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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시대, 밉지만 그래도 이웃사촌 일본
일본과 우리는 작은 해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옛날부터 오늘 날까지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항상 부대끼고 있음에도 지난 시절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쓰라린 역사로 인해 친근감 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적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아니면 국수적인 우월의식으로 그들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동안 그들은 철저히 우리를 탐색하여 지금은 무역의존도가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고, 고대로부터 영향을 주어오던 우리의 문화가 지금은 일본 문화의 역류현상으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일어나고 있음도 사실이다. 거리적으로 볼 때 일본의 큐슈(九州)는 부산에서 213Km, 대전보다 가까운 거리이다. 글로벌시대, 밉지만 그래도 이웃 사촌, 일본이다. 한국 스카우트 경북연맹에서 「2004년 일본 속의 한국역사 탐방-북큐슈 문화 탐방」을 한다기에 스카우트 지도자로서 기꺼운 마음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비록 4박 5일간의 짧은 기간이지만 이번 탐방을 통하여 무시와 외면이 아닌 진정 일본의 참 모습을 접할 기회를 가져보기 위해서였다.
첫째 날(1월 27일)
아침 8시, 일행인 영주지구 스카우트 대원 9명과 지도자 8명은 영주시 하망동에 위치한 원마트 앞에서 계약사인 「여행과 사람(주)」에서 제공한 1호차 관광버스에 탑승하여 점촌, 상주, 칠곡을 거쳐 11시, 도청 실내체육관 앞에 도착, 2·3호차와 합류하였다.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인원 점검을 한 다음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12시 30분에 집결지인 언양휴게소에 도착함으로써 대원 38명, 지도자 80명, 연맹 관계자 1명, 여행사 직원 3명 등 총 119명 탐방원 모두가 합류하였다. 휴게소에서 충무김밥과 가락국수로 간단히 점심을 먹은 다음 다시 고속도로를 달려 15시,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하였다. 1층 관광 안내소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출국수속을 밟은 다음 16시, 큐슈의 하카다항으로 가는 카멜리아호에 승선하였다. 카멜리아호는 여객정원 563명, 승무원 45명이 승선하는 대형 여객선으로 현재 한·일간을 운행하는 카훼리 여객선 중의 하나다. 배 안에는 각종 편의시설을 겸비, 쾌적한 바다여행을 즐길 수 있게 하여 선상 세미나와 각종 토론회, 산업시찰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이용되고 있단다. 그래서 많은 사회단체, 수학여행단이 카멜리아호를 이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규모 단위의 가족여행, 신혼여행이나 효도관광 등에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건조한지 오래되어 수명이 다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단체 이용시 배삯도 조금은 할인이 되는 모양이다.
선내 숙소를 배정 받아 여장을 푸는 동안 카멜리아호는 18시 40분 부산항을 출항하였다.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2등실이라 꽤 시끄럽긴 하여도 한번 쯤은 타 볼만하였다. 배멀미를 걱정했는데 배가 워낙 커서인지 괜찮았다. 5∼6m이상의 거친 파도가 치지 않는 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카 멜 리 아 호 에 서 19시 정각에 된장국 비빔밥으로 선내식을 하였다. 먹을 만 하였다. 그런데 식사 후 커피가 생각나 자판기 커피나 한잔 뽑아 먹으려고 했더니 엔화만 사용할 수 있단다. 한일 합작으로 운영되는 배이고 손님들도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인데 우리 돈으로는 물건을 팔지 않는다고 하니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바다 바람이나 쐬이러 갑판 위에 올라갔다. 부산항의 불빛이 자꾸만 멀어지고 있었다. 바다 한 가운데서 보는 부산항은 더더욱 정겹고 아름답게만 보였다. 詩 한 편이라도 쓰여질 것 같은데 밤바람이 차다고 그만 내려 가잔다. 밤 10시가 되니 소등을 하였다. 선실에 있는 베개와 모포를 이용, 잠을 잤다.
둘째 날(1월 28일)
선실에서 새우잠을 자는 사이, 배는 이미 새벽 1시경에 하카다항에 도착했단다. 그러나 8시가 넘어야 배에서 내릴 수 있다고 한다. 세관원들이 출근한 이후에야 입국 수속이 가능하기 때문이란다. 새벽 5시경 잠자리에서 일어나 선내 목욕탕에 가서 샤워를 하였다. 선내 목욕탕은 여느 목욕탕과 같았으며 30명 정도 입욕할 수 있는 규모였다. 아침 7시에 만두국 백반으로 선내 식사를 한 다음 갑판 쪽으로 나가 봤다. 후쿠오카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후쿠오카(福岡)는 일본을 구성하는 주요 네 개의 섬 - 혼슈, 시코쿠, 훗카이도, 큐슈 -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큐슈(九州)섬의 북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후쿠오카현의 중심지로 큐슈에서 가장 큰 도시이고 일본에서는 여덟 번째로 큰 도시이다. 큐슈의 수도라고 부르기도 하고, 하카다라고 부르기도 한다. 후쿠오카시는 원래 나카가와를 중심으로 동부지방을 하카다(상인의 도시), 서부지방을 후쿠오카(무사의 도시)라고 불렀으나 1889년 이 두 도시가 합쳐지게 되면서 후쿠오카로 지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후쿠오"는 공항이나 항구로, "하카다"는 도가이도신칸센(東海新幹線)의 마지막 종착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혼슈(本州)와 큐슈(九州)를 연결해 주는 교통의 요충지이면서 한반도와 아시아 문화를 잇는 교류 창고로써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인구 127만명의 후쿠오카! 선박 편으로 일본을 찾은 여행자들에겐 첫 번째 도시이자 마지막 도시이기도 하다. 8시 30분부터 배에서 내려 입국수속을 밟았다. 어느 나라에 가든지 출입국 수속을 밟는데 쉬운 나라는 없지만 일본은 더더욱 까다로웠다. 한 사람 한 사람 체크하는데 몇 분씩 걸렸다. 9시 30분에야 가까스로 입국절차를 마치고 대기한 관광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후쿠오카 시내에 있는 오오리 공원이었다. 인공 호수 공원이었다. 파아란 하늘 아래 맑은 물, 그리고 잘 가꾸어진 나무들, 그 사이로 난 조깅로! 호수의 둘레만도 2Km나 된단다. 자연 그대로의 미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바다가 가까워서인지 호수 위에는 갈매기들이 수없이 날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공원을 산책하면서 한 잔에 150엔 하는 자판기 커피를 뽑아 먹기도 하고 기념촬영도 하였다. 오 오 리 공 원 에 서 공원을 돌아본 뒤 후쿠오카 시내에 있는 한식집을 찾았다. 메뉴는 돼지고기 불고기였다. 그러나 돼지고기 몇 점과 김치 한 두 조각이 전부였다. 한국 식단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조촐하고 그 양도 소량이었다. 그러니까 음식물 쓰레기는 발생하지 않는단다.
오후엔 구마모토시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잘 뚫려진 고속도로를 달렸지만 우리처럼 그렇게 속도를 내지 않았다. 그저 시속 70∼80Km가 고작이었다. 차창 밖으로 산과 들, 그리고 나직 나직한 집들이 시야에 들어 왔다. 우리나라 처럼 밀집된 아파트나 수십층 되는 빌딩은 잘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이 목재로 지어진 2층집이었다. 지진 때문이란다. 그래서 이 곳 퐁토에 맞게 온돌방이 아닌 다다미방에서 생활 한단다. 그러기에 오늘처럼 햇볕이 쨍쨍 쬐는 날이면 창문을 열어 놓고 이불이랑 요, 그리고 빨래들을 저렇게 널어 말린단다. 밖에 널어도 황사도 불지 않고 공기도 맑아 깨끗하게 마른다고 하였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또 하나 시선을 끈 것은 동네 어귀, 또는 집 근처 여기 저기에 설치해 놓은 납골묘다. 우리나라 같으면 묘지나 납골당이 가까이 있으면 집값이 떨어지니 어떠니 하면서 야단들인데 일본에서는 그런 집들이 값이 더 비싸다는 것이다. 조상이 보호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란다. 어째든 우리와 전혀 다른 장례문화를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 문화의 차이는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묘지 하나 없이 산을 자연 그대로 잘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은 참 좋겠다는 등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버스는 구마모토현으로 접어 들고 있었다. 구마모토현은 큐슈 중앙에 위치한 인구 186만명의 교통의 요지이고 큐슈 관광의 거점도시이다.
여기서 찾아간 곳이 구마모토성이다. 임진왜란때 풍신수길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가토 키요마사(가등청정)가 영주로 있던 시절인 1601년부터 성을 지키기 위해 7년간에 걸쳐 축성하였다고 한다. 성곽의 넓이는 98만㎡ 이며, 그 둘레가 약 9㎞에 달하는 웅대한 성곽으로 성안에는 천수각이 2, 성루가 49개 등 많은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자연의 지형을 이용한 돌담과 아름다운 곡선의 돌쌓기 등 돌담쌓기의 명인인 가토 키요마사가 우리나라의 성 쌓는 기술을 그대로 본떠 옮겨 놓은 것이라 한다. 다만 우리 나라와 다른 것은 우리나라는 높은 산에 축성하는데 반해 일본에서는 평야지대에 성을 쌓고 성 둘레에 수로를 만들어 적이 접근 못하도록 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건물은 1887년 메이지 정권 출현 때 내전으로 거의 다 불타 버리고 현재의 천수각은 1960년에 구마모토시에 의해 재건되어진 것이란다. 성벽의 아랫부분은 완만하게 되어 있지만 위쪽은 휘어진 모양으로 보병은 물론 쥐새끼 한 마리 기어오르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성 여기 저기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많이 서 있었다. 은행성이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많은 은행나무를 심어 적의 공격에 대비를 하였다나? 식수 등 물 부족을 방지하기 위해 파 놓았다는 후루이 우물도 여기 저기에 남아 있었다. 그 당시에는 120여개소나 되는 우물을 팠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것만도 17개소나 된다고 한다. 구 마 모 토 성 천 수 각 앞 에 서 그 깊이도 깊은 것은 40m 정도나 된다고 하니 적과의 장기간 대치에도 거뜬히 견딜 수 있게 축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구마모토성의 중심적 건물인 천수각에 들어가 보았다. 천수각 1층에는 지배층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으며, 2층에는 갑옷, 투구, 가마 등 가등청정의 개인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었고, 3층부터 6층까지는 생활도구 등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7층은 전망대로서 구마모토시를 한 눈에 조감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소산의 웅장한 모습도 바라볼 수 있었다. 내려와 천수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다음 버스에 올라 아소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구마모토와 벳부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아소산이 가까워질수록 길 양켠에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며칠 전에 내린 눈이라 한다. 그러나 날씨는 춥지 않았다. 저 멀리 나카다케 산봉우리가 육안으로 들어왔다. 화산 활동으로 인해 가스가 솟아 오르고 있었다. 마치 산봉우리에 구름이 솟아오르고 있는 것과 같았다. 16시경 국립 아소 청소년의 집에 도착했다. 대연수실에서 수련원 입소에 따른 절차를 밟은 다음 안내 슬라이드를 시청하고 방 배정을 받았다. 5인 1실의 다다미방이었다. 청소년들의 수련 공간이어서인지 좀 비좁긴 하여도 모포랑 집기들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18시경 구내 식당에서 뷔페식 한식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반찬의 종류는 몇 가지 되지 않았으나 깔끔하였다. 역시 밥은 공기에 퍼서 먹었다. 우리의 한식 뷔페와 비교하면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 침실로 돌아와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 공부를 하였다. 동양화, 그 심오한 경지에 빠져들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데 밤 10시가 되니 소등을 하란다. 규율이 엄격하여 하는 수 없이 잠을 청했다. 아 소 청 소 년 의 집 에 서 아 소 국 립 공 원 을 배 경 으 로
셋째 날(1월 29일)
눈을 뜨니 아침 여섯 시였다. 수련원내 목욕탕에 가서 샤워를 했다. 20∼30명이 함께 할 정도의 크기였다. 7시 50분 아침 식사를 한 다음 방 점검을 받았다. 우리 나름대로는 방 청소와 정리 정돈을 반듯하게 하였는데도 1차에 통과 하지 못하고 지적을 받고서야 가까스로 통과하였다. 역시 규율이 엄격하였다.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점이었다. 버스가 떠나려 하자 수련원 종사자 전원이 나와 손을 흔들며 아리가토우 고자이마스(감사합니다). 사요나라(안녕히 가세요)를 연발하였다. 그러는 그들의 모습에서 일본인들의 인사 성과 친절함을 엿볼 수 있었다.
아소 청소년의 집을 나와 세계 최대의 칼데라 분화구로 유명한 아소 활화산과 그 분화구를 살펴보기 위해 아소산 정상 나카다케로 향했다. 산이 높아서인가 우리가 탄 버스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돌아서 올라 가는데 맨 먼저 시선을 끈 것은 잘 조림된 삼나무였다. 화산 활동으로 인해 나무들이 잘 자라지 못하는 산비탈임에도 이 곳의 기후 조건에 맞는 삼나무를 선택, 의도적으로 산림을 가꾸었기에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 산을 뒤덮고 있었다. 뿌리가 깊고 재질이 단단하여 태풍과 폭우에도 잘 견딜 뿐 아니라 목재로도 안성맞춤이란다. 산중턱으로 올라 갈수록 눈이 점점 더 많아지더니 정상이 가까워지니까 온 산야가 흰 눈으로 뒤덮였다. 그래도 정상으로 향하는 도로는 제설작업이 잘 되어 있어 운행에 지장이 없었다. 가지마다 눈이 얼어 완전히 눈꽃이 피었다. 창밖에 펼쳐진 환상적 장면에 모두들 탄성을 연발하는 동안 버스는 화산 로프웨이에 도착했다. 그러나 화산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바라 볼 수 있다는 우리들의 기대는 허사가 되고 말았다. 저기압의 영향으로 분화구에서 뿜어 나온 유황가스가 그대로 머물러 있어 가까이 접근할 수 없단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솟아오른 유황가스가 안개가 걷히듯이 분산 소멸되어야 하는데 기압이 낮은 날은 가스가 공기 중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곳에 와서 활화산의 모습을 보기는 열에 한 두 번도 어렵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버스를 돌려 쿠사센리(草千里)에 있는 휴게소에 닿았다. 눈덮힌 백색의 설원, 우리 나라의 대관령과 그 모습이 흡사하다. 저 멀리 분화구에서 솟아오르는 연무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면서 활화산을 못 보는 아쉬움을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쿠 사 센 리 에 서 아 소 활 화 산 의 솟 아 오 르 는 연 무 를 배 경 으 로
여기서 점심을 먹은 다음 오오이따시(大分市)의 다까자끼야마(高崎山) 원숭이 공원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다까자끼야마(高崎山) 비탈에 있는 자연동물원에 이르자 500∼600마리의 원숭이들이 공원 입구, 나무 위 또는 바위 위에서 자유롭게 놀고 있었다. 먹이를 먹고 있는 놈, 서로 등을 긁어 주는 놈, 새끼를 껴안고 있는 놈 등 각양각색이었다. 관리인이 먹이를 던져 주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원숭이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어 장관을 이루었다 다 까 자 끼 야 마 원 숭 이 공 원 이 곳 고기산(628m)에는 현재 약 2000마리의 야생 원숭이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들 원숭이들은 공원 관리소에서 주는 먹이를 먹기 위해 A, B, C 3개의 무리로 나뉘어져 번갈아 가며 집합장에 나타난다고 한다. 무리들 끼리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 세력이 큰 무리부터 먼저 집합장에 나타난다고 하는데 수백마리의 원숭이들이 내려오고 되돌아가는 모습은 장관이라고 한다. 1952년 오오이따시에서 야생 원숭이의 먹이주기에 성공한 이래 수많은 관광객을 유치,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단다. 원숭이 공원을 둘러 본 다음 온천 휴양지로 알려진 벳부로 향했다.
버스가 벳부시에 들어서기도 전에 벌써 온천지역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온 도시가 수증기로 가득하였다. 옛날 시골 마을에 저녁 연기가 피어 오르듯 수증기가 뭉게뭉게 하늘로 솟아 오르고 있었다. 여기에서 맨 먼저 들른 곳이 지옥온천이다. 온천물이 부글부글 끓는 모습이 지옥을 연상케 한다고 지옥온천이라고 한단다. 여기에는 아홉개의 지고꾸가 있는데 에메랄드빛의 우미지고꾸(해지옥), 붉은 핏빛의 찌노이께지고꾸(혈지옥), 금빛 용이 승천하는 모습의 긴류지고꾸(금용지옥), 악어지옥이라 불리워지는 오니야마지고꾸(귀산지옥), 유백색의 온천수가 특징인 시라이께지고꾸(백지지옥), 돌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가 마치 땅속의 뜨거운 입김처럼 느껴지는 곳인 가마도지고꾸, 뿜어져 나오는 점토가 쌓여서 산 같은 모습이며 온통 수증기로 가득차 있는 야마지고꾸(산지옥), 뜨거운 진흙이 끓어오르는 모양이 마치 "중의 머리"같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보즈지고꾸(본방주지옥), 용이 승천하는 모습 같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다쯔마끼지고꾸(귀용지옥) 등이다. 이 중에서 우리는 우미지고꾸(해지옥)에 들렀다. 청자 빛깔의 바다같은 연못에는 수증기가 솟아올라 안개꽃을 피우고 부글부글 온천수가 끓어 올랐다. 수온이 98도나 된다고 한다. 그래서 달걀을 넣으면 5분만에 반숙이 된다고 하였다. 그 계란을 먹으면 피부가 고와지고 얼굴이 예뻐진다고 하기에 우리 일행도 명반석 유황 온천수에 삶은 계란 한 개씩을 사서 맛을 보았다. 옛날 어떤 여인이 이 계란을 먹고 거울을 보다가 너무나 예뻐진 자기 모습에 놀라 그만 거울을 떨어뜨려 깨뜨려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로 유명하단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명반 온천에서 볼 수 있는 유노하나의 탕화, 유황 재배지다. 해 지 옥 에 서 움막같이 거적을 덮어 놓고 그 안에서 유황명반 가루를 채집하고 있었다. 이 유황가루를 온수와 화합하면 유황온천수가 된다고 관광객들이 많이들 사 간다고 하였다.
18시 뱃부 시가지에 있는 호텔 풍월에서 여장을 풀었다. 꽤 고급 호텔인 것 같았다. 무척 깨끗하고 시설이 좋았다. 객실은 역시 일본 전통의 다다미방이었다. 젊잖은(?) 체면에 왜놈들이 입는 옷을 입어 본다는 것이 좀 찜찜하였지만 일본 문화를 체험해 본다는 관점에서 호텔에 비치되어 있는 기모노를 입어 보기로 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면으로 만든 것을 입었으니까 유카타를 입었다고 해야겠다. 고름이나 단추가 없어 옷을 입고는 천으로 묶었다. 그러기에 옷을 입는데 좀 불편하였다. 그러나 기모노를 입고 총총걸음을 걷는 여인들을 보면 무척이나 섹시하게 보인다. 어떻게 보면 감추었으면서도 보이게 하는 요염한 자태, 그것이라고 할까? 19시, 일본 전통한식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독상으로 차린 상이었다. 꽤 푸짐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식사예절은 어느 나라 보다 엄격하고 복잡하였다. 숟가락은 사용하지 않고 젓가락만으로 식사를 한다. 식사하기 전에는 반드시 잘 먹겠다고 인사를 하고 젓가락을 들어야 한다. 식사 시에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음식 먹는 소리를 내지 않아야 한다. 밥, 국, 차, 작은 접시에 담는 음식 등은 반드시 들어서 입 가까이 대고 먹어야 한단다. 저녁식사를 마치고는 화산과 온천의 나라. 일본에 왔다고 열 일 제쳐놓고 온천수가 펑펑 쏟아지는 호텔 대중탕으로 갔다. 욕탕에 들어가자 온 몸의 피로가 말끔히 풀리는 것 같았다. 일본인들은 언제 일어날 지 모르는 지진의 공포를 무한정 솟아 오르는 온천수로 보상받는 듯 하였다. 대중탕에서 나와 호텔 옥상에 있는 노천탕에 갔다. 이곳에도 온천물이 펑펑 솟아 올랐다. 노천탕에 들어가 하늘을 쳐다보니 초여드렛날 반달이 여기까지 따라 왔다. 저 멀리 벳부만에는 불빛이 찬란하고 인근 건물에선 온천에서 나오는 수증기가 조명을 받아 파아랗게 피어 오르고 있어 너무 아름다운 밤이었다. 온천욕으로 피로를 푼 다음 객실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넷째 날(1월 30일)
아침 8시, 호텔 풍월을 빠져 나온 버스는 벳부에서 후쿠오카 교외로 이동, 디자이후덴만구(太材府天萬宮)에 도착했다. 905년에 학문의 신 스가와라미찌자네를 수호하기 위해 세워진 사찰로 전국의 수많은 덴만구의 총본산이란다. 입구에 이르자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어 발디딜 틈이 없었다. 일본 전국의 학생 및 학부모들이 즐겨찾는 학문의 신사임을 실감 할 수 있었다. 사찰 입구에 만지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 진다는 놋쇠로 만든 황소상이 있었는데 얼마나 많은 관광객들이 소원을 빌며 만졌는지 반들반들 윤기가 흘렀다. 나도 호기심에 한번 만져 보았다. 사찰내의 나무와 건물의 기둥, 벽 등에는 각종 소망을 적은 쪽지가 수 없이 많이 매달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비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 일본과는 너무나 대조를 이루는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었다. 최첨단 과학문명을 자랑하는 일본인들도 그들 특유의 뿌리깊은 신앙, 신사 참배는 가히 광신적이라고 할까? 중앙에 위치한 본전에는 오늘도 소원을 비는 의식 절차가 이루어지는 듯 주문을 외우며 절을 하고 있었다. 현재의 본전 건물은 1591년에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디 자 이 후 덴 만 구 본 전 앞 에 서 경내에는 6000그루나 되는 오래된 매화나무가 있었는데 매화가 만개되는 2∼3월에는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1월인데 본전 앞 매화나무에는 벌써 꽃망울이 부풀고 있었다. 경내 군데군데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놓은 수백년 묵은 아름드리 녹나무가 이 곳의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는듯 하였다. 12시, 본전 뒤 경내에 있는 식당에서 일본식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한 다음 큐슈역사자료관으로 향했다. 구석기 시대 부터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으나 우리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우리의 유물과 비슷비슷하였다. 이어 인근에 있는 김외(金 ) 유적을 살펴보았다. 후 쿠 오 카 에 있 는 김 외 유 적 12,227㎡의 넓이에 옹관묘 91기, 토광묘(土壙墓) 34기, 인골 3체 등이 뒤엉켜 있는 유적 발굴현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고대의 장묘 문화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큐슈에네르기관이다. 학생들을 위한 체험학습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면세점에 들러 쇼핑을 했다. 값이 무척 비쌌다. 한국산 보다 별로 나은 것도 없는데 값은 거의 열 배에 가까웠다. 그래도 일본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올 수 없어 모두들 싼 것으로 몇 가지씩 챙겼다. 마지막으로 하카타항 주변에 있는 하카다 타워에 올라가 후쿠오카 시내를 조망했다. 잘 정돈된 부두와 크고 작은 배들이 오고 가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16시, 하카다항에 도착하여 출국수속을 밟은 다음 부산으로 오는 카멜리아호에 승선, 방을 배정 받고는 갑판 위에 올라갔다. 다시 한 번 후쿠오카 시가지와 하카다항을 바라보면서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데 18시가 되자 배는 서서히 출항하였다. 4박 5일간이었지만 오가는 배에서 보낸 시간들을 빼면 실제론 2박 3일 밖에 안되는 짧은 여정이었지만 참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일본이라는 나라는 부유하나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가난하다는 점이다. 물가도 비싸고, 집도 작고, 길도 좁으며, 차도 대부분이 소형차를 타고 다니는데 세금은 많이 내야 한다니까 말이다. 그러나 일본이 선진국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들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우선 그들의 몸에 밴 친절, 검소한 생활, 자연스러운 질서의식, 깨끗한 거리, 버리는 것이 거의 없는 음식문화 등등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다섯째 날(1월 31일)
아침 여섯 시 잠자리에서 일어나 선내 목욕탕에 가서 샤워를 한 다음 갑판 위로 올라 갔다. 바다 바람이 시원했다. 배는 이미 새벽 1시경 부산항 가까이 도착해 있었던 모양이다. 저 멀리 부산항이 시야에 들어왔다. 반가웠다. 집 떠나 보면 집 좋은 줄 안다고 불과 며칠 떠나 있었는데 고국 땅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부산항을 나는 갈매기만 보아도 정겨웠다. 일본처럼 지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화산의 위험도 없는 나라, 그러면서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 이 얼마나 복 받은 땅, 복 받은 조국인가? 오늘따라 대한민국 국민임이 자랑스럽다. 7시 30분, 된장국 백반으로 선내 식사를 한 다음 9시, 배에서 내려 입국수속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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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직 한창이오이다. 밤마다 동양화 공부도 하시고, 이웃나라 탐구도 곁들이셨다니 말입니다. 뱃길 여행! 감상문도 일품입니다. 감사합니다.
대단한 관찰력과 자료 정리에 감탄하였습니다. 여행에 동참하면서 그져 즐기고 익살스런 얘기하며 관광만하는 줄 나는 알았는데... 시인다운 통찰력에 다시한번 찬사를 보냅니다. 정말 대단해요. 동양화 감상에도 그렇게 바빴는데 이렇게 기억을 되살리고 예리한 소감을 보태어 기행문을 쓰셨네요. 수고 많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