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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회 전국남명시낭송대회 관련 시모음(60편) 공지
<전국남명시낭송대회 관련시>를 공지하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남명 조식 선생님의 시는 길이가 짧아서 참가자의 기량을 발휘하기가
다소 어려운 점이 있기에 관련시를
남명시낭송대회 추진위원회에서 선정하여 공지합니다.
남명 조식 선생님의 시는 당일 모두가 함께 소리내어
아름다운 모국어로 낭독할 예정입니다.
여기에 올린 <남명시낭송대회 관련시> 외에도
4분내외의 자유시는 신청이 가능하오니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신청기간은 7. 20. ~ 8. 20.까지입니다.
상세한 내용은 공지된 안내장 공고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끝.
가락지
강희근
대한민국에서는 가락지를 보면 논개가 보인다
논개의 그리움인 하늘도 보이고
논개의 외로움인 강물도 보인다
논개의 밤, 캄캄한 밤이었던 시대도
꿈꾸는 시간 아닌
생시의 어느 때 어느 자리
그림 한 장으로 뜨고
논개의 서러움,
산하에 개미처럼 와 덮이던
저들의 고깔 모양의 모자와 모자들
참을 수 없구나
탕, 탕 저들 총기소리 헤집고 다니던
조선의 성가퀴
그 둘레
여인의 눈은 서릿발 치고
여인의 손가락 가락지에 피가 돌았다
아, 대한민국에서는 가락지를 보면 논개가 보인다
논개의 노래인 조선,
조선의 피가 보이고
꽃송이 송이송이 나라로 피는
마침내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보인다
가락지를 보면
가락지 낀 여인의 손을 보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서
신경림
우리가 나서 자란 땅에 두 무릎을 꿇고
두 팔굽을 붙이고 이마를 맞추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것
하늘을 우러러
산과 바위와 나무와 풀을 우러러
내가 흙이 되고 땅이 되고
땅 속의 하찮은 미물이 되어서
천지에서 가장 낮은 것이 되어서
낮은 걸음으로 걸으며 다시
무릎과 팔굽과 이마를 땅에 깊이 붙이며
우리가 염원하는 것은
오로지 이 땅에서 대립과 갈등이 없어지는 것
손과 손이 서로 굳게 얽히는 것
숨결과 숨결이 따뜻하게 섞이는 것
사람과 사람 생명과 생명이
오직 하나의 염원으로
서로를 모독하는 말도
서로를 상처내는 폭력도
사람을 죽이고 우리가 쌓은
문명을 파괴하는 온갖 무기도
무릎과 팔굽과 이마처럼 땅에 붙여
흙이 되게 하면서
이 땅을 평화의 땅으로
이 땅을 사랑의 땅으로
이 땅을 희망과 생명의 땅으로
부드럽고 포근한 땅에 다시
무릎을 꿇고 팔굽과 이마를 붙이고
가진 사람 못 가진 사람 모두 하나가 되어서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모두 하나가 되어서
남쪽 북쪽 모두 하나가 되어서
지리산에서 계룡산까지
계룡산에서 다시 묘향산까지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가지 마셔요
한용운
그것은 어머니의 가슴에 머리를 숙이고 아기자기한 사랑을 받으려고
삐죽거리는 입술로 표정하는 어여쁜 아기를 싸안으려는
사랑의 날개가 아니라 적(敵)의 깃발입니다.
그것은 자비의 백호광명(白毫光明)이 아니라 번뜩거리는
악마(惡魔)의 눈빛입니다.
그것은 면류관(冕旒冠)과 황금의 누리와 주검과를 본체도 아니하고
몸과 마음을 돌돌 뭉쳐서 사랑의 바다에 퐁당 넣으려는
사랑의 여신이 아니라 칼의 웃음입니다.
아아 님이여 위안에 목마른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대지의 음악은 무궁화 그늘에 잠들었습니다.
광명의 꿈은 검은 바다에서 자맥질합니다.
무서운 침묵은 만상(萬像)의 속살거림에 서슬이 푸른 교훈을 나리고 있습니다.
아아 님이여 새 생명(生命)의 꽃에 취하려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거룩한 천사의 세례를 받은 순결한 청춘을 똑 따서
그 속에 자기 생명을 넣어서 그것을 사랑의 제물로 드리는
어여쁜 처녀가 어디 있어요.
달콤하고 맑은 향기를 꿀벌에게 주고 다른 꿀벌에게 주지 않는
이상한 백합꽃이 어디 있어요.
자신의 전체를 주검의 청산(靑山)에 장사 지내고 흐르는 빛으로 밤을
두 조각에 베는 반딧불이 어디 있어요.
아아 님이여 정(情)에 순사(殉死)하려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그 나라에는 허공이 없습니다.
그 나라에는 그림자 없는 사람들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에는 우주 만상(宇宙萬像)의 모든 생명의 쇳대를 가지고 척도를 초월한
삼엄한 궤률(軌律)로 진행하는 위대(偉大)한 시간(時間)이 정지(停止)되었습니다.
아아 님이여 주검을 방향(芳香)이라고 하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갈보리의 노래 2
박두진
마지막 내려 덮는 바위 같은 어둠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 뜨물 같은 치욕을, 불붙는 분노를, 에어내는 비애를,
물새 같은 고독을, 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가 있었는가?
꽝꽝 쳐 못을 박고, 창끝으로 겨누고, 채찍질해 때리고,
입 맞추어 배반하고, 매어 달아 죽이려는,
어떻게 그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강할 수가 있었는가?
파도같이 밀려오는 승리에의 욕망을 어떻게 당신은 버릴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을 패할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약할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이길 수가 있었는가?
방울 방울 땅에 젖는 스스로의 혈적으로, 어떻게 만민들이 살아날 줄 알았는가?
어떻게 스스로가 신인 줄을 믿었는가?
커다랗게 벌리어진 당신의 두 팔에 누구가 달려들어
안길 줄을 알았는가?
엘리......엘리......엘리......엘리......스스로의 목숨을 스스로가 매어 달아,
어떻게 당신은 죽을 수가 있었는가?
신이여! 어떻게 당신은 인간일 수 있었는가?
인간이여! 어떻게 당신은 신일 수가 있었는가?
아! 방울 방울 떨구어지는 핏방울은 잦는데,
바람도 죽고 없고 마리아는 우는데, 마리아는 우는데,
인자여! 인자여!
마지막 쏟아지는 폭포 같은 빛줄기를
어떻게 당신은 주체할 수 있었는가?
고려인
이근모
시베리아 북풍한설 내 핏줄을 얼게 해도
해오름달이나 매듭달이나 언제나 멈춤 없이
흘러 흘러 여기 있습니다
아버지!
핏줄은 얼지 않았는데 마음이 얼었습니다
천 년의 바람과 천 년의 구름이 자리한 하늘 아래
혈의 정체성을 찾아 대를 이은 혼불이 광야를 누볐습니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산천
나의 세포 되어 마음 구석구석 자리 틀고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는 혈맥으로
백두까지 한라까지 뻗을 수 있기를 염원하였습니다.
하얀 순백의 옥양목에 떨어뜨린 쪽물처럼
그 혈흔, 시베리아 벌판에 점을 찍고
한민족 영혼으로 승화해 왔습니다.
아 ~
나의 조국!
늘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무엇이라 부릅니까?
왜 나는 당신의 혈맥 바깥처럼 존재해야 합니까?
내 핏줄의 본향은 어디입니까?
내가 지금 하는 말은 누구의 모어입니까?
그날은
성재경
그날은
아무도 물건을 사지 않았다
굴비 한 손 보리쌀 한 됫박 머리빗 한 개
아무도 물건을 팔지 않았다
식육점도 포목점도 어전도 닫혀 있었다
아우내장터 그날은
아무도 소리 내어 웃지 않았다
수다쟁이 할매도 짓궂던 더벅머리 총각도
비틀거리거나 들내지 않았다
무거운 발걸음 앞만 보고 내디뎠다
사월 초하루 그날은
아무도 부모 자식 걱정하지 않았다
보고 싶은 사람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늘 아래 땅 위에 사람들이 모여
가슴과 가슴이 손과 손이 만났다
목이 터져나가던 그날은
그들의 손엔 어떤 쇠붙이도 없었다
그 흔한 낫 한 자루 부엌칼 호미마저도
삐뚤게 그린 태극기와 맨주먹
만세 부르는 입과 충혈 된 눈이 전부였다
유관순의 아우내장터 그날은
붉은 피에 또 뜨거운 피가 엉기고
죽음 위에 볏단처럼 주검이 덮여갔지만
그날은 이 나라 정신이 바로 세워지고
비로소 광복이 시작되는 날 이었다
그 눈부심 불기둥 되어
허영자
먼 옛날 하늘이 열리는 날
태백산 신단수 아래 신시를 베풀어 펼친
거룩한 홍익인간의 정신
그 지혜를 면면히 이어온 반만년입니다
쑥과 마늘
쓰겁고 매운 맛을 이겨 낸 힘으로
고난과 고통과 억압과 슬픔의 사슬
아리는 아픔을 견뎌온 이 땅 백성들입니다
회오리바람 비바람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새 문자를 만들어 등불을 밝히고
시와 노래와 춤 청청한 신명으로
가꾸고 다듬어 온 이 나라입니다
산이여 들이여 강이여 그리고 출렁이는 바다여
나무여 풀이여 뭇 짐승이여 벌레들이여 그리고 사람들이여
우리들의 살 속에는 피 속에는
흘러간 역사의 솔바람 소리 맑게 배어 있거니
이제 즈믄 해의 닭 울음소리 새벽을 앞두고
백두와 한라가 두 손을 마주잡은 잔치에
둥둥 북소리 높이 올리며
흰 옷 입고 달려갈 배달 겨레입니다
해와 달 그리고 별빛도
우리들 소망위에 영롱히 비치거니
그 눈부심 불기둥 되어
하늘 중심을 겨누어 활활 타오릅니다
금강산은 길을 묻지 않는다
이근배
새들은 저희들끼리 하늘에 길을 만들고
물고기는 너른 바다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데
사람들은 길을 두고 길 아닌 길을 가기도 하고
길이 있어도 가지 못하는 길이 있다.
산도 길이요 물도 길인데
산과 산 물과 물이 서로 돌아누워
내 나라의 금강산을 가자는데
반세기 넘게 기다리던 사람들
이제 봄, 여름, 가을, 겨울
앞 다투어 길을 나서는 구나
참 이름도 개골산, 봉래산, 풍악산
철따라 다른 우리 금강산
보라, 저 비로봉이 거느린 일만 이천 묏부리
우주만물의 형상이 여기서 빚고
여기서 태어났구나
깎아지른 바위는 살아서 뛰며 놀고
흐르는 물은 은구슬 옥구슬이구나
소나무, 잣나무는 왜 이리 늦었느냐 반기고
구룡폭포 천둥소리 닫힌 세월을 깨운다
그렇구나
금강산이 일러주는 길은 하나
한 핏줄 칭칭 동여매는 이 길 두고
우리는 너무도 먼 길을 돌아왔구나
분단도 가고 철조망도 가고
형과 아우 겨누던 총부리도 가고
이제 손에 손에 삽과 괭이 들고
평화의 씨앗, 자유의 씨앗 뿌리고 가꾸며
오순도순 잘 사는 길을 찾아왔구
나한 식구 한솥밥 끓이며 살자는데
우리가 사는 길 여기 있는데
어디서 왔느냐고 어디로 가느냐고
이제 금강산은 길을 묻지 않는다.
꽃상여 타고 훨훨
-김우명달 ․ 김옥순 2007년 3월 어느 날
김종우
어느 날
조선의 딸이었던 나는
나라를 빼앗긴 힘없는 식민지 백성이 된 나는
내 나라를 집어 삼킨 제국의 성전에 바쳐졌어
나라를 팔고 일제에 부역하던 무리들의 딸들이
서 있어야할 자리에 순이, 숙이, 영이…….
죄 없는 식민지 민중의 딸들이 끌려가 서 있었어
그곳이 만주 봉천이었는지
먼 북쪽 일본군 나남사단 주둔지 막사였는지
아니면 남양군도 밀림 한가운데 였었는지
참, 오랜 세월을 참아냈지
어느 날은 그 끔찍한 나날들이 팔순이 넘은 나를
칭칭 감고 놓아주지 않았어
그래서 뜰에 금낭화를 심고 이름 모를 꽃들을 심어
나비를 부르고 벌을 불러 모아
내 마음에 박힌 아픈 상처의 흔적들을 씻고 또 씻었어
그게 내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으니까
그 끔찍한 나날들 속에서도
내 눈물을 받아 머금었던 풀들이
꽃이 되고 나비가 되어 위안소 여기 저기 환하게 피어났었어
그 꽃들이, 그 꽃들이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됐었지
아, 마치 어제인 듯 아프고 아프기만 하네
하지만 이제 돌아가려고 해. 내가 끌려 갔던 그날로
아니, 내가 끌려갔던 그 앞날로 돌아가려 해
파란 하늘이 눈부신 오늘이 그날이야
꽃상여 타고 훨훨 떠나는 날이야
그동안 참 고마웠어!
다들 안녕,
김해, 사론의 꽃 피우다
박선해
무언으로 일구던 익명의 학문에
지나 온 얼을 감싸며
남명의 소묘를 기리는 빛을 후끈 달군다
방랑의 뿌리는 터를 잡고
깊은 멍울을 틔운 글꽃은
창공을 향해 굳건히 피워 앉았다
분수를 쓰내려 온 난생 일기,
경전을 읊던 여정의 시간은
심원의 세계로 흐르고
유구한 촛불은
안중에 품었을 애수의 세월이었을까
유령처럼 꿈속을 방황하는 마음이
영상속으로 주마등이다
하얀 밤은 냉기가 흐르고
방심없는 문향에
얼음꽃이어도 다채로운 본으로 피어 나리
바람의 끈기로
여백의 필지에 먹물로 내린 문장,
문채로 환생하는 남명의 온기가 다사롭다.
낙화
이형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남명매南冥梅 향기여
김태근
지나간다
훑고 지나간다
때 이른 폭풍우가 훑고 지나간다
폭풍우에 부서진 저녁노을이 훑고 지나간다
지리산 천왕봉 유유히 바라보며
수백 년을 피고 지고, 지고 피는 남명매여
따스하고도 고요하여라 깊고도 찬란하여라
산천재 뜨락에 우뚝 서 있는 한그루 남명매여
구름으로 칭칭 휘감긴 천왕봉 아래 서서
새소리 바람 소리 풀꽃 소리 품어주는 남명매여
하늘의 높은 뜻을 새겨듣듯
산천재 가득 가없는 향기로 피어난 남명매여
돌고 돌아
수백 년 무치(無癡) 고결한 향기로 태어난 남명매여
산천재 뜨락 너머 덕천강으로 지리산으로
온 세상을 소리 없이 품어주는 남명매 향기여
내가 백석이 되어
이생진
나는 갔다
백석이 되어 찔레꽃 꺾어 들고 갔다
간밤에 하얀 까치가 물어다 준 신발을 신고 갔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데 길을 몰라도
찾아갈 수 있다는 신비한 신발을 신고 갔다
성북동 언덕길을 지나
길상사 넓은 마당 느티나무 아래서
젊은 여인들은 날 알아채지 못하고
차를 마시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치는 내가 온다고 반기며 자야에게 달려갔고
나는 극락전 마당 모래를 밟으며 갔다
눈 오는 날 재로 뿌려달라던 흰 유언을 밟고 갔다
참나무 밑에서
달을 보던 자야가 나를 반겼다.
느티나무 밑은 대낮인데
참나무 밑은 우리 둘만의 밤 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
죽어서 만나는 설움이 무슨 기쁨이냐고 울었다
한참 울다 보니
그것은 장발이 그려놓고 간 그녀의 스무 살 때 치마였다
나는 찔레꽃을 그녀의 치마에 내려놓고 울었다
죽어서도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말을 못했다
찾아오라던 그녀의 집을
죽은 뒤에 찾아와서도 말을 못했다
찔레꽃 향기처럼 속이 타 들어갔다는 말을 못했다
넋
박경리
장마 그친 뒤
또랑의 물 흐르는 소리 가늘어지고
달은 소나무 사이에 걸려 있는데
어쩌자고 풀벌레는 저리 울어 쌓는가
저승으로 간 넋들을 불러내노라
쉬지 않고 구슬피 울어 쌓는가
그도 생명을 받았으니 우는 것일 게다
짝을 부르노라 울고
새끼들 안부 묻노라 울고
병들어서 괴로워하며 울고
배가 고파서 울고
죽음의 예감, 못다한 한 때문에 울고
다 넋이 있어서 우는 것일 게다
울고 있기에 넋이 있는 것일 게다
사람아 사람아
제일 큰 은총 받고도
가장 죄가 많은 사람아
오늘도 어느 골짜기에서
떼죽음 당하는 생명들의 아우성
들려오는 듯……
먹을 만큼 먹으면 되는 것을
비축을 좀 한들, 그것쯤이야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지혜로 치자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탐욕
하여
가엾은 넋들은 지상에 넘쳐흐르고
넋들의 통곡이 구천을 메우나니
노래하리라
오세영
내 아름다운 조국,
대한민국을 노래하리라.
수 억 만 년 전 / 까마득히 하늘이 처음 열리고
이 땅이 생명의 감동으로 전율하던 날,
지구의 동쪽, 찬란히 해 뜨는 곳에 한
목소리가 울렸나니
그로 하여 한 민족이 태어났고
그로 하여 한 세계가 깨어났노라.
아아, 한국어
그가 꽃을 부르면 꽃이 되고
그가 구름을 부르면 구름이 되고
그가 인간을 부르면 인간이,
사랑을 부르면 또 사랑이 되었나니
수 천 년 / 이 신성한 땅의 주인들은
그 어느 곳보다 밝고, 아름답고, 순수하게
그들의 생존을 영위해 왔다.
비록 / 태양의 율법이 그러한 것처럼
역사의 배면엔
가끔 엷은 그림자가 드리지 않았던 것도 아니지만
꽃이 가장 꽃답게 피고,
짐승이 가장 짐승답게 뛰놀고,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아 왔던 땅이
이 말고 세상 그 어디에 또 있으랴.
지금 세계사는
고단한 역사의 능선에서 밤을 맞고 있으나
우리는 신성한 우리의 모국어로 이 밤을
환하게 밝힐 것이다.
세계를 새롭게 명명할 것이다.
아아, 한국어
그 순결한 언어로
내 아름다운 조국
대한민국을 또 노래하리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김재진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 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伴呂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듯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 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보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챙겨 넣고 떠나라.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主人)은 “거지는 인격(人格)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生命)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罪惡)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者)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將軍)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倫理), 도덕(道德), 법률(法律)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永遠)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人間歷史)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독도는 깨어 있다
김후란
영원한 아침이여 / 푸른 바다여
몇 억 광년 달려온
빛의 날개가 / 어둠을 밀어내는 크나큰 힘이 되고
빛을 영접하는 손길이 / 미래의 문을 연다
시간의 물살이 파도치는
동해 짙푸른 물결 / 오늘 우리
섭리를 밝히려 / 이곳에 모였나니
독도의 돌, 나무, 풀, 한 포기조차
어둠 속에도 결코 잠들지 않았다
독도는 깨어 있다
조국의 수문장이라 외치고 있다
아득한 천년 전 신라 때에도
이미 독도는 우리 땅이었다
마음이 넉넉한 겨레의 초연한 의지로
아름답게 / 당당하게
거센 바람 회오리치는 파도를 딛고
울릉도와 더불어 / 조국을 지켜왔다
저 백두산에서 제주 한라산까지
한 흐름으로 내닫는
조국의 맥이 용솟음친다
우리는 독도에 등대를 세우고
불 밝혀 난파선을 돌보았다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이 수성水城에
모든 어족이 몰려들고
나르는 바닷새가 정다이 인사한다
그 어느 때도 우리는 문패를 바꾸지 않았다
역사는 정직하다 / 누가 기웃대는가
역사는 증언한다 / 누가 거역하는가
어리석은 탐욕의 노를 꺾으리 / 진노하여 바람도 일어서리라
독도. 예리한 눈빛 청청히
오늘도 조국을 지키는 불사조여
이 땅을 지키는 의로운 사람들이여
천 년 세월이 / 영원으로 이어지게
겨레의 자존으로 지켜가리라 / 겨레의 자존으로 지켜가리라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유치환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턴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 간 기술사의 모자帽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에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 않으리.
들어보라
저 거짓의 거리에서 물결 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만세로 가득 찬 사나이
-3·1절 기념시
허영자
기미년 3월 1일 우리나라 천지는 만세! 만세! 만세!로 가득 넘쳤습니다 산도 바다도 강물도 뭇 짐승 초목들도 만세! 만세! 만세!로 우줄거려 춤을 추었습니다 만세를 잡으려고 일본 순사의 구둣발이 달려오고 만세를 꺾으려고 번뜩이는 총검이 달려오고······ 그러나 만세! 만세! 만세!는 구둣발도 총검도 아랑곳없이 도도히 도도히 흘렀습니다 그날 밤 자정에 한 사나이가 경찰서로 잡혀왔습니다 흰 무명 바지저고리에 지게를 짊어진 농군이었습니다 순사의 노한 눈길이 사나이를 노려보았습니다 그보다 더 노한 형형한 눈길이 유치장 창살 너머로 순사를 노려보았습니다 | 지게꾼 사나이는 유치장 마당에서 만세!를 외쳤습니다 순사는 사나이의 지게 막대를 빼앗아 사나이를 마구 때렸습니다 때리면 때릴수록 맞으면 맞을수록 사나이의 만세! 만세! 만세!는 더 우렁차고 높았습니다 "바보 같은 녀석! 만세를 안 부르면 안 맞을 것 아니냐” 순사가 씩씩거리며 뇌었습니다 그러자 그 대답은 이랬습니다 "이 녀석아 내 속에는 지금 만세가 가득 차 있다 네가 때리면 때릴 때마다 내 속에 가득 찬 만세가 튀어나오누나” 이 호통소리 하나에 순사는 혼비백산 유치장은 갑자기 만세! 만세! 만세! 눈물로 목메인 만세!로 넘쳤습니다 박순천(朴順天) 할머니로부터 들은 이 `만세로 가득 찬 사나이' 이야기를 나는 보물처럼 소중히 늘 가슴에 새겨두고 있습니다. |
망향가望鄕歌
황송문
어매여, 시골 울엄매여!
어매 솜씨에 장맛이 달아 / 시래깃국 잘도 끓여주던 어매여!
어매 청춘 품앗이로 보낸 들녘
가르마 트인 논두렁길을 / 내 늘그막엔 밟아 볼라요!
동짓(冬至)날 팥죽을 먹다가 / 문득, 걸리던 어매여!
새알심이 걸려 넘기지를 못하고 / 그리버 그리버, 울엄매 그리버서
빌딩 달 하염없이 바라보며 / 속울음 꺼익 꺼익 울었지러!
앵두나무 우물가로 시집오던 울엄매!
새벽마다 맑은 물 길어 와서는 / 정화수 축수축수 치성을 드리더니
동백기름에 윤기 자르르한 머리카락은
뜬구름 세월에 파뿌리 되었지러!
아들이 유학을 간다고 / 송편을 쪄가지고 달려오던 어매여!
구만리장천에 월매나 시장허꼬 / 비행기 속에서 먹어라, 잉!
점드락 갈라먼 월매나 시장허꼬 / 아이구 내 새끼, 내 새끼야!
돌아서며 눈물을 감추시던 울엄매!
어매 뜨거운 심정이 살아 / 모성의 피 되어 가슴 절절 흐르네.
어매여, 시골 울엄매여!
어매 잠든 고향 땅을 / 내 늘그막엔 밟아 볼라요!
지나는 기러기도 부르던 어매처럼
나도 워리워리 목청껏 불러들여 / 인정이 넘치게 살아 볼라요!
자운영 환장할 노을진 들녘을 / 미친듯이 미친듯이 밟아 볼라요!
목련후기
복효근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
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지는 동백처럼
일순간에 져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 하겠다
구름에 달처럼은 가지 말라 청춘이여
돌아보라 사람아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기억의 비늘들이
타다 남은 편지처럼 날린대서
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
두려운가
사랑했으므로
사랑해버렸으므로
그대를 향해 뿜었던 분수 같은 열정이
피딱지처럼 엉켜서
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
낫지 않고 싶어라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고 싶어라
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무궁화로 피어난 님이시여
김태근
꽃이 피고 꽃이 져도 사시사철 그리운 님이시여
당신이 사무치게 그리워 파란 하늘을 바라봅니다
산천초목이 총소리에 흔들리고
만백성이 피 흘리며 억울하게 울부짖는 전쟁터에서
희뿌연 총탄 속으로 사라져버린 님이시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어찌 당신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어찌 당신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올해도 무궁화는 어김없이 피어나는데
당신은 당신은 어디에 계시는지요
부모형제를 위하여
내 이웃을 위하여
내 나라 내 조국을 위하여
이 세상 단 하나뿐인 목숨을 바치신 님이시여
거룩한 님이시여
파리하게 멍든 잎으로 돋아난 무궁화 잎사귀는
당신이 내쉬는 푸른 한숨인가요
고운 자태로 피어난 분홍빛 하얀빛 꽃잎은
당신이 흘린 피 눈물인가요
무궁화가 되어 피어난 님이시여
무궁화로 피어난 님이시여
송이송이 무궁화 꽃잎 꽃잎마다
그리움 안고서 피어난 님이시여
이제는 평화로운 조국의 이 땅에서
편안하게 잠드소서
차마 감지 못한 눈을 이제는 감으시고
부디 부디 편안하게 잠드소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송수권
천고에 몇 번쯤은 학이 비껴 날았을 듯한 저 능선들,
날아가다 지쳐 스러졌을 그 학 무덤들 같은 능선들,
오늘은 시끄럽게 시끄럽게 그 능선들의 떼 울음이
창해를 끓어 넘친다
만상이 잠드는 황혼의 고요 속에
어디로 가는지 저희들끼리 시끄럽게 난다
부석사 무량수전 한 채가 연화장을 이룬
그 능선들의 노을빛을 되받아 연꽃처럼 활짝 벌고
서해 큰 파도를 일으키고 달려온 善妙낭자의 발부리도
마지막 그 연꽃 속에 잦아든다
장엄하다
어둠 속에 한 능선이 자물리고 스러지면서
또 한 능선이 자물리고 스러지면서
하는 것
마침내 태백과 소백, 兩白이
이곳에서 만나 한 우주율로 스러진다.
무명 영령은 말한다
김남조
나는 가고 싶던 곳 내쳐 못 가고
예 와서 쓸쓸히 누웠느니라
나는 하고 싶던 말 못내 말 못하고
기막힌 벙어리로 누웠느니라
포성이 하늘을 뚫는 싸움터
물밀 듯 밀고 밀어 원수를 쫓던 나날
내 나라와 내 겨레를 지켜야 한다는
뜨거운 마음 하나 솟구치는 불더미와 다를 바 없어도
칡넝쿨에 휘어 덮인 산골 우물 모양
속 깊이 맑고 맑게 개피던 생각
오가는 총탄 속에서도 잊을 길 없어
눈 아프게 삼삼히 보고 싶던 얼굴
그 사랑도 나는 두고
예 와서 검은 흙에 묻혔느니라
천지를 쪼개놓듯 치열한 전투에
빗발치듯 오가는 백 천의 포탄
그 하나가 내 가슴을 쏘아 피 흘리던 날
마구 내뿜는 선지피 흥건히 풀에 물들고
못 박히듯 내 생명 그 곳에 멎을 때
서럽디 섧게 감기는 눈자위는
한 줄기 하얀 눈물 흘렀느니라
내가 죽은 후론 이름 모를 전사
이름을 모르매 새길 비문도 없이
차라리 더 조촐한 내 영혼의 모습
하늘 푸르름을 이리도 시원스레 덮고 누워서
내 나라여
내 겨레 내 사람아 편안하라
밤낮으로 빌고 빌며
하세월 이렇게 누웠느니라
별빛 내시경
이원규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들
도시를 꺼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반딧불이 은하수 가물가물 첫 사랑의 눈빛
두 눈이 멀기 전에 캄캄한 곳으로 가자
예감의 더듬이 다 바스라지기 전에
오지마을로 별빛 사냥을 가자
네온사인 가로등 텔레비전 핸드폰
별 볼 일 없는 세계 최악의 빛 공해 나라
밝아도 너무 밝아 생각은 먹통이고
사랑과 혁명도 시청률이 다 정해져 있더라
한반도 밤의 위성사진이 캄캄한 곳
진안 봉화 영양 인제 개마고원 백두산
북간도의 명동촌 윤동주 생가에 가보자
고흐의 별이 빛나는 아를 카페거리
생레미 생폴 정신병원도 너무 밝아졌더라
나는 왜 무엇으로 언제 어떻게 어디로 가는지
동해선 종단열차를 타고 고성 원산 청진
북두칠성 삼태성에게 물어나 보자
울다가 휙 노려보던 당신의 눈초리
별빛을 사냥하다 슬그머니 별들의 포로가 되자
바이칼 호수에서 맨 처음 목욕재계 하듯이
산꼭대기에서 훌훌 옷을 벗고
기막힌 정수리에서 용천혈까지 별빛 샤워를 하자
하룻밤 굶으며 위 내시경 검사를 받고
오금 저리도록 별의 별의 별의 별침을 맞아보자
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 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 별이 아슬이 멀 듯이,
어머님, /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 이 많은 별 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베개
문정희
어느 해인가, 어머니는
명주옷을 뜯어 오색 물을 들여
자신의 수의를 짓기 시작했다
치마, 저고리, 베개, 손싸개......
그리곤 한지에 이름을 오려 써서
사이사이 가지런히 꽂아 놓았다
틈만 있으면 어머니는 / 그것을 우리에게 보이고 싶어했다
죽음을 나누고 싶어서였을까?
공포를 만져보고 싶어서였을까?
그 때마다 오빠는 바쁜 척 사라져버리고
나는 얼굴을 가리고 다른 방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래서 어머니는 사촌이나 오촌들이 오면
그것을 꺼내 놓았다
나는 죽음옷 준비가 다 됐다고
날 받아놓은 신부가 / 혼수를 펴놓고 자랑하듯 했다
친척들은 모두 대접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볼일이 있어서 곧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것을
끈 떨어진 여행 가방에 담아
아파트 처마 밑에 매달아 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저기 있다. 잉”
“필요할 때 당황 말고 척 찾아 써라. 잉” / 신신당부했다
어머니는 한 새벽에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할 때를 남겨주고 / 조용히 떠나갔다
삭은 낙엽처럼 가라앉았다
나는 손가락으로 처마 밑을 가리켰고
사람들은 그 가방을 열고 수의를 꺼냈다
아아, 거기에서 파르르! / 한 마리 나비가 날았다
서툰 어머니의 조선 글씨가 / 포로롱거렸다
베개......베개......베개......베개......
어머니는 땅에 묻히고 나비는 남았다 .남아서는
밤마다 내 머리맡,
피로 도려낸 벼랑 위에서 / 흰 칼춤 추었다
이승과 저승을 날아다녔다
비 오는 산해정에서
허남철
조차산을 등에 업고
나즈막히 자리잡은 산해정이
계절도 잊은 비에 흠뻑 젖는다
개망초 잎보다 여린
이제 겨우 아홉 살짜리 차산을
뒷산에 묻으며 흘린 눈물은
경의의 싹을 틔웠고
그 뿌리는 세월보다 더 깊어간다
짙은 안개에 묻힌
조차산의 전설처럼
남명은 인심에 묻히고
또 일제에 말살되고
이데올로기에 가리고
민주주의에 왕따 당하더니,
이제야 안개 걷히듯
베일에 가린 거대한 보물이
세상을 빼꼼이 내다본다
산해정 선비는
녹산 앞바다를 바라보며
허황후가 그랬듯
그렇게 호연지기를 꿈꾸었으리라.
뼈저린 꿈에서만
전봉건
그리라 하면 그리겠습니다.
개울물에 어리는 풀포기 하나
개울 속에 빛나는 돌맹이 하나
그렇습니다 고향의 것이라면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똑똑하게 틀리는 일 없이 / 얼마든지 그리겠습니다.
말을 하라면 말하겠습니다.
우물가에 늘어선 미루나무는 여섯 그루
우물 속에 노니는 큰 붕어도 여섯 마리
그렇습니다 고향의 일이라면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생생하게 틀리는 일 없이 / 얼마든지 말하겠습니다.
마당 끝 큰 홰나무 아래로
삶은 강냉이 한 바가지 드시고
나를 찾으시던 어머님의 모습
가만히 옮기시던
그 발걸음 하나하나
나는 지금도 말하고 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한 가지만은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것만은
내가 그리질 못하고 말도 못합니다.
강이 산으로 변하길 두 번
산이 강으로 변하길 두 번
그리고도 더 많이 흐른 세월이
가로 세로 파 놓은 어머님 이마의 / 어둡고 아픈 주름살.
어머님 꿈에 보는 어머님 주름살을
말로 하려면 목이 먼저 메이고
어머님 꿈에 보는 어머님 주름살을
그림으로 그리려면 눈앞이 먼저 흐려집니다.
아아 이 십육 년
뼈저린 꿈에서만 뫼시는 어머님이시여.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산해정 연화
박선해
능선마다 연꽃으로 경계를 이루고
후예는 강직한 기품이 흐리지 않도록
마지막 꽃잎으로 맥을 다지며
노고와 의기를 보은으로 묻었음이다
산해정 뒷산의 정기에 팔작지붕은
차산의 기척이 어리고
기왓담 너머 생강나무에 남명의 글꽃이
들숨 날숨 무늬 지니 후손들의 품새는 붓질이 부지런하다
미려한 강학의 본을 따라
후손의 업은 실행을 기루어 유덕을 이룰 것이다
유독 점령하는 그 깊은 사유에
촛불 심지로 굳굳히 태운 밤은
교만을 청산하려는 감성의 굳은 의지였으니
오늘, 까만 밤하늘에 천혜를 열어 갈 초승달이 의롭다.
3월 1일의 하늘
박두진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3월 하늘에 뜨거운 피무늬가 어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대지에 뜨거운 살과 피가 젖어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조국
우리들의 겨레는 우리들의 겨레
우리들의 자유는 우리들의 자유이어야 함을 알았다.
아,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우리들의 가슴 깊이 피 터져 솟아나는
비로소 끓어오르는 민족의 외침의 용솟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억눌림, 우리들의 비겁을
피로써 뚫고 일어서는
절규하는 깃발의 뜨거운 몸짓을 알았다.
유관순 누나는 저 오르레안, 짠다르끄의 살아서의 영예
죽어서의 신비도 곁들이지 않은
수수하고 다정한 우리들의 누나,
흰옷 입은 소녀의 불멸의 순수
아, 그 생명혼의 고갱이의 아름다운 불길의
영웅도 신도 공주도 아니었던
그대로의 우리 마음 그대로의 우리 핏줄
일체의 불의와 일체의 악을 치는
민족애의 순수 절정 조국애의 꽃넋이다.
아, 유관순, 누나, 누나, 누나, 누나,
언제나 3월이면 언제나 만세 때면
잦아 있는 우리 피에 용솟음을 일으키는
유관순 우리 누난, 보고 싶은 누나
그 뜨거운 불의 마음 내 마음에 받고 싶고
내 뜨거운 맘 그 맘속에 주고 싶은
유관순 누나로 하여 우리는 처음
저 아득한 3월의 고운 하늘
푸름 속에 펄럭이는 피 깃발의 외침을 알았다.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도종환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에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시간이 남아있다
지금은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送人歸安宅 송인귀안택
-편안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보내며
덕계 오건(吳健, 1521~1574)
사욕을 극복한 곳에 천리天理가 온전히 있으니,
마음 속에 집 한 채가 자리하네.
천군天君이 높이 앉아 주인이 되나니,
헛된 기운이 어찌 침범 하리요.
지금 그대는 돌아가 머물 곳을 얻었으니,
의義로운 길로 곧장 가면 평평하고 넓으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러움 알게되면,
학문이 점점 깊어지는데 무슨 어려움 있으랴.
즐거운 저 집에 무엇이 있는가?
마음밭 만 이랑에 향기로운 난초 자라네.
사방에 댓살 창문 활짝 열자,
덕德으로 들어가는 문은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이라.
하늘 빛과 흘러가는 구름은 넓고 넓어 끝없으니,
개인 달 맑은 바람 저절로 한가롭구나.
수선화
유치환
몇 떨기 수선화―
가난한 내 방 한편에 그윽히 피어
그 청초한 자태는 한없는 정적을 서리우고
숙취의 아침 거칠은 내 심사를 아프게도 어루만지나니
오오 수선화여
어디까지 은근히 은근히 피었으련가
지금 거리에는
하늘은 음산히 흐리고
땅은 돌같이 얼어붙고
한풍은 살을 베고
파리한 사람들은 말없이 웅크리고 오가거늘
이 치웁고 낡은 현실의 어디에서
수선화여 나는
그 맑고도 고요한 너의 탄생을 믿었으료
그러나 확실히 있었으리니
그 순결하고 우아한 기백은
이 울울한 대기 속에 봄안개처럼 엉기어 있었으리니
그 인고하고 엄숙한 뿌리는
지핵의 깊은 동통을 가만히 견디고 호을로 묻히어 있었으리니
수선화여 나는 너 위에 허리 굽혀
사람이 모조리 잊어버린
어린 인자의 철없는 미소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나니
하여 지금 있는 이 초췌한 인생을 믿지 않나니
또한 이것을 기어코 슬퍼하지도 않나니
오오 수선화여 나는
반드시 돌아올 본연한 인자의 예지와 순진을 너게서
믿노라
수선화여
몇 떨기 가난한 꽃이여
뉘 몰래 쓸쓸한 내 방 한편에 피었으되
그 한없이 청초한 자태의 차거운 영상을
가만히 온 누리에 투영하고
이 엄한의 절후에
멀쟎은 봄 우주의 큰 뜻을 예약하는
너는 고요히 치어든 경건한 경건한 손일레라.
쉬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 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 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아버지의 그늘
신경림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엽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쳐다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 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신석정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무슨 어둠과 함께 들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인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히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국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오는
물결소리도 차츰차츰 멀어져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 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 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습니까?
어느 대나무의 고백
복효근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 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속에
터질 듯 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컨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정수리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 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나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소리에
어둠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
그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 있는 것이다
어머니 기억
신석정
비 오는 언덕길에 서서 그때
어머니를 부르던 나는 소년이었다.
그 언덕길에서는 멀리 바다가 바라다 보였다.
빗발 속에 검푸른 바다는 무서운 바다였다.
어머니 하고 부르는 소리는 이내
메아리로 되돌아와 내 귓전에서 파도처럼 부서셨다.
아무리 불러도 어머니는 대답이 없고,
내 지친 목소리는 해풍 속에 묻혀 갔다.
층층나무 이파리에서는 어린 청개구리가
비를 피하고 앉아서 이따금씩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청개구리처럼 갑자기 외로웠었다.
쏴아... 먼 바다소리가 밀려오고,
비는 자꾸만 내리고 있었다.
언덕길을 내려오노라면 짙푸른
동백잎 사이로 바다가 흔들리고
우루루루 먼 천둥이 울었다.
자욱하니 흐린 눈망울에 산수유꽃이 들어왔다.
산수유꽃 봉오리에서 노오란 꽃가루가 묻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본 나는
그예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말았다.
보리가 무두룩이 올라오는 언덕길에 비는 멎지 않았다.
문득 청맥죽을 훌훌 마시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것은 금산리란 마을에서
가파른 보리 고갤 넘던 내 소년 시절의 일이었다
어서 너는 오너라
박두진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희 오오래 정드리고 살다 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두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다섯 뭍과, 여섯 바다와, 철이야, 아득한 구름 밖, 아득한 하늘가에,
나는 어디로 향을 해야 너와 마주 서는게냐.
달 밝으면 으레 뜰에 앉아 부는 내 피리의 서런 가락도 너는 못듣고,
골을 헤치며 산에 올라, 아침마다 푸른 봉우리에 올라 서면,
어어이 어어이 소리 높여 부르는 나의 음성도 못 듣는다.
어서 너는 오너라. 별들 서로 구슬피 헤어지고,
별들 서로 정답게 모이는 날, 흩어졌던 너의 형 아우 총총히 돌아오고,
흩어졌던 네 순이도 누이도 돌아오고,
너와 나의 자라나던, 막쇠도 돌이도 복술이도 왔다.
눈물과 피와 푸른 빛 깃발을 날리며 오너라...
비둘기와 꽃다발과 푸른 빛 깃발을 날리며 너는 오너라...
복사꽃 피고, 살구꽃 피는 곳, 너와 나의 뛰놀며 자라난, 푸른 보리밭에
남풍은 불고, 젖빛 구름, 보오얀 구름 속에 종달새는 운다.
기름진 냉이꽃 향기로운 언덕, 여기 푸른 잔디밭에 누워서, 철이야, 너는
늴늴늴 가락 맞춰 풀피리나 불고, 나는, 나는, 두둥실 두둥실 붕새춤 추며,
막쇠와, 돌이와, 복술이랑 함께, 우리 우리, 옛날을, 옛날을 뒹굴어 보자.
여승
송수권
어느 해 봄 날 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 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 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을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 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역사
신석정
1.
저 허잘것 없는 한 송이의 달래꽃을 두고 보더라도,
다사롭게 타오르는 햇볕이라거나, 보드라운 바람이라거나,
거기 모여드는 벌나비라거나, 그보다도 이 하늘과 땅 사이를
아렴풋이 이끌고 가는 크나큰 그 어느 알 수 없는 마음이 있어,
저리도 조촐하게 한 송이의 달래꽃은 피어나는 것이요,
길이 멸하지 않을 것이다.
2.
바윗돌처럼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솟아오른,
저 애잔한 달래꽃의 긴긴 역사라거나, 그 막아낼 수 없는
위대한 힘이라거나, 이것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내가 찬양하는 것도, 오래오래 우리 마음에 걸친 거추장스러운
푸른 수의를 자작나무 허울 벗듯 훌훌 벗고 싶은 달래꽃같이
위대한 역사와 힘을 가졌기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요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3.
한 송이의 달래꽃을 두고 보더라도,
햇볕과 바람과 벌나비와 그리고 또 무정한 마음과 입맞추고 살아가듯,
너의 뜨거운 심장과 아름다운 모든 것이 샘처럼 온통 괴여있는,
그 눈망울과 그리고 항상 내가 꼬옥 쥘 수 있는 그 뜨거운 핏줄이
나무가지처럼 타고 오는 뱅어같이 예쁘디예쁜 손과, 네 고운 청춘이
나와 더불어 가야 할 저 환히 트인 길이 있어 늘 이렇게 죽도록 사랑하는 것이요,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연엽(蓮葉)에게
송수권
그녀의 피 순결하던 열 몇 살 때 있었다
한 이불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때 있었다
연(蓮) 잎새 같은 발바닥에 간지럼 먹이며
철없이 놀던 때 있었다
그녀 발바닥을 핥고 싶어 먼저 간지럼 먹이면
간지럼 타는 나무처럼 깔깔거려
끝내 발바닥은 핥지 못하고 간지럼만 타던 때 있었다.
이제 그 짓도 그만두자하여 그만두고 나이 쉰 셋
정정한 자작나무, 백혈병을 몸을 부리고
여의도 성모병원 1205호실
1번 침대에 누워 그녀는 깊이 잠들었다
혈소판이 깨지고 면역체계가 무너져 몇 개월 째
마스크를 쓴 채, 남의 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나는 어느 날 밤
그녀의 발이 침상 밖으로 흘러나온 것을 보았다
그때처럼 놀라 간지럼을 먹였던 것인데
발바닥은 움쩍도 않는다.
발아 발아 까치마늘 같던 발아!
蓮잎새 맑은 이슬에 씻긴 발아
지금은 진흙밭 삭은 잎새 다 된 발아!
말굽쇠 같은 발, 무쇠솥 같은 발아
잠든 네 발바닥을 핥으며 이 밤은
캄캄한 뻘밭을 내가 헤매며 운다.
그 蓮잎새 속에서 숨은 민달팽이처럼
너의 피를 먹고 자란 詩人, 더는 늙어서
피 한 방울 줄 수도 없는 빈 껍데기 언어로
부질없는 詩를 쓰는 구나
오, 하느님
이 덧없는 말의 교예
짐승의 피!
거두어 가소서.
**남명관련시 중 '연엽에게' 라는 시를
수정하여 올리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내의 멘발1
-연엽(蓮葉)에게
송수권
그녀의 피 순결하던 열 몇 살 때 있었다
한 이불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때 있었다
연蓮 잎새 같은 발바닥에 간지럼 먹이며
철없이 놀던 때 있었다
그녀 발바닥을 핥고 싶어 먼저 간지럼 먹이면
간지럼 타는 나무처럼 깔깔거려
끝내 발바닥은 핥지 못하고 간지럼만 타던 때 있었다.
이제 그 짓도 그만두자 하여 그만두고
나이 쉰 셋
정정한 자작나무, 백혈병으로 몸을 부리고
여의도 성모병원 1205호실
1번 침대에 누워
그녀는 깊이 잠들었다.
혈소판이 깨지고 면역체계가 무너져 몇 개월째
마스크를 쓴 채, 남의 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나는 어느 날 밤
그녀의 발이 침상 밖으로 흘러나온 것을 보았다
그때처럼 놀라 간지럼을 먹였던 것인데
발바닥은 움쩍도 않는다.
발아 발아 까치마늘 같던 발아!
연蓮 잎새 맑은 이슬에 씻긴 발아
지금은 진흙밭에 삭은 연蓮 잎새 다 된 발아!
말굽쇠 같은 발, 무쇠솥 같은 발아
잠든 네 발바닥을 핥으며 이 밤은
캄캄한 뻘밭을 내가 헤매며 운다.
그 연蓮 잎새 속에서 숨은 민달팽이처럼
너의 피를 먹고 자란 시인詩人, 더는 늙어서
피 한 방울 줄 수도 없는 빈 껍데기 언어로
부질없는 시詩를 쓰는구나
오, 하느님
이 덧없는 말의 교예
짐승의 피!
거두어 가소서.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 늘 /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원천부 原泉賦
남명 조식
큰 물결이 하늘에 닿을 듯이 도도히 흘러가누나
결코 물길을 바꾸거나 흐리게 할 수 없나니.
태양이 땅을 태울 듯이 강력하게 내리쬐더라도,
누가 한 바가지의 물인들 줄일 수 있으랴!
또한 군자가 선善의 단서를 미루어 극진히 하는 데는,
근본을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학문이란 쌓지 않으면 두터워지지 않으니,
비유컨대 오줌을 받아놓고 바다를 묻는 것과 같다.
진실로 신령한 뿌리가 마르지 않으면,
천하를 적시고도 마르기 어려우리.
덮어놓지 않은 샘의 차가운 물을 보라,
아무리 퍼내어도 아무리 퍼내어도 여전하지 않은가!
경계하노니,
마음으로 세상만사에 대응하면,
온갖 물욕의 감정이 마음을 흔들고 돋운다.
학문으로 근본을 삼으면,
물욕의 감정이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물욕의 감정에 빠져버리면 근본이 없어지니라
물욕의 감정에 흔들리면 쓰임이 없어지리라.
경敬으로 그 근원을 함양涵養하고,
하늘의 법칙에 근본해야 하리라.
우화의 강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 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어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인연서설
문병란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
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 채
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
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
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
사랑은
저만치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꽃
이 애틋한 몸짓
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
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 가는 일이다
각기 다른 인연의 한 끝에 서서
눈물에 젖은 정한 눈빛 하늘거리며
바람결에도 곱게 무늬지는 가슴
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 가는 일이다
오가는 인생 길에 애틋이 피어났던
너와 나의 애달픈 연분도
가시덤불 찔레꽃으로 어우러지고,
다하지 못한 그리움
사랑은 하나가 되려나
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나니
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
잠 못 드는 바닷가에 모래알로 부서지고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 가는 일이다.
입관
마경덕
하얀 보에 덮여 누워있는 어머니
둥근 베개 하나가 무거운 잠을 받치고 있었다
장례지도사인 젊은 염습사는
보 밑으로 손을 넣어 익숙하게 몸을 닦았다
감정은 삭제되고 절차만 기억하는 손길로
미처 살아보지 못한 생의 끝자락을 만지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주검을 갈무리하여 먼 길을 떠나보냈을까
저 숙련된 손길은 어느 날, 떨어져나간 단추를 주워 제자리에 달듯
벌어진 틈을 메우고 있는 것
하얀 종이로 싸늘한 몸을 감싸는 동안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살아온 족적이 다 찍힐 것 같은 순백의 백지는
어머니의 마지막 속옷이었다
자식들이 사준 속옷은 장롱에 켜켜이 쌓아두고 구멍 난 내복만 입던 어머니
며느리에게 퍼붓던 불같은 성깔도 다 시들어
몇 장의 종이에 차곡차곡 담기는 순간,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다 젖었다
어머니, 편히 가세요 그동안 미워했던 것 다 잊으세요
진심으로 시어머니를 부르며 딸인 듯 목이 메었다
습신을 신은 발, 앙상한 손을 감싼 악수幄手를
꼭 쥐어보았다. 이 작은 손이
밥상을 밀치고 내 가슴을 후볐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던 막내시누이는 꺽꺽 짐승처럼 울고
나는 입을 막고 흐느껴 울었다
당신이 손수 장만한 치자 빛 수의를 입고
허리띠를 나비리본처럼 단정히 묶은 어머니
어느새 떠날 채비를 다 마치었다
지긋지긋한 암 덩어리는 곱게 포장되어 입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아사
신석정
포옹할 꽃 한 송이 없는 세월을
얼룩진 역사의 찢긴 자락에 매달려
그대로 소스라쳐 통곡하기에는 머언 먼 가슴
아래 깊은 계단에
도사린 나의 젊음이 스스로워 멈춰 선다.
좌표 없는 대낮이 밤보다 어둔 속을 어디서
음악 같은 가녀린 소리
철 그른 가을비가 스쳐가며 흐느끼는 소리
조국의 아득한 햇무리를 타고 오는 소리
또는 목마르게 그리운 너의 목소리
그런 메아리 속에 나를 묻어도 보지만
연이어 달려오는 인자한 얼굴들이 있어
너그럽고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두 손 벌려 차가운 가슴을 어루만지다간
핏발 선 노한 눈망울로 하여
다시 나를 질책함은
아아 어인 지혜의 빛나심이뇨!
당신의 거룩한 목소리가
내 귓전에 있는 한
귓전에서 파도처럼 멀리 부서지는 한
이웃할 별도 가고 소리 없이 가고
어둠이 황하처럼 범람할지라도 좋다.
얼룩진 역사에 만가를 보내고 참한 노래와 새벽을
잉태한 함성으로
다시 억만 별을 불러 Satan(사탄)의 가슴에 창을 겨누리라.
새벽종이 울 때까지 창을 겨누리라.
정동진
정호승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는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가로 팔짱을 끼고 걷는다 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서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 듯이 내어준 저 소나무의 마음을 보라
내가 한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대었던 내 어깨처럼 편안하지 않은가
또다시 해변을 따라 길게 뻗어나간 저 철길을 보라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평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울지 않는다
수평선 너머로 손수건을 흔드는 정동진의 붉은 새벽 바다
어여뻐라 너는 어느새 파도에 젖은 햇살이 되어 있구나
오늘은 착한 갈매기 한 마리가 너를 사랑하기를
지리산 고사목에 기대어
김태근
지리산 고사목에 기대어 울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대성산 천년고찰 정취암으로
산음골 성당으로 헤매이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가 고사목에 기대어 울었다
넓디넓은 하늘을 지고
남루한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아니한 채
인고의 세월로 묵묵히 서 있는 고사목
이승에서 재가 되어버린 어린생명 찾아 목 놓아 울었다
하얀 눈송이가 소복소복 나리던 1998년 겨울날
어여쁜 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하고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태어 난 지두 달도 못되어 사망신고를 하게 될 줄이야
그 누가 그 누가 알았단 말인가
맑은 눈동자와 오똑한 코
동그란 입술과 도톰한 귓볼
작은 다섯 손가락과 꼼지락거리던 다섯 발가락
아직도 내 안에 꼬물꼬물 살아 숨 쉬는 너
내 어찌 너를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너를 따라 가지 못한 어미
끝끝내 너를 지켜주지 못한 이 어미는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구나
나약한 어미가 되어 고사목에 기대어 하염없이 울었다
알고 있으려나
너에게로 가는 길 저 고사목은 알고 있으려나
훨훨 날아서 너에게로 갈 수만 있다면
단 한번만이라도 작은 너를 볼 수 있다면
단 한번만이라도 너를 작은 너를 만질 수만 있다면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신석정
성근 대숲이 하늘보다 맑아
댓잎마다 젖어드는 햇볕이 분수처럼 사뭇 푸르고
아라사의 숲에서 인도에서
조선의 하늘에서 알라스카에서
찬란하게도 슬픈 노래를 배워낸 바람이 대숲에 돌아들어
돌아드는 바람에 슬픈 바람에 나는 젖어 온몸이 젖어……
란아
태양의 푸른 분수가 숨막히게 쏟아지는
하늘 아래로만 하늘 아래로만
흰 나리꽃이 핀 숱하게 핀 굽어진 길이 놓여 있다
너도 어서 그 길로 돌아오라 흰 나비처럼 곱게 돌아오라
엽맥이 드러나게 찬란한 이 대숲을 향하고……
하늘 아래 새로 비롯한 슬픈 이야기가 대숲에 있고
또 먼 세월이 가져올 즐거운 이야기가 대숲에 있고
꿀벌처럼 이 이야기들을 물어 나르고 또 물어내는
바람이 있고 태양의 분수가 있는 대숲
대숲이 좋지 않으냐
란아
푸른 대가 무성한 이 언덕에 앉아서
너는 노래를 불러도 좋고 새같이 지줄대도 좋다
지치도록 말이 없는 이 오랜 날을 지니고
벙어리처럼 목놓아 울 수도 없는 너의 아버지 나는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내 심장을 삼으리라 .
처용은 말한다
신석초
바람아, 휘젓는 정자나무에 뭇 잎이 다 지겄다. 성긴 수풀 속에 수런거리는 가랑잎 소리 소슬한 삿가지 흔드는 소리 휘영청 밝은 달은 천지를 뒤덮는데 깊은 설레임이 나를 되살려 놓노라. 아아 밤이 나에게 형체를 주고 슬픈 탈 모습에 떠오르는 영혼의 그윽한 부르짖음------ 어찌할까나. 무슨 운명의 여신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도 육체에까지 이끌리게 하는가 무슨 목숨의 꽃 한 이파리가 나로 하여금 이다지도 기찬 형용으로 되살아나게 하는가. 저 그리운 연못은 거친 갈대 우거져서 떠도는 바람결에도 몸을 떨며 체읍을 한다 굽이 많은 바다다운 푸른 물 거울은 나의 뜰이었어라. 밤들어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에 보니 가랄이 넷이어라. 그리운 그대, 꽃같은 그대 끌어안은 두 팔 안에 꿀처럼 달고 비단처럼 고웁던 그대, 내가 그대를 떠날 때 어리석은 미련을 남기지 않았어라. | 꽃물진 그대 살갗이 외람한 역신의 손에 이끌릴 때 나는 너그러운 바다 같은 눈매와 점잖은 맵시로 싱그러운 노래를 부르며 나의 뜰을 내렸노라. 나의 뜰, 우리만의 즐거운 그 뜰을. 아아, 이 무슨 가면이, 무슨 공허한 탈인가. 아름다운 것은 멸하여 가고 잊기 어려운 회한의 찌꺼기만 천추에 남는구나. 그르친 용의 아들이여. 처용 도도 예절도 어떤 관념 규제도 내 맘을 편안히 하지는 못한다. 지금 빈 달빛을 안고 폐허에 서성이는 나, 오오 우스광스런 |
풍매화
김성관
하얀 물결 빛나는 산 어귀에
풍매화는 임을 기다린 듯
한 바탕 춤을 추고
임을 위한 눈꽃 뿌려준다
지켜주는 이 없이
가날픈 몸으로
홀로 살지만
하얀 모습 깨끗하고 아름답구나
잠자리 날갯짓 바람
작은 미동에도 불안해 하고,
"가여워 가슴아파하지 마세요."
"깊은 정심 변하지 않는답니다."
가끔 아주 작은 다구에
초청받아 호강하면서
깊은 차향에 감추어진
혼기 머리를 내 민다
허락하지 않아도 찾아와
몸둥이 휘감으며 흐르는 바람아
너는 어느 임 청으로
나를 어디로 출가 시키는가?
휩쓸려가는 것은 바람이다
박두진
휩쓸려가는 것은 바람이다.
보고 싶은. 보고 싶은 나라의 사람의 초록빛 이름이다.
빈 들의 작은 꽃. 꽃을 보고 않아있는 사람의 가난한 마음
다시는 생각하지 않으려던 사람의 초록빛 목소리
다시는 생각하지 않으려던 사람의 어질디어진 눈길이다.
휩쓸려 가는 것은 바람이다.
채찍에 구두발에 몸둥이와 총칼 그 비밀한 그물에
쫓기이는
쓸쓸한 황톳벌 침침한 부둣가 창백한 문명의 거리
아무에게도 말할 곳 없는
약하디 약한 사람들의 공포의 심장 굶주린 창자
낮에도 으르릉거리는
강한 자 횡포한 자 무법한 자들의 나라의
맹수들의 목덜미
떼무더기의 내일의 허물어져 가는 자들의 뼈다귀
휩쓸려가는 것은 바람이다.
저 바다에서 아침에서 초록의 벌판에서 솟아나는
눈이 부신 찬란한 새로운 나라 사람들의 앳된 소리
소년들의 깃발을 보고 싶은 나라 사람들의 합창이다.
아, 어제의 것 사라져가야 할 것 들의 죽음
죽은 자는 진실로 죽은 자들이 장사하는
빛이 있는 빛의 나라 빛의 대열의
휩쓸려가는 것은 바람.
휩쓸려가는 것은 바람이다.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셔츠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승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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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좋은 자료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가 되었다니
저도 감사드립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최회장님
감사드립니다
홍보도 부탁드립니다
******연엽에게 ******
라는 시를 수정하여 다시 올렸습니다
<대회용 시> 방에도 올려두었으니
이 시를 선정하신 분은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다시 올린 시 원문으로
낭송하셔야 합니다
권도현입니다. 선생님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대한민국의 많은 위정자들이 선생님처럼 늘 최고와 최선을 다해 매사에 임한다면 아름다운 대한민국이 될 터인데요. 선생님은 또다른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셔야 하실 분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시 주옥같은 글을 보며 저를 힐링 시켜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