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민원과 고소ㆍ고발이 넘쳐흐르는 이상한 나라가 된 지는 오래됐다. 공동체 정신이 사라지자 책임질 만한 일을 기피하는 현상이 모든 직장에서 나타나고 있다. 기업들이 민원과 고소ㆍ고발에 대비하는 방어적 경영에 몰두함에 따라 그 생산성은 곤두박질쳐 버렸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추세에 적응해서 살아 나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힘들게 살거나 아예 포기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세상을 우리가 스스로 만든 것이다.
공동체 정신을 상실한 사회에 대신 들어선 것은 온갖 잡다한 법률과 규제다. 무슨 일만 터지면 국회는 처벌을 강화하는 법률을 만들어 내지만 그것은 자발성을 저해하는 부작용을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법률이 책임을 강화하면 경각심을 갖게 하는 긍정적 효과도 있지만 책임이 돌아올 수 있는 일은 아예 회피하는 부작용도 생겨난다. 의사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면 의사는 위험하고 힘든 일을 기피하게 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응급실 의사가 부족하고 소아청소년과 병원이 문을 닫는 현상도 이런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
지난 2001년 필립 하워드라는 변호사는 법과 규제가 지배하는 미국 사회에선 ‘공동선’(Common Good)이란 가치가 사라져 버렸다고 개탄하는 책(‘공동선(共同善)의 붕괴’)을 내서 호응을 얻었다.
하워드는 미국 공립학교에선 의욕적인 교사를 보기 어렵다면서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관료적 규칙에 얽매여 있어, 열성적인 교사들은 아예 교직을 떠나고 있다. 교사는 수업을 교란하는 학생을 제어하려 하지 않는데, 말썽 부리는 학생을 제지했다가는 부모로부터 소송을 당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정직이 덕목’이라고 가르치던 시절은 오래전에 끝났고, 이제 학생들은 적법절차라는 보호막 안에서 거짓말과 부정을 당당하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년 전에 필립 하워드가 지적했던 현상을 오늘날 우리의 학교 교육이 겪고 있는 것 같아 걱정되는 바가 크다.
오늘날 미국의 공립학교는 총기 난사가 발생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인 처지로 전락했으니 그것을 보고 우리는 그래도 조금은 낫다고 스스로 위안한다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더 늦기 전에 사라져 버린 ‘공동체 정신’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서로가 상대방을 비난하고 있기에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전 국회의원의 칼럼에서)
<발밑에 떨어진 휴지는 누가 주워야 하는가.
이 얄궂은 질문을 진보 교육감들에게 해 보고 싶다. 모두의 일이므로 먼저 보는 사람이 주워야 한다고 가르칠까. 모두의 일이므로 굳이 먼저 주울 의무는 없고 똑같이 나눠 주워야 한다고 가르칠까.
전자는 공동체의 가치, 후자는 평등의 가치를 우선한 답이다. 진보 교육감들은 틀림없이 후자를 정답이라 가르칠 것이다. 한국 진보주의 교육이 어떤 순간에도 앞세웠던 핵심 가치가 평등이므로.
교단에서는 서이초 교사 사건에 대해 “올 것이 왔다”고 말한다. 교육 현장의 무질서와 좌절이 임계치를 넘었다는 얘기다.
올 초 초등 1학년 담임을 맡은 30대 교사는 “뭘 해도 아동학대, 휴직을 못 하면 일 년을 숨만 쉬고 버틸 것”이라 했다. 50대 교사는 “명예퇴직을 하루에 열두 번 생각한다”고 했다. 4년차 초등 교장은 “학부모 민원 처리가 거의 본업”이라 토로했다. 열패감에 젖은 교사들이 유독 내 주변에만 몰려 있는 것일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장면들을 연일 목도하는 중이다. 진보 교육감들이 뒤로 한 발쯤 빼고 있다.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된 지난 10여 년 동안 제도 보완과 비판에 반응한 적 없던 이들이다.
무엇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쩔쩔맨다. 전교조의 이런 수세적 모습은 30여년 역사를 통틀어 처음 본다. 추모 집회를 열면서 교사들은 전교조에 대놓고 빗장을 걸었다.
전교조가 집회를 계획하자 교사 커뮤니티 사이트가 들끓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 “단 1그램의 정치적 불순물도 섞지 말라”는 성토가 이어졌다.
전교조가 정부에 대책을 요구하자 비판 수위는 더 높아졌다. “이제 와 무슨 낯짝으로.” 현직 교사의 원색적 비판 글이 인터넷 공간을 달궜다.
2011년 경기도를 시작으로 도입된 학생인권조례는 성취가 없지 않았다. 교실 체벌을 거두었고, 두발과 복장 규제를 풀어 사생활의 자유를 학생 권리로 돌려줬다. 문제는 학생의 권리와 교사의 권리가 제로섬이 되도록 방치됐다는 사실이다. 학생인권조례와 아동학대법을 피하려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교사들의 무기력 병증은 깊었다.
교권 방어 장치인 교권보호위원회 절차를 밟기도 전에 아동학대로 경찰 신고가 먼저 들어간다. 이런 푸념도 오래됐다. “수행평가가 유일한 교권”이라는 교사들의 자조도 오래됐다.
교사 재량으로 학생을 평가할 수 있는 합의 장치가 수행평가뿐이라는 얘기다. 주변의 교사 누구한테라도 듣게 되는 현실을 전교조는 왜 못 본 척했을까. 아이러니다.
진보가 학교를 이념의 실험장으로 삼았을 리는 없다. 지옥으로 가는 길을 선의로 포장했을 리는 더더욱 만무하다. 그러나 진보 교육의 이념적 한계를 냉정하게 짚어 보게 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평등과 인권의 기계적 진보 가치가 교육 환경을 개선하는 가장 절박한 명분이었을지 따져 보지 않을 수 없다. 교권이 붕괴돼 아이들이 득을 봤는가. 방종의 괴물로 방치된 것은 아닌가. 신랄하게 득실을 따질 순간이다.
진보가 평등을 앞세우면 주눅부터 드는 ‘진보 콤플렉스’도 그만 벗어날 때다. 미성숙하고 이기적인 사회집단이 되고 있지 않은지, 이데올로기가 그런 사회를 의도하고 있지는 않은지. 전방위로 의심을 품게 된다. 진보 교육이 맞닥뜨린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이다.
진보 콤플렉스로 나야말로 하고 싶은 말을 빙빙 두르는 중이다. 이데올로기와 교육을 성찰한 일본의 인문학자 우치다 다쓰루는 “사제지간은 대등한 인간관계가 아니어야 한다”고 일갈한다.
시민사회의 모든 관계가 수평 계약되더라도 스승과 제자는 종적인 인간관계로 남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력히 동의한다.
평등 콤플렉스가 깊어 이런 어른의 말씀 한 줄이 우리에게서는 종적을 감췄다.>서울신문. 황수정 수석논설위원
출처 : 서울신문. ‘진실의 순간’ 맞은 진보 교육
제가 학교를 그만 둔 사람으로 전교조에 관한 얘기는 거론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DJ정권, 노무현 정권, 문재인 정권에서 상당한 비호를 받으며 진보교육에 나팔을 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참교육이 무엇인지 저는 지금도 알 수가 없지만 교사의 권위를 부정하고 공교육에 수익자 개념을 등장시킨 것은 그들 정권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전교조에게 무슨 책임을 묻을 일은 아니지만 오늘날 대한민국 교육이 황폐해진 데는 그들의 책임도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동격인 사회가 과연 바람직한지 저는 정말 궁금합니다. 교사가 학생보다 위에 있다거나, 학부모의 위에 있다는 얘기는 결코 아입니다. 교사는 교사로서, 학생은 학생으로서, 학부모는 학부모로서 자신들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사회, 그게 제가 바라는 교육 현장입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