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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10월 30일 금요일
[(녹)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으로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이 그의 기대와 희망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시작입니다. 1,1-11
1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 바오로와 티모테오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사는 필리피의 모든 성도에게,
그리고 감독들과 봉사자들에게 인사합니다.
2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3 나는 여러분을 기억할 때마다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4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7 내가 여러분 모두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나로서는 당연합니다.
여러분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갇혀 있을 때나, 복음을 수호하고 확증할 때나
여러분은 모두 나와 함께 은총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8 사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애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9 그리고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10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1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6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2 마침 그분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셨다.
4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신 다음,
5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6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루카 14,4). 이 한 문장이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완고함을 너무나 잘 드러내 보여 주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14,3) 하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이렇게 반응하였습니다. 그들도 무엇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맞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며 꼬투리 잡을 것이 없나 살피는 데에 더 신경을 썼던 그들은 정작 율법의 중요한 계명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는 더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보면 어떠한 생각이 드나요? 나는 저렇지는 않다며 안심하나요? 아니면 내 삶의 어떤 모습이 그들과 비슷한지 살피게 되나요?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없애러 오신 분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병이 위급하지 않아 안식일이 지난 뒤 치료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그것을 모르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픈 이의 어려움을 먼저 보셨습니다.
눈길을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하느님을 따를지 아니면 내가 옳다며 고집만 피울지가 정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을 더 잘 따르려고 기도하며 자신을 되돌아보지요.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 성도들에게 이야기하였듯, 우리의 기도 안에 지식과 온갖 이해로 풍부해진 사랑이 담기면 좋겠습니다(필리 1,9 참조). 그리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하는 가운데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기를(1,10-11 참조) 희망해 봅니다.(김영송 알베르토 신부)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그곳에는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의 손을 잡아 고쳐 주시고 돌려보내십니다. 사람들은 규정을 바라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고통받는 사람을 바라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마음이고 은총의 모습입니다. 은총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선물입니다. 은총 안에 산다는 것은 단순히 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며 하느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총을 받은 사람은 조금씩 하느님의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병든 사람을 보시고 지나치지 않으셨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고 지나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내가 아플 때 누군가 찾아와 주기를 바란다면 나도 아픈 이를 찾아가고, 내가 힘들 때 위로받고 싶다면 나도 힘든 사람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이러한 은총의 흐름을 막는 장애물도 있습니다. 바로 욕심과 교만, 시기와 미움, 그리고 죄가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죄의 속성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뱀은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고,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욕심에 빠집니다. 죄를 지은 뒤에는 하느님을 피해 숨고 서로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결국 형제의 생명까지 해칩니다. 죄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자기 자신만 바라보게 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도 병든 사람의 고통보다 자기들의 기준과 판단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사람보다 규정을 앞세울 때 우리 역시 사랑의 본질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더구나 죄는 나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욕심과 미움, 험담과 분열은 가정과 공동체에 상처를 줍니다. 반대로 한 사람의 친절과 용서, 기도와 봉사는 공동체를 살립니다. 예수님께서 수종을 앓는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아 주신 행동은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보여 줍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람을 판단하고 밀어내는 곳이 아니라 상처 입은 이를 일으켜 세우는 곳입니다.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 예수님 앞에 있었던 병든 사람도 바로 그 ‘가장 작은 이’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은총 안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성사 생활과 기도 생활과 봉사 생활이 중요합니다. 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며, 봉사를 통해 받은 은총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특히 성체성사에서 우리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렇다면 성체를 모신 우리도 누군가를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로 낙심한 사람을 살리고, 용서로 관계를 살리고, 작은 봉사로 공동체를 살려야 합니다. 은총을 받는 사람에서 은총을 전하는 사람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성사 생활의 열매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사람을 먼저 바라보느냐, 아니면 판단을 먼저 하느냐?” 우리 주변에도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 상처받은 사람, 공동체에서 소외된 사람,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수종을 앓는 사람에게 다가가셨듯이 우리도 그들에게 한 걸음 다가가면 좋겠습니다. 욕심과 죄로 하느님의 은총을 가로막지 말고, 성사와 기도와 봉사를 통해 받은 은총을 이웃에게 나누면 좋겠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고, 은총의 열매도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쪽을 선택합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함께 먹는 밥>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마침 그분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루카 14,1-2)
기쁜 날
벗들과
나누는
맛난 밥
어울릴 수
없는 이
따뜻하게
보듬어
함께
먹어야
참으로
맛나다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식사를 하시는데, 예수님께서는 마침 그분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을 보시고 먼저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신 다음 그 병자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노자의 도덕경 49장에서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성인무상심(聖人無常心), 이백성심위심(以百姓心爲心).” 곧 성인은 영원히 사심이 없고, 백성을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종종 자기 일에는 상당히 예민하면서 자기 일이 아닌 일에는 참 무심하고 무딘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말씀대로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서로가 바쁘다는 이유로, 그리고 힘들다는 이유로 자신의 것만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기주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바리사이의 경우는 백성들의 지도자였지만 자신의 집에 수종병자가 있어도 안중에 없었습니다. 곧 백성의 마음은 관심이 없고 그저 율법을 지키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병을 앓는 사람을 보시고 나서 그냥 지나치시지 않고 측은지심으로 정성스럽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율법을 넘어서는 사랑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또한 율법을 넘어서는 사랑, 그리고 이타적인 측은지심의 마음을 함께 배우고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오늘의 성인
성 안젤로 (Angelus)
신분 : 신부, 설교가
활동지역 : 아크리(Acri)
활동연도 : 1669-1739년
같은이름 : 안겔로, 안겔루스, 안젤루스
이탈리아 칼라브리아(Calabria)의 아크리에서 가난하지만 겸손하고 신심 깊은 부모에게 태어난 성 루카 안토니오 팔코네(Luca Antonio Falcone)는 청소년기에 한 수도승을 만나 수도생활에 대한 강한 성소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1687년 카푸친회에 입회하여 이듬해에 안젤루스(Angelus, 또는 안젤로)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하지만 유혹을 이기지 못해 두 번이나 수도원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1690년 세 번째로 특별 입회를 허락받아 수련기를 시작했다.
그로 인해 동료 형제들로부터 ‘출퇴근하는 수련자’라는 우스갯소리를 듣기도 했다.
1700년 4월 10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주로 설교 사도직을 수행했는데, 첫 번째 설교가 너무나 실패작이라서 수없이 기도하며 반복해서 연습을 했다.
그 결과 1711년 사순시기 동안 실시한 나폴리에서의 설교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그는 위대한 설교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성 안젤루스는 평생 칼라브리아와 나폴리(Napoli) 등지를 순회하며 수많은 이들을 회개의 삶으로 이끌었고, 치유의 기적도 행하였다.
그는 또한 환시와 탈혼의 경험도 많아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말도 들었고, 사람의 영혼을 꿰뚫어 볼 줄 아는 능력 있는 고해신부였다.
그는 1739년 10월 30일 아크리타니아(Acritania)의 수도원에서 선종했다.
1825년 12월 18일 교황 레오 12세(Leo XII)는 그를 복자품에 올렸고, 2017년 10월 15일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그의 시성식을 거행했다.
성 알폰소 로드리게스 (Alphonsus Rodriguez)
신분 : 수사, 증거자
활동지역 :
활동연도 : 1533-1617년
같은이름 : 로드리게즈, 알론소, 알폰수스, 알퐁소, 알퐁수스
스페인의 세고비아 태생으로 마요르카에서 운명한 알퐁소 로드리게스는 성공한 양모업자의 아들로서, 그가 23세 때 아버지의 가업을 상속받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가업이 기울고, 아내와 어린 두 아이가 죽자, 평소에 늘 염원해오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그의 나이 40세 때 발렌시아의 예수회에 평신도 조력자로서 받아 달라는 청원을 드렸다.
얼마간을 망설이던 수도회는 그를 받아들여, 마요르카의 몬떼시온 대학에 보냈다.
알퐁소는 마요르카 섬의 팔마라는 곳에 파견되어 그곳 수도원에서 40년간 문지기 수사로 지냈다
따라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로드리게스수사와 접하게 되자, 점차 그를 존경하게 되었으며, 그의 충고를 유의하게 받아드렸다
알퐁소 로드리게스는 신비에 관한 놀라운 감성을 지니고 있으며,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장상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체험들을 글로 옮겼다.
제랄드 멘리 홉킨스의 시(1930년)속에는 성 알퐁소 로드리게스를 찬양하는 시가 있다.
성 테오네스토 (Theonestus)
활동년도 : +425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알티노(Altino)
같은 이름 : 떼오네스또, 떼오네스뚜스, 테오네스투스
성 테오네스투스(또는 테오네스토)는 마케도니아(Macedonia)의 옛도읍인 필리피(Philippi)의 주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아리우스파(Arianism)의 위협에 의해 주교좌에서 내려와야 했고, 교황은 마인츠(Mainz)의 성 알바누스(Albanus, 6월 21일)가 포함된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그를 독일 지방의 복음화를 위해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반달족(Vandals)의 침략으로 인해 탈출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성 테오네스투스는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Veneto) 지방의 알티노에서 순교하였다. 그런데 이 부분은 아마도 베네토 지방의 순교자인 다른 성 테오네스투스와 혼동된 것일 수도 있다.
성녀 도로테아 (Dorothea)
활동년도 : 1347-1394년
신분 : 과부, 증거자
지역 : 몽토(Montau)
같은 이름 : 도로떼아, 도로시
프로이센(Preussen)의 몽토에서 출생한 성녀 도로테아는 17세 때에 단치히(Danzig)의 알베르트(Albert, 또는 Adalbrecht)란 부유한 사람과 결혼하여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녀의 겸손하고 우아한 생활 자세는 다소 거칠던 남편을 완전히 변모시켰고, 그래서 남편은 성녀 도로테아와 함께 수차례나 순례를 떠남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굳게 하였다. 남편이 그녀의 로마(Roma) 순례에 동행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병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돌아왔을 때에는 남편이 병사하고 말았다. 그래서 성녀 도로테아는 1391년에 마리엔워더(Marienwerder)로 이사하여 그곳에다 은둔소를 짓고 살다가 1394년 6월 25일 선종하였다.
그녀는 특히 성체에 대한 신심이 뛰어났고 환시를 보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는 공식적으로 시성되지는 않았지만 중부 유럽, 특히 프로이센의 수호성인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공경을 받아 왔다.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는 1976년 최종적으로 그녀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였다. 그녀는 도로시(Dorothy)로도 불리며 6월 25일에 축일을 기념하기도 한다. 교회미술에서 성녀의 상징은 호롱등이나 묵주이며 때로는 화살에 둘러싸인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복자 도미니코 콜린즈
도미니코 콜린즈는 1566년, 아일랜드 남부 코크카운티에 있는 욜 시(市)에서 태어났다.
20살에 프랑스로 건너간 그는 여관에서 일하기도 하고 9년여의 군 복무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 인생에서 더욱 가치 있는 일을 하길 원해, 1598년,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1601년에 아일랜드로 돌아왔던 그는, 1602년 6월 18일, 아일랜드 해변에 상륙한 영국 군대에 의해 사로잡혀 감금되었다.
영국군은 그에게 배교를 종용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였고, 7월 9일에 사형을 선고받아 그해 10월 31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도미니코 콜린즈는, 1579년부터 1654년 사이에 아일랜드에서 순교했던 다른 16명의 아일랜드 사람들과 함께 –이들은 예수회원이 아니다.- 1992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도미니코 콜린즈는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십자가를 견딘(히브 12,2)’ 그의 충절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