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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창세기 30:1-24 “ 경쟁 “
8절에 보시면 내가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고 합니다. 자기 언니와의 자녀낳기 경쟁에서 이겼다고 이름을 납달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이렇게 인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인하여 지어진 이름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믿음의 조상이고 하나님이 택하신 열두 지파는 무언가 태어나는 것도 고상하게 아름답게 신비롭게 태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을 보면 산산이 부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의 욕망, 경쟁, 시기, 질투 이러한 것에 대하여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인간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시는 길 외에는 달리 구원의 길이 없음을 또한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을 보기 전에 잠시 야곱의 도망과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처신을 그동안 보았습니다만 몇 가지를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야곱평전이라는 책을 지난주에 책소개하는 것을 듣고서 한권 사서 보았는데 그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 즉 장자가 되리라는 것을 리브가를 통하여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30년이 지나도 장자가 되리라는 기미마저 보이지 않자 드디어 형의 배고픔을 동원하여 장자의 권리를 빼앗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자기중심적인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장자의 권리를 죽 한 그릇에 사기는 하였지만 30세에서 70세까지 40년을 기다려도 누가 너 장자하라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삭은 에서에게 장자권을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듣고서 리브가와 야곱의 합작으로 장자의 축복을 아버지를 속여서 받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나서 이삭이 크게 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에 설교중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사람의 기호와 취미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야곱을 다시 축복하여 하란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도망가는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벧엘까지 약 180리길인데 하루만에 온 것입니다. 죽도록 달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언약을 야곱에게 하시자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겨우 자기의 먹을 것 입을 것 해결하여 주시면 하나님으로 섬기겠고 그렇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는 식으로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야곱의 모습입니다. 그리고서 드디어 외삼촌 라반의 집 가까이 와서 라헬을 보는 순간 한눈에 반해 버리는 것입니다. 레아는 안질이 약하고 이 부분을 야곱평전에서 잘 말하고 있어서 소개합니다. 레아는 안질이 약하고를 눈매가 아름답고로 말하기도 하고 눈이 부드럽다 약하다라고 말하는 데 시력이 약하다는 말이 아니라 성적 매력이 없다 라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중동의 여인들의 특유한 성적 매력이 라헬에게 있었다고 그 당시의 여인들의 모습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야곱이라고 하여도 얼마나 자기의 취향을 따라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죄란 자기는 살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챙겨나가는 것, 이것을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야곱이 가장 잘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인물들도 다 동일합니다. 라반이든 레아이든 라헬이든 서로 서로 경쟁하여 이기려고 하는 것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러한 경쟁속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통하여 이들의 경쟁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고자 합니다. 야곱이 라헬만 사랑하고 레아를 등한히 하자 하나님이 레아의 총이 없음을 보시고 레아의 태를 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는 그런 이름을 지어야 할텐데 어떻게 이름을 짓습니까?
29:32절, 르우벤 뜻은 ‘보라 아들이다’ 남아 선호사상은 어디라도 다 있었습니다. 그러니 보라 아들이다 하면서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라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하나님의 권고를 가지고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라는 쪽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29:33, 시므온, 뜻은 ‘들으심’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기에 자기의 소원을 들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29:34, 레위, 연합, 이제는 세 명을 낳았으니 이제는 남편이 나와 연합하리라는 이름입니다. 29:35, 유다, 찬송함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한다는 믿음의 표현 같아 보입니다만 그 정도의 수준이 안됩니다. 야곱이 자기를 보호하여 주시면 나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는 정도인데 레아인들 별수 있습니까? 단지 자기의 억울함이 풀렸으니 이제 아들을 네 명이나 낳았으니 이제는 이겼다 야호 하나님을 찬양하자 이런 정도라고 보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네 명의 아이로 만족하지 않고 나중에 라헬의 시녀가 아이를 낳자 자기도 자기의 시녀를 주어서 아이를 낳게 하는 경쟁을 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라헬의 시녀가 아이를 낳습니다. 아무리 백방의 노력을 하고 야곱을 거의 독차지 하여도 안되니 자기의 시녀 빌하를 주어서 자기 아들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단입니다. 30:1-6절, 단, 억울함을 푸심, 그러나 하나님이 억울함을 풀어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억울함을 푼 것입니다. 나로 아이를 낳게 하라고 고함을 지르다가 야곱이 내가 하나님이냐 그렇게 하게 하니까 자기의 종을 남편에게 주어서 아이를 낳게 하고서 자기의 몸종이니 자기의 품에 두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는데 단, 나의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한 남편을 두고서 두 자매가 투기하고 질투하는 그 소리를 들어주셔서 응답하신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스스로 자기의 억울함을 풀어내는 것입니다. 언니가 네 명의 아들을 낳기까지 얼마나 투기가 불 붙었겠습니까? 그러니 나로 아이를 낳게 하지 않으면 내가 죽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가 애써서 일하여 놓고서 속으로는 자기의 공로를 챙기면서도 겉으로는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은혜라면 지금 자기의 받은 것이라는 것을 몽땅 거두어 가버려도 할말이 없이 당연합니다 주신이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신이도 하나님이시라고 하여야 할텐데 만약 라헬에게서 단을 빼앗아 간다면 하나님과 싸울 라헬입니다. 우리도 그러하지 않습니까? 함부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면 전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기와 경쟁과 투기속에서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을 가지고 은혜라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집을 하나 사서 집들이를 하면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라고 하면 정말 은혜라면 그 집을 내어 놓으시지요 하면 아멘하여야 하는데 당장 안색이 달라진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내가 이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얼마나 먹을 것 안먹고 입을 것 안입고 장만하였는데 내어 놓으라니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생각이 든 것이라면 앞으로 은혜라고 하지 맙시다.
30:8절입니다. 납달리, 경쟁 라헬의 여종에게서 둘째 아이가 태어나자 라헬이 무어라고 이름을 짓습니까? 납달리입니다. 내가 언니와 경쟁하여 크게 이겼다고 좋아하면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여기까지 6명의 자녀가 태어나는데 언제 한번 양보하여 낳은 자녀가 있습니까? 서로 서로 남편을 차지하기 위하여 시기하고 경쟁하고 질투하는 것입니다. 레아가 자기의 자녀 4명으로 만족이 안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생산이 멈춘 줄 알고 어떻게 합니까? 라헬이 자기의 몸종 빌하를 주듯이 자기도 자기의 시녀 실바를 야곱에게 줍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12절에 보면 갓입니다. 복되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시녀가 야곱에게서 아이를 낳아 주었으니 복되도다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복의 기준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자기들의 복입니다. 이렇게 자녀들이 출산하는 과정들을 통하여 인간이 얼마나 시기와 경쟁을 하는지 보게 됩니다.
실바가 두 번째 아이를 또 낳습니다. 그러자 이름을 무어라고 합니까? 13절에서 기쁘다 라고 이름을 아셀이라고 지었습니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할 것이라고 하면서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이 정도만 하여도 한풀 꺾여져야 하는데 경쟁의 불은 끝이 날줄 모릅니다. 산불이 나도 어느 정도 지나면 자연 소화가 되는데 사람의 경쟁의 불은 끝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시녀들이 자녀를 두명씩 낳고 나자, 잠시 조용하게 보이든 자매간에 또다시 불꽃이 튀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레아의 장남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발견하여 들고 온 것입니다. 임신촉진제로 사용되는 식물인데 이것을 레아에게 드리니 라헬이 그것을 보고 달라고 합니다.
14-15절입니다. 레아가 분노하지만 라헬이 그 대신 자기의 남편을 하룻밤 언니에게 양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서로 자기의 남편이라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레아가 합환채를 주는 대신 야곱을 하룻밤 자기와 동침할 수 있기에 양보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레아에게 아들을 주시니 그 아들을 받아서는 무어라고 이름을 짓습니까? 18절입니다. 잇사갈, 값 자기의 시녀를 남편에게 준 값으로 아들을 주셨다고 합니다. 합환채도 동생에게 주었지요. 그러니 그 아들의 이름을 값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가 또는 삯이라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레아가 다시 잉태하여 딸까지 낳습니다. 이제 레아는 없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기 몸에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고 자기의 시녀에게서 아들 둘을 낳았으니 아들 일곱과 딸까지 있습니다.
처음에는 레아에게 야곱의 총이 없어서 하나님이 총을 베풀어 주셨는데, 이제는 라헬이 총이 없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몸에서는 자녀가 없고 시녀에게서만 두 명을 얻었으니 이를 하나님이 보시고 라헬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라헬에게 하나님이 은총을 허락하셔서 태를 열어 아들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아들을 얻고서 무어라고 이름을 짓습니까? 이제 내가 내 몸으로 아들을 하나 얻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러겠습니까? 아닙니다. 나에게 아들 하나를 더 주시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이름을 짓습니다. 경쟁은 끝이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만족도 끝이 없습니다. 상대방과 자꾸만 비교 경쟁을 하니 상대적인 빈곤감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처음 텔레비젼 나올 때 흑백, 동네 한 대 정도이었습니다. 지금은 완전평면 아니면 안되지요. 그런데 이제는 평면 정도가 아니라 컴퓨터 모니터 겸용 초박형 벽걸이용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어제의 평면 텔레비젼은 이것을 보는 순간 고물이 되어 버리고 아 나는 가난하구나 언제 저런 것 한번 가져볼까? 그러면 더 경쟁을 하여야지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요즈음의 광고란 없는 욕망까지 만들어 내어서 가지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원초적인 욕망이 내재되어 있기에 화약에 불을 붙이는 것이고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요셉, 더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경쟁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된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여기서 라헬의 둘째 아들의 출생까지 함께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35:16-20절입니다. 라헬이 난산을 합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서 죽습니다. 이름을 베노니라고 짓습니다. 자기가 죽게 되어 그렇게 짓습니다만 야곱이 베냐민이라고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태어난 것입니다.
라헬과 레아의 시기와 경쟁과 질투속에서 태어난 이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되는 것을 보면서 무엇을 알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택하심에 인간의 선제적인 조건을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인간이 타락한 후로는 자기 주인이 되어서 철저하게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살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 이미 아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세계에서는 경쟁과 시기와 질투가 끊어지지 아니함을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자들을 택하셔서 자기의 백성을 삼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예 다 쓸어버리시고 끝장을 내어 버리시면 될텐데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기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그 좋으심이 죄로 인하여 좋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는 그 상태를 회복하시고 유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입니다. 그러나 그 회복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는 말씀으로 이루어 내셨지만 그러나 재창조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자기의 피를 흘리심으로 재창조를 하시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피로 만들어 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것 보다 죄인을 의인 만드시는 것이 더 힘이 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속의 은혜를 보이시기 위하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내어 가시는 모습을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신명기 7:6-11절입니다. “봉독” 이스라엘을 택하심은 잘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8절에서 두 가지의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그리고 자기의 언약을 인하여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과 자기의 언약을 따라 선택하셨기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그렇게 경쟁과 시기로 태어난 자녀들이라도 이스라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역대상 16:7-36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선택하실 때 이스라엘은 인수가 매우 영성하여 이리 저리 떠돌아 다닌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약속을 위하여 보호하시고 가나안에 들여 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기의 언약을 따라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난 것이 있어서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도 라헬과 레아 못지않게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교회안에서조차 얼마나 시기와 질투와 경쟁이 많습니까? 그러한데도 우리를 부르심은 무엇때문입니까?
디도서 3:5절입니다. “봉독” 우리의 의로운 행실이 아닙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욱 은혜의 풍성함에 거하는 것입니다. 6-11절을 봅니다. “봉독” 쓸데없는 변론을 하지 맙시다. 무익합니다. 족보, 변론, 율법에 대한 다툼을 버립시다. 이미 경쟁이 끝나고 은혜가 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경쟁이 끝난 나라입니다. 그 천국을 약속으로 받았다면 우리의 삶에서도 경쟁이 끝난 안식과 쉼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경쟁끝. 행복시작.
47. 창세기 30:25-43 “ 야곱과 하란 “
야곱이 하란에서 사는 동안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자 합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몇 년을 살았습니까? 20년을 삽니다. 이 20년 동안의 야곱의 고생이란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정도입니다. 왜 이런 고생을 시키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이미 태중에서 선택을 하셨다면 태어날 때부터 장남으로 태어나게 하셔서 장자권을 가지고 속이지 않게 하시지 않고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삭이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이해하고 비록 차남이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장자의 축복을 하지 않고 에서를 축복하려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을 오게 되고 하란에서 고생을 하게 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바로 들여놓으시지 않고 왜 사막으로 인도하여 물도 양식도 없는 곳으로 인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없다고 양식없다고 길이 험하다고 불평과 원망을 하게 하는 것입니까? 원망하기 전에 주시면 될텐데? 여러분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없습니까? 왜 이리 고생이 심하노 차라리 탁 죽어서 천국이나 갔으면 좋겠다고 하지요. 그런데도 고생할 것 다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신명기 8:2-3절을 봅니다. “봉독” 이것이 대답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밥만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 밥이 모자랄 때는 어떻게 배부르게 먹느냐가 문제이고, 이제 배가 부르면 어떻게 더 맛있게 더 멋있게 먹는가 하는 것으로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일부러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사막으로 인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괴로운 겁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고 내 힘으로 이루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내 마음대로 나의 뜻을 세워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지적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이제 야곱의 하란에서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야곱이 생각하는 축복의 개념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손으로 자기의 인생을 부요하게 만드는 것이 축복으로 알았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출세와 성공이 나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서도 세상에서의 성공과 출세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런 가르침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세상에서 잘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예수 믿는다면서 어려움을 당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는 식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기초가 안되어 있는 것인지 신앙클리닉으로 공부해보니 어느 정도 감이 잡히지요? 그런데도 세상에서 출세하고 부자 되어야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하니 이것이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대하여 악착같아 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남보다 부자 되어야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이고 예수를 믿는데도 어려움이 있으면 무언가 예수를 잘못 믿어 벌을 받아 저렇지 하는 그런 분위기에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러니 모든 일에 여유와 넉넉함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헌금을 안하고서 모으니까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소득의 십분의 일 이상을 헌금으로 하지요. 십일조 감사 선교 건축들의 헌금을 하고자 하니 더욱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이라도 장만을 하고, 회사에서도 혹독한 상사가 되어서 승진을 빨리 하고서도 하나님의 은헤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야곱도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고 부를 스스로 만들어 내어 보겠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아내를 위하여 14년을 봉사하고서 나서 야곱이 라반을 떠나려고 합니다. 야곱 때문에 라반이 부자가 되었으니 야곱이 간다고 하니 이제야 품삯을 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정하는 품삯이 양과 염소 중에서 얼룩진 것을 따로 구별하고 나서 따로 먹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얼룩진 것이 나오면 그것을 자기의 품삯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라반이 생각해보니 별 손해 볼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양이나 염소 중에 얼룩이 있고 점이 있고 검은 것이 많지 않지요. 주로 희거나 회색계통의 양이나 염소입니다. 물론 우리나라는 흑염소가 많지만 대부분의 목축하는 염소들은 희거나 회색의 염소로서 젖을 생산하는 염소입니다. 여기다가 얼룩진 것을 구별하여 3일 길이나 떨어지게 하고서 목축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계산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무껍질을 벗겨서 얼룩덜룩 하게 하고서 양이나 염소가 물먹으러 와서 그것을 보고서 새끼를 배면 얼룩덜룩한 양과 염소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 당시의 어떤 속설로 그렇게 한 모양입니다만 그러나 근거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야곱이 오랫동안 양과 염소를 치다보니 흰 양이나 흰 염소에게서도 얼룩배기가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룩진 것을 다 구별하여 가더라도 얼룩배기가 나오는 것은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지 아닌지 모르지만 야곱의 빠른 계산으로 보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긴 합니다. 그래서 계속하여 얼룩진 것의 번식을 위하여 힘을 쓰는 것입니다. 나무껍질 보고서 새끼가 얼룩진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임신하고서 오리고기 먹으면 오리발 나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얼룩진 것이 왜 나오는 것입니까? 얼룩진 놈이 새끼를 배게 하였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구별하여 따로 놓았는데도 그렇게 나오는 것은 양과 염소의 임신 기간이 있지요? 그러니 구별해 놓아도 임신 중에 있는 것은 나오기 마련입니다.
창세기 31:10-12절입니다. “봉독” 꿈에 보니 양떼를 탄 수양은 전부 얼룩진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라반의 소행을 보시고 하나님이 야곱에게 갚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기까지의 야곱의 생애가 어떻습니까? 창세기 31:38-41절입니다. “봉독” 야곱의 20년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양을 치다가 도적을 맞거나 짐승에게 찢겨 죽으면 자기가 다 물어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낮에는 더위를 무릎서고 밤에는 추위를 무릎서고 일한 것입니다. 거기다가 결혼하고서는 네 명의 아내에게서 서로 시기와 질투 속에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삼촌 라반이 열 번이나 자기의 품삯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입니까? 형과 아버지를 속이는 사람입니다. 자기 살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란에서의 삶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라반에게서 호되게 당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심각하였으면 라반에게서 야반도주를 감행해야 할 만큼 무시무시한 세상입니다. 그리고 라반이 야곱이 자기의 딸들을 위하여 14년을 봉사 하였으니 딸들에게도 14년 동안 일한 것이 딸의 공적도 있기에 최소한 10%정도는 딸에게 주는 것이 그 당시의 풍습이라는 것입니다. 14년 동안 양을 1천마리로 늘렸다면 적어도 딸에게 100마리는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라반은 이것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라반의 딸들이 야곱과 함께 도망가면서 하는 말이 31:14-15절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14년 품값으로 받은 그 돈을 라반이 다 먹어 버렸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응당 돌아갈 것까지 다 먹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일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마땅히 돌아올 몫까지 돌아오지 않았을 때 어떤 기분이 듭니까? 저것은 나에게 어느 정도 돌아오리라 기대 하였는데 돌아오기는커녕 오히려 일이 잘못되어 손해가 오는 경우를 당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특히 신앙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하면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겨우 해결하는 정도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하셨고, 또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 말라고 하셨으니 우리가 주님을 따르면 그런 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상대적인 빈곤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서 성도가 남보다 더 잘 살려고 하면 세상 사람의 노력보다 얼마나 더 악착같아야 하겠습니까? 일요일 마다 쉬어야지요. 수요일 금요일 새벽기도까지 하면서 직장생활 사업하려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리고 그런 삶 속에서 남보다 앞서고 윗자리에 오르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였으니 정말 불철주야 애쓰고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요 복이라고 하니 정말 속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복이라는 것을 실감을 하십니까? 전혀 아닙니다. 내가 피땀으로 번 것인데 어찌 하나님의 것이란 말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번 것을 누가 가로채 가버리는 것입니까?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이 가로채 가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라반의 말을 한 번 더 봅니다. 31:43절입니다. 딸들이 자기 딸이요 자식들도 자기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모두 자기의 것이라는 겁니다. 이런 억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야곱이 정당하게 14년 일하고 받은 아내이고 그리고 자기의 아내에게서 낳은 자녀이니 자기의 자녀이고 짐승떼들도 자기의 정당한 품삯인데 라반이 자기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다 빼앗아 갈수 있지만 어제밤에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셔서 선악간에 야곱에게 말하지 말라고 해서 내가 참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아무리 야곱이 영악하고 자기의 부를 축적하려고 하여도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 부모의 유산없이 자기의 정당한 힘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땀 흘려 일하여서 큰 부자가 되는 것은 얼마나 희소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믿고 사는 것은 세상에서의 출세나 성공이나 부자 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돈버는 일에 마음을 쓰고 애를 쓰면 돈은 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 세상의 것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기에 세상에서 혹독한 시련을 당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그러한 시련속에서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미 언약을 하셨지만 야곱이 만약에 하란에서의 생활이 안락하고 성공적이었다면 그냥 머물러 있으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환난과 시련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미 서두에서 보았듯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야곱이라는 개인의 삶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여전히 자기가 신이고, 왕이고 주인이기에 하나님마저도 자기의 부하로 신하로 부려먹으려는 그런 야곱을 꺾으시는 것이 하란입니다. 결국 하란의 마감이 얍복강에서 일어나는데 지금까지의 하란의 생활을 청산하게 하시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야곱의 허리가 위골되어 버리는 불구자가 되는 것이 하란 생활의 종착점입니다. 얼마나 항복을 안하였으면 하나님에게까지 대어드는 야곱입니까? 그런데 이런 야곱을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리움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이미 성도가 된 사람은 가야할 본향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곳으로 스스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땅에서 태어나서 땅에 붙어 있으려고만 합니다. 세상에 늘어붙어 있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성도라면 그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떼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야곱평전의 말을 인용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셨으면 바로 천국에 데려가시지 왜 이 세상에서 살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실직, 이혼, 이별, 전학, 이직. 실연, 재정적 어려움, 파산, 망신, 비난, 위축, 쇠약, 교통사고, 갑작스런 죽음, 낙방, 시험, 핍박, 자녀의 일탈 등등 오만가지 일을 다 겪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장자의 복을 받기 위함이며 두 번째는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이곳이 아니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에서를 하란에 보내어 고생하게 합니까? 아니지요. 에서는 자기도 부자입니다. 나중에 야곱이 선물로 바치자 에서가 무어라고 합니까? 33:9절에 내 소유도 넉넉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고 합니다. 야곱이 그렇게 고생하고 얻은 짐승떼보다 에서가 훨씬 많다고 봅니다. 적어도 자기의 개인 군대가 400명입니다. 아브라함은 318명인데 에서가 아브라함보다 군대가 더 많습니다. 에서가 세상에서의 힘과 부과 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동안 놓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한다면 에서가 되는 것이 났지요.
그러므로 오늘 성도에게는 세상의 사람보다 세상에서 더 어려운 일을 겪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이 무언가 하나님께 잘못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하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 동안 더욱 주님의 나라와 그 의를 사모하라고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련을 주시는 것을 이제 감사하는 수준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24장에서 처처에 지진과 기근과 전쟁과 난리가 나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이 좋다고 하면서 살면 더욱 큰 시련으로 떼어 놓고야 마시는 주님의 고집에 항복을 하는 것이 신상에 이롭습니다. 이번 주의 2주간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3:1-4절입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