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7:21] (없음)
[마 17: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갈릴리에 모일때에 - '모이다 거류하다', '머물다', '살다' 등의 뜻인 '아나스레포'의 헌현 분사다. 이는 예수께서 수 주간을 팔레스틴 북단에 머무시다가 다시 헤롯 안디바의 영지인 갈릴리 지역으로 조용히 접근해 들어오셨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갈릴리 복귀는 예루살렘으로의 최후 여행을 위한 마지막 준비작업이었다.
한편 막 9:30은 이와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라고 기록 함으로써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를 통과하지 않으시고 윗 갈릴리의 한적한 사잇길을 통해 자신의 고향이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셨음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갈릴리 지역은 북쪽으로 헬몬산 근방에 위치한 티타니강,
서쪽으로 갈멜산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 연안, 남쪽으로 에스드렐론 평원, 동쪽으로는 요단강과 갈릴리 호수 등으로 구성된 남북 약 96km, 동서 약 48km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이다. 본문에서는 헬몬산 아래에서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는 가버나움 지방으로 오시는 장면을 묘사할 것 같다
예수께서...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공식적으로 당신 자신의 수난에 더해 말씀하신 두번째 예언이다. 여기서 '넘기워'(파라디도스다이)란 두 가지 점에서 애매 모호하다.
(1) 이는 '넘기다', '배반하다'는 뜻일 수 있는데, 문맥에 따라서 강한 의미 가질 때는 후자의 뜻이고, 한 의미를 가질 때는 전자의 뜻을 가진다. (2) 수동형(을 취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를 넘겨 주신 것인지...가롯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인지 모호하다.
여하튼 본문 전체의 문맥으로 볼 때 이 같은 다양한 견해는 조화될 수 있는 것들이다. 한편 본문의 '사람들의'란 말은 유대인의 대표자로서의 대제사장(16:21) 또는 십자가 처형에 관여한 이방인들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수난 고지는 순전히 믿음이 부죽한 제자들을 위한 것으로서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이 일을 뚜렷이 기억하게 된다
[마 17:23]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죽음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 예수께서는 패역한 인간들의 순간적인 승리 '죽음을 당하고'와 하나님의 영원한 승리('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를 대비시켜 닥쳐오는 당신의 삶을 정확히 예시 하셧다.
즉 부활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들의 모든 궤계와 포악을 일거에 물거품으로 돌릴 수 있다는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예시한 것이다.
결국 이 논지의 초점은 승리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순간적인 죽음을 필연적으로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 막 9:32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를 깨닫지도 못하고 그에 대해서 더 이상 묻기도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 소식에 온 정신이 쏠려 그 이후에 있을 영광스런 부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계시의 불완전한 이해 때문에 인간적인 두려움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수난의 참의미를 이해하는 완전한 신앙에로 발전하여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었다. 요한 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음심으로 제자들이 슬퍼하겠으나 다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슬픔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계시의 동시적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마 17: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가버나움 - '나훔의 마을'이란 뜻으로서 갈릴리 호수 서북쪽에 위치한 성읍이다. 오늘날에 이 성읍은 어디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텔 훔'이란 곳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곳은 예수의 선교 사역의 중심지였으나, 회개하지 않고 교만함으로서 인해 예수의 책망받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제 예수께서는 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오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리 방문하셨다.반 세겔 받는 자들이 - '반 세겔'이란 헬라어로 '디드라크마'로서 '두드라크마'를 의미한다. 그런데 한 드라크마는 헬라어인 하루 품삯을 나타내는 동전 명칭으로서 유대인에게도 사용되는데 일반적으로 1/4세겔로 취급되었다.
한편 이 '반세겔'은 유대인들이 출애굽한 후 시내산에서 인구 조사를 한 직후에 모든 유대인 남자들이 내었던 생명의 속전, 즉 애굽에서 건져주신 생명의 대가로 여호와께 바쳤던 양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의무적으로 부과된 것이었다. 바벧론 포수 후 그 의무는 20세이상된 자로서 3/1세겔로 조정되었다
예수 당시에도 느헤미야의 수정된 의무조항에 따라 매년 유월절 전인 봄에 모세 당시의 환율에 의해 계산, 부과했다. 따라서 당시에는 반세겔을 바꾸려는 환전상으로 들끓고 있었을 것이다. 이 환전상들은 그 수수료로 인해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여하튼 이 반세겔은 로마에 바치는 공공의 세금이라기보다 당시 주로 성소의 유지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여기에서 '반 세겔 받는 자들'
호이 타디드라크마 람바논테스, 은 일반적으로 국세를 거두는 '세리'와는 다르다 세겔을 거두는 자들이 신분상 로마 위해 세금을 거두는 자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성전을 위해 거두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임을 암시한다.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 이는 세금 징수자들이 이미 예수와 베드로 등의 제자들과의 관계를 익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와 더불어 성전을 대하시는 예수의 태도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이들은 예수께로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마 17:25]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마 17:26]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마 17:27]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히나 데 메 스칼달리소멘 아우투스 - 직역하면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실족지 않게 하기 위하여'가 된다. 길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율법 위에 계신 분으로서 율법이 정한 바 그 의무 조항을 능히 초월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인의 유익을 우선 생각하시는 지극한 사랑의 원리에 따라 스스로 겸비해지기를 원하셨다. 한편 본문의 '오해케 한다'는 '스칸달리소멘'은 단순히 넘어뜨린다는 뜻이 아니라 아예 함정에 빠뜨려 치명적인 피해를 제공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성전세 납부를 거부함으로써 야기될 상황, 곧 예수가 왜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자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을 율법으로 파괴하고 성전과 예배를 무시하는 자들로 오해하여 마침내 당신의 복음을 먼저 배척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예방적 조처로서 성전세 납부를 하고자 하신 것이다.
이러한 겸비의 모범을 따라 훗날 사도 바울도 다른 사람을 위한 자기 절제와 겸비의 도를 가르치게 된다.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 성전세 조달을 위한 예수의 구체적인 지시 사항이다.
이로써 우리는 동전 한 닢이 고기 입 속에 있음을 미리 아시는 예수의 전지성과 그 동전을 이미 있게 하신 다자신의 전능성을 알수 있다
한편 신약에서는 낚시 기사가 이곳밖에 없고 대부분은 그물을 사용하는 것으로 언급된다. 여하튼 예수의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율법의 요구에서 면죄되시지만, 율법에 순종하실 뿐 아니라 제자들의 필요에 대해서도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적 방식으로 예비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수난 예고 바로 뒤에 위치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겸비를 다시 생각케 한다. 즉 그분은 바다를 잠잠케 하시며, 오병 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능력자이셨지만 스스로 낮추시고 쓸데없이 남으로 오해케 하지 않으시려고 이러한 이적의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같은 겸손의 교훈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및 오늘 우리들을 위한 것이다. 한 세겔 - 그리이스에서 통요되던 금화로서 대략 4드라크마, 곧 한 세겔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것이면 1인당 반세겔요구되는 성전세의 두 사람분을 납부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례수의 이적은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가장 정확한 은혜로 채워진다.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 '나와 너'란 예수와 베드로가 비록 하나같이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었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입장에서 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즉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신 분으로서 성전세를 내지 않으셔도 됨에도 불구하고 내시는 것이며,
베드로는 그 근본이 죄인된 인간이요 사망에 처헌 자로서 생명의 속전 곧 성전세를 내야 할 자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