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의 논리
양명학(陽明學)은 중국 명나라의 철학자 왕수인(王守仁)의 호인 양명에서 이름을 따서 붙인 유가 철학(儒家哲學)의 한 학파로 주관적 실천 철학에 속한다. 양명학이라는 명칭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퍼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육왕학(陸王學) 왕학(王學) 또는 심학(心學)이라 불렸다. 육왕학은 육구연(陸九淵)의 학풍을 이어 왕수인이 대성한 유학을 뜻하고, 왕학은 왕수인의 유학을 뜻한다. 심학은 양명학의 테제인 심즉리(心卽理)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육구연은 송대의 학자로 호는 상산(象山)인데 주자와 대척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주자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을 깊이 연구해 지식을 넓힘)의 성즉리(性卽理)설을 제창하였고, 육구연은 치지(致知, 마음의 도리를 알아서 깨달음)를 주로 한 심즉리(心卽理)설을 제창하였다. 주자가 격물치지론(格物致知論)에서 주장한 “모든 사물에 이(理)가 있으므로, 사사물물(事事物物)의 이(理)를 밝힘으로써 만물의 일리를 얻는다”라는 논리와는 다르다. 상산의 이(理)는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와 같은 존재의 이(理)는 그것을 그것이라고 조정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고 하였다. 양명은 이와 같은 육상산의 설을 받아들여, 심즉리·치양지(致良知)·지행합일(知行合一 지식과 실천의 일치)이라는 양명학의 3대 강령을 내세웠다. 그러면 이들 내용에 대하여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왕수인의 집안은 대대로 무인 가문이어서 자신도 무과 시험을 봐서 장군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공부가 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환관들이 조정을 어지럽히고 권세를 잡아 흔드는 것을 보고 왕에게 진언을 했다가 변방의 장수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를 기화로 그는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왕수인은 원래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성리학에서 말하는 격물치지론을 충실히 따랐다. 성리학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무생물까지도 하늘의 이치[理]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각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으로써 구극적인 앎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 격물치지다.
어느 날 왕수인은 관사 앞에 몇 그루 대나무가 있었는데, 이를 보고 그는 대나무도 사물이니 대나무의 이치를 연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일주일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밥도 그르면서 대나무를 바라보며 그 이치를 궁구했다. 그러나 병만 얻고 대나무의 이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성리학이 맞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아무리 해도 격물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죽으려고 관속에 들어가 누웠다. 그러다가 며칠 뒤에 깨달은 바가 있어 관속에서 나오면서, 그는 모든 이치는 마음에 있음을 선언한다. 심즉리 곧 마음이 이(理)라는 것이다. 성리학의 성즉리에 상대되는 말이다. 성리학에서는 하늘이 인간에게 내린 이(理)를 성(性)이라 하고, 이 성이 곧 이라고 하는 성즉리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성리학에서 이치는 개개사물마다 있다고 하는데 양명학은 모든 이치가 사람의 마음 안에 있다고 한다. 성리학에서는 하늘의 이치 곧 성(性)이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무생물 등에 똑같이 주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양명학에서는 오직 인간에게만 그것이 주어졌는데 그것이 곧 마음이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이치는 내 마음 안에만 있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왕수인은 ‘심내리 심외무리(心內理 心外無理)’를 주장한다. 마음 안에 이치가 있고 마음밖에는 이치가 없다는 것이다. 집 밖 들판에 노란 달맞이꽃이 만발해 있다고 하자. 그러나 방에 앉아 있는 나에게는 그 꽃이 존재하지 않는다. 밖에 나가서 꽃을 보는 순간 달맞이꽃이 피었음을 비로소 알 수가 있다. 그 순간 달맞이꽃이 존재하는 것이다.
왕양명이 남진을 유람할 때 한 친구가 바위틈에 있는 꽃을 가리키며, ‘마음 밖에 사물이 없다고 했는데, 이 꽃은 깊은 산속에서 스스로 피고 지므로 내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자네가 이 꽃을 보지 않았을 때 이 꽃과 자네의 마음은 모두 적막했네. 하지만 자네가 이 꽃을 보자마자 이 꽃의 모습이 일시에 분명하게 드러났네. 그러니 이 꽃이 자네의 마음 밖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이처럼 양명학은 지독한 주관주의 철학이다. 모든 진리가 내 마음 안에 있다고 믿는다. 순수의식을 강조하는 서양의 현상학과 일맥 상통한다. 이는 성리학의 입장과 다르다. 성리학의 이(理)는 인간뿐만 아니라 우주 만물이 가진 본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왕양명은 대나무 따위에는 본성이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리학의 제일 테제인 성즉리는 폐기된다.
성리학은 맹자가 말한 사덕(인의예지)과 사단(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에 주목했다. 인간에게는 선험적으로 사덕이라는 본성이 갖추어져 있으며, 이 사덕이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이 사단이다.
반면에 왕양명은 맹자가 말한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에 주목한다. 이 말은 『맹자』 진심장구 상(盡心章句上)에서 “사람이 배우지 않아도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양능이고 생각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것이 양지이다. 두세 살 난 아이도 자기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자가 없으며, 커서는 그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자가 없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양지, 양능의 양(良)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선험적인 것으로서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니 타고난 지식이 양지이고, 타고난 능력이 양능이다. 두세 살 된 어린애도 가르치지 않아도 부모를 사랑할 줄 알고 아우가 형을 공경할 줄 아는 것이 양지, 양능인 것이다. 양지는 완전한 앎이다. 성리학에서는 사물의 이치를 하나하나 깨달은 다음에 완전한 앎에 이른다고 하였으나 양명학은 완전한 앎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양지가 세상의 도리이고 그 착한 본성이 발현되는 것이 양능인데 그것이 곧 인(仁)의 출발이자 끝이라는 것이다. 곧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최우선한다는 것이 양명 심학의 핵심이다.
왕양명은 양지를 전면적으로 발휘하여 마음을 다스리고 도덕을 바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치양지(致良知)라고 하는데, 양지에 따르는 한 그 행동은 선이 되는 것으로서 양지에 근거하는 행동은 외적인 규범에 속박되지 않는다. 뜻에서 선악이 발생하므로 선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양지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왕양명은 양지를 기르기 위해서는 욕심을 근본에서부터 뿌리를 뽑아야 하는 발본색원론(拔本塞源論)과 일상에서 양지를 닦아야 한다는 뜻인 사상마련(事上磨鍊)의 길을 제시하였다. 즉 실제로 일(행동)을 하면서 정신을 단련해야 한다는 뜻이다.
요컨대 걱물치지에 대한 해석이 성리학과 양명학이 서로 다르다. 성리학에서는 격(格)을 ‘도달하다’로, 물(物)을 사물(인간관계 포함)의 이치로, 치지(致知)를 완전한 지식을 얻음으로 풀이 한다. 사물의 이치를 철저히 궁구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온전한 지식에 이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양명학은 격을 ‘바로 잡다’로, 물은 ‘마음’으로, 그리고 치지는 ‘양지를 발휘한다’로 해석한다. 마음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욕심을 버리고 바른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타고난 양지를 키운다는 것이다.
지식과 실천에 관해서도 지식이 선행하고 실천이 뒤따른다는 이른바 선지후행적(先知後行的)인 성리학적인 주지주의를 배격하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였다. 지행합일설은 심즉리설 이후 2년 만에 제창되는 학설로서 이 역시 마음이 곧 이(理)라는 기반 위에서 성립되는 이론이다.
성리학에서는 사물을 궁구해서 먼저 이치를 안 연후에 행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양명은 지행합일은 지식과 행위는 원래 하나이므로, 알고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완전히 안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이처럼 지행합일에 대해 지와 행은 마음을 주체로 하기 때문에 지는 심지(心知)가 되고 행도 심행(心行)이 된다고 보았다. 지식과 실천은 심을 주체로 하여 성립되기 때문에 지의 주체나 행의 주체가 모두 심에 의하여 통일되는데, 그러한 주체를 그는 양지(良知)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왕양명의 지식론을 살펴볼 때, ‘지행합일’이라는 명제도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행위와 분리할 수 없다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행위와 지식의 경계를 구분하고 도덕적 실천이 도덕적 지식을 전제로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왕양명이 말하는 지행합일이란 나의 어떤 경험적 체험이 곧 지식의 형성 과정과 일체를 이룬다는 뜻이다.
중국사상은 성리학과 양명학의 긴장 속에서 다양한 이론들을 창출했다. 일본 또한 양명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양명학이 발을 디딜 틈조차 없었다. 정제두 등 소수의 학자들이 양명학을 학습한 바 있지만 피상적인 수준에만 머물렀을 뿐이다.
첫댓글 성리학과 양명학을 이리 분명하게 정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런 대학자들이 진리를 깨치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건다는 이야기에 감동받았습니다. 관 속에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만, 꿈에서 어떤 뒤주에 갇힌 일이 있는데 너무 답답하여 미치도록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