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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사학도의 시사토론 글방 원문보기 글쓴이: 감사합니다
나는 박대통령의 인간적인 면이 가장 집약적으로 그리고 극명하게 드러난 경우가 육여사 피격사건 때였다는 생각이 든다.
1974년 8월15일의 육여사 피격장면을 나는 관사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보게 되었고 육여사가 피격되었다는 긴급연락을 받고 곧 서울대학 병원으로 달려갔다. 육여사는 국립의료원을 거쳐 서울대학병원 응급실에 옮겨져 있었다. 내가 들어서니 경호원이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는 육여사의 두 다리를 안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경호원은 나를 발견하고는 반가워하는 기색으로 나에게 그 임무를 넘겨주었다. 대통령 부인의 다리를 받치고 있는 것이 황송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던 것 같았다.
오원철의 수기 중에서..
머리에 총탄을 맞은 육여사는 의식불명상태에서 헉,헉하는 불규칙적인 호흡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 20분쯤 육여사가 응급처치를 받고 수술실로 옮겨진 직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 의과대학장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왔다.
뒤에서는 박종규 경호실장이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의 박대통령 표정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핏기가 가시고 검은 얼굴은 샛노랗게 변해있었다. 무서운 인상이었다.
박대통령은 의사들에게 『최선을 다해주시오』라고 단단히 부탁하고는 대통령전용 입원실로 올라갔다.
『총쏘지 마!』
육여사에 대한 수술은 오래 걸렸다.
나는 육여사가 끼고 있던 반지와 머리뼈 파편을 의사로부터 받아 호주머니에 보관하고 있다가 운명한 후에 의사에게 돌려주었다.
머리에 총탄을 맞을 때 욱여사의 머리뼈가 부서지면서 떨어진 것을 수습한 모양이었다.
이어서 공휴일이라 서산 농장에 내려가 있던 김종필 총리가 신직수정보부장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
김총리는 신부장에게 『이것은 한사람이 한 짓이 아닐 것이다. (박대통령이 시승식에 참석하게 돼 있었던)청량리와 영등포 전철역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박대통령은 수술 도중에 수술실로 내려와 의사로부터 『어렵겠다』는 보고를 받고는 오후 4시쯤 청와대로 들어갔다.
육여사는 저녁 7시쯤 운명했다.
육여사에 대한 수술이 시작될 무렵에 갑자기 하늘이 노래지면서 건물벽과 마당의 색깔이 오렌지색으로 변하던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고, 일부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나중에 경호원들로부터 저격당시 국립극장에서 박대통령이 취한 행동에 대하여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총성이 나자 박대통령은 연설대 뒤에서 몸을 낮추었다. 경호원들이 옆에 붙었다.
『잡았나?』 『총쏘지 마!』
이것이 박대통령의 첫 반응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는 순간에도 경호원들이 청중석을 향해 사격을 할 때의 유혈극을 걱정하고 있었다.
육여사가 피격당한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이도 박대통령이었다.
경호원에게『저기 우리 식구한테 가봐!』라고 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연설을 계속하겠습니다』라면서 8 15 경축사를 다시 읽기 시작하였다.
총성으로 중단되었던 귀절 바로 뒷문장을 정확히 짚어내 읽어갔다.
퇴장할 때 박대통령은 육여사의 고무신과 핸드백을 자신이 직접 주워 갖고 나오다가 경호원에게 넘겼다.
박대통령은 독립유공자들을 위로하는 리셉션장에 들러 공식행사를 끝낸 뒤 서울대 병원으로 갔던 것이다.
박대통령은 그 위기의 순간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대담하면서도 세심하게 처신하였다.
공인과 사인의 갈림길에서 보여준 박대통령의 이 같은 태도는 너무나 인상적이었으며 보는 이에 따라 가슴을 아프게 했다.
박대통령을 평하기를 「청탁을 같이 들이마시는 사람」「작게 치면 작게, 크게치면 크게 울리는 큰북 같은 분」이라고 한 말이 있었다.
박대통령은 담대해야 할 때는 무섭게 담대하였고, 자상해야 할 때는 자상했으며, 슬플 때는 누구보다 눈물이 많았던 분이었다.
대통령의 대성통곡..
저녁 7시를 조금 넘어서 육여사의 유해가 청와대에 도착하였다.
박대통령은 까만 양복을 입고 지만군, 근영씨와 함께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해는 청와대 본관1층 영부인 접견실에 안치되었다.
접견실 입구에서 나는 그냥 서서 울고 있는데 박대통령이 갑자기 내 목을 끌어안고는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국무위원들이 옆방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김정렴비서실장이 내 옆구리를 내지르면서 『각하 모시고 이러면 어떻게해』하며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나는 『각하 들어가시지요』라고 하면서 대통령 집무실로 모셨다.
육여사의 유해는 대접견실로 다시 옮겨져 빈소가 차려졌다. 5일장이었다. 박대통령은 매일 새벽에 2층 침실에서 내려와 분향을 했다.
그때 프랑스에가 있던 근혜씨는 장례식 3일 전에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박대통령은 직접 공항으로 마중 나가 딸을 태우고 들어오면서 차내에서 전후사정을 설명하였다.
청와대 본관 앞에서 발인제를 올리는데 박대통령은 앞에서 절하는 지만군의 상복에 실밥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손으로 감아 당겨 끊어주었다.
박대통령은 불규칙적인 것이나 비정상적인 것은 그대로 넘기지 못하는 분이었다.
박대통령은 청와대 정문의 옆문을 부여잡고 운구 행렬이 경복궁을 돌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 유명한 장면을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이 직접 카메라에 담았었다.
신직수 정보부장이 박대통령을 모시고 본관으로 올라왔다. 대통령은 손수건을 꺼내 코를 팽 푸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박대통령은 텔레비젼을 통해서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이튿날 박대통령은 아침에 집무실로 츨근하자마자 인터폰으로 나와 함께 육여사를 모셨던 제2비서실 직원들을 불렀다.
대통령은『내자가 저렇게 되었으니 얼마나 비통하겠는가. 2부속실 직원들을 제일 먼저 부른 이유는…』하고 지시를 내렸다.
『내자가 하던 일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하겠으니 항목을 정리해 올려라』
나는 그날 육여사가 하던 일-나환자촌 지원, 양지회 운영, 민원처리등의 항목을 표로 만들었다.
비고란에는 「이것은 각하가 맡으심이 좋겠음」 「이것은 근혜양이 하는 게 좋겠다」는 식으로 의견을 붙였다.
거의가 박대통령이 직접 맡아 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박대통령은 리스트에다가 매 항목마다 「동의함」이라는 의견을 적어 내려 보냈다.
육여사의 서거 이후 박대통령의 집무방식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다만 2층 내실로의 퇴근이 좀 빨라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박대통령은 자신이 퇴근하지 않으면 청와대 직원들이 퇴근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일단 2층으로 물러갔다가 밤중에 다시 집무실로 내려와 일을 보는 수가 많았다.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박정희
1974년 9월 4일 ( 가신지 20일후 )
이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몇번이나 다짐했건만
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영상
그 우아한 모습 그 다정한 목소리
그 온화한 미소 백목련처럼 청아한 기품
이제는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더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
당신의 그림자
당신의 손때
당신의 체취
당신이 앉았던 의자
당신이 만지던 물건
당신이 입던 의복
당신이 신던 신발
당신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이거 보세요"
"어디계세요"
평생을 두고 나에게
"여보" 한번 부르지 못하던
결혼하던 그날부터 이십사년간
하루같이 정숙하고도 상냥한 아내로서
간직하여온 현모양처의 덕을 어찌 잊으리.
어찌 잊을수가 있으리.
요즘 나라가 너무 혼란스럽다. 다시 한번 올릴 타이밍이 된것 같아
1961년06월10일 농어촌 고리채 정리법 공포
1961년06월11일 재건국민운동전개(국민의식개혁)
1961년07월03일 반공법 공포
1962년01월01일 연호를 서력으로 변경(연호에 관한 법률 제정)
1962년03월01일 공문서의 한글전용실시(70년1월1일 관계법 제정)
1962년05월12일 반공센터창설
1962년07월13일 국민 의무교육 실시
1963년02월01일 장충체육관 건립
1963년03월30일 원자로 가동식
1963년12월22일 서독광부·간호원파견(1963.12.22~1966.1.30)
1964년07월01일 경주석굴암복원준공
1964년12월05일 제1회 수출의 날 제정, 1억불 달성
70년 10억불
77년 100억불
82년 200억불
85년 300억불
88년 500억불 달성!!!!
1964년12월06일 서독방문(유럽국가 첫 방문), 8일 뤼프케 대통령,
9일 에르하르트 수상과 정상회담
1965년01월25일 제2한강교 개통
1965년02월24일 한국원양어선단 결단(원양어업추진)
1965년03월23일 청소년 선도 국민 궐기 대회
1965년04월01일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확정
1965년06월01일 김해간척공사 기공
1965년06월22일 한일협정 정식조인(동경), 8월14일 국회비준(야당불참),
12월18일 비준서 교환(서울) 즉시 발효, 국교정상화
1965년08월31일 해인사 경판고 보수
1965년09월15일 제2 영월 화력발전소 준공
1965년10월15일 율곡사 및 율곡기념관 낙성
1965년11월13일 경호천 종합개발 준공식-칠곡군 북삼면
1965년11월23일 민방위법 제정(민방위대창설:1975.9.22)
1964년 식량증산 5개년 계획 확정
1965년12월03일 서울·춘천간 도로포장공사 준공
1965년12월07일 진삼선 개통(사천~삼천포)
1965년12월16일 국내(텔레스)개통
1966년01월19일 정선선 개통(예미, 증산, 고한 간)
1966년01월27일 경북선 개통(점촌~예천 간)
1966년01월27일 한국과학기술원 설립
1966년02월04일 한국과학기술 연구소(kist)발족
1966년03월03일 국세청 발족
1966년03월03일 수산청 발족
1966년04월09일 인천제철공장 기공
1966년04월29일 경인공업단지 건설
1966년05월03일 울릉도 추산 수력발전소 준공
1966년06월08일 충청남도 부여군 남면 지구 전천후
농업용 수원개발사업 준공
1966년06월09일 팔당수력발전소 기공
1966년06월22일 한군군장비현대화계획발표
1966년11월09일 김삼선 기공
1966년11월09일 충남선 기공
1966년11월28일 서울 분묘 보수
1966년11월30일 밀양 영남루 보수
1966년11월30일 서울 종각 보수
1966년12월06일 부여 정림사지 정비
1966년12월17일 아시아 개발은행 건설
1966년12월18일 법주사 대웅전 보수
1967년01월24일 청평·의암 ·화천 수력발전소 건설
1967년02월10일 대도시 그린벨트설정(서울, 부산 등)
1967년03월04일 영남화력발전소 제2호기 기공
1967년03월30일 원자력청 발족
1967년03월30일 과학기술처 신설
1967년04월01일 구로동 수출 공업단지 준공
1967년04월13일 서해안 철도건설
1967년04월25일 종합민족문화센터 준공
1967년04월26일 안중근의사 동상 이안
1967년04월29일 천체과학관 준공
1967년05월01일 국립광업연구소 설립
1967년09월19일 구미전자공업단지건설
1967년09월23일 제1한강대교, 강변도로건설
1967년10월01일 국립묘지정화, 현충탑건립
1967년10월03일 포항종합제철공업단지기공(1973. 7. 3 완공)
1967년11월23일 한국수자원개발공사발족
1967년12월01일 농어촌개발공사발족
1967년12월20일 성산포 어업전진기지 준공
1968년01월22일 대간첩작전본부발족
1968년02월07일 경전선개통
1968년02월11일 병기공장(M16소총)건설착수
1968년04월01일 예비군 창설
1968년04월13일 서울대학교 이전 건설
1968년06월13일 「레이다」기지 준공
1968년07월05일 방위산업육성3개년계획확정
1968년07월22일 중앙선,태백선전철화(~1974.6.20)
1968년07월23일 동해안공업도시개발착수(묵호,북평, 삼척)
1968년07월24일 해양주권선언발표(대륙붕 자원확보 및 개발)
1968년07월29일 축산개발 4개년계획 확정
1968년08월30일 영남화력발전소(울산가스터빈)건설
1968년09월09일 제1회 한국 무역 박람회
1968년11월01일 제주도 포도당공장준공
1968년11월08일 동양화학공업주식회사준공
1968년12월02일 소수서원 해체 복원
1968년12월0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1968년12월07일 지리산 등 9개지역국립공원지정
1968년12월16일 한국 투자개발공사 설립
1968년12월21일 경인·경수고속도로준공
1969년00월00일 교육제도개혁(중학교무시험,
고교평준화, 대학입시예비고사제)
1969년02월05일 농업진흥공사 발족
1969년02월15일 지하수개발공사발족
1969년02월15일 한국도로공사발족
1969년02월22일 농업기계화 8개년계획확정
1969년03월01일 국토통일원 개원
1969년03월01일 가정 의례 준칙 공포
1969년04월28일 현충사 중건 준공식
1969년04월28일 불국사 복원 정화작업(1969~1973)
1969년06월04일 부산 화력발전소 준공(21만Kw)
1969년06월17일 마산수출자유지역공업단지조성
1969년07월03일 울산 알미늄 공장준공
1969년07월29일 서울신도시건설착수(한강이남.여의도.한강개발)
1969년08월19일 범어사 대웅전 보수
1969년10월07일 남강「댐」준공
1969년11월0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발표
1969년11월29일 관악산 기상레이더 건설
1969년12월26일 제3한강대교 건설
1970년02월29일 금산사대적광릉 해체 복원
1970년03월07일 비적성공산권에 문호개방
1970년03월22일 정부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마련-
86년까지 단계적으로 실시(의무교육9년으로로연장,
교육제신설,교원에게병역
1970년04월15일 남해고속도로기공(~1973.11.14)
1970년04월22일 새마을운동 제창
1970년05월16일 서울대교 건설
1970년05월29일 인천 화력발전소 준공
1970년06월02일 금산 위성통신지구국 개통
1970년07월01일 우편번호제 실시
1970년07월04일 배창 방직 기계 준공식 참석
(충북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
1970년07월05일 직기 공장 준공-유사시엔 총포 생산도
1970년07월25일 남산 어린이회관 건립
1970년08월02일 낙동, 영산강 종합개발안 영구수해방지
위해 다목적댐 건설 수운 개설
1970년08월15일 8.15기념식에서 북한이 무력포기하면
남북간의 인위적 장벽 단계적 제거 선언
1970년09월16일 공군 전천후 해상소형공격기 S2A배치
1970년10월22일 수도권(경인,경수,경원)고속전철화(~1974.8.15)
1970년11월10일 행주산성 복원 준공
1970년11월19일 세종대왕기념관 준공
1970년12월08일 도산 서원 보수 정화 공사 준공
1970년12월17일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 확정(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
1970년12월25일 화엄사 대웅전 보수
1970년12월31일 남원 광한루 보수
1971년01월31일 제주도 일주 도로 준공
1971년03월19일 원자력발전소 기공
1971년03월23일 금강·평택 지구 다목적 농업 개발 사업 기공
1971년04월08일 거제대교 건설
1971년04월13일 칠백의총 보수 정화 준공
1971년06월12일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 제의, 북한측 거부
1971년08월12일 한국적십자연맹, 남북가족찾기회담을 북측에 제의
1971년08월30일 속리산 법주사의 사천왕문 복원
1971년09월08일 국토종합개발계획 확정
1971년09월25일 태릉 국제사격장 준공
1971년09월29일 여의도 5·16광장 준공
1971년11월14일 각종 무기 생산 개시
1972년01월04일 전국 10대 관광권 개발 확정
1972년01월05일 군산항 개발 착수
1972년00월00일 제주관광개발사업추진(~1977년)
1972년02월09일 녹색혁명추진(통일벼 개발)
1972년03월10일 경주 고도개발 10개년획확정
1972년04월05일 산림보호, 육성, 산지개발(입산,수렵금지)
1970년05월29일 인천 화력발전소 준공
1972년06월07일 교육용 한자1,781자 선정 발표
1972년06월26일 전국702개섬 개발계획확정
1972년07월04일 한국 개발연구원 설립
1972년07월04일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1972년09월30일 영동화력발전소 건설
1972년11월13일 시외전화 자동화
1972년11월24일 부산항 대단위종합개발 추진(~1978.9.29)
1972년11월25일 소양강 다목적댐 담수
1972년12월11일 지리산,설악산,낙동강 하류철새보호지역 지정
1973년00월00일 이리 수출 자유 지역
1973년01월12일 공업진흥청 신설
1973년02월16일 제주도 종합개발 착수
1973년05월04일 8개 공업장려지구지정 공업개발
(춘천,청주,원주,대전, 전주, 이리, 목포, 군산)
1973년05월05일 어린이대공원 개원
1973년05월11일 해운항만청 신설
1973년05월24일 중화학공업건설발표
1973년06월20일 중앙선(청량리-제천)전철 개통
1973년06월22일 남해대교 건설
1973년06월23일 평화통일외교정책 7개항 발표(6.23선언)
1973년06월26일 대덕연구단지 건설(10개연구소)
1973년07월05일 한일대륙붕 협상 완전 타결
1973년07월10일 전국91개 공업고등학교 신설, 확충계획발표
1973년07월20일 여천 석유화학 공업단지 건설
1973년08월15일 남북 UN 동시가입촉구
1973년10월11일 옥포 조선소 기공
1973년10월17일 국립극장 개관
1973년07월18일 정수직업훈련원 개관
1973년10월19일 문예중흥5개년계획추진
1973년06월06일 창원 기계 공업단지 조성
1973년11월07일 국민연금복지법 제정
1973년11월10일 죽도조선소 건설
1973년12월15일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 등 4개항의 친 아랍성명 발표
1974년01월18일 남북한 불가침 협정체결 제의
1974년01월24일 최대임해공업벨트개발(제2제철-조력발전소 건설)
1974년03월28일 영동.동해고속도로기공
1974년05월22일 아산·남양방조제 준공
1974년06월10일 낙성대 정화 사업 준공
1974년01월18일 남북한 불가침 협정 체결 제의
1974년12월10일 금산사 미륵전 해체 복원
1974년12월27일 이경관문 해체 복원
1975년01월10일 구미대교 건설
1975년01월21일 농어촌지역의 상수도 시설5개년계획추진
1975년02월01일 대단위농업개발사업추진(금강,평택,광주, 삽교천,계화도)
1975년03월27일 대청 다목적댐 건설
1975년04월11일 중앙민속박물관 개관
1975년05월20일 학도호국단 창설
1975년09월01일 국회의사당 준공
1975년10월10일 서울 어린이회관 이전 개관
1975년10월28일 전국 성곽 보수 사업 추진
1975년10월30일 정립회관 건립(장애인보호육성)
1975년11월07일 함대함 미사일 개발
1976년01월20일 옥산서원보수
1976년01월20일 강화 지역 유적 개발
1976년01월20일 신안 해저 문화재 발굴
1976년03월17일 모산 저마 공장 준공-충남 아산군 배방면 공순리
1976년04월10일 밀양 포충사 정화사업
1976년04월10일 유관순 유적지 정화사업
1976년04월17일 국어 정화, 순화 운동 전개
1976년05월10일 강릉 오죽헌 정화사업
1976년05월18일 한국 인력 검정공단 법안 확정
(기술인력관리,자격,검정의 일원화)
1976년06월24일 유적지전적지 개발을 위한 특별법제정
1976년06월24일 구마고속도로 착공
1976년07월16일 잠수교 개통식 참석
1976년10월02일 반월공업도시 건설
1976년10월12일 쌀의 완전 자급자족 달성
1976년10월14일 영산강 유역 농업개발 제1단계사업준공
1976년10월30일 한산성 충무공 유적 정화사업 준공식 참석
1977년01월12일 대북식량원조 제의, 남북한 불가침 협정
체결되면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힘
1977년01월28일 국방부 순시에서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음을 천명
1977년00월00일 남서울대공원 건설
1977년02월15일 산업체부설학교 및 특별학급설치
1977년02월17일 증권감독원 개원
1977년00월00일 전국 도서관 확충
1977년04월30일 초고압송변전시설 완공
1977년05월25일 미군철수 정책 저지(선보완, 후저지)
1977년06월15일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설(1977.6.15 ~1982.3.10)
1977년07월10일 자동차공업 육성책 발표
1977년07월30일 경주통일전조성
1976년11월03일 안동 다목적댐 건설
1977년09월22일 소비자보호기본법제정
1977년10월07일 육림의 날 선포
1977년10월09일 여주 영육 성역화 사업
1977년10월09일 부석사 정화 작업(1977~1979)
1977년10월25일 군산화력발전소
1977년10월25일 부평화력발전소
1977년11월04일 아산화력발전소건설
1977년12월07일 전주권 광역도시개발 및 공업단지 조성
1977년12월22일 1백억불 수출달성 기념
1978년01월01일 동력자원부 신설
1978년01월09일 충주 다목적댐 건설
1978년01월18일 군수산업의 육성(헬기, 대포, 탄약,
장갑차, 함정, 레이다, 미사일을 생산하고 있으며,
항공기 산업과 특수전차 개발에 착수)
1978년02월20일 행정전산화 10개년 계획 확정
1978년03월30일 호남선 복선 개통
1978년04월14일 세종문화회관 개관
1978년05월03일 월정사복원
1978년05월10일 김덕령장군 유적지 정화사업(광주)
1978년05월10일 임경업장군 유적지 정화사업(충주)
1978년05월22일 부마고속도로건설(1978.5.22 ~ 1980.10.5)
1978년06월05일 태양에너지 연구소 발족
1978년06월12일 경북 울진 원자력 발전소 기공
1978년06월23일 남북간의 교역, 기술, 자본 협력
위한 민간 경협기구 구성을 북한에 제의
1978년06월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
1978년08월15일 해남 표충사 보수
1978년09월26일 국산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 중거리 유도탄,
다연발 로케트, 대전차 로케트 시험발사에 성공, 세계 7번쨰 개발 보유국됨.
1978년10월05일 자연보호헌장 선포
1978년10월20일 서해안 일부지역 국립 해안 공원 지정
1978년10월30일 직지사 정화사업
1978년11월08일 관광산업진흥책 발표
1978년12월22일 곽재우장군유적지 조성 정화사업
1978년12월06일 광주박물관 개관
1978년12월30일 장거리 자동 공중전화 시대 개막
1979년03월27일 토지개발공사 설립
1979년04월06일 경주 보문 관광단지 개장
1979년04월18일 잠실체육관 건립
1979년05월30일 상주 정기룡장군 유적지 정화 사업
1979년06월12일 경북 울진 원자력 발전소 기공
1979년06월13일 수도권 광역수도사업 추진(팔당)
1979년07월05일 천호대로 준공
1979년10월02일 환경청 신설
1979년10월12일 국제 올림픽대회 서울 유치 언명
1979년10월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시스템은 박정희 정권때 만들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한민국 근대화는 사실상 박정희의 리더쉽이 만든 위대한 승리.
정말 대단하고 경이로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산업화가 없이 부르짖는 민주주의는, 허공속에 외침일 뿐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민주주의' '분권화'만을 외쳐서는 절대 참된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가 없다.
제아무리 선진국으로부터 세련된 비물질문화를 가져와도, 물질문화가 받쳐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국사가 전재하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프레임에만 갇혀 현재 중시되는 이데올로기로 당시를 판단하지 말고,
왜 산업화의 주역이었던 기성세대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할까 한번쯤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세종대왕은 당시 시대상을 그리도 철저히 반영하면서 역대 최고의 군주라고 칭하면서,
왜 박정희 대통령은 [오히려 조선시대보다 더 가난했던 전후상황]이었음에도 현재의 이데올로기를 잣대로
독재자라며 매도하는 것인가?
당시 민주주의가 필요했던 대한민국 1%의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간절함보다,,
산업화가 절실했던 99%의 가난한 국민들과 박정희 대통령의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 세대가 있는 것이 아닐까?
독재냐 민주주의냐는 중요한게 아니다.
중요한건 국민을 행복하고 풍요롭게 해주었느냐 아니냐지.
언제부턴가 그들은 정치의 목적을 잊고 있는 것 같다.
왜 오바마가 한국을 칭찬하고, 세계 경제교과서에 한국의 성장이 소개되고
왜 중국의 후진타오가 박정희를 배우고, 푸틴이 박정희를 배우겠나?
이렇게 짧은 기간안에 폐허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거둔 국가가 없기 때문이다.
싱가폴도, 일본도, 대만도, 홍콩도, 독일도
한국처럼 짧은 기간 동안 폭발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오로지 지구상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일부 국민들은 민주주의의 노예가 되어 있다.
국민의 풍요와 행복 아래에 있어야 할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되려
국민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서 국민을 노예로 부려먹고 있는 형국이 되어 버린것.
'민주주의는 국민을 지배하는 것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국민의 행복과 풍요를 민주주의가 방해한다면
국민은 얼마든지 민주주의를 끝장내고 다른 제도를 선택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국민 위에 군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반도 역사는 그야말로 비참했어.
제대로 성공을 해본 적이 없는 역사였지.
물론 그 도중엔.좋은 기기도 발명하고.문화가 꽃피울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침략이나 당하고 세계 흐름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해
굴욕과 고통 식민생활을 겪어 왔던게 사실이지.
박정희는 현재의 중국보다 무려 50년이 앞선 뛰어난 정치체제를 가지고
남들이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을때 홀로 미래를 보고 그것을 향해 매진했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독재는 일반적으로 경제개발에 실패하는 경향이 있다.
좌파인 박노자의 말에 의하면 피노체트의 칠레 같은 경우,
퇴보를 거듭해 1977년의 산업 생산량은 1968년의 수준에 불과했다.
그것은 왜인가?
소규모의 집권 연합을 위해 국가 전체를 희생시키는 것은 독재의 일반적인 속성이기 때문이다.
독재의 기반은 다수 대중이 아니라 소규모 집권 연합이기에, 다수 대중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필요가 없다.
아프리카의 족벌정치나 스탈린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장된 홀로도모르(대량 아사 사태)와 같은 경우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애초부터 독재자를 집권시켜준 기반이 국민이 아닌 소규모 집권 연합이기에 국민을 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박정희가 진정 위대한 것은 그러한 독재의 일반적인 속성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독재자는 보통 국민을 가난하고 못살게 내버려둔다. 그래야 그들의 목소리가 커지지 못해 억압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반대의 선택을 했다. 그는 내폭의 위험을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서 있는 독재의 기반을 스스로 깎아내렸다.
그는 국민들을 보다 부유하게 만들위험이 있는 제조업을 키우며 민주주의에 필수불가결한 중산층 세력을,
자신에게 반대할 세력을 키워냈던 것이다.
노농계급으로부터 국부를 뽑아내어 기업에게 주었다는 악평이 있지만,
이 역시 초기의 산업을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다.
쉽게 설명하면, 기술력도 자원도 아무것도 없는 최빈국가의 기업이
국제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솔직히 가격밖에 없다.
저임금 노동자들과 함께 대량생산 시설을 만들기 위한 돈이 필요한 것이다.
박정희의 저곡가 저임금 정책은 다르게 표현하면 자본을 모아 덩치를 키워
국제무역에서의 경쟁 승리를 위한 경쟁력의 임계질량을 넘긴 것이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며,
솔직히 말해 평등을 이뤄내지 못한 것은 박정희 이후 대통령들의 문제이지
엄밀히 말해 박정희의 문제는 아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한국 현대사의 성자인가?
그렇게는 볼 수 없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당연히 쿠데타이고, 헌정 질서의 파괴에 대해서는 비판받는 것이 맞다.
유신은 당시의 암흑 상황에서 나온 악법이 맞다.
그의 독재가 현재에 와서 다시 되돌아와서는 안되는 것 역시 맞다.
하지만 그의 쿠데타는 쿠데타임과 동시에 위로부터의 근대화 혁명이기도 했다.
일본을 동아시아의 패자로 만들어주었던 메이지 유신처럼,
뒤떨어진 우리가 수많은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 여기에 우뚝 설 수 있게 해준 혁명 말이다.
박정희 같은 독재는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품성이 바탕이 되고 그 위에 옳은 철학과 사상, 이념이 얹어져야 한다.
아무나 독재를 한다고. 모두 박정희가 될 수 없는 이치인 것.
박정희가 집권 후반부에 맛이 갔다?
박정희는 서거하는 그날까지.
헤어진 혁대, 물빠진 양복, 구멍난 양말, 빛바랜 넥타이핀을 메고 있었다.
심지어는 의사조차도 대통령이라고 상상조차 못했다고 하지.
지금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이렇게 사는 사람 없을껄?
똑같은 돈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도박꾼 가장이 돈을 가지면 가족은 굶어 죽고
소심한 가장이 돈을 가지면 가족은 평생 그모양으로 살지만
이건희 가장이 돈을 가지면, 가족 전체가 매달 800만원씩 받게 된다.
박정희를 분석하면 할수록 참으로 대단한 혁명가였다는 생각이 든다.
박정희의 영웅적 입지는 감히 누구와 비교할 대상은 아니지만
특히 세계의 독재자나, 각국 지도자
심지어 한국의 민주화 지도자라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그의 영웅적 면모가 특히나 부각된다.
평생 살 것처럼 박정희는 꿈을 꾸었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았다.
기회주의자는 자신의 목숨을 걸지못한다.
박정희 더러 독재 독재 하는데 그거 하나로 박정희를 묻으려 하지마라.
박정희가 이루어낸 모든것들은 다른 모든 나라들의 꿈이다.
하물며 진정한 독재국가들조차 실행시키지 못하는꿈...
가난하고, 무식하면 우선 누가 자기 편인지를 몰라.
그래서 가난하고, 무식한 인간들 편을 들어주면 화를 당한다니까.
똑똑하고, 돈많은 사람들 편을 들어주면 반드시 그에 대한 보답을 받게 마련이지만
가난하고, 무식한 인간들 편을 들어주면 물려요.
좌빨들은 자신들의 입을 막는 것이
자유를 훼손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지.
복지?
정치인은 왜 성장을 해야 복지가 달성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아니 아예 하려 들지 않는다.
박정희라는 뛰어난 영웅의 실적을 통해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음에도
'독재'라는 단어로 공격받을까 두려워 눈치를 보느라 박정희를 언급하지 못하고 있다.
틈만 나면 박정희를 언급해도 모자를 판에
동으로 미국,서로 중국,남으로 일본,북으로 러시아 세계 최강국들에 둘러쌓여서
한울타리안에는 북괴가 호시탐탐 노리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할 줄 아는건 농사밖에 없는 국민들을 데리고
한반도 역사상 최강국을 건설했다.
그게 박정희.
이런 경우가 또 있던가?
모래에서 반도체 1개를 만드는 것하고
반도체 1개를 1000개로 찍어내는 것하고.. 어떤게 더 어려울까?
수익은 후자가 더 높을지 모르지만,
박정희는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그것도 전쟁의 폐허에서..
싱가포르의 리콴유나 일본의 시게루, 중국의 덩샤오핑 같은 경우는
전 국토가 폐허 잿더미가 된 적은 없었다,
또한 훌륭한 교육을 받은 인적 자원들도 많았다.
전쟁으로 그야말로 폐허,
인력도 없고 건물도 없는 완전한 無의 상태.
박정희는 거기에서 출발했다.
"중단하는 자는 성공할 수 없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한 세대의 생존은 유한하나 조국과 민족의 생명은 영원한 것.
오늘 우리 세대가 땀흘려 이룩하는 모든 조국과 민족의 생명은 영원한 것.
오늘 우리 세대가 땀흘려 이룩하는 모든 것이 결코 오늘을 잘 살고자 함이 아니요.
이를 내일의 세대 앞에 물려주어 길이 겨레의 영원한 생명을 생동케 고자 함이다."
첫댓글 박정희 대통령 각하을 이토록 발돋움하도록 만드심에 감사합니다.
오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