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00원 공장밥 먹는 사장님, 250억 쏟아 특목고 지었다
카드 발행 일시2024.10.11
에디터
이상재
기업人사이드
관심
성큼 가을이 왔지만 여전히 반소매 셔츠에 멜빵, 짙은 색 바지 차림이다. 지금은 경기도 김포시 월곶으로 이사왔지만, 서울 청계천 시절부터 30년 넘게 고수하는 트레이드 마크 복장이다. 겨울엔 여기에 잠바(점퍼)를 걸쳐 입는다. 아내와 함께 서울 여의도 집에서 출근하는 시간은 5시30분, 하루도 빠짐이 없다.
사무실 겸 창고 한구석에 놓인 책상은 살짝 삐거덕거린다. 모나미153 볼펜 검은색과 붉은색을 하나로 묶어서 쓴다. 나름 운치 부리려고(?) 책꽂이 한켠에 올려 둔 장식용 조화(造花)가 인상적이다. 딱 봐도 “나 구두쇠요” 소리치는 거 같다.
전병두 록스기계 대표가 경기도 김포에 있는 사무실 겸 공장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김경록 기자
전병두 대표 책상 앞에 놓은 볼펜. 그의 업무 스타일을 그대로 보여준다.
30년 넘게 반소매 셔츠, 멜빵 바지 차림
“멜빵을 메는 건 바지가 흘러내려서에요. 배가 나와서 기성복이 잘 맞지 않아요. 허리가 42인치거든요. 물건 들 때도 이런 복장이 가장 편해요. (볼펜은) 보험회사에서 주는 다색 볼펜도 써봤지만, 성능이 이것(모나미)만 못해요. 빨간색 쓸 일이 잦다 보니 테이프로 (검은색 볼펜과) 붙들어 맸지요. 제가 짠돌이입니다. 사실 굉장히 짜요, 허허.”
이름은 전병두(74), 건축용 공구를 생산·판매하는 록스기계 창업자다. 제품 생산부터 주문 접수, 납품을 도맡는 현역이기도 하다.
1950년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에서 태어났다. 당시엔 북한 땅이었다. 아버지는 서울 마포에서 쌀장사를 했는데, 6·25전쟁 때 인민군에게 총살돼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 스물아홉에 혼자 된 어머니가 다섯 남매를 키웠다.
그의 말대로 “똑같이 가난하던 시절이라” 그 역시 가난했다. 경기상고에 다녔는데 1년 만에 그만둬야 했다. 형이 맹장염에 걸려 치료비가 필요했다. 급한 대로 대일철강이라는 철재 도매상에 취직했다.
이게 청계천과 인연의 시작이다. “누구나 그렇듯” 고단하게 일했고, 저녁에는 종로에 있는 학원에 다니며 고졸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 옆 노점에서 100원짜리 수제비로 허기를 채웠다. 밤에는 사무실 철제 선반 위에 조그마한 이불을 깔고 잠을 잤다. 전기풍로에 불이 붙어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있다.
그러다 회사가 부도 나는 바람에 행상을 시작했다. 손수레 위에 이것저것 미제 장물을 올려놓고 팔았다. 이듬해 “운이 좋게도” 경기상사라는 노점을 열 수 있었다. 이때가 1970년 7월 1일, 그의 공구 인생은 올해로 55년째다.
전병두 대표가 1970년대 국산화한 파이프 머신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한때 청계천 공구상가에선 ‘전병두’ ‘록스’ ‘경기상사’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랜 기간 건설 설비공구를 제조·판매해 온 터줏대감이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일을 배워 독립한 ‘제자 사장님’이 30여 명에 이른다. 한겨울만 빼고는 흰색 러닝셔츠와 멜빵바지를 입고 다녀서 ‘난닝구 사장님’으로 더 유명했다. 지금은 퇴색했지만, 1960~90년대 청계천 주변 수표동·입정동·산림동 일대는 소형 기계공장과 공구상가가 밀집한 ‘대한민국 공구 1번지’였다.
“처음엔 이태원이나 동두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중고 건설 장비·공구를 다뤘습니다. 이후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장병들한테서 물건이 들어왔고요. 그때만 해도 국산 장비나 부품은 구하기도 힘들었지만 품질도 조악했어요.”
난닝구 사장님 고백 “내가 봐도 짠돌이”
월~토요일 오전 7시30분 출근, 한시도 가게를 비울 수 없어 짜장면을 배달해 먹으며 일했다. 퇴근해선 장부 정리를 했다. 젊어서 신혼여행 이틀, 4년 전 아들이 티켓을 사주는 바람에 등 떠밀려 떠난 일본 여행 사흘 다녀온 거 빼고는 쉬어 본 적이 없다. 지금도 “여행은 돈 안 드는 관악산이나 남산 둘레길 산책” “외식은 설렁탕”이 공식이다.
워낙 성실하기도 했지만, 록스가 뜬 건 1970년대 중반 서울의 아파트 건설 붐 덕분이다. 당시만 해도 배관용 파이프를 수작업으로 절삭(커팅)했는데 정교함도 필요하고, 힘이 드는 공정이었다. 모양과 굵기가 다른 파이프끼리 나사선을 만들어 연결해야 해서다. 일본 렉스에서 수입해 온 파이프 머신이 불티나게 팔린 이유다.
“일제 파이프 머신을 구해 달라는 요청이 계속 늘어나는 거예요. 중고까지 구해서 5만원, 10만원에 팔았지요. (렉스 제품을) 가만히 살펴보니까 우리도 할 수 있겠는 거예요. 부속품을 하나둘씩 직접 만들었지요. 핵심은 모터였습니다. 일단 현지 제품을 더 구해봐야겠다 싶어서, 형님이 일본으로 날아갔어요. 오사카의 고물상을 뒤져가며 어렵게 구한 기계 부품을 서울로 공수해 오다가 비행기에서 포장이 터져버렸어요. 결국 출발이 늦어지는 소동을 겪었지요.”
5년 걸려 국산화…“이게 사업 효자”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파이프 머신을 국산화했다. 꼬박 5년이 걸렸다. 그러고 나서 30년 넘게 매달 300개의 파이프 머신을 팔았다. 좋은 시절엔 월 500~600개도 주문받았다. 인천 남동공단과 고향인 포천에 공장을 지었다. 파이프 머신으로는 국내 최고가 됐다. 전 대표는 “한때는 건설업자들이 ‘달러 빚을 내서라도 사갔다”고 회고했다. “아파트가 30층이면 높이가 100m쯤 됩니다. 파이프가 사람의 핏줄처럼 들어가니 수요가 폭발했습니다.”
록스기계가 인천 남동공단 공장에서 가동하던 생산라인. 사진 록스기계
브랜드에도 눈을 떴다. 첫 출시 당시 제품 이름은 ‘H-렉스’. “그땐 현대건설이 국내에서 최고로 날렸으니까” 영문 머리글자인 ‘H’를 따온 거다. 일본 렉스가 상표권과 특허 소송을 걸어와 벌금을 물었다. 이후엔 세계적 시계 브랜드인 ‘롤렉스’에서 이름을 따와 로렉스기계공업이라는 법인을 세웠다. 1978년이다. 이번엔 롤렉스에서 항의해 왔다.
“서로 업종이 달라서 회사명으로 로렉스를 쓰는 건 법적으로 문제가 없었어요. 하지만 내친김에 새 이름을 찾았습니다. 그게 ‘록스’입니다. “사실 ‘롤렉스’의 준말입니다. 공구에선 시계의 롤렉스 이상 가겠다는 자부심을 담았지요(웃음).”
요즘 주력 제품은 코어 드릴과 밴드쏘 머신, 하수도 청소기 등이다. 코어 드릴은 콘크리트 벽에 구멍을 뚫어주는 기계다. 밴드쏘는 금속 재료를 자를 때 톱처럼 사용한다. 전 대표는 “기존 금속 절단기보다 소음과 전기 사용량을 줄인 제품”이라며 “지름 300㎜(약 12인치)짜리 파이프를 자를 수 있는 모델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고 자랑했다. 지난해 매출은 250억원가량. 아들인 전튼튼씨가 경영하는 공구 유통업체 매출을 더한 것이다.
“아들은 자기 이름 따서 ‘튼튼’이라는 브랜드로 사업해요. 젊어서 공구 쇼핑몰을 차렸어요. 처음엔 고생했지요. 전기풍로를 대당 5만원 주고 2만 대쯤 샀다가 판매 규제 때문에 온라인 유통이 막혔어요. 나중에 1만5000원에 땡처리했어요. 지금은 잘하고 있습니다. 여기보다 직원도, 매출도 많아요.”
부인은 ‘고속도로 위의 여자’, 무슨 사연
전 대표가 청계천을 지킬 때, 아내인 한수영(67)씨는 포천과 인천에 있는 공장 운영을 맡았다. 한씨는 “새벽 5시에 출근하면서 아이 셋을 키우던 시절”이라고 짧게 말했다. 공장 짓고, 제품 생산하는 일이었다. 한편으론 목욕탕 사업을 제안한 것도, 2000년 포천 공장 화재사고를 수습한 것도 한씨다. 워낙 운전을 자주, 장시간 하다 보니 지인들이 붙여준 별명이 ‘경인고속도로 위의 여자’였다.
전병두 대표(왼쪽)가 주문 전화를 받고 있는 사이에 부인인 한수영씨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두 사람은 목욕탕 사업을 크게 벌였다. 김포와 인천 남동공단, 서울 마포에서다. “그때는 어음 결제가 보통이었어요. 자금 융통이 여의치 않았는데 현금 장사를 하는 목욕탕이 떠오르더군요. 남동공단 지하 250m에서 소금물을 뽑아 ‘해수(海水)탕’이라고 간판을 세우고, 황토 사우나까지 설치했더니 인기가 제법 있었습니다. 김포에선 온천 유원지를 운영했어요. 이게 학교 설립으로 이어졌고요.”(한수영씨)
두 사람이 결혼한 것은 1979년.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난 남편이 말을 꺼냈다. “나중에 학교를 짓겠다.” 학교를 짓겠다?
신혼여행서 밝힌 꿈 “학교를 짓겠다”
“서른 무렵부터 학교 세우는 게 꿈이었습니다. 어렵게 자란 사람은 더 배우고 싶은 한이 있어요. 사실 자식은 ‘집안의 재산’이잖아요. 우리 학교 재학생이 550명쯤 됩니다. 여기에서 잘 자라서 나중에 훌륭한 재목이 되면 좋잖아요. 또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학교 만들어 학생 키우는 게 낫다고도 생각했지요. 사실 자식 셋을 키우면서 부모로서 제 역할을 못 했어요. 하지만 학교를 세우면 다르잖아요. 무엇보다 (자녀가) 말조심하고, 행동도 바르게 하지 않겠어요?”(전병두·한수영 부부)
2000년 초 당시 김동식 김포시장이 ‘외국어고를 유치하겠다’고 말한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전 대표는 바로 전화를 걸어 “내가 한번 해보겠다”고 했다. 마침 2년 전 오픈한 김포 목욕탕이 성업 중이었다. 처음엔 100억원쯤 들겠거니 여겼다. 웬걸 210억원이 넘게 들었다.
신고한 금액만 그렇다는 것이다. 학교 재단에서 건물 공사를 하려면 교육당국 신고→승인 절차를 거치고, 입금이 확인된 후에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성격 급한 전 대표는 사비를 털어 공사부터 시작했다. “일단은 튼튼하게 교사(校舍) 짓는 게 우선”이었다. 남동공단과 포천에 있던 공장 부지를 팔았다. 평생 모은 재산의 절반이었다.
김포외고는 2006년 3월 290여 명의 첫 신입생을 받았다. 교훈은, 사훈과 똑같이 ‘성실’로 정했다. 그는 ‘전병두 이사장’이 됐다. 이때도 그의 근무지는 청계천이었다. 일요일 오후에 학교 나가서 청소 거들어주는 게 이사장으로서 그의 일이었다.
사훈도, 교훈도 하나…오로지 ‘성실’
하지만 김포외고는 설립 직후 엄청난 풍파에 휘말린다. 개교 이듬해인 2007년 11월 입학시험 문제지 유출 사건이 터졌다. 이 학교 교사가 뒷돈을 받고 입시학원에 문제지를 사전에 유출한 것. 전국이 들끓었다. 김포외고에 대한 지정 취소는 물론 특목고 폐지론까지 불거졌다. 수험생 합격 취소 및 합격자 신분 회복 소송도 이어졌다.
전병두 대표가 파이프 머신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전병두 대표가 2007년 당시 청계천 '경기상사'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30년 넘게 고수하고 있는 멜빵 바지는 그의 작업복이다. 김현동 기자
“정말이지 그때는 TV만 켜면 김포외고 뉴스가 나왔어요. 친구들이 우스개로 ‘신설 학교가 1000억원짜리 홍보를 했다’고 위로해 주기도 했어요. 하지만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어요.”(한수영씨)
200억원 넘는 돈을 들여 학교를 세우고도 사회적 지탄을 받은 것이다. 이때도 전병두 이사장은 청계천으로 출근했다. 뉴스를 지켜보면서도 평소처럼 제품 주문을 받았다.
“애초에 학교는 교육가에게 맡겼습니다. 저는 지원해 주는 거지요. 당연히 회사로 출근했어요. 하지만 관리를 못 한 죄는 인정합니다. 그때는 학생들이 더 걱정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전국 단위로 신입생을 선발했거든요. 혹시라도 불안한 마음에 학업을 전념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컸어요.”
현재 김포외고에는 550여 명이 재학 중이다. 교직원은 110여 명. 학생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만큼 운영이 까다롭다. 전 이사장 부부는 지금까지 250억원을 학교에 내놨다. 지금도 한여름에 수박을 썰어서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다.
250억 들여 고등학교 지은 청계천 공구왕
1950년 경기도 포천 생. 경기상고 중퇴 후 고졸 검정고시. 70년 서울 수표동에 ‘경기상사’를 열고 올해로 55년째 공구사업을 하고 있다. 78년 법인 ‘로렉스기계공업사’를 설립한 후 일본에서 전량 수입하던 파이프 머신 공구를 국산화했다. 이후 ‘록스’ 브랜드로 공구 제조·유통 사업 외길을 걷고 있다. 오랜 기간 청계천 공구상가에서 후배 사업가를 키워내 ‘청계천 사부’로 불린다. 2006년 김포외국어고등학교를 설립,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학교 때문에 웃다가 울었지만, 그의 남은 꿈은 여전히 학교다. 김포에 추가로 국제중학교를 개교하겠다는 바람이다. 설립 자금으로 100억원쯤은 내놓을 계획이다. 왜 학교일까. “좋잖아요. 아이들 잘 키우면 훌륭한 법률가도 나오고, 기업인도 나오고…. 이런 보람이 어디 있습니까.”
메뉴는 싼 거…8000원 공장 밥
인터뷰가 이어진 3시간 내내 전 대표의 휴대폰은 쉴 새 없이 울렸다. 그는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그 전화를 받았다. 대개는 크고 작은 철물점에서 걸려온 주문 전화였다. 그는 “네. 내일 아침 무조건 배송합니다” “가격은 60만원입니다”라고 쩌렁쩌렁 대답했다.
그는 왜 이리 분주한 걸까. “우리 거래처가 대부분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입니다. 시간이 금이거든요.” 그러곤 공장 전문 뷔페에서 8000원짜리 늦은 점심을 주문했다.
전병두 록스 대표가 인터뷰를 마친 후 평소 입던 반팔 셔츠와 멜빵 바지로 갈아 입고 회사 문 앞에 서 있다. 이상재 기자
모자왕부터 버스왕까지…알고 보면 ‘창업요람’ 청계천
2004년 복원 공사 중인 청계천. 중앙포토
서울 한복판 청계천은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후 한국의 산업화를 일군 산실이었다. 인근 이태원 미군부대에서 군수품과 중고 장비가 공급됐다. 자연스럽게 기계 장인과 주물·금형 공장이 밀집했고, 교통도 편해 지방에서 사람이 몰렸다. 대량 생산을 위한 시제품을 만들어 주는 ‘만물공장’이기도 했다. ‘청계천에서는 탱크도 만든다’는 우스개가 나왔다.
기술과 장인이 모인 만큼 창업도 활발했다. 공구상가에선 금성풍력(송풍기), 삼영기계(3D프린팅), 록스 같은 실력 있는 제조 기업이 배출됐다. 세운상가에선 ‘국내 컴퓨터 1호 기업’인 삼보컴퓨터와 소프트웨어 회사인 한글과컴퓨터가 첫 둥지를 텄다. 국내 최초로 인터폰을 개발한 코맥스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세계 ‘모자왕’으로 불리는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이 열 살 때 노점상을 시작한 곳도 청계천4가다. 청계천 끝자락 전농동에선 고 권영우씨와 허명회씨가 대원여객을 운영했다. 이후 대원여객은 KD운송으로 이름을 바꾸고, 적극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3000여 대의 버스를 운영하는 국내 최대 버스 운송업체로 성장했다. 지금도 백 회장과 허명회 명예회장의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KD운송은 영안모자 계열사인 자일대우버스를 우선 구매한다. K2 등산화로 유명한 K2도 이곳에서 미싱 3대를 놓고 창업했다. 원할머니보쌈도 1호점은 청계천이었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3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