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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수풀孝在
전삼용 요셉 신부님
돌아가기 위해서 성취해야 하는 소명
독수리는 가장 오래 사는 새입니다. 70년까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70년을 살기 위해서는 40살 정도 이르렀을 때 신중 하고도 어려운 결정을 해야만 합니다.
40세 정도가 되면 발톱이 안으로 굽어진 채로 굳어져서 먹이를 잡기조차 어려워집니다. 또 길고 휘어진 부리는 독수리의 가슴 쪽으로 구부러집니다. 날개는 약해지고 무거워지며 깃털들은 두꺼워집니다. 날아다니는 것이 견디기 어려운 짐이 됩니다.
두 가지의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죽든지 아니면.... 고통스러운 재탄생의 과정을 겪어내든지.
아주 긴 150일 동안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절벽 끝에 둥지를 틀고 전혀 날지 않고 둥지 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합니다. 독수리는 자신의 부리가 없어질 때까지 바위에 대고 칩니다.
다 깨어 없어진 부리에서는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새로 난 부리를 가지고 자신의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냅니다.
그리고 새로운 발톱이 다 자라나면 이제는 낡은 깃털을 다 뽑아냅니다. 이렇게 5개월이 지나면 독수리의 새로운 비행이 시작되며 생명을 30년 연장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예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육체를 지니시고 하늘로 오르실 수 있는 이유는 당신 육체는 죄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몸이시기 때문입니다. 몸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듯이, 몸이 없는 예수님도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몸이 썩게 된 것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여, “너는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라는 하느님의 명령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원죄에 물들지 않은 예수님과 성모님은 그 육체가 땅에 묻힐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썩지 않는 몸을 지니셨기 때문에 승천하실 수 있다는 말은 예수님의 승천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당신 소명을 마치셨기 때문에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우리의 소명을 마치면 그리스도처럼 하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이 승천하는 모습이 우리 모든 신앙인의 미래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복음 선포의 완수하지 못한다면 오늘 예수님의 느끼는 기쁨을 맛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처럼 하늘로 오르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제자들에게 당신 복음 선포의 소명을 이을 것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우리 생명을 소진하는 일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새로 나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시간을 거쳐야만 하듯이, 우리들도 우리 자신을 소진시키는 소명을 달성하지 않고서는 결코 부활이나 승천의 새로운 삶을 맛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같은 승천의 기쁨을 맛보도록, 제자들에게도 복음 선포의 소명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저도 신학교 때는 어쩔 수 없이 유학 가서 공부를 하였지만, 사제가 되어서는 유학가기가 참으로 싫었습니다. 다시 학생이 되어 나이가 들어 잘 외워지지도 않는 남의나라 말로 학위를 따와야 하는 부담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다시 나가라는 주교님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과목을 바꾸어서 석사부터 다시 해야 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더욱 나가기가 싫었습니다.
석사를 하면 수업과 시험, 종합시험과 논문을 다시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교님은 주교의 말을 따라야 하는지 한 달 동안 묵상하고 다시 전화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기도하다보니 당연히 주교님의 말씀을 따르라는 대답만 해 주셨습니다.
처음으로 사제가 되어서 받는 신자들의 사랑은 사제가 아니고는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그 행복감에 젖어있는데 다시 유학가라는 것은 마치 지옥에 가야하는 것처럼 싫었습니다.
주교님께 순명은 하지만, 그 때 심정은 마치 신혼 때 전쟁터로 끌려가는 마음이었습니다.
처음 1년은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점심 먹고 나서는 침대에 누워 낮잠을 자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금세 10킬로가 쪄버렸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공부를 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컸고 한 쪽 귀도 잘 안 들리게 되었고 이명까지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고쳐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는 햇빛 알레르기까지 생겨 몸이 점점 안 좋아졌습니다.
이렇게 몸까지 망가지며 힘겨워하는 저의 모습을 보며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절대 쉬운 것이 아님을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다가는 온전한 몸으로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겠다는 불안감도 들었습니다. 몸은 로마에 있었지만 마음은 한국에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마음까지 로마로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주어진 소명을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마음먹었더니 다른 사람들보다는 빠르게 석사 2년, 박사 3년에 모든 것을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오직 돌아가기 위해서만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탈 때의 마음이 오늘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할 일을 다 마치고 돌아오는 느낌은 걸어서라도 오라면 올 수 있을 것 같이 가벼웠습니다. 독수리의 환골탈태하는 시간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저의 유학생활도 쉽지는 않았지만 행복하게 되돌아올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손과 발의 상처를 지니고 승천하셨습니다. 이것이 영광의 상처입니다. 아버지께 자랑스럽게 보여드릴 상처입니다. 당신께 순명하여 받은 상처이고 당신이 구하신 많은 영혼들을 당당히 아버지께 보여드릴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당신처럼 당당하게 당신께 돌아오라고 제자들을 온 세상으로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파견하신 열한 제자는 모두 복음전파를 하다가 그리스도를 따라 순교하셨습니다. 그 분들도 가벼운 마음으로 예수님께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은 3년 가까이 고생했던 햇빛 알레르기가 지금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한국 햇볕을 자주 받으니 처음에는 그렇게 많이 돋아나던 붉은 반점들이 지금은 축구를 해도 돋아나지 않습니다. 저에게 부족했던 것은 한국의 햇볕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날, 예수님께서 마치 해산하는 여인이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가도 새로운 생명이 세상에 탄생하게 되었다는 기쁨에 그 고통을 다 잊는다고 하셨듯이, 하느님은 우리의 노고를 그 몇 배로 갚아주셔서 과거의 고통을 보람과 기쁨으로 남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성모님도 그러한 마음으로 당신 모든 할 일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가야 할 차례입니다. 다시 돌아가기 위한 방법은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이 명령뿐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전삼용 요셉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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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공석 신부
부활 대축일이 지나고 40일이 지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합니다. 부활과 승천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죽음을 넘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곧 승천하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르코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시고 “하늘로 맞아들여져 하느님 오른 편에 앉으셨다.”(16,19)고만 말합니다. 마태오복음서는 마르코복음서를 옮겨 적으면서도 이 부분을 삭제하고 승천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루가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고 베타니아 근처로 그들을 데리고 나가 축복하시고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로 사도행전을 들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장면을 더 분명하게 묘사합니다. 부활 후 40일 동안 자주 나타나셔서 사도들을 격려하신 후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은 같은 사람이 집필하였습니다. 저자는 루가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삶에 대해 기록하고,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의 활동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저자의 기록인데도 두 문서가 전하는 승천 이야기는 서로 다릅니다. 루가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당일에 승천하셨고, 그 장소는 베타니아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고 제자들은 성전으로 가서 날마다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신지 40일 만에 승천하셨습니다. 장소는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는 구름에 싸여 올라가시고 제자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사람 둘이 나타나서 예수님이 같은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승천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 복음서들 안에 없는 것은 부활과 승천이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이 부활과 승천을 굳이 분리하여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사실로 말하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부활을 설명하려는 의도가 작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우주가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있는 죽음의 나라, 이렇게 세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부활은 죽음의 나라에서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돌아온 것이고, 승천은 땅에서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부활과 승천 사이에 40일의 기간을 둔 것은 제자들이 부활을 믿고 복음 선포에 나서기까지 상당한 시일을 필요로 하였다는 말입니다.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을 같은 저자가 집필하였는데, 두 문서에 승천을 서로 다르게 기록한 것은 승천에 대한 사실보도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다는 말은 그분이 제자들을 떠나 하느님에게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위에 군림하지도 않으시고, 당신의 초능력으로 제자들의 활동을 돕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떠나가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겨 놓은 것은 당신에 대한 기억이고, 성령이 곧 오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신 기적이 경이로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대해 제자들이 기록하여 남긴 성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배워 실천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우는 그리스도인인 것은 예수님의 초능력을 배워서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경이로운 일을 하며 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과 삶을 본받아 실천할 때 그분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요한복음서는 말합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그대들은 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고 그대들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14,19).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초능력을 과시하며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초능력을 과시하면 사람들은 그 초능력에 매료되어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굴종시키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의 생명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실천하여 자유로운 당신의 자녀로 살 것을 원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마르 8,11)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은 표징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초능력을 과시하여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하신 나머지 악의에 찬 유대인들의 자유 행사에 압도당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자유를 무시하고 그를 압도하여 자기 뜻을 관철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가 자기의 사랑을 자유롭게 받아 주고, 그 사랑에 호응할 것을 호소하고 기다립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처신이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이 섭리하시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여 떠나가셨다는 오늘의 메시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공동체에는 어느 누구도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위나 권한을 주장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떠나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당신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약속을 남기고 당신은 가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성령이 일하셔서 나타나는 제자들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군림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제자의 정체성은 섬김입니다. 성령이 살아계시는 신앙인의 모습에는 섬김이 보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말은 하늘이 있는 곳 어디에나 예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늘이 보이는 곳 어디에나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은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스스로를 낮추어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자기의 실수와 실패의 죽음을 넘어 하늘을 우러러는 마음으로 새 출발하는 사람들의 삶 안에 승천하신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기억 안에만, 혹은 전례가 거행되는 성당 안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넓은 세상 어디에나 그분이 가르치신 섬김을 실천하고 그 섬김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지고 수고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살아계십니다.
억울함과 고통을 딛고 일어서서 이웃을 섬기는 데에 삶의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의 삶 안에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나자렛, 갈릴레아 혹은 예루살렘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늘 아래 어디에나 성령이 일하시는 곳에, 희생적인 섬김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에, 예수님은 그들의 주님으로 살아 계십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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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운 신부
너희는 왜 빈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냐?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다시 올라가셨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십니다. 하느님 오른쪽,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 천국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이제 우리와 별개의 세상 사람이 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말은 천국의 편안한 의자에 고고한 자세로 앉으셔서 혼자 즐기고 계신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승천하시기 전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 구원을 위해 노심초사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승천은 우선 우리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마귀도 쫓아내고 여러 가지 기이한 언어로 말도 하고 뱀을 만지거나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는 능력은 예수님이 승천하셨기에 받을 수 있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우리 힘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만 올바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승천은 우리 모두와 함께 계시려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버리고 떠나가신 것 같지만 사실은 ‘성령’을 대신 보내주실 계획을 세우심으로써 영원히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하늘만 쳐다보지 맙시다. 그분은 하늘에 머물러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실천되는 곳에 살아 계시고, 그곳에 참다운 삶을 향한 천국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사람들이 있는 곳 어디에나 그분은 늘 계십니다.
교회는 승천주일을 홍보주일로 정했습니다. 주님 부활의 기쁨과 은총을 다른 모든 사람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천사들이 꾸중하시는 말을 다시 한 번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왜 빈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냐?"
우리는 빈 하늘만 쳐다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과 발로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선교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말로 아무리 그럴싸하게 이야기해도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성당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나중에 우리만 하늘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느님께 가야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승천은 우리 일상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가능한 일이고, 그리스도인이 매 순간 각자의 삶 안에서 실현해야 될 과제입니다.
박상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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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대 신부
하늘과 땅의 새로운 의미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로, 즉 그분께서 원래 계셨고, 오셨던 곳으로 다시 올라가셨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이다.
유럽 교회에서는 주님 승천 대축일을 통상 부활 제40일째인 부활 제6주간 목요일에 지내고, 우리나라와 같은 전교지역에서는 부활 제7주일에 지낸다.
예수님의 승천사실은 전하는 신약성서의 기록들을 먼저 살펴보자.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기록은 신약성서에서 단지 세 군데 발견된다.(사도 1,3-11; 루가 24,50-52; 마르 16,19)
마태오와 요한복음에 승천사실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놀랄 필요는 없다. 마태오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따로 갈릴래아의 산으로 초대하신 후,
제자들에게 첫째로 "세상 모든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을 것",
둘째로 "성삼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 것",
셋째로 "예수께서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칠 것"을 지상사명으로 내려주신 다음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함께 있을 것을 약속하셨다.(마태28,16-20)
이렇게 마무리되는 마태오복음은 예수님의 승천사실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이미 장구한 고별사(13-17장)의 틀 안에서 죽음-부활-승천-성령강림을 예고한다.
특히 추가로 편집된 21장은 부활하신 예수의 베드로에 대한 특별한 안배를 통하여 예수께서 가신 길을 베드로도 따를 것을 명하고 있다.(요한 21,19)
마르코복음이 전하는 승천사실도 사실은 후일 추가로 편집된 기록에 속한다.(마르 16,9-22) 이 대목에서 추가편집자는 마태오와 루가복음을 참조하여 부활예수의 발현, 제자들에게 지상사명전달, 예수의 승천 사실을 덧붙임으로써 복음서를 마무리짓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승천사실을 제대로 기록하고 있는 신약성서의 기록은 루가복음과 사도행전뿐이다. 그런데 루가복음을 잘 살펴보면, 예수께서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부활하신 후 바로 그 날 저녁 늦은 시각에 승천하신 것으로 보인다.
즉,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부활, 발현, 승천 사실을 단 하루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도하고 있다는 것이다.(루가 24,1-53) 오직 사도행전만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여러 가지 증거로써 여전히 살아 계심을 보여주셨고, 후기 교육과 함께 성령의 강림을 약속하신 후 11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사도 1,3-11)
결론적으로 복음서들의 직접·간접적인 기록을 통하여 예수께서 승천하셨다는 사실은 확실하나, 부활하신 후 40일째 되는 날 승천하신 사실은 사도행전의 증언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개념을 다시금 정리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 돌아가신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이나, 부활하신 후 40일간 지상에 머무셨다는 것, 성령강림 사건이 유다교의 과월절 후 50일째 되는 오순절에 일어난 사건(사도 2,1-4)이라는 것 등에서 성서저자들이 정확한 시간을 기록하려했다기보다는 3일, 40일, 50일의 신학적 의미를 더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서에서 3일은 무엇을 결정하고 확인하는 의미를, 40일은 회개와 변화를 위한 준비의 뜻을, 50일은 하늘로부터 귀중한 것을 내려 받는 오순절의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하늘과 더불어 살아왔다. 하늘에 빌고, 하늘을 우러러 반성하고, 푸르고 넓은 하늘을 보면서 답답한 가슴을 달래고 살았다.
오늘 우리는 대도시에서 하늘을 우러러볼 여유도 없이, 우리 삶의 일상쳇바퀴에 갇혀서 살아간다. 푸르고 신선한 하늘, 밤이면 별이 쏟아지는 하늘이 우리 삶에서 사라진 그만큼, 하느님에 대한 감수성도 잃어가고 있다. 우리 삶에 숙연함을 주는 체험도 잃어가고 있다.
넘쳐나는 인간 생산품에 시선을 빼앗기고, 정보매체들이 전하는 정보의 홍수에 빠져, 우리는 모두 분주하게 또 고달프게 살아간다. 하늘을 우러러 생각할 겨를도 없고,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여유도 없다.
이러한 때 주님 승천 대축일은 그런 삶이 인간 운명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하늘이 우리 삶에 의미하는 바가 있듯이, 우리가 세상에서 매일 보고 듣는 것보다 더 귀중한 것이 우리 삶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푸르고 넓은 하늘, 우리 마음을 숙연하게 하는 하늘,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하늘의 의미를 되찾게 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절망과 실의에 빠진 병든 이들을 고쳐서 생기 있는 삶의 현장으로 보내셨다. 죄인이라 버려진 이들을 찾아가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하느님의 넓으신 자비 앞에 그들을 숙연하게 만드셨다.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 살아야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행복을 오히려 불행한 것으로 보셨다. 예수님을 재판하고 사형 언도를 내린 유대인 최고 회의와, 그 언도를 확인하고 집행한 빌라도는 잠깐의 승리자였고,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은 잠시 동안은 패자였으나 이제 영원한 승리자가 되셨다.
이 모든 것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자비와 은총의 결과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묵은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고린 5,17). 그리스도 안에 새로움을 체험한 바울로 사도의 외침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가 사는 하늘과 땅에 새로움을 준다. 승천은 하늘 아래 어디에나,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실천되는 곳에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며, 그곳에 참다운 삶을 향한 새로움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당이나 사람들이 거룩하다고 여기는 어떤 곳에 갇혀 계시는 것이 아니다. 푸르고 넓은 하늘이 어디에나 있듯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사람들이 있는 곳 어디에나 그분은 새로운 체험의 대상으로 늘 살아 계시는 것이다.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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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우 신부
승천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로 오르셨다는 예수 승천 대축일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부활과 승천 사이 기간이 40일로 얘기되고 있습니다(사도 1, 3). 40일이라는 숫자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새롭게 시작되는 교회의 시대를 위한 준비를 충분히 닦으신 후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공간의 개념보다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존재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표징은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하느님의 위치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즉 인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인성을 지니신 채로 승천하시어 지금 천국에서 아버지와 영원한 일치를 이루시며 세상 곳곳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임마누엘)의 위치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늘의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가 하늘이다.”라고 말했듯이,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시어 우리 각 사람 안에도 함께 계실 수 있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이때부터 제자들은 주님을 감각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던 시기를 지나, 믿음으로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생활하는 교회의 시대를 열어가야 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볼 수 있는 어떤 것이나 기이한 어떤 사건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만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도는 하느님을 이 지상적인 차원에 가두어 두려는 모습입니다. 보이는 어떤 형상은 하느님의 단편적인 모습만 보여줄 뿐 하느님 자신을 온전히 만나게 하지는 못합니다.
이 지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예수께서 보내주신 성령 안에서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의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볼 때, 모든 것 안에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으나 우리의 인성을 지니신 채로 삼위 하느님의 위치로 가셨기 때문에 같은 인성을 지닌 우리 인간에게도 한없는 영광과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몸인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영적인 깊은 지혜이고 통찰력이라고 바오로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에페소서1,17이하).
즉 그리스도의 인성과 하나 되어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영광과 축복이 얼마나 큰 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영광된 축복은 세상이 뺏어갈 수 없는 희망이라 하였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가 사랑의 삶을 살 때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교회의 시대에 살고 있는 신앙인으로서 그분이 맡기신 인류구원의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하는 사명을 예수승천 축일에 함께 다짐해 봅시다.
이찬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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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환 비오 신부
“네가 하늘에 오를 성 싶으냐?”
(마태 11,23)
성당 꼬마들이 저만 보면 비행기를 태워달라고 졸라댑니다. 타고나면 어지럽다고 하면서도 늘 태워달라고 성화입니다. 애나 어른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늘을 날고 싶은 이러한 인간의 욕구는 비행기를 만들게 했고, 이제는 우주인의 삶까지 예약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옛부터 우리는 예수님, 성모님도 하늘에 오르셨다고 믿습니다. 물론 최첨단 과학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승천(昇天), 천국(天國)의 하늘이 더 이상 물리적인 하늘이 아님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하늘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경외의 대상입니다.
즉 하늘은 사람이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그런 우주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가 닿는 하느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승천하신 주님은 하늘에 오른 것이 아니라 아니 덮은 것 없는 하늘로 표상되는, 아니 계신 곳 없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의 승천으로 두 팔을 뻗어 하늘을 나는 슈퍼맨처럼 하늘을 날고 싶은 욕구가 아니라 하늘과 하나가 되는, 하느님을 닮고 싶은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승천은 우리 인생의 목표이며 희망입니다. 우리는 바로 예수님이 오르시고 걸어가신 그 하늘 길을 가기 위해 살며, 하느님을 닮기 위해, 더 나아가 언제 어디서나 계시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삶과 죽음과 다시 삶의 증인이 되어야 함을 일깨우시며, 회개의 삶을 선포해야 함을 당부하십니다. 바로 그 일이 예수님께서 아니 계신 곳 없는 하늘에 오르셨고,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곳이 없음을 알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기쁜 소식을 “모든 민족들”(루카 24,47)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마르 16,15)에게까지 널리 알리도록 주님 승천 대축일을 홍보주일로 지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전 인류의 구원과 완성을 위하여 홍보 매체를 이용하고, 그 홍보 매체에 인도적 내지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부여하여 인류공영의 큰 기대와 하느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해야”(매스메디아 교령 3항)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람들에게 진실된 정보를 알려 신뢰와 친교와 일치를 도모해야 할 홍보 매체들이 상업주의적인 기업과 정치권력에 길들여져 타락과 불신, 혼란의 주범이 되어 가고 있는 오늘날 현실 안에서 특히 되새겨야 할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본당 내 주 매체인 강론, 주보, 홈페이지 등을 통해서 무엇을 널리 알리고 있는지, 그리고 주님께서 이르신 고난을 겪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야 하는 파스카 신비의 복음을 널리 알리기는커녕 귀찮다는 이유로, 여론만 눈치를 보고 신경을 쓰며 감추고 살지는 않았는지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진리를 옳다고, 현실을 그렇다고 널리 알리지 못하는 우리 자신부터 회개해야 주님이 가신 하늘 길에 오를 수 있는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이르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한반도의 강줄기에 기쁜 소식이 전해지도록 “4대강 사업 반대”를 널리 알리고 외치는 것이 지금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주님의 승천을 고백하고 믿는 것이요, 홍보주일을 맞아 이 세상의 모든 홍보매체의 회개를 선포해야 하는 우리들의 의무인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 향해 외친 주님의 꾸짖음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 성 싶으냐?”(마태 11,23)
교우 여러분, 진정 하늘에 오르고 싶습니까? 그러면 그 하늘이 덮고 있는 주위 이웃들과 피조물의 아픔에 동참하여 그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소식을 나누며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늘에 오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하늘에 오르는 방법인 것입니다.
이경환 비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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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일 유스띠노 신부
하느님 나라 완성을 위한 새로운 출발
"하느님께서 환호 소리와 함께 오르시도다. 주님께서 나팔 소리와 함께 오르시도다.”(시편 47,6)
화답송 후렴구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활의 모든 여정을 마치시고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오르십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이 세상의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임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완전한 패배가 아니며, 끝난 것도 아니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완전하게 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출발을 통해 주님의 여정에 함께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명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라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이제 예수님과 함께한 시간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의 복음 말씀을 배우고, 느끼고, 사랑 받았던 모든 것들을 세상에 나가서, 즉 파견되어 그대로 증언하고 실천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사명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에페 1,17-18
)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 그들이 모여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였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다가올 성령을 준비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성령께서는 우리의 결심을 강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수행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나는 하느님께서 나보다 더 쓸모없는 인간을 찾는다면 그분께서는 그를 통해 더욱 위대한 일을 하실 것임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바로 주님 그분의 일이시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씀처럼 새로운 출발선상에 다가선 우리들에게 힘이 되어 주실 것이고 완성으로 나아가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교황 바오로 6세의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 41항에서 우리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자들의 진정한 생활의 표양”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삶의 구체적인 실천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교회의 충실, 청빈과 희생, 현세 권력에 굴하지 않는 자유, 한마디로 성덕 생활의 표양”으로 완성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교회의 정신이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겨 주신 지상 명령일 것입니다.
윤승일 유스띠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