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헵번은 1929년 5월 4일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네덜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6살 이후 부모님이 이혼을 해서 어머니와 함께 네덜란드와 영국을 떠돌며 살았습니다.
오드리 헵번의 부모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처럼 번지던 우익 파시즘의 신봉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발레를 좋아했던 오드리 헵번은 발레리나를 꿈꿨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70cm에 달하는 그녀의 큰 키는 발레리나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쟁 후까지 계속된 가난은 그녀가 헛된 꿈을 꿀 여유를 주지 않았습니다.
발레로 다져진 우아한 몸매와 귀엽고 발랄한 외모를 가졌던 오드리 헵번은
1950년 21살에 마리오 잼피 감독의 '낙원의 웃음'에 단역으로 출연하였으나
주목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후 프랑스 소설가 콜레트 여사의 눈에 띄어
브로드웨이 연극 [지지]에 전격 캐스팅되어 연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후 최고의 스타 자리에 오르게 한 작품 [로마의 휴일]에서 앤공주 역할을 훌륭하게 해냅니다
오드리 헵번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1953년 작품인 [로마의 휴일]에서의 연기를 통해
세계적인 스타로 부상합니다. 영화 속 그녀의 의상과 헤어스타일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이 작품으로 오드리 헵번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합니다.
이 후 그녀는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작품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조지 큐커 감독의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또 한번 자신의 매력을 발산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1989년작 [영혼은 그대 곁에 (올웨이즈)]에서 오드리 헵번은
주인공을 돕는 천사 역할로 출연합니다. 이 작품은 오드리 헵번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였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이 작품의 출연료 대부분을 유니세프의 기금으로 기부하였다고 합니다
오드리 헵번, 그녀의 화려한 배우로써의 삶 뒤에는 따뜻한 인간적인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진하여 유니세프 쪽에 의사를 전달하였습니다.
구호를 위한 기금 모집이 절실했던 유니세프는 대스타인 오드리 헵번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환영했죠.
그녀는 즉시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유니세프가 원하는 곳이면
그곳이 오지든, 전장이든, 전염병 지역이든 어디든 갔습니다.
일 년 보수 1달러에 출장지로 가는 경비와 숙박비 외에는 그 어떤것도 제공되지 않는
유니세프 친선대사 활동에 오드리 헵번은 온 힘으로 매달렸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나이를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활동으로 건강이 매우 안좋아졌습니다.
1992년 11월, 오드리 헵번은 로스엔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직장암 진단을 받습니다.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3개월뿐이었죠. 그녀는 은퇴 후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993년 1월 20일,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아들에게 남긴 아름다운 글...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야 하며,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져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