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중국 씨름, 쉬아이쟈오 (摔跤, 摔角) 이야기
중국은 수많은 소수민족과 문화와 전통이 다른 여러 민족의 중원 문화가 교차되며, 공존하는 나라로 전통적 민속 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복잡한 구조의 나라입니다.
하지만, 일단 정통성은 약하더라도 중원 (中原) 의 문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중국 남북조 시대 (A.D 420 ~ 589 년) 의 임 방 (任房) 이 기록한 술이기 (述異記) 에는, ` 치우 (蚩尤) 가 머리에 뿔을 쓰고 황제 (黃帝) 와 싸웠으며, 뿔을 쓰고 벌이는 겨루기를 기주 (冀州, 하북성) 에서는 치우희 (蚩尤戱) 라고 부른다.’ 라고 적었습니다.
(제 14 대 환웅 치우 천왕릉 [산동 요성시])
(신라 시대 치우 수막새 기와)
또, 소씨연의 (蘇氏演義) 에는 치우희 (蚩尤戱), 각저지희 (角觝之戱, 角抵之戱), 각희 (角戱) 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옛날 전설시대 (B.C 2,700) 치우의 모양이 머리에 뿔 (角) 이 있어서, 사람들을 뿔로 들이받으면 겁이 나고 당할 수가 없어, 힘을 겨루지 못한 데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후세에 기주 (冀州, 하북성) 지방 풍속에 치우처럼 머리에 뿔을 달고, 둘씩 셋씩 한 편 (組) 이 되어 서로 힘을 겨루는 놀이를 ‘치우희 (蚩尤戱)’, 혹은 뿔을 달고 하였다 하여 ‘각저지희 (角觝之戱, 角抵之戱)’ 또는 ‘각희 (角戱)’ 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붉은 악마의 상징, 치우 엠블렘)
(치우희 [蚩尤戱], 각저지희 [角抵之戱])
이에 대해, 전 기봉 (傳起鳳) 은 `당시 한족과 이민족과의 전쟁을, 후세에 본떠 재현한 것이 각저희 (角抵戱) 다.’ 라고 하였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史記) 이사전 (李斯傳) 에는, 진 (秦) 의 이세 (二世) 호 해 (胡亥, 서기 전 209 ~ 207 년) 는 각저희 (角抵戱) 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중요한 문건을 감천궁 (甘泉宮) 으로 가져 온 승상 이 사 (李斯) 를 만나지 않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잘 살펴보면, 고대의 각저희 (角抵戱) 라는 놀이가 우리의 씨름하고는 다른 개념으로, 맨손으로 하는 무술에 음률과 이야기 줄거리를 엮어 만든 것을 각저희 (角觝戱) 라 불렀으며, 이것은 희극의 기원이 된 놀이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원래, 각저 (角抵) 의 `각 (角)’은 `다툼’ 을 뜻하여, `다툴 각’으로 쓰이며, `저 (抵)’ 는 `밀칠 저’, `던질 저’, `맞닥뜨릴 저’ 등의 뜻을 지니고 있어, 각저 (角抵) 라는 말은 `다투어 밀친다.’ 또는 `맞닥뜨려서 다툰다.’ 혹은 `겨룬다’ 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각저 (角觝) 의 `저 (觝)’ 는 `닿을 저’ 로 겨루는 두 사람이 서로 몸을 대고 다툰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각력 (角力) 은 `힘 력’ 자를 붙여서 `힘을 겨룬다’, `다툰다’ 는 뜻으로 쓰고 있고, 각희 (角戱) 의 `희 (戱)’ 는 `놀 희’ 자로, 이 말은 무예를 두 사람 이상 여럿이서 겨루는 것을 통틀어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 이야기하는 각저희 (角抵戱) 는 우리의 씨름이 아니고, 각저 (角抵) 의 묘희 (妙戱) 라고 하여 지금의 서커스 비슷한 기예와 더불어 여러 가지 짐승들의 재주 부리기, 여러 가지 요술, 노래, 음악과 춤 및 환상적 무대 연출이 포함되어 있었고, 한 (漢) 나라는 기존의 무예를 유희화 (遊戱化) 한 것과 더불어 서역에서 들어온 갖가지 교예와 가무극을 망라한 다양한 유희를 통칭하였으며, 한 (漢) 나라에서는 이러한 각저희 (角抵戱) 를 외국 사신을 위하여 자주 공연하였고, 한 (漢) 대부터 당 (唐) 대까지 여러 가지 묘기를 기본으로 하는 각저의 묘희가 더욱 발전된 놀이 (百戱) 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의 민속 씨름 (角抵) 과는 전혀 다른 의미인 것입니다.
(각저희 [角抵戱] – 다리 기술 기예)
중국에서 씨름에 관한 가장 오래된 유물은 서기 전 3 ~ 2 세기의 유적으로 섬서성 (陝西省) 장안현 (長安縣) 에서 나온 구리판 (13.8 × 7.1 Cm) 으로, 두 사람의 씨름꾼은 허리를 잡고 겨루는 중이며, 양쪽에 안장을 올린 말 두 마리가 있고, 좌우에 나무를 배치하였으며, 씨름꾼 머리 위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나무와 까마귀는 고구려 무덤 그림에도 있으며, 다른 것은 말 두 마리로 말은 죽은 이의 영혼을 나르기 위해 마련한 까닭에, 좌우 양쪽에 두고, 안장까지 갖추어 놓았을 것으로, 말이 눈을 부릅뜨고 발굽을 세운 것도 서천 여행을 재촉하는 듯 하며, 씨름이 장례 의식의 하나였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을 만한 유물입니다.
(섬서성 장안현 구리판 씨름도)
중국 문헌에서는 우리 나라의 씨름을 `고려기 (高麗技, 고구려 = 고려)’ 또는 `요교 (撩跤)’ 로 불렀는데, 이는 우리의 씨름이 중국의 것과 다른 특징이 있음을 시사해주는 말이며, 요교 (撩跤) 라는 말의 ‘요 (撩)’ 는 `붙든다’ 는 뜻이고, `교 (跤)’ 는 `종아리 교’ 자로 `종아리 (다리) 를 붙들고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놀이’ 라는 뜻입니다.
(요교 [撩跤])
송나라 때에는 각저 (角抵, 角力) 가 다시 씨름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고, 여항간에 씨름 (角力) 이 매우 성행되었으며, 북송 때에 궁중에서 해마다 10 월 12 일에 벌인 각종 경기와 유희 끝에 반드시 씨름을 보였고 (동경몽화록), 남송 때에는 조정의 대조회 (大朝會) 때, 장 (將), 상 (上), 중 (中), 하 (下) 네 체급의 군인들이 씨름을 벌였으며, 외국 사신을 위한 잔치에서도 씨름 (角抵, 角力) 을 베풀며, 궁중에 상,중 등 각 5 팀 (10 명), 하등 8 팀 (16 명) 으로 구성된 씨름부 - 도수시위 (徒手侍衛) 를 따로 두었고, 3 년마다 새로 뽑았다고 합니다.
또, 이종 (理宗, 1225 ~ 1264) 때, 호국사 (護國寺) 남고봉로대 (南高峯露臺) 에서 열린 전국 대회에는 각 성에서 선수가 참가하였으며, 황제는 우승한 절강성 온주 (溫州) 의 한 복탈 (韓福奪) 에게 깃발, 비단, 말 등과 군좌 (君左) 벼슬을 내렸다고 하며, 당시에는 씨름꾼들이 시합 전에 죽어도 좋다는 생사문서 (生死文書) 를 작성하였으며, 씨름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적지 않았던 까닭이라고 합니다.
(중국 시안 씨름 [角力] 동상)
(송나라 씨름 [角抵])
중국 56 개 여러 소수민족 중에 구이저우 (貴州) 성, 후난 (湖南) 성, 광시 (広西) 성에 분포하여 살고 있는 동족 (侗族) 에게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쉬아이쟈오 (摔跤, shuaijiao) 라는 씨름이 있습니다.
(동족 [侗族] 거주 분포)
그들은 축제 형식으로 씨름인 솔교 (摔跤, shuaijiao) 를 계승해 오고 있으며, 축제에는 모든 마을 사람이 참석하는 커다란 행사입니다.
(동족 [侗族] 솔교 [摔跤, shuaijiao] 축제)
(동족 [侗族] 솔교 [摔跤, shuaijiao])
(동족 [侗族] 솔교 [摔跤, shuaijiao] 축제 여인들)
이렇게 전해져 내려온 솔교 [摔跤, shuaijiao] 가 중국에서는 새롭게 씨름의 대명사로 굳어지면서, 몽골 원 (元) 시대에 최성기를 맞았고, 태종은 페르시아 (터키) 장사 30 명을 불러들였고, 최우승자인 카이두왕의 딸이 자기를 꺾는 남자를 남편으로 삼겠다고 하였으나 아무도 못 이겼다고 하며, 씨름을 남자 삼항 경기 (男子三項競技) 의 하나로 삼아서 뛰어난 성적을 올려야만 부락 연맹의 수령 자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솔교 [摔跤, shuaijiao])
만주 여진족이 세운 나라인 청 (靑) 나라에서 장병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당시 만주족에게 정복 당한 몽골족 (元) 의 씨름을 받아들여, 만주 씨름과 결합시켜 개량하여 만든 것이 솔각 (摔角, 摔跤) 이며, 이것은 단순한 씨름에서 격투기 쿵후 (功夫, kung fu) 의 하나로 변하게 되었고, 솔교 (摔跤, shuaijiao) 는 북경 솔각 (摔角, shuaijue) 과 만주 솔각 (摔角, shuaijue) 으로 나누어지는데, 북경 솔각은 만주 솔각에 북파 소림 권법들을 가미하여, 힘을 위주로 하는 만주 솔각에 비해 좀 더 정묘하고 부드러운 특징이 있습니다.
(청나라 솔각 [摔角, 摔跤])
청 (靑) 은 몽골족을 길들이려고 씨름대회를 자주 열었으며, 청나라의 건륭 (乾隆) 황제는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군사 집단이었던 팔기군 (八旗軍) 내에 근골이 강하고, 기골이 장대한 우수한 용사들만 뽑아서 궁궐 선박영 (善搏營) 에 씨름꾼 2 백여 명을 두어 솔교 (摔跤) 훈련장을 만들어놓고, 훈련과 시합을 친히 즐겨 관전하였을 만큼 솔교 (摔跤, shuaijiao) 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고 합니다.
(청나라 선박영 [善搏營] 솔교 [摔跤] 훈련장)
(청나라 솔교 [摔跤, shuaijiao])
그러나, 지금에는 중국의 솔교 (摔跤, shuaijiao) 는 유명 무실해 졌고, 고향을 등지고 외로운 땅, 중국에 살고 있는 재중 임 용순 화백이 그린 솔교도 (摔跤圖) 는, 남쪽 고향을 그리며 살고 있는 만주 재중 동포들의 한 (恨) 을 그린 그림으로, 마치 조선시대 김 홍도의 씨름도를 연상하게 하는 토속적 그림 입니다.
(재중 임 용순 화백의 솔교도 [摔跤圖])
계속합니다, 보름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