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에 대해서 갖는 가장 큰 오해 중의 하나는 그의 모든 철학이 오로지 논리학에 집중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저 대리석 조각의 색감이 너무 아름답다.”는 미학적 판단이나, “인간은 자신의 부조리한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형이상학적 판단은 《논고》에 나타난 엄격한 논리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고》에서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다고 해서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적 물음이나 예술의 차원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른 철학자들의 책을 읽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던 비트겐슈타인이 가장 탐독한 책 중의 하나가 키르케고르라는 사실은 이를 잘 뒷받침한다. 그는 도저히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삶의 절대적 역설을 강조한 키르케고르를 찬양하였다. 게다가 일생을 통틀어서 그가 일관되게 흥미를 가진 것이 음악이었다. 이런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과 예술을 배격하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논고》에서 그가 매우 치밀한 인공언어의 세계를 구축한 것은 이러한 세계만이 유일하게 참된 세계임을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논고》를 통해서 인간이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분명하게 밝히고자 하였다.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은 이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ß man schweigen).” 마치 아포리즘과도 같은 이 말은 《논고》가 의도하는 바를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명제를 다듬고 언어를 분석하여 논리적으로 완전무결한 인공언어의 세계를 구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닌 한계는 명확하다.
말하자면 우리가 논리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는 구분되어야 한다. 미학적 세계나 도덕적, 형이상학적 세계에 논리적 잣대를 댈 수는 없다. 말할 수 없는 것, 즉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명제화할 수 없는 것이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자 할 때, 즉 형이상학이나 예술을 명제화하려고 할 때 철학자의 오만함과 월권 행위가 발생한다. 이런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오로지 논리적인 것만을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보는 편협한 사상가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면모가 결코 《논고》에 나타난 논리주의의 딜레마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앞서 본 대로 그는 완전무결한 논리적 세계로서의 인공언어를 구축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논리적 세계는 그 자체로 이미 이론적 균열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소 지엽적일 수도 있지만 ‘색(color)’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이를 잘 드러낸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색에 관해 간헐적으로 언급하는데, 이들 언급에 나타난 핵심적인 주장 중의 하나는 “한 장소에서 두 가지의 색을 경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사과가 여러 개의 색을 지니고 있을 수는 있지만, 어느 특정한 공간의 한 점에서는 반드시 하나의 색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과가 여러 색을 띠는 것은 한 점에서 동시에 여러 색을 띠기 때문이 아니라 각각 다른 색을 띠는 지점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 장소에서 두 가지 색을 경험하는 것이 마치 “어떤 것이 P이면서 동시에 –P이다.”라는 명제만큼이나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사태라고 생각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생각이 현실적으로 맞는 것일까?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였던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는 잔디를 표현하기 위해 녹색뿐만 아니라 녹색의 보색인 보라색을 칠하였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처럼 화면의 한 점에는 녹색과 보라색이 공존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잔디를 시각적으로 경험할 경우, 그것은 한 장소에서 녹색과 보라색이 중첩된 것이라고 받아들여진다. 어떤 공간이든 다양한 파장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한 장소에 특정한 파장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파장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잔디를 녹색이라는 파장의 특성만으로 이해할 경우 오히려 잔디는 현실과는 다른 것이 되고 만다.
들라크루아, 〈해 질 녘의 하늘〉 Study of the sky at sunset, 1849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한 장소에 두 가지 색은 공존할 수 없다. 그러나 들라크루아가 잔디를 표현하기 위해 두 가지 색을 썼듯이 우리는 어떤 것을 시각적으로 경험할 때 여러 파장의 중첩으로 받아들인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가 지닌 가장 취약한 부분이 바로 이 점이다. 그가 《논고》에서 구축한 논리적 세계는 인공언어의 세계이며 이는 애초에 현실과 다른 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림이론은 현실과 언어의 대응을 전제로 하지만 이 그림이론은 《논고》에서 전제된 것이지 결코 증명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취약성은 위대한 사상가이자 진정한 인간인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어떠한 감점 요인으로도 작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은 스스로 자신의 이론이 지닌 취약점과 한계를 자각하였으며, 이를 겸허히 인정하고 극복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