시집에 발문을 남긴다.
조선시대 역사 상 가장 뛰어난 천재이며
정조가 가장 신뢰하여 중용하였던.,정약용.
그가 김만덕 숙소까지 찾아가 쓴.,시집의 발문.
'김만덕을 기리는 시집'.,발문.
"김만덕을 위해서는 좌승상 채공(채제공)이
소전(小傳)을 지어 자세하게 서술하였으므로
그 기록된 사실에 관하여 나는 덧붙이지 않겠다."
"나는 만덕에게는 세가지 기특함과
네가지 희귀함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기적에 실린 몸으로
과부로 수절(守節)한 것."
"많은 돈을 기꺼이 내놓은 것,
섬에 살면서 산을 좋아하는 것."
"네가지 희귀함에 대하여는
중동(重瞳 : 겹눈동자)인 여자인 것.
종의 신분으로 역마의 부름을 받은 것.
기생으로서 중을 시켜 가마를 메게 하였고
섬 사람으로 내전(內殿)의 사랑과 선물을 받은 것."
"아!~ 보잘 것 없는
여자(女子)의 몸으로
이러한 세가지 기특함과
네가지 희귀함을 지녔으니
이 또한 대단히 기특한 일이다. "
- 1796년 정약용 -
1795년 정조가 한강을 건넌 '배다리'는 정약용이 설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연.,수원 화성.
당시, 배다리는 효의 상징이고 모든 백성에게 큰 구경거리.
훗날 그가 유배지 강진에서 1808~1817년 쓴 <경세유표>
'순조 8 ~ 17' 10년동안 쓴 미완성 작.,경세유표.
그 저서에서 ‘남도경영’을 주장하였던 다산 정약용.
‘남도의 섬을 잘 다스려야 재물이 숲처럼 일어서리라.’
하였건만, 조정에서의 중론은
낙도는 낙도일뿐.,냉담한 반응.
정약용은 일찌기 젊은 시절부터
'남도경영'의 큰 뜻을 품고 있었기에
1796년 김만덕에게 큰 기대감을 가졌던듯.
김만덕이 왕의 부름을 받아 한양에 올라와 머물 때
수많은 사대부들이 김만덕을 칭송하는 시(詩)를 지었고
시문(詩文)으로 출간된 그 시집에 발문(跋文)을 쓴.,정약용.
'겹 눈동자'는
귀인상(貴人相)을
뜻하는 관상이었을까?
아니면, 대자자비의 현신
관음보살 상으로 여긴걸까?
숭유억불 조선시대 사대부 명문 선비들까지
그녀의 겹눈동자에 관심 쏠린 것은 놀라운 일.
그녀를 거의 신격화한 관점으로 바라 본.,기록들
'햇빛 아래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눈빛.'
'후덕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가진.,관음상.'
김만덕의 중동(重瞳)은.,장안까지 화제거리.
만덕의 한쪽눈이 겹눈동자라는 소문이 장안에 퍼졌다.
'중국 순 임금, 진한 교체기 항우가 있었다.'는.,겹눈동자.
박제가, 조수삼 등이 당시 그녀의 겹눈동자를 부각시켰던 것.
김만덕은 스스로 중동(重瞳)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박제가는 전생에 부처의 마음과 신선의 풍골이 있어
그녀가 '그러한 귀인상(貴人相)을 지녔다.'고 칭송했다.
의녀 김만덕의 인기가
조선시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의녀 김만덕이 한성에 머무는 동안에
한양의 사대부 유명인사들은 "앞을 다투어
그녀를 '한번 만나 보려고 애썼다."고 전해온다.
정조는 재위 동안 창경궁 내 인정전을 사용하였다.
내의원(약방)은 인정전 서쪽 궐내각사 권역에 있었다.
왕이 부르면 항상 달려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내의원.
김만덕의 숙소는 동대문 밖 제기동.,보제원(普濟院).
보제원은 조선시대 동대문 밖에 있었던 국영 여관이며
가난한 백성들을 위한 구휼사업과 의료시술을 베풀던 곳.
김만덕이 의녀반수로 한양에 머무는 동안에
활동반경은 주로 3곳.,창경궁, 내의원, 보제원.
금강산 유람은 미아리고개를 넘어 다녀온듯 하다.
박제가는 그녀의 숙소를 찾아가 시를 써주었다.
정약용은 그무렵에 함께 그녀를 만났던 것 같다.
형조판서 이가환도 그녀를 전송하며 시를 남겼다.
당시 박제가는 청나라에서도 높이 평가하는.,석학.
당시 형조판서 이가환은 정조가 신임하는.,실세였다.
김만덕의 학문 경지가 그들보다 못지 않았던듯 여겨진다.
김만덕이 금강산 유람을 다녀와 한양에 머물때
한번은 한양 악소배(惡少輩) 한량들이 접근하여
유혹하자 단호하게 외면했다. - 이채재 作.,만덕전 -
"내 나이 쉬흔이 훨씬 넘었다.
저들이 나를 곱게 봐서가 아니라
내가 갖고있는 재물이 탐나서들 저런다."
"굶어 죽어가는 이들을 구휼하기도 넉넉하지 못한데
내가 어느 겨를에 저런 탕자들을 살찌울 겨를이 있으랴."
1796년(정조 19년) 초여름, 그녀가 한양에서 겪었던.,일화.
그녀는 제주 객주집과 상단을 거느린 거상.
하인, 홀아비, 남편 여럿을 거느린 여인이라고
한양까지 소문이 자자하게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당시 김만덕은 58세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갓 40세 나이로 보이는 '외모의 소유자' 의녀반수.
그 당찬 모습에 수행한 의녀들이 더 놀랐다고 전한다.
그외, 채제공 이면승 등이 지은.,만덕전.
김만덕 묘비문, 등 23개 번역사료와 원문.
사리봉에 있는 만덕 기념탑과 묘비,
만덕 묘에 세워졌던 동자승 등.
그러나, 그녀가 남긴 기록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의녀 김만덕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본관 김해 김씨, 아버지 김응열, 어머니는 고씨.
김만덕은 2남 1녀 중에서 두 오라비 아래 고명딸.
두 오라비는 '김만석 & 김만제, 아버지는 중개상인.
아버지 김응렬이 육지인 나주로 장사를 나갔다가
1750년 돌아오는 길에 풍량을 만나 목숨을 잃었다.
어머니 고씨는 그 충격으로 몸져 눕고 2년후 운명한다.
오빠 둘은 남자라 먼친척이 데려 갔지만
그녀는 딸이라 누구도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래서 고아가 된 3 남매는 뿔뿔히 흩어졌다.
그당시, 양반의 딸은 30살이 가까워도 가난해서
출가 못하면 호조에서 혼인 비용을 도와주었지만
양인은 딸이 출가 못하면. 가장을 중죄로 다스렸다.
그녀는 부모를 사별한 후 갈 곳이 없어 외삼촌 댁에 기탁.
그해 외삼춘마저 죽자, 김만덕을 돌보기가 어려워진 외숙모.
만덕은 기생 월중선(月中仙)에 보내져 12살에 기적에 올려졌다.
자기 자식이 없는 퇴기 월중선이
데려다 키우겠다고 하여 보내졌던 것.
만덕을 기적에 올리고 자신은 빠져나온듯..
조선시대 관기는 기적에 한번 올려 지면
50세가 되어야 기역에서 해방될 수 있었으며
또한, 딸이라도 대신 넣어야 기적에서 지워졌다.
하루 세 끼니를 따듯한 쌀밥으로
먹는 것만으로 만족했던.,어린 소녀.
기녀로서 교육을 받는 것이 마냥 좋았다.
수양모 월중선은 13세 김만덕이 춤, 노래, 가무 등
예기가 출중하자 제주관아의 관기로 기적을 올렸다.
15세에는 악기, 예의범절, 시와 서예까지 최고의 수준.
어떤 사대부는 김만덕을 보기 위하여
한양 또는 요지의 높은 관직을 마다하고
스스로 제주목사로 좌천 발령을 자원 할 정도.
제주 관기 김만덕의 명성은 한양까지 알려졌다.
제주관아에서는 중앙정부의 감찰관이 자주 내려와
제주목사를 매우 곤란하게 할 만큼이나 인기가 높았다.
재색을 겸비한데다가 춤 노래는 물론이고
악기 다루는 솜씨까지 뛰어났던.,관기 김만덕.
제주는 물론이고 육지까지 그 소문이 자자하였다.
감찰관을 녹이면, 제주목사도 승진할 기회가 생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몸을 함부로 허락할 수 없던.,김만덕.
영조의 밀명을 받은 안찰어사는 한달이 지나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에게 반해 자신의 본분조차 잊은.,안찰어사.
"만덕아!~ 너는 황진이 다시 태어난 것 같구나.
내가 너에게 반해 그만 죄인이 되었구나."., 탄식.
이와 유사한 일들이 반복되자 그녀는 당혹스러웠다.
열 일곱 나이에는
이와 같은 경우에는
'소복을 입었다.'는 일화.
"이 어인.,한밤에 소복이냐?"
"저는 원래 양민이었읍니다.
숙청을 들고나서 자결을 하려고
소복을 입었으니 무례를 용서하소서."
스무살이 넘어가면서부터
기녀 명단에서 삭제해 줄 것을
관가에 호소하였으나 거절 당했다.
뜻을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제주목사' 신광익(申光翼)과
판관 한유추를 찾아가 설득했다.
그러나, 제주목사를 비롯한 관원들의 입장에서는
제주목의 관기를 쉽게 기적에서 지워줄 수가 없었다.
김만덕은 제주목사 신광익의 부인까지 찾아가 설득했다.
마침내, 신광익 제주목사는
"김 만덕의 탄원이 타당하다."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게 된다.
"본래, 양가 출신으로 부모를 잃고
가난으로 인해 부득이 기녀가 되었으나
위로 조상에게 부끄러워 신분 환원이 되면
불쌍한 이들을 돌보겠다." 하여 뜻을 이룬 것.
본래, 그녀는 전라감영 소속 관비.
전라감영에 소속된.,제주 노비들.
그녀의 이름을 적어 놓은.,노비안.
관기도 노비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제주목 소속 관기는 엄격하게 관아의 통제를 받았다.
관기는 연회에 참석하고 관원들에게 수청 들 의무가 있다.
50세 전에 기역에서 해방되려면 부자집의 소실로 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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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24살에 그녀는 기적에서 벗어났다.
12살부터 24세까지 제주 관기로 있으면서도
철저한 근검절약으로 장사밑천을 모은.,김만덕.
관기에서 벗어나 가난한 병자들까지 돌보며
의술을 펼쳐 의녀로서의 명성도 함께 얻은 것.
제주목 관기의 노비 문서에서는 삭제 되었지만
전라감영의 '노비록'에는 노비로 적혀 있었던 그녀.
만덕도 그러한 사실은 뒤늦게 알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민으로 새출발 할때 만난 제주 관아의 통인이.,남편.
제주관아에서 제주목사의 잔심부름을 하던 관리.,고선흠.
당시 제주 관아에 속한 통인 고선흠은 두 딸을 가진 홀아비.
그 남편이 돌림병으로 사망한 이후에
그의 두 딸을 키우며 평생 수절한 그녀.
어릴 때 어머니가 들려준 김천덕 열녀 이야기
그녀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자신으로 인하여
'가문이 천민으로 대우받는 것이 괴로웠다.'던.,김만덕.
훗날, 영의정 채제공이 쓴 만덕전을 살펴보면
'관기 출신이지만 과부로 수절한 일.'을 찬양하고
'뭇 남자들을 일꾼으로 부리면서도.,혼인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고선흠이란 사람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 것 같다.
제주는 풍랑, 난파, 풍토병으로 인한 과부가 많은 지방.
동거인이 한지붕 아래 식구인 경우는 드물어 호칭 "호로방".
과부 여럿이 홀로 사는 "호로방"을 공유하는.,일부다처제 풍습.
능력있는 제주 여성은 여러 "호로방"도 거느렸다.
마치, 조선시대 안방마님이 하인 여럿을 거느리듯.
조선시대 유교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제주 풍습.
그당시 그녀는 한양에서 상당한 관심거리였던 것 같다.
김만덕에 관한 일화와 일거수 일투족 그 자체가 화제거리.
'제주 관기 출신인 김만덕은 어떻게 하여 거상이 된 것일까?'
김만덕은 객주집을 차리고 제주 특산물인
말총· 미역· 전복· 양태· 우황· 진을 한양에 팔고
관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양반층 부녀자의 옷감·
장신구·화장품 등을 염가로 공급하여 천냥 부자가 되었다.
객주는 여관 구실도 했지만
외지 상인들의 물건을 위탁받아
팔거나 거간하는 중간상 역할도 했다.
당시, 신용 있는 상인을 만나기 힘든 때였다.
"장사꾼은 제 부모도 속인다."라고 할 정도로
제주에는 상호 신뢰할 수 있는 상인이 드물었다.
그녀는 판매한 상품을 실은 배가 육지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침몰하면, 다시 똑 같은 물품과 수량을
육지로 보내 주어, 철저히 신용을 지켜 신뢰를 쌓았다.
12살에 기적에 올라 24살에 관기 기적에서 지워질 때까지
제주를 왕래하던 8도 거상들과 친분을 폭 넓게 쌓았던.,기생.
관기일때 출장 온 한양 관리들과도 두텁게 친분을 쌓았던 덕분.
관기 김만덕의 예기와 매력에 빠져
중앙정부 관리가 제주목사를 자청하고
제주목에 눌러앉은 관리도 있을 만큼.,인기.
송도 명기 황진이를 능가한다는 소문이 돌며
그녀를 찾는 손님들이 구름과 같이 몰려 들었다.
1762년 24세에 양인이 되어 객주집을 연 김만덕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외가 친척 고씨의 도움을 받아
제주 여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객주집을 창업한 것이다.
만덕이 상인들과 공물관리 녹이기는 식은 죽 먹기.
관기 시절에 사귄 부자들을 불러 단골고객으로 유치.
거상은 각별한 후배 기생을 불러 환대하여 사로잡았다.
육지 거상들이 그녀와 거래하기 위하여
다투어 그녀의 객주집을 통해 제주를 왕래.
정치, 경제, 물가, 물류 동향, 고급 정보를 제공
김만덕은 불과 1년만에 거금 1000냥을 벌었다.
당시, 150냥이면 경복궁 궁궐 옆 고급 주택 가격.
김만덕은 객주집을 열때 빌린 돈을 다 갚게 되었다.
그후, 미역 말린 건어물을 쌀때 대량으로 구매.
저장해 놓았다가 성수기에 내놓아 돈을 벌었다.
장사를 시작한지, 3년 만에 선단까지 거느린.,거상
그녀는 객주를 중심으로 관기 시절의 경험을 살려
제주의 양반층 부녀자에게 육지의 옷감이나 장신구
화장품을 팔고 제주 귤, 갓의 재료 등은 육지에 팔았다.
그녀가 객주집과 상단를 운영하는 동안에
육지에서 온 물건들은 그녀가 가장 먼저 만났고
제주를 떠나 육지로 가는 물건들은 그녀가 배웅했다.
그녀는 관가의 물품도 조달하게 되었고
'포구주인권'을 획득하여 포구 유통을 장악.
객주집 단골 무역상들과 함께 중계무역도 했다.
그녀의 객주집에는 늘 단골 무역상들이 붐볐다.
그녀는 객주집에서 무역상들의 숙식을 제공하였고
중계 무역에 필요한 물품 수매까지 직접 맡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역관들이 자주 들렀던.,제주.
'조선, 일, 청' 3국 항로의 중간지점.,제주.
그녀가 운영하는 객주집과 상단은 항상 붐볐다.
의녀에서 거상으로 변신에 성공한.,김만덕.
27세 제주에서 최대상단과 선단을 소유한 것.
그녀가 그때까지 실천해왔던.,자신의 생활 철학.
'풍년에는 흉년을 생각하여 근검절약하고
편안하게 사는 이는 고생하는 이를 생각하여
하늘의 은덕에 감사하면서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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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정조 14)부터 1794년(정조 18)까지 5년 간
제주도에 흉년이 들어 제주도민들이 기아에 허덕였다.
1791년 겨울부터 1792년 봄까지 비한방울 내리지 않았다.
들에는 쑥조차 말랐고 여름이 되자 유랑민이 늘어났다.
퀭한 눈으로 먹을 것을 찾아다니다가 함부로 풀을 뜯어 먹었다.
풀독이 오른 사람들이 여기저기 길가에 허수아비처럼 처박혀 쓰러졌다.
이해에만 무려 600명이 주린 배를 안고 죽어갔다.
1794년 봄이 되자 반가운 비가 내렸다.'이젠 살았다.'
논밭을 일구는 이들의 눈이 밝아졌다. 그것도 잠시였다.
1794년 8월 27부터 다음날까지 세찬 바람이 불었다.
기왓장이 달아나고, 돌이 나뭇잎처럼 마구 날아다녔다.
곡식은 바람에 꺾였다. 바닷물이 날아와 논에 들이닥쳤다.
벼가 바닷물에 김치처럼 절었다.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날아가거나
물에 잠겨 흩어졌고 가을이 되자
제주는 죽음의 섬으로 돌변해갔다.
1792년 이래 잇따른 흉년과 태풍 피해로
수많은 제주도의 백성들이 굶어 죽어갔다.
의녀 김만덕은
'제주목사 이철운이
3년째 덮친 제주의 흉년에
재해민 피해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환곡을 낭비한 죄로 압송되는 것도 목격.'
이해 9월에 조정에서 파견한 어사
전 제주목사 '심낙수'가 실태를 조사.
조정에 최악의 제주 기근상황을 보고하고.
조정에 긴급지원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린다.
'온 섬을 비가 쓸어버릴 것 같아서
어디가 어디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1794년에는 바람과 해수 피해를 입자
제주목사 심낙수가 9월17일과 10월23일에
연달아 구휼미 2만섬을 조정에 요청한 일이 있다.
'당장 2만여섬의 곡식을
배에 실어 보내지 않는다면
제주백성들은 다 굶어 죽을 것.'.
1795년(정조 19년) 을묘년,
탐라에 큰 기근(饑饉)이 들이닥쳐
많은 백성들이 서로 베고누워 죽었다.
임금께서 배에 곡식을 싣고 가서
그들을 구제하라고 명을 내리셨다.
그후로 고래등 같이 파도치는 풍랑 속으로
돛단 배 범선(帆船)들이 베틀 북처럼 오갔지만
때를 맞춰 제주에 도착하거나 이르지는 못하였다.
1795년(정조 19년) 윤2월, 2차 구호곡 5천섬.,출발.
곡물을 실은 배들이 제주로 가다가 12척 중 5척이 침몰.
800리 머나먼 제주 바닷길도 풍랑으로 끊겨 고립된.,제주도.
그해에는 곡창 전라도에서도 가뭄으로 흉년.
망망대해 속에 고립되어 '죽음의 섬'이 된.,제주.
텅빈 객주에 앉아 이러한 광경들을 목격한., 김만덕.
구휼미 운반비가 곡물 가격보다 많이 드는.,제주.
전국적으로 굶주린 백성들이 많아 조정에서 내려오는
구휼미를 더 이상 기대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
제주목 관아 소속의 관기에서
주막을 열어 의술을 펼친 의녀로
그후 또 다시 거상으로 거듭난 김만덕.
'내가 지금까지 돈을 번 까닭이 무엇이던가?'
'나에게 돈벌게 해준 사람들은 이들이 아니었던가?'
'이들이 이대로 모두 죽는다면 내가 무슨 수로 살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보릿고개가 다가오는 제주에 펼쳐진 굶주림의 참상.
김만덕은 재물을 처분하여 급히 1000량을 마련하였다.
곡물을 사기 위해
풍랑 속에 배를 띄워
강진으로 건너가게 한다.
강진 상단을 통해 구입한 곡물을
제주까지 무사히 실어나르기 위하여
자신이 소유한 배를 풍랑 속에 띄운 것.
김만덕은 객주에 앉아 먼 바다를 바라보며
곡물을 실은 배가 무사히 도착하기만 기다렸다.
마침, 하늘이 도와 배가 무사히 제주로 돌아왔다.
'한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뚫고
고래등 같은 풍랑을 헤치고 돌아온.,곡물 배.'
김만덕의 눈에서 안도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천금을 들여 구입한 곡물 500 석 중에서
50석은 친척과 은혜 입은 이들을 우선 살리고,
450석은 관가에 보내 도민 구호곡으로 내놓는다.
이때 제주 내 곡물 가격은
육지의 곡물 시세보다 10배였다.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 같은 구호곡.
부황(浮黃)난 도민들이 이 소식을 듣고
제주목 관청 뜰로 구름 같이 몰려 들었다.
관아에서는 완급을 조절하여 나누어 주었다.
1794년 (정조18년) 갑인년에는 흉년으로 아사.
1795년 이듬해에는 각종 질병 및 돌림병으로 병사.
제주도민 10만 중 3만 인구가 굶어죽고 병걸려 죽었다.
굶주림이 질병을 낳고
병자의 시신이 돌림병을 낳고
흉년이 아사(餓死)를 낳는 악순환
"갑인년에도 마실 물은 남았당."
"갑인년 흉년에도 살아 남을 사람."
고난의 대명사 "갑인년."이.,1794년.
그때 굶어 죽어가는 이들을 살려낸 곡물이
김만덕이 사재을 털어 마련했던 구호곡이며
갑인년 보리고개를 무사히 넘기게한 식량이다.
이때가 1795년 5월인데
무슨 까닭인지는 몰라도
그해에는 김만덕의 선행이
조정에 보고되지 않은 것 같다.
'정조실록'에는 만덕의 선행을 적은 날자가
'1796년(정조 20년) 11월 25일'로 되어 있다.
그당시 제주목사가 장계를 올려 조정에 보고.
'제주의 기생 만덕이 재물을 풀어서
굶주리는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였다.
상을 주려 하였지만 만덕은 사양하였다.'
정조는 제주목사 이우현에게 어명을 내렸다.
'김만덕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아 보고 보고하라.'
남자라면 벼슬을 내렸겠지만 여자라 소원을 물은듯..
이에 김만덕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소원을 말한다.
"한양에 올라가 임금님 계시는 궁궐을 멀리서 우러러보고
천하의 명산인 금강산 1만 2천 봉우리를 구경하는 것이옵니다."
그 소원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조는 그녀를 궁궐로 불러들였다.
1796년 가을에 그녀는 관원의 안내로 배를 타고 한양에 11월 도착.
'제주~해남'은 뱃길로 그곳부터 강진, 수원 거쳐 역마로 한성 입성.
정조의 어명으로
천민이 역마를 타고
한성까지 입성한 것이다.
조선 역사 상
이러한 사례는
전무후무한 기록.
선혜청에서 숙식을 제공 받았다.
평민은 궁궐에 입궐 할 수 없으므로
내의원 의녀반수(醫女班首)직을 제수.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에는 모두 3개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김만덕이 상경 후 쓰인 것으로.,'11월 24, 25, 28일'자
11월 24일 기록은 정조가 채제공 등을 편전에 불러
김만덕이 금강산 구경으로부터 제주로 귀향할 때까지
각종 편의를 제공해 주도록 '비변사'에 왕명을 내린 내용.
11월 25일 기록은 정조의 명에 따라 만덕에게 진휼청에서
한양 체재기간의 양식과 비용을 지급하고 내의원에서
행수의녀로 임명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11월 28일 기록은 정조의 명으로 만덕전을 짓게 하는데
그중의 하나인 '서준보'의 만덕전 전기를 수록했다.
서준보는 만덕을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나오는
진시황 때 '파촉의 여인' 청(淸)에 비해 칭송한다.
청은 과부였음에도 여러 대에 모은 재산을 지켜냈다.
진시황은 그녀를 정조가 굳은 여인으로 여겨
여회청대(女懷淸臺)를 지어 주었다.
만덕전은 정조의 명으로
이희발과 김희락도 지어 올렸다.
이희발은 만덕이 의협심이 걸출한 여협(女俠)으로 칭송
김희락은 만덕의 의기가 협사전(의협심 있는 이들의 전기)
에 넣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고 찬탄하였다.
"저는 부역을 덜어 주시는 것도
상을 받는 것도 원치 않사옵니다.
저는 천인(賤人)이며
해도(海島)에 태어나서
왕도(王都)의 궁궐이 얼마나 굉장한지
성곽 안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
보지 못하였습니다."
"또 들으니,
금강산은 명승으로
천하의 제일이라 신선들이 살명
중국사람들도 보기를 원한다고 하니
이몸이 상경하여 유람하고
발이 명승지를 밟아보는 것이
저의 오랜 소원입니다."- 김만덕 -
(이희발 作 '만덕전'에서 발췌)
.........................................
그녀는 궁궐에 들어가 만조 백관들 앞에서 정조를 알현하였다.
1796년 늦은 봄에 영의정 채제공과 선혜청의 배려로 금강산을 유람.
그녀가 금강산을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원도 감찰사가 편의를 제공했다.
채제공은 정조 재임 때.,최고 실권자.
채제공은 1790년에 좌의정에 제수되었고
이때에는 3년동안 영의정과 우의정이 공석.
삼정승을 겸임할 만큼 정조가 신임한.,채제공.
정조가 왕세자일 때부터 스승이었던.,채제공.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세자일 때도.,스승.
채제공은 정조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지켜준.,은인.
정조는 특별히 규장각 관료를 비롯한 신하들에게
교지를 내려 <김만덕 전기>를 쓸 것을 지시하였다.
김만덕에 관련된 기록은 여러 자료에서 전해지고 있다.
정조의 어명으로 입궐한 김만덕을 수차례 만난.,채제공.
김만덕의 입궐에서부터 금강산 유람까지 기록으로 남겼다.
정조실록을 비롯해 체제공이 쓴 번암집(樊巖集) 내 김만덕전
그외,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탐라기년(耽羅紀年) 등.,기록물.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善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다.’
채제공이 김만덕과 헤어질때 직접 써주었던 글귀.
김만덕이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제주로 돌아할때
채제공은 자신이 쓴 김만덕전과 글씨를 선물한 것.
형조판서 이가환도 그녀에게 송시(頌詩)를 지어 헌정.
'만덕은 제주의 기특한 여인인데
육십 나이지만 사십 나이로 보이네.
천금으로 쌀을 사들여
백성들을 구제하였으니
바다 건너 궁궐을 찾았구려.
한번은 금강산을 보기를 원했는데
임금께서 날쌘 역마를 내려 주시니
천리를 번쩍하고 강원도로 옮겨갔네.
제주 여인으로
육지에 오르기는
그녀가 처음이네.
높은 기품은 오래 세상을 밝히겠지
사람으로 태어나 이름을 이와 같이 높이니
여회청대(女懷淸臺)로 이름은 어찌 몇이나 있으리.'
- 이가환 -
송시(頌詩)란 '공덕을 기리는 시(詩).'
헌정(獻
김만덕(1739∼1812년) 보다
2살 연상인.,형조판서 이가환.
.................이가환(1742∼1801).......................
정조로부터 ‘정학사(貞學士)’라 호칭될 만큼 대학자.
정약용(1762~1836)은 이가환의 학문에 대해 높이 평가.
1784년, 이가환은 천주교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벽과 논쟁.
1791년, 신해박해를 계기로 광주부윤으로서 천주교를 탄압
1795년, 주문모 신부 입국사건에 연루되어 충주목사로 좌천.
1801년(순조 1) 이승훈, 권철신 등과 함께 한., 천주교 순교자.
..................................................................................
.
김만덕이 금강산 유람후 한양에 돌아오자
병조판서 이가환이 만덕에게 헌정한.,시(詩).
그가 쓴 헌정시에서 싯귀 한구절이 눈길을 끈다.
'돌아오니 찬양하는 소리가 떠나갈듯 하고
높은 기풍은 오래 머물러 세상을 맑게 하겠지.'
그당시 김만덕의 명성은 한양에서 나날이 높아갔고
이미 세상의 귀감으로 오래 남을 것으로 예견되었다.
그당시 의녀 만덕의 선행은 '정조실록'을 비롯하여
영의정 채제공, 병조판서 이가환, 정약용이 글로 칭송.
정조실록에는 그녀가 '제주 기생.,만덕'이라고 적혀있다.
그래서, 그녀가 조선시대 양인으로
신분이 회복되었는지 의문을 남긴다.
명기 홍도(紅桃)는 만덕을
자랑스러워하며 시를 읊는다.
女醫行首眈羅妓
萬里層溟不畏風
又向金剛山裡去
香名留在敎坊中
행수 의녀는 탐라의 기생이라
만리 길, 높은 파도도 겁내지 않네.
이제 또 금강산으로 유람 길 떠나며
꽃 같은 이름을 교방(敎坊)에 남기네.
정조로부터 조선 제일의 명기로 칭송 받았던.,홍도.
'정조~순조 22년' 약 30년간 활동하였던.,예인 최계옥.
그당시, '정조의 장인' 국구(國舅) 박원준 소실이던.,홍도.
박준원이 정치의 정상에 있을때 11년간 동거한 후,
훗날, 그가 고인이 되자 상례(喪禮) 후,고향 경주로 내려와
궁궐에서 익힌 실력으로 후진 양성에 전념한 동도악부 사종(詞宗).
홍도가 자랑스럽게 싯귀에서 표현한.,'행수의녀'.
'女醫行首耽羅妓(여의행수탐라기) & 교방(敎坊)
김만덕이 제주 관기 중 제일 나이가 많은 행수이며
'의녀반수' 벼슬을 하사받은 의녀 및 교방의 우두머리.
정조 때, 교방에서 최고참 우두머리 행수는.,만덕.
그 다음 서열로는 그당시 가장 명성이 높았던.,홍도.
행수는 관례 상 가장 나이 많은 현역 관기가 맡는다.
조선시대 왕이 참석하는 다리밟기 행사
정월 대보름 한양의 다리밟기 행사에 참여한 김만덕.
채제공은 태평성대 일이라며 시(詩)를 지어 화답한다.
김만덕이 '행수의녀' 관직으로 궁궐 행사를 주도한 것.
행수는 직위는 낮지만 왕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는 관직.
여러 비주부(妃主府) 및 왕자부를 숙위하며, 각종 의례에서
의장(儀仗)을 서는 일 등이 행수의녀가 맡는 중요한 임무이다.
'행수의녀'는 병조 예하 무관(武官)의 품계와 관직이지만
왕, 왕비, 왕자, 세자비, 조정의 관료들과 가까이 지내는 관직.
김만덕은 '행수 의녀'로서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한듯 여겨진다.
'당대 명기' 홍도가 그녀를 자랑스럽게 여길 만큼.
'제주관기 출신' 객주집 여주인이었던.,거상 김만덕.
왕과 대소 신료들은 그녀의 능력을 직접 목격하였던듯..
'김만덕의 명성이
명불허전(名不虛傳)은
아니었구나.' -대소 신료들.
금강산 만폭동
춘삼월, 그녀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만폭동, 중향봉 등 명승지를 두루 살펴보고
난생 처음으로 금불상을 보고 공양하고 배례(拜禮).
제주도에는 사찰이 전혀 없어 김만덕이 58세에
금강산에 와서야 처음으로 사찰과 금불상을 본 것.
그무렵 8도 명산의 사찰들은.,오늘날 산장(山莊) 격.
중들이 그녀를 가마에 태워
금강산 유람을 안내한.,기록.
그당시, 강원도 감찰사의 영향력 덕분이었을까?
그녀가 들른 사찰마다 후하게 공양을 한 때문일까?
아니면, 구휼미 선행으로 1천1백 생명을 구한 때문일까?
그녀는 안문령을 넘고
유정사를 거쳐 고성으로 내려가서
삼일포에서 배를 띄워, 통천 포석정에 오르니
천하의 아름다운 경관은 다 본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곳에서 한양으로 돌아온 며칠 후,
내전(內殿)에 들러 귀향의 뜻을 아뢰자
정조는 예전과 같이 그녀에게 상을 내렸다.
이때는 김만덕의 이름이 이미 장안에 퍼져
그녀를 한번 만나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체 높은 사대부 유명인사들까지 그녀를 찾았다.
그무렵 그녀는 조선에서 가장 인기높은.,유명인사.
여성에게 엄격한 유학자들까지도 그녀를 칭송한다.
그중 한사람이 실학자 '규장각 검사관' 박제가(朴齊家)
당시 박제가는 명성이 청나라까지 알려진.,석학.
김만덕이 곧 고향 제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숙소로 직접 찾아와서 詩(시) 4수를 선물로 써주었다.
왕의 부름을 받아 한양으로 올라와
임금님이 계시는 대궐 구경도 하였고
꿈에 그리던 금강산 유람까지 이룬 그녀.
그녀가 왕이 하사한 의녀반수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 하던 일을 계속 하겠다고 하자
조정 관료 및 한양 사대부들이 그녀가 가는 길을 배웅한다.
정조가 그녀에게 내린 역마에 높이 앉아
겸손하게 손사래치듯 손 한번 흔들고나서
쏜살같이 말을 몰아 제주로 돌아온.,김만덕.
특별히, 김만덕의 선행에 감동하였던.,정조.
떠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던 은혜에 감읍하여
그후로 평생 그 손을 비단으로 가리고 다닌 김만덕.
궁궐 내 의녀들의 우두머리.,의녀반수(醫女斑首席)
평민 신분으로는 궁궐을 출입할 수 없어 왕이 내린.,관직.
김만덕은 '의녀반수' 관직으로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를 배알.
그뿐 아니라 중전과 함께 세자빈도 알현.
"여자의 몸으로 의롭게도 굶주린 백성들을
헤일 수 없이 구하였으니 참으로 기특하구나.'
'한낱 여자의 몸으로 의기(義氣를 내어
기아자 1,100명을 구하였으니 기특한 일.' - 정조 -
채제공이 김만덕에게 내린 선물.,만덕전.
영의정이 일개 관기의 일대기를 쓴 책이다.
500년 조선 역사 상, 이러한 사례는 전무후무.
채제공의 쓴 만덕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김만덕이 한양에서 제주로 돌아오기 전 날에
채제공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목이 메였다.'는 대목.
"이제 작별함에 있어
어린 여아(女兒)와 같이
울고 있는 까닭이 무엇이냐?"
"이승에서는 다시 상공의 얼굴
그 모습을.,뵈올 수 없겠읍니다."
채제공은 정조의 정치 개혁 파트너로서
그당시 이 제주의 여인에게 관심이 깊었다.
김만덕이 상경한 직후부터 교분을 쌓았던 터.
"너는 탐라에서 백록담 물을 떠마시고
이제 금강산도 편답하였으니 이는 천하에
조선의 수많은 사대부들도 경험 못한 일이다.
진시황과 한무제가 모두 해외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다고 말하였다.
한라산은 영주산, 금강산은 봉래산이다."
만덕은 王의 마음에 ' 찍은 여인.,玉(옥).
채제공은 김만덕에게 옥가락지와 더불어
자신이 직접 쓴 만덕전을 송별선물로 주었다.
'채제공이 해마다 82세까지' 오른.,관악산.
83세에는 오르지 못했고 84세에 운명한다.
채제공은 만덕과 헤어진지 4년 후에.,운명.
.............채제공(蔡濟恭, 1720년 ~ 1799년).....
'영조 후반~ 정조' 남인의 영수로 정조의 최측근.
정약용, 이가환 등의 정치적 후견자이자 사도세자 스승.
사도세자 측근이었고 그 아들인 정조의 측근이자 스승.
정조 즉위 후 남인의 영수로 중용되어 요직을 역임하였다.
천주교에 온건 정책을 폈고 1790년에 단독으로 국정을 보좌.
................................................................................
1795년 이때, 채제공은 78세였고. 김만덕은 58세.
정조와 채제공은 김만덕을 개혁 파트너로 여긴 것.
만덕전에는 민생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담겨져 있다.
김만덕은 평생 혼인하지 않고 홀로 살았으며,
죽기 전에 가난한 이들에게 남은 재산을 나눠주고
양아들에게는 살아갈 정도의 적은 재산 만을 남겼다.
돈을 옳바르게 버는 방법과
돈을 쓰는 방법을 전수하였으니
그녀가 갖고 있던 전부를 넘겨준 셈.
자신이 평생 모은 전부를 내놓은
김만덕을 당대의 사대부들이 칭송.
1812년 10월 22일 74세를 일기로 운명.
.........................
..........................
김만덕 (1739년~1812년 )
순조 13년에 향년 74세였다.
정조(1752년~1800년)
재위기간(1776년∼1800년).
정조 보다는 12년 연상녀이지만
정조 보다 12년 더 살았던.,김만덕.
..........................................
...........................................
1840년 제주에 유배 중이던 김정희는 '김만덕의 3대손 김종주에게
‘은광연세(恩光衍世: 은혜로운 빛은 길이 빛나리.)’ 현판을 써주었다.
의녀 김만덕(1739∼1812) 사후에 귀양 온 김정희(1786~1856)가 쓴 글.
2014년 '김만덕의 6대손' 김균 기증으로
170년 여만에 세상에 모습이 드러난 현판.
그때까지도 제주도에서는
고인 김만덕에 관한 훈훈한 미담들이
제주도민들 사이에서는 가라앉지 않았다.
29년이 지나면
강산도 세 번이나
변할 만큼., 긴 세월.
...........................
김만덕은 한양을 다녀온지 16년 후인 74세에 운명.
관기 출신 여성으로는., 조선시대 역사 상, 최장수 기록.
관기 때, '승마술로 뭇 남심(男心)을 사로잡았다.'는.,김만덕.
오늘날까지 제주 관기 시절의
김만덕에 관한 일화가 전해온다.
그녀가 관기일때 제주 관아에서는 승마를 익히게 하여
조정에서 관리가 출장 내려오거나 연회 행사가 있게 되면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는.,마상술을 볼거리로 제공하였다.
"官妓能調馬"
'관기능조마.'
제주 관기는 말을
능히 조련할 줄 안다.
한번 채찍을 들면 삼월에 돌아온 봄풀 우거진 석성가로
넓은 바닷가 백사장 넘어 말 타고 질주하는.,절세 미인들.
그중에서도 눈에 띄일 만큼 날렵하게 말을 달리던.,김만덕.
허공을 가르는
한마리의 고니 처럼
선이 곱고 날렵한.,몸 맵시.
갓쓰고 붉은 가죽옷을 입고 검은 말을
전후로 내달리는 마상 기술이 놀라웠다.
제주 목관이 그녀를 보내 일부러 연출한 것.
영조때 유배인을 호송해왔던.,의금부도사 신광수.
풍랑이 심해 배가 떠나지 못하자 위로공연을 한 것.
'제주목'의 서쪽에 있는 명월진성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관기 김만덕은 가무, 예기는 물론이고 승마, 미모까지 출중.
월중선은 그녀를 제주 최고의 기생으로 키울 욕심이 발동하여
관아에 관기로 적을 올려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관기가 되었던 것.
김만덕은 12살 어린 나이에 관기가 된 이후에도
주어진 여건 속에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던 흔적들.
제주 관아를 대표하는 관기로서 명성을 떨친듯 여겨진다.
12살에 기적에 올라 24살에 기적에서 지워졌다면
조선시대 꽃관기에 비교해 보면, 사실 상, 많은 나이.
당시 제주 관기 24살이면, 삼패기생으로 일해야 할 나이.
그러나, 김만덕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또 다시 자력으로 개척해 나아갔다.
관기였던 그녀가 24살에 객주집을 차리고 여성사업가가 된 것.
1739년(영조 15년) 아버지 김응렬, 어머니 고씨
2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나 12살에 부모를 잃고나서
어려움을 겪으며 돈을 벌어 '세상에 도움을 주겠다.'.,결심.
여러 가지 장사를 하여 천냥 부자가 되었고
늘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며 독신으로 살았다.
1792년 정조 16년부터 4년간 제주에 큰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는 사태가 발생하여 나라에서도
제주에 도움을 주려 곡식을 보냈으나 수송하던 배가 침몰.
제주도민들의 굶주림 사태는 차츰 더 심각해져갔다.
나라에서는 최선을 다하였지만 제주까지는 거리가 멀고,
풍랑이 심한 바다가 항로를 가로막아 제때 도와줄 수 없었다.
만덕은 천금을 내놓아 곡식을 사다가 배고픈 백성들을 구제.
많은 제주도민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기에, 만덕을 칭송했다.
관기 출신 객주집 여주인이 천금을 내놓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당시 제주목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자, 정조는
“김만덕을 불러서 그 소원을 물어보고 특별히 시행하라.”
왕명으로 교지가 내려지자 이에 김만덕은 몹시 기뻐하였다.
“한양에 가서
임금님이 계시는 궁궐과
금강산을 구경할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요즘 관점에서 보면, 대수롭지 않은 소원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사회 기강을 송두리채 뒤흔드는 소원.
천민 신분이지만 궁궐에서 왕을 직접 만나고 싶다는 요청.
더불어, 한달 이상 걸리는 금강산 유람을
관기였던 천민 여성이 왕에게 부탁을 한 것.
조선 개국 이후, 역사 상 처음으로 벌어진 일.
조선후기 금강산 유람은 사대부 선비들의 시대적인 조류.
이곡., <동유기>. 남효온., <유금강산기> 등이 지침서였다.
김만덕에게 기행문은 접할 수 있어도 금강산 유람은 꿈 같은 일.
정조가 어명을 내려 그녀의 소원을 묻고
"특별히 실행하라."는 교지까지 내려오자
그녀는 가슴 속에 담아둔 소원을 토로한듯..
'그래서, 그녀의 선행은
조정에 뒤늦게 보고 되었고
정조가 뒤늦게 알게 된것 같다.'
그녀는 어떠한 연유로 인하여
한양에서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까지
한양 사대부들에게 관심거리가 되었을까?
제주의 특이한 풍습들이
한양에서는 흥미로웠던듯.
그녀의 결혼 생활부터
과부로 수절하게 된 과정도
조선시대 유교관과 전혀 다른 탓.
남존여비 조선시대 유교관념 하에서
남자와 마주치는 눈빛조차 당당했던 그녀.
'겹눈동자' 귀인상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조선시대 제주도민은
대부분 천민 신분으로 묶여
'출륙(出陸)금지령' 법에 따라
제주에서 육지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제주도민은 양반, 중인, 천민 등
조선시대 신분 차별에 대한 개념이 모호하다.
그래서, 육지와 제주의 생활, 풍습은 전혀 다르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이국적인 풍경., 제주도.
'흑돼지 우리' 담위에 높이 있는 개방식 화장실.
볼일 보는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대화도 자연스럽다.
조선시대 유교관 시각으로 보면 놀라운 일.
고려 때부터 왜구의 침입 약탈이 잦았던.,제주.
살아남기 위해서는 볼일 보면서도 망 봐야 하였다.
제주 여성은 시부모님이나 친정 부모님이
홀로 남으셔도 건강 하시면 모시지 않는다.
단, 병들어 운신 못하시는 경우에만 모신다.
워낙 척박한 환경이라
돌림병, 풍토병 등이 극심한 편.
옛부터 후손이 끊긴 가문이 많았다.
하여, 한 가족의 몰살을 막기 위한 예방조치
제주도민에게는 오랜 세월 굳어진 전통적 풍습.
제주 여성은 생활력 강해 실질적인 가정의 가장이다.
집안의 대소사는 가장인 제주여성이 대부분 결정한다.
즉, 실질적으로 가정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가정의 가장.
제주해녀들은 대부분 한 가정의 가장.
척박한 제주도 환경에서 살아 남으려면
딸린 식구들을 굶기지 않는 사람이 곧 가장.
한겨울 바다물 속에서 알몸 조업하는 제주해녀.
해녀는 수련에 따라 기량이 달라 계층이 있다.
하군으로부터 중군, 상군, 대상군으로 올라간다.
해녀계층에 ‘군(軍)’자를 사용하는 것이 흥미롭다.
안전을 위해 대상군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제주 해녀들.
단체로 알몸 조업도 강행한다.
물속에서 오랫동안 숨 안쉬고 일하려면
물의 저항을 최소한으로 줄여야.,안전한다.
특히, 겨울철에는 생존을 위해 알몸으로 조업.
조선시대 유교관으로는 이해 못할.,광경.
저체온증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비상 대책.
제4빙하기 후, 인류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 비법
혼욕은 동아시아 화산지대의 공통적인 전통 풍습.
그녀는 제주도민을 대신하여
제주의 풍습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양의 사대부들에게 대변한듯 하다.
'김만덕은 왜 금강산에 가서야
금불상을 처음으로 본 것일까?'
1만8천 미신들이 주민들과 공존하는.,제주.
미신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사는 가족.
부엌에도 있고 뒷간에도 있고 장독대에도 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혼이 된 고인들과 악령들.
산자와 이미 죽은 자와 악귀들이 공존하는.,제주.
조선시대 육지에서는 더욱 이해하기가 힘들었을듯.
제주 특유의 전통 풍습들, 방언까지 독특하여
조선시대를 지배한 유교관과 상반되는.,제주도.
특히, 제주 여성은 국법으로 육지 왕래를 금했다.
약 100년전.,조선시대 제주 해녀.
인조 재위 때부터 제주 여성은., 출륙(出陸) 금지령.
섬에서 나갈 수 없고 육지 남성과 결혼할 수도 없었다.
하여, 조선 후기 제주 여성은 더욱 육지로 나갈 수 없었다.
조선개국 후 300년이 지난, 1703년 제주목사 이형상.
제주도민은 공자, 맹자, 유교 서원은 관심조차 없었다.
뱀, 귀신, 도깨비 등을 섬기는 신당 129곳에서 미신이 만연.
거기에다가 제주목사 이형상을 기절초풍하게 한 것은
해녀들이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해산물을 채취하는 풍습.
엄격한 유학자였던 이형상은 제주 풍습을 강압적으로 바꾸는 조치.
129곳 신당을 모두 불태웠고
해녀들의 알몸 잠수를 금지했고.
동성동본 간 혼인을 법으로 막았다.
제주목사로 있던 2년 반 동안
일부다처 및 남녀 혼욕을 엄금.
500 사찰과 500 신당을 없애 무당과 승려를
모두 귀농시켜 유교 이념을 실현한 제주목사.
그외 제주도 시조인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세 형제를 모신 삼성(三聖) 사당(祠堂)을 세워
모든 관원이 제주도민과 함께 참여해 제사 지냈다.
제주목사 이형상의 제재와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의 독특한 풍습과 미신은 개선되지 않았다.
하여, 제주 여인은 아예 육지로 왕래할 수 없게 한 것.
그리하여, 김만덕은 제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그당시, 제주에는 사찰이 한곳도 남아 있지 않았다.
1792년 정조 때는 제주 인구의 감소를 막기 위하여
제주 여인은 아예 뭍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시기였다.
의녀 김만덕도 지켜야할 법(法) 앞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그녀는 출륙 금지령 벽을 무너뜨리려 한걸까?'
당시 관리들은 불과 100석 미만 곡식을 기부한 대가로도
현감(종6품)등의 벼슬을 얻거나 높은 관리로 진급을 하였다.
그러나, 기생 출신 김만덕은 어떠한 댓가도 받은 적이 없었다.
1795년(정조 19년) 태풍이 불어 제주도민 1만명 아사.
태풍의 영향으로 최악의 흉작이 들이닥친 때문이었다.
제주도민들은 자연환경때문에 자급자족할 수 없는 환경.
김만덕은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에게 직접 숙식을 제공.
'함께 살아야 한다.'는 동반성장 철학을 몸으로 실천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았던.,의녀 김만덕.
그러한 소식을 뒤늦게나마 알게 된.,정조.
그녀의 선행 규모가 엄청나서 보고가 늦어진 것.
관기였던 일개 객주집 여주인으로서는 통 큰 기부행위.
그당시 평민은 궁궐에서 왕을 직접 뵐 수 없기에
예궐할 수 있도록 김만덕에게 의녀반수 벼슬을 하사.
그녀가 궁궐에 들어와 자신을 만날 수 있도록 조치한다.
의녀(醫女)반수란 의녀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명예직 관직.
의녀반수는 '의녀 행수'라고도 한다
1796년( 정조20년) 김만덕의 나이 58세 때
정조가 하사한 의녀반수 벼슬직을 제수 받았고
왕명으로 배를 타고 관원 안내를 받아 제주를 출발.
해남에서 말을 타고 강진 영암 정읍 공주 수원 거쳐 한양.
1796년, 대신들과 궁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정조를 알현
1797년 봄, 영의정 채제공과 선해창의 배려로 금강산 유람.
그녀가 제주에서 육지로 나와 궁궐에 도달할 때까지 처럼
정조는 말을 보내고 각 군현 역마다 숙식 편의를 제공했다.
더군다나 그녀의 제주 백성들을 구제한 공로로 인해
부친은 평민으로 사망했음에도 가의대부(종2품)로 추증.
오라비도 가선대부(종2품 하계)가 되어 가문에 광영을 입었다.
그녀의 구제 활동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이 <만덕전> 전기를 작성.
형조판서 '이가환'이 김만덕을 칭송하는 시를 썼다.
당시 김만덕의 선행이 알려지자 제주도민 뿐만 아니라
영의정을 지낸 채재공, 병조판서 이가환, 신학자 박제가,
후세에는 김정희 등 지식인들까지 사후 그녀를 칭송했다.
금강산 유람에서 돌어온 그녀는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 제주로 다시 내려와 객주집 사업을 계속했다.
그 후 김만덕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자선사업을 계속하여
“만덕할머니”로 통칭되어 오다가, 74세 나이로 운명하였다.
의녀 김만덕을 기리기 위하여 제주시 사라봉 모충사 기슭에는
만덕을 칭송하는 묘탑, 기념관, 옛 무덤에 세웠던 비석이 있으며,
만덕제 행사를 실시하여 김만덕의 근면, 자주, 박애 정신을 이어간다.
조선시대 제주도민을 구해 낸
의녀(義女) 김만덕(1739~1812).
조선시대 여성 거상이었던 김만덕.
1739년(영조 15년)에 태어나
1751년 돌림병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자 기녀 수양딸이 된.,그녀.
그녀는 20세에 기녀 생활을 청산하고 객주업에 손을 댔다.
객주는 여관 구실도 했지만 물건을 위탁 판매하는 중간상 역할.
그녀는 상업적 재능을 발휘하여 50대에 이르러 굴지의 재력을 발휘.
여성은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서야 바깥출입하던 사회에서
그녀의 성공은 조선 역사상 가장 주목받아야 할., 여성 사업가.
1794년(정조 18년) 거듭되는 자연재해로
제주도민들은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을때
김만덕은 전재산을 털어 제주도민들을 구한 것.
그당시 출륙금지령이 내려져 있던 제주도의 천민들.
사·농·공·상 중 말업(末業)으로 천시되던 상업을 통해
거부(巨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 재산을 환원.
그녀는 변방·여성·천민·상인 최말단의 조건에서
국가·남성·양반·관료도 하기 힘든 구휼 활동을 했다.
출륙금지령 하에서 꿈도 꾸지 못할., 육지 나들이.
그뿐만 아니라 임금 알현, 금강산 유람까지 이루어낸
최고경지의 인간사를 경험한 제주여성의 표상인 김만덕.
그녀는 자신을 얽어맨 봉건적 굴레에 도전,
상도(商道)의 모범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굶주린 이웃을 위해 임종하기 전에 전재산을 환원.
1812년(순조 12년) 10월 12일 74세를 일기로 운명한
옛 묘소는 제주시 동쪽 사라봉 위쪽 언덕에 모셨다가
도시계획으로 도로가 나면서 현재 모충사로 옮겨졌다.
칠순에는 몸이 비대하고
키가 크고 말씨가 유순했다.
후덕한 분위기에
눈은 쌍거풀이다
임금님이 잡으셨던 왼쪽 손목을
비단으로 감싸서 늘 살빛을 감추었고
흰머리와 얼굴 빛은 희여서 부처라 불렀다.
의녀 '김만덕'의 묘.
제주시 건입동 모충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공원
그 안에 1977년 제주도민이 세운 사당.,모충사.
조선 후기 흉년에 제주도민을 구휼한 김만덕과,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순국한 열사들의
충성스런 마음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명명된.,모충사.
1909년 제주 의병 항쟁을 이끌었던 고사훈과
승려 김석윤 등의 뜻을 기리는 ‘의병항쟁 기념탑.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비, 김만덕 기념탑 & 기념관.
1976년 김만덕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제주시 건입동 387-4 (사라봉길 75.)
해마다 사회 봉사에 공헌한 제주도 여성을 선정
만덕봉사상을 수여하고 있으며 또한 모충사에서는
매년 10월에 김만덕을 기리는 만덕제를 거행하고 있다.
2003년 11월에는 김만덕기념사업회 발족.
제주시 건입동 산지천변.,김만덕(1739∼1812년) 객주 터.
2015년 5월에 복원공사를 완공한 이후에.,개관 될 예정이다.
제주시 산지천면 동문시장은 제주 최대 공설 재래시장
이곳은 조선시대 제주도를 출입하는 관문이던.,산지 포구.
한라산에서 발원하여 제주항을 통해 바다로 나가는.,산지천.
...................산지천......................
병문천 한천과 더불어 제주시 3대 하천
하류는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구간이다.
현재, 산지천의 하류에는 뱀장어, 은어, 숭어,
학공치, 밀어 등 어류가 서식하며, 또한 해오라기,
쇠백로, 흑로, 왜가리, 청둥오리, 괭이갈매기 등 서식처.
산짓내(山地川), 산젓내(山低川) 또는 가락천(嘉樂川) 등.
제주도 여러 고문헌에도 많이 등장하는 하천 중 하나이다.
예로부터 특히, 산지천 하구는 ‘산포조어(山浦釣魚)’라 하여,
낚시를 즐기는 것 자체가 영주10경에 속할 정도로 운치 있는 곳.
하류 구간은 조선 시대 때 제주목의 읍성과도 관련이 깊은 곳이다.
즉, 하류 구간은 최초 읍성 축성 과정에서는 성 밖에 두었으나
전시에 식수 조달이 어렵다고 하여, 뒤에는 성 안으로 들여 축성
산지천은 탐라역사의 발상지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오늘날에는 제주시민들의 친수 공간이자 문화 공간으로 이용.
산지천은 건입동 산지포구에서 부터 시내를 관통하며
삼성혈과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사이를 지나 이도1동까지
이어지는 하천으로 한라산 북사면 해발 약 720m 지점에서 발원.
.....................................................................................
제주시의 아라동, 이도동, 일도동을 차례로 흘러
하구 건입동 제주항을 통해 바다로 나가는 산지천.
지금은 제주항이 크게 확장되어 예전과 달라졌지만
원래 이 금산(禁山) 앞이 바로 산지 포구가 있었던 곳.
옛부터 제주 상권의 중심지였고 새벽 어시장이 유명한 곳.
산지천 주변은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였기 때문에,
하천 주변에 많은 유적지를 비롯한 관광명소가 분포하고 있다.
하천 하류는 제주항과도 연결되기 때문에
제주항, 임항로 부근 또는 동문로터리.,버스.
제주시내 탑동 중앙로, 관덕로는 걷는게 좋다.
산지천 상류에는 관음사를 비롯하여 탐라목석원, 산천단,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신산공원, 제주 삼성혈, 제주성지 등.
산지천, 산지포구, 제주항 여객터미널은
'제주 올래길 18 코스'로 지정되어 인기가 높다.
새벽 고기배들이 포구로 몰려들면.,청정 수산물시장.
1063년부터 '제주~ 목포'를 왕래한
제주 산지포구 나무배였던.,덕남호.
출륙금지령
조선 개창 이후에 중앙 집권화가 안정기에 접어들며
15세기에 이르러 제주에 대한 중앙정치의 간섭도 강력.
그 지나친 간섭은 제주도민들을 유민(流民)으로 내몰았다.
제주유민은 전라도 경상도 해안과 심지어
중국의 해랑도(海浪島) 지역까지 떠돌았다.
당시 제주유민들에게는 특별한 명칭이 따라 다녔는데,
'한라산의 별칭' 두독야지(頭禿也只), 두모악(頭毛岳) 등.
혹은 해산물을 채취하여 생활한다고 하여.,포작인(鮑作人) 등.
조선시대 제주도민이 제주를 떠나야 했던 원인으로는
중앙 관리와 지방 토호의 이중 수탈, 왜구의 빈번한 침입,
제주도민들에게는 과중한 진상과 그에 따른 부역의 증대 등.
세월이 지나갈수록
제주 유민의 수가 증가
제주 인구는 감소하였다.
조선 중기 제주도민이 제주를 떠나는 것을 금지한 정책.
15세기 조선 정부의 중앙 집권화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제주에 관한 중앙 정부에서의 통제 및 간섭도 강력해져갔다.
남자는 부역, 공역, 군역에 얽메이어
여자가 생계 및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고
노동력이 부족하면, 여자도 부역에 동원되었다.
조정의 지나친 행정 및·경제적 간섭은
제주도민을 유민(流民)으로 내몰았던 것.
조상 대대로의 고향을 등지고 떠나게 한 것.
가장 큰 이유는 온갖 명목의 잦은 수탈 때문이었다.
감귤 진상, 전복 등 해산물 진상, 부역, 공역, 군역 등.
해가 거듭될수록 제주유민은 증가하고 제주 인구는 감소.
조선 정부 입장에서 제주는 지정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무시하지 못할 효용 가치가 있었다.
일본과 중국을 잇는 거점으로서 방위 전략 상 중요.
경제적으로는 명과의 말 무역에 있어.,말 생산지.
제주 지역의 특산물 또한 조선시대에 중요한 자원.
감귤 등 농산물, 전복 등 해산물, '말 소' 등 축산물.
조선 중기, 제주도민이 제주를 떠나 제주 인구 감소로
특산물의 진상, 군액의 축소 등이 심각한 과제가 되었다.
1629년(인조 7) 8월 13일 조정에서는 출륙금지령을 실시.
공무에 해당하는 사람만 육지를 오고갈수 있었고
그 관문도 '조천진 & 화북포구' 만으로 제한하였고
특히, 제주도민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
여자가 출륙하는 것은 더욱 엄격하게 금지.
특히, 제주 해녀에게는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조정의 입장에서 효과적인 유민 정책이었지만,
제주도민들에게는 육지와의 단절로 고립을 초래.
조정의 강화된 수탈은 '양제해 모반.' 등을 불렀다.
또한 탐라국 시대 해상을 왕래하며
무역하던 배를 만들던.,조선 기술과
배를 다루던 항해 기술이 단절되었다.
범선의 운항은 금지되었고,
떼배 만 어장 인근을 맴돌면서
고기잡이 물때를 기다려야 했다.
'1629년(인조 7) 8월 13일 ~ 순조 말,1825년'
200년 간 출륙금지령에 묶여 살았던 제주도민.
출륙금지가 풀리자 과감히 탈출을 시도한 건 제주해녀.
해조류 채집을 위해 제주해녀들이 해외까지 뭍으로 진출.
그전까지는 몰래 뭍으로 진출하여 일했던 것이 고작이었다.
1880년 경남 울산 방면으로 진출한 것을 시작으로,
서해·남해·동해 바닷가는 제주 해녀의 차지가 되었다.
15세기 때부터 남해안으로 ‘출륙이주(出陸移住)’하며
그들이 꿈꾸던 ‘이어도’를 그려보곤 했던 제주 해녀들.
"이어도 사나~" 제주민요에는 그녀들의 아픔이 담겨있다.
조선시대 제주도민을 섬에 고립시켰던., 출륙금지령
제주 언어의 독특한 고유성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고
민간신앙 및 제주 전통 풍속이 보존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