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심산과 에발산의 교훈
우리안 ・ 2021. 6. 18.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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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9:7-21
7사람들이 요담에게 그 일을 알리매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로 가서 서서 그의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
기드온의 막내아들 요담만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모든 형제들이 살육을 당할 때 피할 수 있었습니다(5절). 요담은 형제들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다른 성읍으로 가는 대신에 그리심 산에 올라 세겜 사람들을 책망하였습니다(7절). 그는 그리심 산 꼭대기에서 선포하였는데,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세겜 사람들이 축제를 거행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세겜과 그리심 산은 성경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장소입니다.
그리심산과 에발산은 신명기에서 언급된 산으로 세겜 입구 왼쪽에 우뚝 솟은 두 개의 산입니다. 왼쪽에는 그림심산(881m)이 오른쪽 에는 에발산(940m)이 쌍둥이처럼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모세의 명령대로 신 11:29 여호수아는 여리고와 아이 성을 정복한 후 세겜으로 나아갔으며, 에발 산에 제단을 쌓고 수 8:30, 이스라엘의 여섯 지파(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요셉, 베냐민)를 그리심 산에 세우고, 나머지 여섯 지파(르우벤, 갓, 아셀, 스불론, 단, 납달리)를 에발 산에 세우고 나서 그림산을 향해서는 축복을, 에발 산을 향해서는 저주를 선언하게 했습니다 수 8:33.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산의 차이가 아닙니다. 먼저 두 산이 위치하고 있는 세겜은 지역적으로 이스라엘 중심부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이 처음 가나안으로 이주해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곳입니다 창 12:6-7.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에발 산에는 제단을 쌓고 큰 돌을 세워 율법을 새겨 넣게 했습니다. 그리고서는 그리심산에서 에발 산을 향하여 축복을 선포하고, 반대로 에발 산에서는 그리심산을 향하여 저주를 선포하게 했습니다.
복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며, 성읍이나 들에서나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고, 자녀나 가축이나 떡 반죽에도 복을 받고, 적군이 한 길로 공격해와도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세계 만민이 두려워하게 되며,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신 28:1-14. 반면에 저주의 내용은, 우상숭배하는 자,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 이웃의 경계를 옮기는 자, 경제적 약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 근친상간하는 자 등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 27:15-26.
그러므로 이 두 개의 산이 의미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듯이 성도들의 삶의 중심에 말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훗날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을 예루살렘처럼 성산으로 여겼는데, 결국 그들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도 그리심산과 에발산의 교훈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요 4:20-24, 20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심산과 에발산의 교훈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보이는 현상에 집중하지만, 축복과 저주의 원리를 깨닫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는 예배의 본질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요담은 나무의 비유를 들어 세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했습니다.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는 다른 나무들에 비해 유익한 열매를 맺는 나무들입니다. 사람에 비한다면 당연히 이러한 나무처럼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나무들은 왕의 지위와 권력을 가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이것은 이전의 사사들과 기드온이 그렇게 했습니다. 적어도 사사들이 다윗 왕조 이후의 왕들과 달랐던 것은 스스로 왕이 되지 않는 것을 마땅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분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담은 굳이 누군가 왕이 되어야 한다면 아버지 기드온과 자신들의 형들이 그러한 자격이 있음에도 굳이 왕이 되기를 거부한 것을 이에 빗대어 언급한 것입니다(8:30,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14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반면에 아비멜렉은 가시나무로 비유함으로써 아무 자격이 없는 자가 스스로 왕이 되려 한 것을 폭로하고 있습니다(14절). 가시나무는 열매도 없고 가지도 쓸모가 없으며 해롭고 성가신 나무입니다. 그것은 가까이 오는 사람과 동물을 찌르고 할퀴며 해를 끼치는 것이기에 결국 잘라져 불태워지는 것입니다. 죄인에 대한 저주와 심판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15~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적반하장격으로 가시나무는 자신의 그늘로 피하라고 합니다. 만일 그의 그늘 속으로 가기 위해 가까이 접근한다면, 유익을 얻기보다 찔리고 상하게 될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이렇게 헛된 것을 자랑하고 위험한 자를 지도자로 세우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가진 가시를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권력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기드온의 아들 칠십 명을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들은 이러한 악행을 비판하기보다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줄지도 모른다는 권력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멀리 볼 필요도 없습니다. 히틀러의 때도 그랬고, 김일성의 때도 그랬습니다.
"16~이것이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의 손이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요담은 기드온의 가족을 선대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였습니다. 위대한 공로를 선대하지 못할 망정 심지어 악으로 갚는 경우가 있습니다. 애굽사람들은 요셉의 공로를 잊어버리고 그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고 학대했습니다.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악을 행하는 데 서로 손을 잡았습니다. 헤롯과 빌라도도 전에는 원수였으나 예수를 죽이는 데에는 서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눅 23:12. 초록은 동색이요, 가재는 게 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처지가 비슷한 자들이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하나입니다. 진리는 편을 가르거나 진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손을 잡지 않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하나 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과즙이지 과일 맛이 아닙니다. 진리는 천연향이지 인공향(합성향)이 아닙니다. 진리라는 이름으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성경 구절을 인용하였다고 해서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를 말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후 2:15. 악은 그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살전 5:22.
[출처] 그리심산과 에발산의 교훈|작성자 우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