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전요.. 홍명보 선수는 절~대 미팅이나 첫사랑 같은 건 없는 줄 알았어요.
워낙 철저하시구, 자기를 통제하는 힘이 강하시니까.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건 정말 신선한 충격이네요..
솔직히 읽다가 정말 놀라고 웃겨서 피식피식 웃기도 했지만..
역시 홍명보 선수도 사람이죠? ^^ 농담임다..
아..
오늘 올스타 발표 났는데 역시 홍명보 선수가 1위를 차지했습니다~!
축하축하..
영원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 [원본 메세지] ---------------------
☞자서전이랑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정말 희귀한 자료 같아서 퍼왔어요..<br>
명보님 히스토리에 절대 빠질 수 없는 선홍님이 역시 중간에 잠깐 등장하시고..^^<br>
선홍님이 자신에게는 하늘같은 분이다, 말씀하시는 이회택 감독님과<br>
포항 입단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네요..(진짜 관심은 다들 제목의 그것에 가시겠지만..^^;)<br>
예나 지금이나 오로지 축生축死! 一心 명보님 화이팅!!^^*<br><br><br>
- 그라운드의 푸른 잔디 위에 서면 나는 한없이 자유로움을 느낀다.<br>
달리고 드리블하며 슛을 쏘는 가운데 나는 공과 그라운드와 저 드높은 하늘과 하나가 된다.<br>
나의 젊음은 한 없이 달리라고 채찍질하고 내 뜨거운 피는 그라운드에 설때 환호한다.<br>
팬들의 함성과 환호보다도 내 속에서 울려퍼지는 소리없는 환호성 때문에 나는 축구공을 인생의 동반자로 삼았다. 축구공과 함께 걸어온 나의 길 시련이 있었고 좌절의 늪에서 헤멜 때도 있었다.<br>
아픔이 깊어 그만 주저앉고 싶을 때 옆에서 부축해 준 고마운 분 기쁜 일 보다는 슬픈일이 찾아 왔을 때 옆에 있어 준 사람 꿈과 희망을 더 높이 더 크게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해 주고 용기를 불어준 분들 내가 사랑했던 사람, 사람들.....<br>
나의 길은 결코 나 혼자만이 걸어온 길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축구로 맺어진 끈끈한 우정속에서 나는 내 꿈을 향해 달린다. 그때 나는 가장 자유롭다.<br><br><br><br>
<피는 못 속여, 나는 꼬마 축구왕><br><br>
1969년 2월 12일 세상 사람들이 아침을 준비할 7시쯤에 나는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곳은 지금까지 거의 30년간을 살아온 서울 성동구 구의동 209-59호. 나는 구의동의 터줏대감인 셈이다. 당시 아버님이 방앗간을 운영하셨기 때문에 동네사람들이 나를 방앗간집 아들이라 불렀다.<br><br><br>
어머니는 내가 태어날 때 특별한 태몽같은 것을 꾸지 않으셨다. 재미있는 사실은 부모님 대신 고모님이 나의 태몽을 대신 꾸셨다는 것이다. 첫 애였던 나를 낳으실때 어머니는 밤새도록 산고에 시달리셨다. 고모는 그날 밤 커다란 청룡이 당신의 몸을 칭칭 감고 하늘로 승천하는 꿈을 꾸셨다고 한다.<br>
부모님 대신 나의 태몽을 꾸신 때문인지 고모님이 나에게 베푸시는 사랑은 특별하다. 환갑에 지났음에도 친자식처럼 내 일을 걱정해 주시고 돌봐주신다. 조금은 쑥스럽지만 내꿈이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고 있는 것도 다 고모님의 태몽의 암시 때문이 아닐까...<br><br><br>
나는 너무도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친구들과 동네 골목에서 뛰어노는 것을 즐겼고 학교 성적도 늘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귀여움을 받았다. 특히 나는 어린시절 축구왕을 꿈꿀 만큼 볼을 다루는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광장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 날이면 나는 축구를 통해 1년 쓸 공책들을 마련하고는 했다. 그렇게 동네에서나 학교에서 축구 때문에 칭찬도 많이 들었고 볼도 잘 찼다. 아마도 아버지의 피가 내게 축구와의 인연을 맺어준거 같다.<br><br><br>
아버지께서는 군대시절 부대 내의 축구대표로 활약하셨다. 제대 후에는 마을 대항 축구경기가 있을 때마다 동네 사람들의 탄성을 불러 일으키는 플레이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 탓일까. 지금도 동네 할머니들이 나를 보면 심심찮게 이런 얘기를 한다. "저 놈이 아버지를 닮아 그리 축구를 잘하는겨"<br><br><br>
그런 가정환경이었으니 내가 축구를 좋아하고 잘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했다. 그런데 밥먹는 거보다 좋아했던 축구를 아버지의 반대로 하지 못했던 적이 있다. 그 일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때 학교에 축구부가 생기면서 시작됐다. 축구를 좋아하는 또래 친구들이 주축이 돼 결성된 축구부인데 내가 빠진다는 것이 이상했다.<br><br><br>
나는 당연히 축구부 가입을 허락해 주실거라 믿고 부모님께 말씀 드렸는데 일언지하에 안된다는 말씀이셨다. 당시 상위권을 유지하던 내 학교성적에 지장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버님은 덧붙이시기를 축구부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다. 나는 그 말씀을 거역할수 없었다.<br>
그러나 내 속에서 갈구하는 축구에 대한 열망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축구를 직접 하지 못해도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당시 과외 공부를 받았던 나는 과외 간다고 집을 나와 축구연습을 구경하는 것이 거의 일과처럼 되었다. 그러니 어머니가 나의 행동을 이상하게 느끼실만 했다. 하루는 과외에 연락을 해보고 내가 안 나온다는 사실을 아셨다.<br><br><br>
학교로 나를 찾아 나선 어머니는 마침 그 때 성내 초등학교와의 연습경기를 친구들과 구경하고 있던 나를 발견하셨다. 그 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혹독한 매를 맞았다.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던 사랑의 매였다. 다시는 축구를 보지도 않고 하지도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나서야 부모님은 나를 용서해주셨다.<br><br><br>
2대 독자인 나에게 거는 부모님의 기대는 그 때도 상당히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사실 나의 어릴적 꿈은 꼭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남들보다 잘할 수 있고 또 축구를 하면 신이 나고 해서 좋아하는 정도였다.<br>
어린 마음에 가졌던 꿈이라면 초등학교 선생님이나 '으리으리하고 커다란 집에서 멋있게 사는 것'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막연한 먼 미래의 꿈보다도 지금 당장 내가 잘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축구를 집에서 못하게 한다는 것은 나를 괴롭혔다.<br><br><br>
부모님께 축구를 하지 않는다고 맹세는 했지만 그럴수록 축구에 대한 금지된 열정이 나를 휘감아왔다. 그러다가 나의 재능을 눈여겨 본 임동수 코치님이 나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임코치님은 부모님을 찾아와 설득하기 시작했다. 나 또한 꼭 하고 싶다고 무릎을 조아린 채 말씀드렸다. 그 때서야 완고하시던 부모님이 조건부로 허락을 하셨다. 공부 또한 열심히 하라는조건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말. 나는 꿈에 그리던 축구부에 들어가게 되었다.<br><br><br><br>
<축구는 나의 길, 좌우명은-一心><br><br>
축구부에 들어가기까지 진통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더욱 열심히 연습에 몰두했다. 먼저 축구부에 들었던 또래 친구들과는 선의의 경쟁도 붙어서 새벽 6시면 학교 운동장이 우리들의 공차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임코치의 훈련방법도 스파르타식이었다. 하루의 연습을 마치면 몸이 파김치가 되기 일쑤였다. 아침에 세수할 때 흘러나오던 코피를 어머님 모르게 처리한적도 여러번 있었다.<br><br><br>
그렇게 열심히 했던 결과였을까. 우리팀은 생긴지 얼마 안 되었지만 서울시대회 4강까지 올랐고 학교에서도 모두 모범생으로 평가를 받던 기억이 난다.<br><br><br>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나는 광희 중학교로 진학이 확정되었다.<br>
처음 광희중에서 훈련을 시작할 때였다. 당시 나의 키는 150cm를 갓 넘었는데 동료들이나 선배들은 나보다 평균 10cm이상 씩은 컸었다. 그 때문일까. 신입생 테스트 첫날 코치는 나만을 홀로 연습게임에 참가시키지 않았다.<br>
은근히 축구실력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나로서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아마 내가 축구의 길에 들어선 이후 그 날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던 것을 기억한다. 키에 대한 열등감은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까지 나를 따라다녔다. 그래서 나는 더욱 열심히 축구 연습에 몰두했다.<br><br><br>
신장의 열세를 극복하는 길은 남보다 뛰어난 기량을 갈고 닦는 것뿐이었으므로 매일밤 나는 학교에서의 훈련을 마치고 개인적으로 1시간가량 드리블 , 트래핑, 킥 연습을 했다. 그 당시의 그런 연습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br><br><br>
당시 어머니는 단신이었던 내가 상대편 선수와 몸싸움에서 밀릴 때 가장 안쓰러웠다고 한다. 어머니는 나의 경기모습을 관전하시길 좋아하셨는데 하루는 다른 학부형들의 얘기 소리를 흘려듣게 되었다. "저 8번 아이는 공을 잘치는데 키가 작고 체력이 약해. 저봐 부딪치기만 하면 떨어지잖아" 그 8번 아이는 바로 나였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의 어머니의 심정이야 오죽하셨으랴. 그 말을 다시 전해 듣는 내 마음도 찢어지는 듯 했다. 동북고에 진학할 때도 나의 키는 160cm가 겨우 넘었다. 일단 많이 먹는 것에만 신경쓸 정도로 나는 심한 컴플렉스를 앓고 있었다.<br><br><br>
그러다가 1학년때 9cm. 2학년때 10cm이상이나 자랐다. 지금과 같이 신장이 182cm 체중 73kg의 건장한 체격을 갖기 전까지 나에겐 많은 마음 고생이 있었다. 내가 앞으로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본격적으로 결심을 굳힌 것은 중3때인거 같다.<br><br><br>
그 이후 내가 걸어온 길에 대해 한번도 후회해본 적은 없었지만 단 한가지 공부를 열심히 못 했다는 아쉬움은 남는다.<br><br>
그래선지 중2 담임이었던 임미숙 선생님에 대해 기억들은 요즘도 가끔씩 되살아난다. 운동선수라도 공부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지론을 임 선생님은 갖고계셨다.<br><br><br>
한번은 내가 연습경기중 어깨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한 달간 학교에 못 나간 적이 있었다. 아마 가을이었을 것이다. 그 때 선생님은 매일 집으로 찾아와 과목별로 숙제를 내줬는데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감당하기 조차 힘들었다. 그 숙제를 하느니 어깨뼈가 부서져도 차라리 운동장에서 뛰고 싶을 정도였다. 결국 그 숙제들을 다 하기는 했지만 한동안 마귀 할멈이라고 선생님을 미워했다.<br><br><br>
그러다가 3학년으로 진급할 무렵 선생님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명보는 축구를 잘하지. 그렇지만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지식과 교양의 습득 또한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모든 걸 다 잘하기는 힘들지만 축구이외 다른 걸 포기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닐꺼야."<br>
임미숙 선생님 덕분이었을까. 나는 중3때까지 중위권 이상의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집에서는 어느덧 내가 축구와 공부를 둘다 병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br><br><br>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아버지께서는 나를 불러다 앉혀 놓으시고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셨다. 축구냐? 공부냐? 나는 서슴치 않고 말했다. "축구를 하겠습니다." 한동안 아버지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천정만 응시했다. " 우리집 가훈이 뭐지. 일심이란 건 알꺼다. 네가 축구를 선택했다면 축구 그 한 길에 너의 온마음과 정성을 바쳐라. 할 수 있겠니!!" 나는 마음을 가다듬은 뒤 힘주어 말했다. "네 하겠습니다."<br><br><br>
그 후로 나의 길은 축구이며 축구로 성공할 수 있고 또 해야한다고 깊게 마음을 먹었다. 동북고는 내가 1학년 때인 84년에 전국 대회4강에 올랐다. 10년만의 쾌거였다. 그리고 85년 대통령금배 우승, 86년 전국MBC배 우승 등 빛나는 성적을 올렸다. 나는 잘 한다는 소리를 몇 차례 들었을 뿐 고교랭킹12위에 들어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내가 89년 월드컵 대표에 발탁되기 전까지 유일하게 매스컴을 탔던 기억은 대통령금배대회에서 프리킥으로 두 골을 넣었을때 뿐이었다. 당시 동북고 축구부는 야간 조명 시설, 슈팅보드 설치등 적극적으로 축구부를 육성하려는 분위기가 강했다. 따라서 밤에 불을 켜놓고 드리블, 킥, 트래핑훈련 등을 마음껏 할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두운 데서 훈련했던 것이 축구 감각을 키우고 늘리는 데 많은 효과가 있었던거 같다.<br><br><br><br>
<사춘기, 그리고 사랑의 실축><br><br>
내게 사춘기라는 보랏빛 계절이 찾아왔던 것은 언제였을까?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무언가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에 끌려 밤잠을 설치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던가. 열병 아닌 열병을 앓아야 했던 사춘기의 추억은 내겐 없다. 다만 잔잔하게 내 마음에 파문을 남기고 가을 나뭇잎처럼 바람에 날려간 소녀를 기억할 뿐이다. 그 때가 고등학교 1학년 가을이었을 것이다. 우리 학교는 축제기간중에는 타학교 학생이나 여학생들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아마 그녀도 축제 기간중에 내가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봤던 거 같다.<br><br><br>
하루는 9시까지 개인훈련을 마치고 다른날과 다름없이 교문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을 때 거기서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던 손길이 있었다. "얘기 좀 할 수 있어요." 그 당시 나는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머리를 곱게 양갈래로 땋아 묶은 예쁜 여학생이 먼저 말을 걸어 오다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겁도 나서 나는 경계하는 빛을 띄었다.<br>
아마 '집에 가야 합니다.' 정도의 대답을 했을까. 그때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던 것을 기억한다. 뻣뻣한 내 반응에 무안했으리라. "잠깐이면 돼요. 축구선수죠." 그녀는 처음 만난 그 자리에서 많은 말을 했던 거 같다. 축제 기간동안 쭉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자기는 별로 축구경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댁이 훈련하는 모습은 멋있더라 순진하게 생겼는데 어떻게 축구를 잘 할 수 있느냐 등등.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물끄러미 바라본 그녀의 얼굴은 깨끗하고 정이 많아 보였다.<br><br><br>
그렇게 인연이 돼 한 동안 그녀와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사실 나보다 한 살 많았던 그녀의 나이차이는 별로 개의치 않는지 '누나'인 척 포근하게 내 마음을 감싸 주었다. 그녀는 따뜻하고 이해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주로 우리들의 만남은 내가 훈련을 끝내고 밤늦게 귀가하는 시간에 이
루어졌다. 특별히 늦은 시간에 어디 갈만한 곳도 없었던 우리는 귀가길에 동행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길에서 나눴던 많은 이야기들이 방황하기 쉬운 사춘기의 내 마음을 잡아줬던 것 같다.<br><br><br>
그러나 그 만남은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녀가 먼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만남의 기회도 뜸해지고 만남의 자리에서도 이상한 침묵들이 오래 흐르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녀는 나보다 먼저 고등학교 아닌 다른 세상을 보아버린 것는 이름의 정거장에 도착해 있었다. 그녀가 순수한 의미에서의 첫 이성이었다면 나는 대학 1학년때 진짜로 쓰라린 '첫사랑' 을 경험했다.<br><br>
그녀를 만난 건 고려대학 1학년 때인 87년 6월이었다. 미팅이라는 것도 시시하게 느껴질 무렵 나는 우연히 어떤 친구의 대타로 미팅에 나가게 되었다. 나는 미팅에 나갈 때마다 이상한 징크스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가장 예쁜 여자가 내 파트너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 날도 미팅을 주선
한 선배가 서로 마음에 드는 상대의 이름을 적어 내라고 제안했다. 서로 같은 상대의 이름을 적었을 경우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나는 주저없이 그녀의 이름을 적었다. 처음부터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그녀 또한 나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었다.<br><br><br>
우리는 즉시 다른 짝들을 남겨두고 카페 밖으로 나와 학교 교정을 거닐었다. 첫 만남에 대화의 화제도 궁해서 우리는 별말 없이 산책을 할 뿐이었지만 서로에게 끌리고 호감이 간다는 마음만은 분명했다.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주면서 나는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청했다. 마침 그녀나 나나 볼펜을 갖고 있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는 갑자기 무단횡단의 위험을 감수하며 맞은편 문방구로 달려갔다. 볼펜을 사온 것이다. 내 손바닥에 꼭꼭 눌러 써준 전화번호.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만남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그녀는 경희대 음대를 다녔는데 그녀를 보노라면 맑고 투명한 피아노 소리나 애잔하고 감미로운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br><br><br>
그녀의 손을 처음 잡아보았을 때의 짜릿함, 어느 쓸쓸한 가을날 김성수동상 아래서 나눴던 첫 키스의 황홀함, 그 날 그 많던 별들의 반짝임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만남 때마다 웃고 떠들고, 우리들이 세상의 중심이었던 그 많은 날들,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우린 사랑하면서도 서로 용기가 부족했다. 그의 부모님은 굉장히 완고하고 보수적인 분이었다. 집에 전화하기조차 어려워 여학생들에게 부탁해 겨우 여학생들에게 부탁해 겨우 통화할 정도였다.<br><br><br>
나는 89년말 대표팀에 발탁되고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갔다온 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 이전까지만해도 평범한 선수에 불과했으나 이젠 선수로서 대성할 가능성을 자타가 인정한 셈이었으므로. 그래서 월드컵을 끝내고 돌아온 뒤 그녀에게 결혼하자는 의미의 말을 던졌다.<br>
그녀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던 만큼 긍정적인 답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의외였다. '어렵다'는 단 한마디. 부모님을 설득시킬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축구선수였기 때문이었을까. 몇 번 설득을 하고 또 했지만 그녀는 도저히 용기를 못냈고 우리는 결국 헤어지기로했다.<br><br><br><br>
<드래프트를 거부, 그해 겨울은 추웠다.><br><br>
그녀와 헤어진 후 내겐 또 다른 시련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은 축구를 시작한 뒤 내가 처음으로 겪은 좌절이었다고 할 정도로 암담한 시련이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 황선홍과 함께 프로축구의 신인 드래프트선발을 거부했다.<br><br><br>
그것은 자기가 뛰고 싶은 팀에서 뛰지 못하게 하는 제도적 모순과 계약금 3천만원 연봉 1천 5백만원을 주는 계약 조건에 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br><br>
국가 대표로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던 스타 플레이어를 그런 헐값에 몸을 팔 수 없다는 자존심 또한 크게 작용했다. 당시 여고만 졸업한 농구선수도 1억 5천만원을 받던 때였다.<br><br><br>
그러니 황선홍과 나는 이런 모순된 제도 속에서 우리가 희생되서도 안되고 후배들을 위해서도 드래프트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로 작정했다.<br><br><br>
드래프트가 있을 무렵 나와 선홍이는 청주로 여행을 떠났다. 전국체전 구경도 하면서 기간을 보내고 집을 돌아왔다. 그리고 집 근처의 헬스클럽에서 2시간을 가량 운동하고 동네 뒷산을 뛰는 것으로 하루 해를 보냈다. 그렇게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대학 은사인 남대식 감독
님이 저녁이나 먹자고 불렀다. 잠실 쪽의 어느 횟집이었다. 고교 은사인 김삼락 올림픽대표팀감독님이 계셨고 잠시 후 이회택 감독님 김순기 코치님도 들어 오셨다. 모두가 동북고 축신들이었다.<br>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김감독님이 큰 컵에 양주를 한 잔 가득 부어 주셨다. "동북고의 명예를 위해 마셔라."<br><br>
나는 단숨에 한 잔을 쭉 비워버렸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고 한 잔 따라 드리려고 할 때 김감독님은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아무 생각 말고 포철에 입단해라." 나는 갑자기 가슴이 찡해왔다. 그때까지 어떤 결정도 내린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모두가 동북고의 선배들인데다 남대식 감독에게 모든 것을 맡긴 상태였고 대표팀 시절부터 이회택 감독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네' 하고 대답해버렸다. 며칠 후 포철과 계약을 맺었다. 12월 초였을 것이다. 이젠 모든 것이 잘 해결됐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지만 잘된 것도 같고 어찌보면 아닌 것도 같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무엇 하나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br><br><br>
이와 함께 볼을 잡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반면에 술을 먹으며 방황하는 시간이 점점 늘었다.<br>
내가 축구를 시작하고 처음 맛보는 방황과 좌절, 또 가장 훈련을 게을 리 했던 시간이었다. 20대 초반의 한국 남자들이 꼭 가야하는 곳. 나는 젊은 날의 방황을 군에 입대함으로써 끝내려고 했다.<br>
4개월 이상 운동에 전념하지 못한 채 불확실한 미래를 고민하던 나던 91년 3월 입대를 결심, 군팀인 상무에 들어갔다. 2대 독자인 탓으로 6개월의 복무만 마치면 되었기에 큰 부담감은 없었다.<br>
오히려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길 같아 즐거운 마음이었다.<br><br>
그러나 오랜 기간 불성실한 생활 탓인지 훈련을 시작한지 몇 주 지나지 않아 왼쪽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7월의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후로는 통증이 더욱 심해지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해 경찰 병원을 찾아갔더니 피로 골절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3개월간 조깅도 하지 말고 푹 쉬라고 것이었다. 그 말은 이미 군생활의 반이 지나가버린 내게 죄책감만 주었다. 이강조감독님과 부대장 장정호군님은 내게 아무걱정 말고 푹 쉬라고 얘기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br>
남들은 3년 씩이나 하는 군생활을 나는 3개월 밖에 하지 못했다. 정말 상무팀을 위해 성실하게 선수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주지를 않았다. 제대하기 전날 이감독님과 술을 마시며 '죄송하다'는 말을 거듭 할 수 밖에 없었다.<br><br><br><br>
<벌써 기다려지는 98프랑스 월드컵><br><br>
나는 90년 드래프트를 거부한 순간부터 91년 말까지 제대로 게임을 하거나 훈련을 하지 못했다.<br>
그러나 91년 11월 19일 포철과 계약을 맺은 후부터 남다른 각오를 다졌다. 포철이 나를 데려가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아끼지 않았듯이 나 또한 팀을 위해 절대 필요한 선수가 되겠다는 다짐이었다. 또한 1년 이라는 허송세월을 보상받기 위해 나는 92시즌 신인왕에 도전했다. 그 결과였을까.<br>
입단 첫해에 포철은 우승컵을 품에 안았고 나는 일간스포츠에서 주는 골든볼을 수상했고 축구기자단에 의해 올해의 선수로 선정됐다.<br><br><br>
그러나 나는 기쁨보다도 동료 선수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나보다 더 열심히 뛴 동료들이 있었기에 찾아온 영예라는 생각때문이었다.<br>
93년은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활약을 못했다. 월드컵팀 독일 전지 훈련 중 레버쿠젠과의 연습경기에서 오른쪽 허벅지근육이 이완되는 부상을 입었고, 아디다스배 경기때는 오른쪽 무릎 인대를 다쳐 한동안 재활트레이닝을 받아야 했다. 재활트레이닝을 받는 동안 그라운드를 달리고 싶어 몸
이 근질근질한 것을 참는 것이 가장 괴로왔다. 역시 선수는 그라운드에서 볼을 다룰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그리고 94미국월드컵. 바로 작년의 일이라 그동안 신문이나 잡지에서 많이 다루어졌고 기억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온 국민의 염원이었던 16강 진출에 실패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후회 없이 싸웠다는 마음에 아쉬움들은 접어두고 있다.<br><br><br>
스페인과의 1차전, 1승의 제물로 선택한 볼리비아와의 2차전, 그리고 94월드컵 최고의 명승부였다고 외신들이 평가한 독일과의 3차전, 모두 최선을 다했고 그라운드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달린다는 마음으로 뛰었던 경기들이었다. 16강 진출엔 실패했지만 선수단이 귀국했을 때 국민들이 보내준 성원과 격려들은 지금도 곱게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앞으로의 포부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대답할 것이다. 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는 꼭 16강에 들어 온국민의 염원을 성취시키는 것이라고. 그리고 기회가 닿는다면 유럽무대에서 내 마지막 선수
생활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나는 지난해 일본 J리그의 22억원 스카웃제의를 거절할 수 있었다. 집안에서도 돈이나 지금 당장의 이익보다는 먼 훗날을 생각하라고 충고해주셨다.<br><br><br>
나는 체력이 다하는 날까지 그라운드에서 뛸 생각이다. 아마 33살까지는 충분히 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서 다시 그라운드에서 서고 싶다. 이상으로 나의 재미없는 지나온 이야기들을 마칠까 한다.<br><br><br>
실제로 27년의 삶 동안 나는 축구 밖에는 할 이야기가 없다.<br>
그간 사랑과 실연도 있었고 작은 사건들도 많았지만 오직 내 삶의 중심은 축구뿐이었다. 아침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의 훈련, 중학교 이래 '생각하는 축구를 하라'는 코치선생님의 말에 따라 잠자기 전 30분간의 이미지 트레이닝의 반복. 그런 것들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듯 싶다. 올해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소망은 없다. 다만 더욱 열심히 뛰어 팀의 승리에 견인차 역할을 하고 싶다.<br>
그리고 그것이 팬들의 성원에 답하는 길이라 믿는다.<br><br><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