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85
4월4일 [사순 제5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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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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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EDY_KG-3V6k (황중호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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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1)존재 자체로 구원>
인간이란 존재,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때로 참으로 대단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정말 대단한 일, 정말 경이적인 일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강도 높은 격무에 하루 온종일 시달리던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해봅시다. 집에 돌아오니 갓 돌을 넘긴 아들이 아빠를 향해 방긋방긋 웃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순식간에 하루의 피로가 사라질 것입니다. 하루 내내 받았던 스트레스가 눈 녹듯이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비록 7-8Kg도 안 나가는 작은 아기지만 모습 자체로 아버지에게는 기쁨의 원천이요
삶의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잃고 큰 충격에 빠진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너무나 슬퍼 식음까지 전폐합니다. 삶의 큰 의미를 상실하다보니 우울증까지 겹쳤습니다. 거의 죽음을 향해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 절친한 한 친구가 다가갑니다. 그저 말없이 함께 있어줍니다. 함께 울어주고 함께 고통의 순간을 견뎌냅니다. 상심한 사람에게 그 친구는 존재 자체로 빛이요 구원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생각해봅니다. 여러 가지 신학적, 철학적, 논리적 정의를 내릴 수 있겠지만, 제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 그 자체가 구원이 아닐까요?
부족한 인간 존재로부터 받는 위로도 이렇게 큰데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받게 될 위로는 얼마나 더 크겠는가 생각해봅니다.
어제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 기억나십니까?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을 둘러 싼 모든 사람들이 다들 돌 하나씩 들고 서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당신의 온 몸으로 막습니다. 당신의 뜨거운 사랑으로 그 여인을 사람들의 돌팔매질로부터 보호합니다.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극진한 배려와 각별한 보호를 통해 여인은 구원받습니다. 새 삶을 얻었습니다. 짙은 어둠만이 그 여인의 삶을 싸고 있었는데, 너무나 은혜롭게도 예수님께서는 환한 빛으로 다가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당신의 신원을 밝히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사순시기는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 당신 존재 자체로 구원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께 깊은 감사의 정을 표하는 시기입니다. 그분께서 내게 빛이요 구원이 되셨으니, 우리도 그 누군가에게 빛이요 구원으로 다가서는 시기가 사순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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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과거 없는 성인(聖人) 없고, 미래 없는 죄인(罪人)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대하게 지내는 축제들 가운데 ‘초막절’이라는 축제가 있습니다. 이 축제는 이집트를 탈출한 백성들이 광야를 횡단하던 오랜 세월을 기억하는 축제입니다.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던 백성들의 기나긴 순례 여정, 광야에서의 그 기나긴 밤들을 인도했던 불기둥은 하느님 현존의 상징이었습니다.
초막절 축제 기간 동안 매일 저녁 성전의 ‘여성 구역’ 네 곳에는 엄청난 크기의 등이 설치되었습니다. 밤새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성전지기들은 계속 올리브 기름을 채웠습니다. 백성들 각자의 손에도 등불이 들려져 있었고, 동이 틀 무렵까지 가무(歌舞)가 계속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막절 기간 내내 예루살렘 성전 경내에는 커다한 황금 촛대들에 불을 켜놓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언덕이 온통 환한 빛으로 밝혀진 그 모습이 꽤나 장관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어둠 속에서 환히 빛나는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현존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크고 환한 등불, 성전을 환하게 밝히던 황금 촛대들, 백성들 손에 들려있는 등불... 이 모든 것은 어둠 속에 헤매는 백성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느님을 표현하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적용되었던 빛의 상징을 당신 스스로에게 적용시키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복음 8장 12절) 하느님 현존의 표시가 더 이상 등불이나 촛대 등과 같은 상징이 아니라, 예수님 존재 자체로 드러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느님은 일심동체이십니다.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뵈었다면 아버지 하느님을 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정체와 신원에 대해서 더 이상 돌려서 말씀하신다든지, 은유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스스로 당신을 드러내시고 알리신, 일종의 자기 계시를 하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자기 계시를 그저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바로 구원이고 영생인데, 그 간단한 길을 거부했습니다. 그토록 은혜로운 구원의 계시를 배척함으로서 스스로 심판을 자초한 거입니다.
밝은 빛으로 다가갈수록 있는 그대로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깊은 상처와 굵은 주름, 부끄러운 과거와 엄청난 과오, 나약함과 유한성이 낱낱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송구함에 가슴을 치게 됩니다. 나 자신의 한계와 부기력을 실감하며 더 겸손되이 주님 현존 안에 머물고자 노력합니다.
깊어가는 사순 시기, 보다 자주 환한 빛이신 예수님께로 다가서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지 알수 있습니다.
우리의 숱한 죄와 방황, 악습과 부끄러운 과거를 낱낱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가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속적인 하느님의 자비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과거 없는 성인(聖人) 없고, 미래 없는 죄인(罪人)없습니다!” 또 다시 용기를 내서 구원의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주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 갈수록, 그분의 뜨거운 사랑 앞에,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는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녹아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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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4zMD7Ngi05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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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 헌금함 옆의 예수>
‘세상의 빛’을 묵상하며 꾸르실료 차수 지도를 하신 이종덕 가밀로 신부님의 강론을 들었었습니다. 그러면서 ‘아, 그래. 이것이 세상의 빛이겠구나!’라고 느낀 것이 있어서 소개해드립니다.
이종덕 신부님은 신학생 때 휴학을 하신 적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 의왕에 있는 성 라자로 마을에서 봉사를 했다고 합니다. 라자로 마을은 나환우들을 위해 만들어진 동네였습니다.
그때 한 작은 방에서 움직이기도 어려운 나환우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손은 다 뭉그러졌고 얼굴도 녹아내리는 초처럼 되어버린 할머니였습니다. 묵주를 쥐기 힘든 손으로도 그분은 작은 방에서 묵주기도만 바치고 계셨습니다.
이종덕 신학생이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천당 가시려고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할머니의 대답이 이 신학생의 뒤통수를 때리듯 충격적이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학사님, 제가 너무 받은 게 많아서요. 뭐라도 보답을 해야 하는데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네요. 제가 감사해야 하는 분들에게 작은 보답이라도 드리려고 기도하는 거예요.”
어쩌면 이종덕 신부님이 신학생 때는 자신이 천당에 가기 위해 기도를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남을 위해 바치고 있다는 것에 놀란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남을 위해 사는 사제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셨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빛이 없으면 앞이 보이지 않아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라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발걸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나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집착하는 것들입니다. 만약 애인을 사귀고 있다면 그 애인이 떠날까봐 두렵습니다. 만약 돈을 좋아한다면 돈이 사라질까봐, 가난해질까봐 두렵습니다. 자녀에 집착하면 자녀가 안 좋은 일을 당할까봐 노심초사합니다. 이것이 어둠을 걷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라고 하십니다.
빛은 바로 보게 합니다.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계신 하느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알면 아버지도 알 수 있다고 하시는 말씀은 당신이 아버지를 볼 수 있게 하시는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를 볼 수 있게 되면 저절로 세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집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상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종덕 신부님은 한 할머니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삶을 본 것입니다. 그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고 그렇게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을 다시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빛이 되는 길은 빛을 바라보고 따르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이시고 그 빛이 한 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복음 사가는 마지막에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곁에서 하신 말씀이다.”
도대체 당신이 빛이시라고 증언하면서 헌금함은 왜 등장하는 것일까요? 요한복음은 창세기의 해설서라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에덴동산에 헌금함이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헌금함에 바쳐야 했던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선악과입니다.
자신의 소출 중에 일부를 바치며 참 주인은 하느님이시라 고백하는 것이 헌금함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참 주님으로 보게 만들어 주님께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선악과나무의 옆에는 ‘생명나무’도 있었는데 하느님께서 당신을 주님으로 인정하여 봉헌하는 이들에게 주시려고 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이 바로 당신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종덕 신부님은 서품 받을 때, ‘내가 왜 여기 있지?’라는 생각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성소에 대한 확신을 가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때 제대 앞에 예쁜 꽃꽂이가 보였다고 합니다. 무슨 꽃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척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기 위해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에게는 빛이 필요합니다. 그 빛이란 내어줌을 좋아하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려면 세상에 생명을 주는 양식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 빛을 본 이들은 교회 옆에 있는 헌금 통에 자신이 가진 것을 봉헌하며 세상 것에서 시선을 떼어 하느님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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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8,12-20 :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께서는 이제 공공연히 당신 자신을 소개하신다. 당신이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세상의 주님이심을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12절) 여기서부터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반대의 표적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13절) 말씀이신 그분은 빛과 생명을 가지시고 그것을 베푸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니 그분께 다가와 빛을 받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부끄러움이 없도록 참 빛을 받아야 한다.
이 사순시기는 새로운 탄생의 시기이다. 빛에 가까이 가 완전한 빛, 완전한 빛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어두움을 물리쳐야 한다. 예수께서 바로 ‘빛’이시다. 그분은 본성상 빛이신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나오신 본성상 빛이시다. 또한 그분은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의 빛이 아니라 ‘온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12절) 라고 하셨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제 자랑을 하는 것 같은 “당신의 증언은 유효하지 않소.”(13절) 라고 한다. 당신은 인간이시면서도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표현하셨다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여도 나의 증언을 유효하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기 때문이다.”(14절) 즉, ‘나는 하느님이다. 나는 하느님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느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자격 있는 증인이다.’라는 뜻이다.
캄캄할 때, 우리는 전등을 밝힌다. 그러면 우리는 쉽게 물건을 찾을 수 있게 빛을 비춘다. 우리는 전등을 보기 위해 전등을 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건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물건들을 보면서 동시에 전등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등이 자기 자신을 보여주든,물건을 보게 하든, 전등의 존재이유는 확실하다. 빛이 다른 것들을 보게 한다면, 자기 자신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빛이시므로 당신 자신에 관해 자격 있는 증인이시다.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15절) 유대인들은 그분이 하느님이신 것은 믿지도 않았고 알아보지도 못했으며, 인간으로만 보았던 것이다. 육에 따라 사는 것이 잘못 사는 것을 의미하듯, 육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잘못 판단하는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그렇게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임을 알려주신다. 그분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그 심판을 미루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심판은 언제나 유효하다.아버지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16절)
“너희의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은 유효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로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에 관하여 증언하신다.”(17-18절)고 하신다. 여기서는 아버지의 증언도 아드님의 증언도 확실하다. 그런데 아들은 바로 당신 자신에 관해 증언하시기 때문에 두 사람의 증언이 아니다. 즉,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라는 말씀은 당신과 아버지는 같은 분이며, 당신은 아버지 외에 다른 증인이 필요치 않다는 말씀이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 있소?” 하고 묻자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19절)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 정도로만 알고 있는 그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다. 또한 말씀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셨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말씀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셨고 우리를 위해 육이 되셨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더라면, 예수님을 낳으신 분이 누구인지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들을 모르기 때문에 그 아버지도 모르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당신 자신을 공공연히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친자관계로 표명하시게 되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죽음에로 몰아가려고 서로 협력관계를 갖게 된다. 예수님이 잘못 말씀하신 것은 없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사고에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없어 보이지만 당시 율법주의에서는 전혀 옳지 않은 면을 드러낼 수 있다. 주님께 올바른 신앙의 고백과 함께 사랑을 드릴 수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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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여기서 ‘빛’은 ‘생명’을 뜻합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은, “나는 세상에 생명을 주려고 왔다.”로 해석됩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라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어둠’은 ‘죄, 죽음, 멸망’을 뜻합니다. ‘어둠’이라는 말에서 바오로 사도가 겪은 일이 연상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난 뒤에,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일을 겪었습니다.(사도 9,3-9) 그 일에 대해서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르고 박해자로 살던 시간들이 ‘죄와 죽음 속에서 살던 시간들’이었음을 깨달은 일로 해석합니다.
‘나를 따르는 이’라는 말은,b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둠 속을 걷지 않고’라는 말씀은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서’ 라는 뜻입니다.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뒤의 12장을 보면, 같은 말씀이 또 나옵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2,46)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십시오. 사실 그들이 은밀히 저지르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입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빛으로 밝혀집니다. 밝혀진 것은 모두 빛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에페 5,8-14)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생명)을 받아서, 그 빛(생명) 속에서 사는 사람이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또 자신이 받은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서 사람들을 영원한 빛으로 인도해 주는 사람입니다(마태 5,16)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여도 나의 증언은 유효하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또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요한 8,14)
앞의 5장을 보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요한 5,31)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과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증언은 유효하다.” 라는 말씀이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모순은 아니고, “세속의 법률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법에서는 유효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법’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법’입니다. 여기서 ‘알다.’ 라는 말은 ‘일치’를 뜻합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세상에 왔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하기 때문에 나의 증언은 유효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믿어라.”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또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하느님께서 구원을 주시는데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즉 “너희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생활을 하고 있다.”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심판을 하여도 내 심판은 유효하다. 나 혼자가 아니라,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함께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의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은 유효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로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에 관하여 증언하신다."(요한 8,15-18)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지만”이라는 말씀은, “너희는 겉모습만으로 하느님의 일을 판단하지만”, 즉 “너희는 눈에 보이는 세속 일만 신경 쓰고, 눈에 보이지 않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는 관심 없이 살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심판은 인간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복음’은 그 자체가 심판이기도 합니다. 받아들이면 구원받고, 거부하면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요한 12,48) 16절의 말씀은, 재림 때에 예수님께서 심판관으로 오시겠지만, 그 심판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17절-18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19절의 예수님 말씀은,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고(요한 10,30), 예수님을 보는 것은 아버지를 뵙는 것이고(요한 14,9),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요한 3,34)이라는 가르침입니다. 20절의 ‘그분의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때’는 인간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목숨을 ‘빼앗기는’ 일이 아니라, ‘내놓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요한 10,11.15.18).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신(바치신)’ 메시아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이어집니다. 신앙인들의 죽음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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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인문학으로 듣는 성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토마스 하디의 ‘테스’와 김동인의 ‘감자’ 그리고 요한복음 8장의 ‘부정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3 이야기의 공통점은 잘못한 여인은 있는데 잘못을 함께 저지른 남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테스에게 폭력을 행했던 것은 남자였고, 테스를 힘들게 했던 것도 교회의 목회자였습니다. 감자에 나오는 복녀에게 폭행을 가했고, 결국 복녀를 죽인 것은 남자였습니다. 복녀의 죽음을 눈감아 주었던 것도 남자였습니다. 부정한 여인과 함께 죄를 범했던 남자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다만 교회의 이름으로 모인 남자들이 부정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왔고 돌을 던져야 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테스와 복녀 그리고 부정한 여인은 어쩌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병든 사람은 아닐까요? 테스와 복녀 그리고 부정한 여인을 죽였고,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은 어쩌면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병든 사람을 외면했던 사제, 레위인은 아닐까요? 그리고 21세기를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은 아닐까요?
한국은 2019년 낙태죄가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낙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낙태가 죄가 되는지, 낙태를 해도 죄가 되지 않는지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법으로 규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원하지 않았던 아이를 가진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태도입니다. 원하지 않았던 아이를 가진 여성을 대하는 교회의 태도입니다. 테스와 복녀 그리고 부정한 여인을 단죄하는 것은 율법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테스와 복녀 그리고 부정한 여인을 사랑으로 품어주는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아이를 가져야 했던 여성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안심하고 아이를 출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회를 받아들이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교회를 로마의 유일한 국교로 인정하면서 교회는 법의 보호를 받았고, 교회는 법을 이용해서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교회는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고 성장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이교도들에 의해서 순교한 사람보다 훨씬 많은 이교도들이 교회의 법에 의해서 순교한 것도 역사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 돌을 던져도 되는지 물었던 남자들의 모습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인종차별이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교회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물질과 자본으로 가득한 세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교회의 위기는 내부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 사람들을 외면하는 교회의 내부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죄인을 품어주지 못하고, 돌을 던지려하는 교회 내부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법과 제도로 판단하고 규정하기 전에 성령의 이끄심에 온전히 맡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우리를 맡길 때, 우리는 유혹을 이겨낼 수 있고, 거룩하게 변할 수 있고, 회개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서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묵상하면서 남은 사순시기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 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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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평소처럼 컴퓨터의 전원을 켰는데 문제가 생겼다는 내용의 화면이 나타났습니다. 대게는 컴퓨터를 껐다 켜면 해결되곤 하였습니다.
컴퓨터를 다시 켜니, 문제를 해결하려고 원인을 찾고 있었습니다. 컴퓨터는 그 과정이 몇 분은 걸릴 거라고 안내를 해 주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지만 자동차의 내부 구조를 모르는 것처럼, 컴퓨터를 사용하지만 컴퓨터의 구조를 모르기 때문에 무척 당황했습니다. 다행히 컴퓨터는 알아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냈고, 그런 원인을 마이크로 소프트 사에 전달하겠느냐고 물어서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10분가량의 시간을 기다리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컴퓨터를 바꿀까? 사무실에 가서 일을 할까? 왜 내 컴퓨터에 이런 일이 생겼을까?’
급한 성격에 옷을 입고 사무실로 가려는데, 컴퓨터는 정상이 되었습니다. 고작 10분인데 그것을 참지 못하는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느 본당 사목위원의 경험입니다. 그는 술을 잘 못했습니다. 하루는 회사에서 회식이 있었는데 그날따라 상급자가 자꾸 술을 권했습니다. 한두 잔은 받았는데 너무 심해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느닷없이 뺨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도 중간 간부이고, 그 자리에 아랫사람도 있었는데 창피하고 분했습니다. 하지만 분위기 때문에 참았습니다. 집에 와도 분이 삭지 않아 다음 날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이 참에 회사를 그만두자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사표를 결심하니까 마음이 씁쓰레해 성당을 찾았습니다.
제대 뒤 십자가를 보며 말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음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겨우 뺨 한 대 맞은 것 갖고 그렇게 억울해하느냐? 나는 멸시와 천대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갔다.’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면서 부끄러워졌다고 합니다.
그는 다음 날 출근했습니다. 그런데 뺨을 때린 간부가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가 처리한 일에서 하필 그때 문제점이 드러난 것입니다. 누군가 변호해야 했는데 적임자는 뺨맞은 사목위원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런 감정 없이 옹호했다고 합니다. 일처리가 끝난 뒤 그 간부는 예비교우가 되었고, 세례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작은 기적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없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도 변명 없이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불평과 불만은 나쁜 습관입니다. 나쁜 습관을 벗는 길은 좋은 습관을 지니는 것밖에 없습니다. 인내와 절제가 힘들어질 때 십자가를 바라보아야겠습니다.
3년 전에 저는 안식년을 하고 싶었습니다. 교구장님께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안식년 동안에 미국에 있는 동창에게 가서 지내려고 항공권도 구입했습니다. 강의를 부탁해서 강의 준비도 했습니다. 안식년 동안 쓰려고 비용도 마련했습니다. 이제 인사 이동만 있으면 모든 것이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구장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안식년은 다음에 하고, 용문 청소년 수련장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사제는 순명을 약속하였기 때문에 조금 아쉬움은 있었지만 용문 청소년 수련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원망의 마음을 가졌다면 용문의 맑은 공기를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를 보고도 별 감동이 없었을 것입니다. 공기 좋은 곳에서 6개월 머물다가, 성소국으로 자리를 다시 옮겼습니다. 아직은 안식년을 하지 않았으니, 다음 기회에 안식년을 신청하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수산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억울하게 거짓증언으로 재판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은 수산나의 누명을 ‘다니엘’이라는 젊은이를 통해서 벗겨주었습니다.
수산나는 수치스럽게 목숨을 연명하기보다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당당하게 죽음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수산나를 사랑하셔서 거짓으로 증언을 한 간악한 사람들을 벌하셨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옭고 그름을 정확하게 가리는 것은 필요합니다. 정의가 실현되고, 억울함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에 덧붙여 한 가지 더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나는 아쉬움이 없습니다. 파란 풀밭에 나를 뉘여 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내 비록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수레바퀴를 벗어나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고통 중에도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죽음을 앞두고 새로운 출발을 생각하며, 헤어지는 모든 사람이 부활하여 영원한 삶에로 나갈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것은 빛으로 오신 주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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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그런데 주님이 세상의 빛이시라는 이 말씀을 세상을 어둡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밝게 하는 존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천상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며, 다른 누가 아니라 당신이 바로 세상의 빛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요.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은 이 중 어떤 뜻일까요? 지금의 우리는 첫 번째 의미는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세상을 어둡게 하는 분이라고 생각지 않고 너무도 당연히 세상을 밝게 하는 분이라고 생각하기에 주님께서 그런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을 거라고 우리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뿐 아니라 다른 종교 신자들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간디가 예수님과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하지요.
나는 예수는 존경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자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힌두교 신자인 간디조차도 예수라는 존재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이 세상 누구도 세상을 어둡게 하는 분으로 예수님을 생각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는지를 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오늘 복음은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에 이어서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는 당신을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생각지 않고, 그래서 그 빛을 따르지 않고 어둠 속에 산다고 말씀하시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빛으로 생각했다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바리사이들도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빛이신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래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고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저는 바리사이가 빛을 미워하는 존재는 아니었을 거라고,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깨닫기 전까지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세상의 빛으로 생각하기는커녕 사람들을 미혹하고 호도함으로써 한 편으로는 자기가 그렇게 철저히 믿는 유대교를 무너뜨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세상을 어둡게 하는 존재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바로 바리사이 출신이지요. 대부분의 바리사이들은 바오로 사도처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고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우리도 깨닫지 못한 사람이 아닌지,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내가 세상의 빛이야’ 라고말씀하시는 것은 아닌지 반성을 하는 오늘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주님, 그런 말씀 제겐 하실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세상의 빛이시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꼬집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왜 어둠 속을 걷고 있느냐? 왜 너희 얼굴이 밝지가 않느냐? 왜 사람들이 너희의 빛을 보고 나를 보게 하지 않느냐? 왜 간디가 나는 존경해도 너희들은 싫어한다고 얘기하느냐?” 할 말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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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회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부산교구 염철호 사도요한 신부님]
밤이 있어 아침이 빛납니다. (요한 8, 12-20)
만일 낮만 있고 밤이 없다면 생명이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합니다. 세상에 선한 사람만 있고 문제의 사람이 없다면 사람이 할 일이 없어 무료해서 삶의 기쁨 즐거움도 없을 것입니다.
법이 없어도 잘사는 사람만 있다면, 법원이 존재가 없어지고, 병이 없으면 병원이나 의사의 업을 가진 사람이 없어질 것이며 인간이 죄와 악의 현상이 없다면 하느님의 존재를 체험하기 힘이 들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주님이 참 빛으로 사시는 이유는 어둠이 있어서입니다. 언제나 밝은 태양 속에 있다면 태양의 빛이 얼마나 소중 한지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캄캄한 밤이 있어 빛나는 아침을 기다리며 태양의 빛이 얼마나 수중한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 저는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깊이 체험하며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스스로 “ 하느님은 살아계시다.” 하고 외쳤습니다.
기도회 모임을 갔다가 오후에 운전하고 돌아오는데 고속도로에서 잠깐 잠이 오기에 정신을 더 차리고 운전을 하고 왜관 톨게이트를 통과하고 수도원 거의 다와가는 중 깜빡 졸았던 것 같습니다.
차가 요동치며 달려 100km 이상 굉음을 내며 달리며 정지가 되지 않아서 500m 정도를 달려 앞 차를 피하면서 요리저리 운전하며 이것이 죽음의 길이구나 생각하며 달리던 차를 사이드 브레이크를 밟아 왜관시내 입구에서 차를 세워놓고 타이어집으로 들어가 차를 점검하니 앞바퀴 뒷바퀴가 다 터지고 에어백까지 터졌는데 어떻게 살고 다른 차와 충돌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니 내가 운전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운전해 주셨기에 살아날 수 있었다 감사 감사하면서, 주님이 내 옆에 계셨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운전면허 갱신을 하고 차를 더 운전하려고 했는데 내 운전은 여기까지인가? 아니면 더 운전하려면 좀 더 긴장해야 하는데 어찌할까? 어제 저녁에는 운전 그만 두고 외적 활동 전부 접어야 하겠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오늘 당장 사수동 고백성사 주고 내일 치과에 가야하고 요셉회 모임도 있고 누구에게 나를 대려다 달라고 말을 하기 어렵고 그래서 하는데 까지 운전하기로 마음을 정해보았습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오듯이 내 마음을 어둡게 하지만 아침 새날을 맞이하며 조심하며 운전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사는 것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의 새로운 빛을 받으려고 합니다. 기도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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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빛”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성경>에서 빛은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빛”은 하느님의 현현과 계시의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떨기나무 가운데 태우지 않는 불꽃으로 현현하셨습니다. 그리고 “빛”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백성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상징하였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인들이 광야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심을 빛으로 드러내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선언은 곧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하느님이다.’라는 선언이 됩니다.
동시에, <구약> 전승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빛”은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이사 46,6; 60,19-22) 따라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이 선언은 결국, ‘나는 메시아다.’라는 선언이 됩니다.
<둘째>로, “빛”은 하느님께서 백성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쫓아오는 파라오의 군대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할 때도, 어둔 밤 광야의 온갖 짐승들로부터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해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빛”이라 하심은, 곧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셋째>로, “빛”은 하느님의 백성을 인도하심을 나타냅니다. 이정표가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방황할 때, 하느님께서는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빛”이라 하심은, 곧 당신께서는 하느님 백성을 어둠으로부터 이끌어 내는 인도자라는 선언이 됩니다. 곧 죄와 무지의 어둠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선언을 통해, 당신께서는 하느님이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보호하실 분이시며, 더 나아가 백성들을 인도하실 분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 하심은 당신은 세상에 속해 있는 분이 아니라, 세상을 비추는 빛이심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세계에 속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세상’을 비추어, 구원하실 구세주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빛”은 곧 ‘생명’이 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당신을 선언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이는 곧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빛’을 비추는 이가 되어, 그 역시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됩니다. 곧 이제는 ‘위에서 비추는 빛’이 ‘안에서 비추는 빛’이 되고, ‘안에서 비추는 빛’은 ‘밖을 비추는 빛’이 될 것입니다.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주님!
당신께서는 늘 세상을 비추시니
저희를 어둠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진리에로 이끄소서.
무지로부터 비추시고 빛으로 입히소서.
당신 빛으로 생명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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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헌금함 곁에>
요한 8,12-20 (나는 세상의 빛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바리사이들이 “당신이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으니, 당신의 증언은 유효하지 않소.”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여도 나의 증언은 유효하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또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심판을 하여도 내 심판은 유효하다. 나 혼자가 아니라,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함께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의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은 유효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로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에 관하여 증언하신다.”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 있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곁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을 잡지 않았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헌금함 곁에>
하느님께 바친 돈이
담긴 헌금함이
있다네
헌금함 곁에
헌금하는 사람들이
있다네
하느님께 사로잡힌
빛의 사람들이
있다네
돈에 사로잡힌
어둠의 사람들이
있다네
하느님을 섬기는
빛의 사람들이
있다네
돈을 섬기는
어둠의 사람들이
있다네
하느님으로 사는
빛의 사람들이
있다네
돈으로 사는
어둠의 사람들이
있다네
하느님을 드러내는
빛의 사람들이
있다네
돈을 드러내는
어둠의 사람들이
있다네
헌금하는 사람들이
헌금함 곁에서
나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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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눈높이를 높여라>
빛은 어둠을 밝혀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으로 오셨고 죄와 악의 어둠을 비추어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빛을 따라가면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어둠을 좋아하는 사람은 빛을 피합니다. 결국, 스스로 죽음의 심판을 받고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육적인 욕망을 채우려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라는 것이,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인간의 마음을 현혹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논리나 가치에 해박한 지식으로 종교를 ‘비과학적’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세상 것에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정작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 절대자 하느님은 알지 못합니다.
이 세상만을 쳐다보는 한계성 때문에 결국 하느님 아버지도 그 아들 예수님도 알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그들은 무지합니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세상 것에만 매여 있으면 세상 것밖에 다른 것이 보일 리 없습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알고 계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왔고, 아버지 하느님께로 갈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이 세상에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천상의 것을 이 세상에 옮겨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세상 것에만 관심이 있으니 천상의 것을 보기가 너무도 어렵습니다. 잠시 세상 것에서 한발 물러서서 하늘의 신비를 바라보면 모두를 얻을 수 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합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면 내가 현실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눈높이를 맞춰주러 세상으로 오셨는데도 그분과 소통을 하지 못한다면 어느 정도 내 눈높이를 높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이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러 오셨기에 우리의 생각을 바꿔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에 마음을 두면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하는 일이 잘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일이 잘되고 못되고는 우리의 결단과 실천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품어주시고 생명을 가지고 기다리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더이상 내 것을 고집하거나 세상 것만을 쳐다보는 일은 없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당신을 믿습니다. 하오니 저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인식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세상에 살면서도 여기서부터 천상의 행복을 누리게 해 주십시오. 빛이신 예수님의 빛을 받아 세상을 빛나게 하는 도구가 되게 해 주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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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한 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입니다. 그래서 이 넷째 복음서는 1장에서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라고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소개한 다음, 성부 하느님의 창조 행위가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고 그분께서 바로 메시아, 곧 세상의 구원자이시며 세상의 빛이시라고 복음서 전체에서 전합니다.
이로써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이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증언은 유효하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심판을 하여도 내 심판은 유효하다. 나 혼자가 아니라,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함께 심판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라고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위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입니까? 그분께서 세상의 구원자이시며 세상의 빛이시라고 고백하며 증언합니까? 인간적 두려움, 근심과 걱정 앞에, 또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벼랑 끝에 서서, 과연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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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세상에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입니다."(요한8,12)
<증언의 삶!>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십니다. 당신 자신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시는 빛이시며, 때문에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어 생명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증언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증언을 두고 증언의 법적 유효성을 따지면서 예수님의 증언이 무효라고 주장합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그들 눈에는 예수님이 하느님에게서 나신 분이시면서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 보이질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싫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고 만들어 놓은 틀 안에 예수님께서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의 닫힌 마음이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 갇혀 있게 되면 우리도 그렇게 됩니다.
돈과 재물의 틀, 권력과 명예의 틀, 알고 있다는 지식의 틀, 혈연과 지연의 틀! 이러한 틀들이 너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너와 하나가 되는 일치의 장애물이 됩니다. 더 무서운 것은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과 예수님의 증언을 거부합니다. 이러한 틀들이 하느님이신 예수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하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합니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진실되게 믿고, 말과 행동으로 빛이신 이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그런 증언의 삶을 살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합시다!
제7처 : 기력이 다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예수님이 또 넘어지셨습니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고해성사를 보고 또 보며 자신의 십자가를 잘 짊어지겠다고 결심하지만 이내 불평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베드로가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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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매일 미사에 참석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기도 생활에 전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항상 읽는 책은 성경책이었고, 그 어떤 사람보다도 성경에 대한 지식이 박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람을 신심 깊다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입에서 자주 이웃과 가족에 대한 부정적인 말이 쏟아져 나왔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교만과 멸시의 말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복음 말씀을 잘 알면서도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에게 악착같이 복수하려고 합니다. 이 사람 역시 스스로 신앙인이라고 말하지만, 참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뿐 아니라 행동에서도 주님의 사랑이 흘러넘쳐야 합니다. 즉, 기도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 자기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잘 아는 사람은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사랑을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셨던, 미움과 복수의 삶을 버리려고 노력할 것이고, 세상에 재물을 쌓기보다는 하늘에 재물을 쌓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잘 알지 못하기에, 세상의 기준에 맞춰만 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 빛은 매우 중요한 의미였습니다. 우선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만물에 앞서 제일 먼저 ‘빛’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지혜서는 이 불기둥을 ‘불멸의 빛’이라고 전해줍니다. 그 빛이 바로 당신이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 중요한 빛을 ‘율법’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를 부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으니, 당신의 증언은 유효하지 않소.”라고 바리사이들이 말합니다. 이도 율법에 근거한 말이었습니다. 율법에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증언할 수 없다고 분명 나옵니다. 문제는 이 율법은 외부 행위를 단죄할 때 법정에서 적용되는 원칙일 뿐, 예수님의 경우처럼 내적 진리에 적용되는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옳지 못한 판단으로 예수님에 대한 의심만 키우고 있습니다. 이 잘못된 판단이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 역시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알아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세상의 빛이신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뜻인 사랑을 실천할 때만 비로소 주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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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 하느님 체험>
-빛이신 주님의 반사체反射體인 우리들-
봄꽃들 만개하기 시작한 요즘의 풍경은 흡사 기적처럼 생각됩니다. 꽃들도 많고 새소리들도 많습니다. 참으로 빛과 생명으로 약동하는 봄철, 벌써 부활시기가 앞당겨진 느낌입니다. 산책때 마다 황홀한 기쁨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전례시기와 계절이 참 잘 어울리는 우리의 자연 환경도 큰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아침 산책중 떠오른 글입니다.
“봄이 왔습니다.
온갖 꽃들 피어나는
온갖 새들 노래하는 봄이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인간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여전히
예나 이제나
영원히, 끝까지
세상을
인간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입니다.
신망애信望愛
참 좋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 영광과 영예를 드립니다.”-2022.4.3. 아침
이 또한 폄범한 일상의 하느님 하느님 체험입니다. 비상한 하느님 체험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새로움, 놀라움, 좋음, 아름다움 체험등 평범한 일상의 체험들 역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 체험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성무일도 아침 기도중 성서 독서 말씀 마지막 구절의 깨달음도 생생합니다.
“이날은 우리 주님의 날로 거룩하게 지킬 날이니 슬퍼하지 마라. 주님의 기쁨은 우리의 힘이로다.”(느헤8,10).
주님의 기쁨은 우리의 힘이랍니다. 그러니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은 바로 우리의 힘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우리의 모든 수행은 우리 기쁨의 원천이 되고 우리를 영육으로 건강하게 하는 하느님 체험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 기도 은총보다 더 좋은 하느님 체험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체험의 기도도 바로 참 좋은 영성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입니다. 평소의 평범한 하느님 체험의 축적들이 위기시 빛을 발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다니엘서의 수산나가 그 좋은 증거입니다. 아마 미사시 독서중 가장 긴 독서일 것입니다. 수산나는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이었고 수산나의 부모는 의로운 이들로서 수산나를 모세의 율법에 따라 교육시켰다 합니다.
사악한 바빌론의 두 원로들의 모함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한 순간, 수산나는 마음으로 주님을 신뢰하였기에 눈물이 가득한 채 하늘을 우러러 기도합니다. 평소의 축적된 하느님 체험의 기도가 위기시 빛을 발하는 모습입니다.
“아, 영원하신 하느님! 당신께서는 감추어진 것을 아시고 무슨 일이든 일어나기 전에 미리 다 아십니다. 또한 당신께서는 이자들이 저에 관하여 거짓된 증언을 하였음도 알고 계십니다. 이자들이 저를 해치려고 악의를 꾸며 낸 것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결정적 순간에 하느님은 다니엘을 통해 개입하심으로 수산나를 살려 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라는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신 것입니다. 다니엘의 천상 지혜로 수산나는 살아나고 사필귀정事必歸正, 대신 바빌론의 두 원로가 사형을 받습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구절은 흡사 수산나의 구원 체험의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곤궁한 처지도 수산나와 흡사해 보입니다. 물론 수산나처럼 급박한 죽음의 위기는 아니지만 호시탐탐 예수님을 노리는 무지하고 사악한 바리사이들입니다. 예수님의 확고한 하느님 체험의 신원의식이 예수님을 다니엘 이상으로 지혜롭게 했고 자신을 지키게 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예수님의 신원 의식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오늘 복음중 길이 마음에 새겨할 구절입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바 탈출기 모세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이름인 “나는 이다”(I AM)입니다. 나는 너희를 위해 있는(I AM for you), 나늘 너희와 함께 있는(I AM with you), 하느님인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신원을 드러내는 일곱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1.나는 생명의 빵이다.
2.나는 세상의 빛이다.
3.나는 문이다.
4.나는 착한 목자다
5.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6.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7.나는 참 포도나무다.
얼마나 좋고 자랑스런 우리 예수님의 정체인지요! 바로 이런 확고한 신원의식 체험이 예수님께서 흔들림없이 십자가의 길을 가게 했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확고한 자의식自意識이자 신원의식은 다음 바리사이들을 향한 말씀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내가 나에 관하여 증언하고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에 관하여 증언하신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참으로 예수님을 알아감으로,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예닮의 여정’이 얼마나 결정적인 구원의 여정인지 깨닫습니다. 새삼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하느님 체험이 우리를 일상의 유혹과 위험으로부터 지켜줌과 동시에 날로 예수님과 하느님을, 나를 알게 하는 구원의 체험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일상의 하느님 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신원도 점차 또렷해 질 것이며 빛이신 주님의 반사체로 주님의 영광을 날로 잘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태양을 반사하는 달빛처럼, 발광체發光體인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反射體로서 우리의 신원임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위험에서 지켜 주시며 생명의 빛이신 주님의 반사체로서 주님 영광의 빛을 발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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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4CJs06gq2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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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 12)
너무 가까이에
있는
어둠과 빛이다.
어둠은 닫히고
빛은 열린다.
어둠은
두려운 심판을
동반하지만
빛은 용서와
늘 함께한다.
세상의
빛은 빛의
역사를 다시
써내려 간다.
빛은 하느님을
알게한다.
생명의 빛은
생명의
길이 된다.
숨결과 숨결
사이에서
길이 된다.
빛은 우리를
결코 심판하지
않는다.
회개의 빛으로
이끌 뿐이다.
빛은 빛으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밝혀준다.
하느님께로
오신 빛이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신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온통
빛이 된다.
빛은 우리를
향해 사랑을
실천하신다.
빛의 뜻은
사랑이며
구원이다.
구원은
하느님의
뜻이다.
가야할 삶을
빛으로
보여주신다.
어둠이 아니라
빛을 믿는다.
빛을 사랑하는
사람은
빛 안에서 빛의
길을 걸어간다.
생명의
봄빛이
눈부시다.
빛으로
빚어만드신
하느님의
세상이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은총의
오늘, 이 오늘이
바로 가장 빛나는
빛의 새날이다.
빛의 풍광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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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 12)
깨어난 봄꽃들이
다시 빛안에서
기도처럼 빛납니다.
결코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의 빛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관계를 비추는
관계의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관계의 빛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며
우리를 주님께로
돌아서게 합니다.
주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관계의 빛은
생명의 빛입니다.
생명의 빛은
모든 활동의
원천이 됩니다.
세상의 빛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되찾아 주십니다.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가장 안전하고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구원의
출발점이며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이십니다.
세상의 빛을
진실로 믿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삶을
깨어나게 하는
세상의 빛이
우리를 위해
기도합니다.
생명의 빛을
얻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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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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