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교리는 교리가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과 사랑으로 살아간 자들이 지켰다/ 최종원
니케아 공의회가 개최된 325년에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개최된 381년까지의 역사적 과정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지만, 그중에서도 교회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이런 아타나시우스의 삶이었다.
그가 삼위일체 논쟁에서 결국 승리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과정 속에서 고난을 감당한 그의 삶이 결국은 삼위일체에서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을 지켜 냈기 때문이었다. 차가운 신학이 아니라 삶의 근본 혹은 본질을 지켜 낸 것이다. 그리고 세 사람(교부 대 바실리우스, 그의 동생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찬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갑바도기아 교부들이 삶 속에서 자신의 신학과 신앙을 지켜 냈다. 교회를 지키고, 신앙의 본질을 지키고, 기독교를 세속의 오염으로부터 지켰다. 그러한 삶의 실천 때문에 이들은 위대한 갑바도기아인으로 기억된다.
오리게네스나 테르툴리아누스가 신학적으로는 매우 뛰어나지만,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와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학문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쌓은 것을 넘어서, 고난의 신학, 삶의 신학을 형성했기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피상적으로 흘러가는 교회의 흐름만 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회를 공인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소망을 찾기 어렵게 된다. 교회가 세속화하면서 급격하게 변질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율리아누스 황제는 탁월한 통치력으로 로마를 안정시켜 가면서 로마를 다시 이교 신앙으로 돌이키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 가운데에도 역사가 기억하고 주목하는 자들은 제국과 결탁하여 세력을 휘두르던 세력이 아니다. 수차례의 박해 속에서도 올곧게 신념을 지켜 간 아타나시우스와 같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발견되는 의외성은 역사의 진보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이들의 삶은 오늘날 우리가 돌아가서 회복해야 할 교회와 신앙의 근본이 무엇인지 제시해 주고 있다. 니케아 공의회와 삼위일체 신학이 교리적이고 이론적인 논쟁 같으나 역사가 기억하는 삼위일체를 지킨 자들은 차가운 교리가, 변증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핍박하는 자에게 축복하고, 따뜻한 가슴으로 나환자들을 돌보고, 지성을 자랑하지 않고 겸손히 수도사의 삶을 살아간 자들이었다. 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의 삶으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또 이러한 역할을 누군가가 계속 치열하게 또 치밀하게 감당해 나가야 한다.
- 최종원,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PP 284-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