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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디즈니에서 제작한 뮬란이라는 에니메이션을 기억하시나요?
배경이 동양이고, 동시에 여주인공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다소 독특한 점이 있었죠. 그러한 독특한 점 때문에 2탄 까지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극상에서의 뮬란은, 고생을 겪기는 하지만, 그 고생이 부조리나 절망과는 다소 거리가 있게 묘사되어있습니다. 더욱이 중요한건 엔딩은 해피엔딩으로 그려져 있죠. 더욱이 뮬란을 둘러싼 중국사회는 이민족의 침입이라는 점만 없으면, 꽤 괜찮은 일상을 누리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이러한 뮬란의 모티브는, 사실 '목란시(木蘭詩)'에 나오는 북위(北魏)시대의 여인이죠. 제작진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여기서 모티브를 얻어 '중국의 잔다르크'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목란시는 과연 그러한 명성에 어울리고, 동시에 영화 뮬란에서 구현되는 '해피스토리'일까요? 이제부터 이를 디벼보고자 합니다.
# 1 : text 성격 디벼보기
'목란시'가 적혀있는 책은 '악부시집(樂府詩集)'입니다. 즉 '악부'라는 데에서 시를 모은 책이라는 뜻인데. 과연 악부는 무엇을 하던 관청이었을까요?
여기에 실마리를 주는게 바로 '주례(周禮)'입니다. 주례에서는 악부란 민간의 시가를 모아서, 민심을 살피고, 이를 국정에 건의하는 기관이라고 되어있죠.
다시 말하자면, 악부에서 모은 시는 바로 민심을 반영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목란시가 단순한 시가가 아니라, 민심을 반영하는 정책자료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죠.
즉 목란시 자체가 병역을 아버지 대신 살다온 한 여인에 대한 단순한 찬미로 제한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즉 영화 뮬란에서처럼 사회적 동향과 민심과 유리된 상태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럼 여기서 우리는 어떠한 사회적 의미들을 읽을 수 있을까요?
# 2 : 나이에 관계 없이 남자는 무조건 징집한다.
몇몇 연구자들은 목란이 살던 지역을 바로 통만진(統萬鎭)이라고 합니다. 혹은 어느 북방의 군진이었을 것이라는 데에 대부분의 의견이 일치하죠.
그렇다면 그러한 군진들은 과연 어떠한 성격의 장소였을까요?
북위시대의 국방은 바로 군진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 그러한 군진에는 직업군인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군진 주변의 주민들을 병사로 삼고, 대신 세금등의 잡역을 면제해주는 '병호제(兵戶制)'가 시행됩니다. 그리고 북위 초기에는 이러한 군진의 소속민에 지배층-피지배층이 비교적 광범위하게 섞여있어 서로간의 연대를 높이고, 국방적 효율을 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군진의 소속민이라는 것은 자부심으로 통할 정도였죠.
하지만, 북위 조정의 정책이 지배층을 조금씩 정형화하여, '귀족화'하려는 정책으로 진행됩니다. 그러한 중앙 지배계급을 만듬으로서, 일종의 중앙집권화의 단초를 밟으려는 것이었죠. (동시에 명가 출신 귀족들이 조정의 실권을 잡아가던 것도 작용했죠.) 때문에 군진의 소속민에서 지배층들은 이탈하게 되고, 동시에 이 지배층들은 변방에서의 병역을 기피하려고 하게 됩니다.
이러한 젊은 귀족-지배층 자제의 이탈 속에서, 남은 국방의 빈자리는 누가 지켜야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진에 남은 힘 없는 백성이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 사이에서도 젊은이의 수는 한계가 있고, 결국 남은 자리를 병들고 늙은 장정들이 채우게 된 것입니다. 바로 목란의 아버지에게 징집영장이 날아온 것은 바로 그런 배경에 근거한 것이었죠. 목란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軍書十二卷,그 많은 군첩 속에,
卷卷有爺名。 아버지도 끼어 있소.
阿爺無大兒,우리 집엔 장남 없고,
木蘭無長兄,목란은 오라비 없으니
願為市鞍馬,내가 안장과 말을 사,
從此替爺征。 아버지 대신 싸움터에 나가겠소
성장한 병역 적령의 아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의 소속민이라는 이유로, 남아있었다는 이유로 현실과 괴리된 징집명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 2 : K-2는 사서 가지고 와야지, 아니 탱크도 같이 사와라.
군대가면 고참들이 제일 많이 써먹는 유머가 바로 "총은 사가지고 왔냐."이죠. 그러나 북위시절에는 진짜 총을 사가지고 와야 했습니다. 아니 실은 탱크도 마찬가지죠.
북위시대의 병호제는 세금과 잡역을 면제해주는 대신에 자기 땅에서 농사지은 수익으로 무기를 마련하게 하는 제도였지만, 대신에 소속민들이 농사짓는 땅은 양이 적거나, 양도 일정치 않았고, 척박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나마 세금은 없어도, 이제 수도로 올라가 '동지' 대신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 귀족들의 사적 수탈에 시달려야 했죠. 그래서 활-화살, 도검 등을 사들이는데에는 생활비에서 빠지는 비용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목란시를 보면, 당시의 '탱크'에 해당되는 말을 사는 대목이 나옵니다.
東市買駿馬,동쪽 장에서 말을 사고,
西市買鞍韉,서쪽 장에서 안장 맞추고
南市買轡頭,남쪽 장에서 고삐 사고,
北市買長鞭 북쪽 장에서 채찍을 사
즉 지금으로 따지면 탱크와 탱크의 부가장비들을 다 자비로 마련해야 했다는 것인데, 여기에도 심각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즉 제도의 문란화죠.
전통적으로 중국 왕실은 반란의 질적 향상을 막기 위하여, 백성들이 석궁(기계식 활), 철갑옷, 장창, 그리고 '말'을 함부로 소유하는 것을 규제해왔습니다. 대신에 전쟁이 나면 이를 해당 관청에서 지급해주는 것이 제도화되어 있었죠.
그런데 원칙상으로는 말과 마구는 중앙정부에서 지급해주거나 지원해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비로 사들여야 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가정에서 탱크를 구입하는 것이 과연 가당한지의 여부를 생각한다면, 이 부담이 가히 가벼운 것은 아니란 것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습게도 이러한 고가 군장비들의 공급처이자 판매처, 즉 말과 철을 전매한 곳이 바로 당시 조정이었죠.)
이러한 비용부담 때문에 백성들은 자신의 땅을 담보로, 귀족들에게 돈을 빌리는 경우가 많았고, 이를 통하여 귀족들은 더욱더 토지를 확산하거나 고리대를 통하여 배를 불릴 수 있었죠.
# 3 : 군대에서 10년을 넘게 뺑이친다.
우여곡절끝에 장비를 마련해서 군대에 오면 이제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할까요?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2년(이것도 줄은거지만...-_-;;)이지만, 당시는 '무기한'이었습니다. 즉 전쟁이 끝날때까지였죠.
그렇기에 복무기간 동안 지내는 것도 장난이 아니었죠. 더욱이 북위조정은 북방 유목민들의 본거지에 쳐들어가는 정책을 자주 썼기 때문에, 징집된 병사들은 북방의 추운 기후와 부족한 군수품 부족에 항시 시달려야 했죠. 목란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朔氣傳金柝,삭북의 찬 바람은 쇠종소리 울리고,
寒光照鐵衣。찬 달빛은 철갑옷을 비춘다.
將軍百戰死,장군은 백번의 전투 끝에 죽고,
壯士十年歸。 젊은이들은 십년 만에 돌아오다.
고위 장교들이나 장군들 조차도 백전을 싸우다 죽는다고 노래할 정도이니, 일반 장병들의 고생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십년만에 돌아올 수 있다는 것도 기적일 노릇이었습니다. 그들이 싸웠던 장소가 얼마나 극한적이었는 곳인지는 다음의 일화가 말해줍니다.
"사마초지(司馬楚知)가 군량부대를 이끌고 가던 도중에, 유연족 기병대를 만났다. 이에 사마초지는 마차를 빙 둘러서 진을 만들고, 모래를 쌓아 거기에 물을 뿌리게 하니, 삽시간에 물이 얼어붙어, 흩어지기 쉬운 모래가 방벽이 되었다. - 위서(魏書)"
물이 삽시간에 얼어붙는 이러한 극한의 상황이, 바로 병사들이 자비로 준비하고 맞서야 하는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곳에 돌아갈 기약 없이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다. 얼어죽고, 굶어죽고, 병들어 죽어가는 병사들은 부지기수였죠. 때문에 동료들은 이러한 곳에서, 시련을 버텨낸 목란을 여자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이죠.
# 4 : 에필로그
이래저래 목란은 이러한 시련을 극복하고 돌아왔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그녀는 과연 해피앤딩을 맞이하였을까요? 목란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歸來見天子,돌아와 천자를 뵈오니,
天子坐明堂。천자는 명당에 앉아
策勳十二轉,공훈을 열두급으로 기록하고,
賞賜百千強。 백 천 포대기의 상을 내린다.
可汗問所欲,가한이 소망이 뭐냐고 묻거늘,
木蘭不用尚書郎,목란 대답하되 "상서랑 벼슬도 싫소.
願馳千里足,원컨대 천리마를 빌려주어
送兒還故鄉。 나를 고향으로 보내 주오."
포상을 제안 받고, 포상을 거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어찌보면 해피앤딩이라 할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후세의 기록들은 슬픈 후일담도 함께 기록합니다.
고향에 돌아와 군복을 벗고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서니, 함께 종군했던 자들이 다 놀라게 되었다.
이 소문이 조정에 알려지자, 임금은 그를 대궐로 불렀다. 황제는 주색에 빠져 있었으므로, 그녀를 후궁에 들게 하였다.
목란은 신하에게는 군주를 모시는 예가 없다 하고 죽음으로써 거절하였으나, 계속된 요구에 어쩔 수 없어 자결하였다.
임금은 후회하면서 이를 불쌍히 여겨, 장군을 추증하고 효열(孝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향인들은 그를 추모해서 묘당을 세우고 (생일인 4월 8일에) 제사를 지냈다.
백성들을 전쟁터에서 죽게하고, 그들을 수탈했던 전제군주의 오만은, 그녀의 재주와 활약을 자신이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그러한 오만과 욕망으로 인하여 우리의 히로인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습니다.
물론 궁으로 들인다는 것은 후궁이기는해도, 아내로 맞이한다는 것인데 뭐 나쁠 것이 있겟냐고 할수도 있겠지만, 백거이의 '후궁사'에서도 살필 수 있듯이, 한때의 총애가 꺼져버리면 임금의 발길을 기다리다 늙어 죽는 것. 그것이 후궁의 진상이었죠. 그것을 당대 사람들도 모르진 않았을 것입니다. 여하간에 그녀는 이렇게 배드 앤딩을 맞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렇게 종결되지만, 과연 과연 사회적 모순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두 임금 정도를 내려가면서 북위조정은 차별과 그에 따른 폐해를 시정하기는 커녕, 차별을 더욱 법제화하여 결국 특권 귀족층을 법적으로 명시하는 '성족분정'이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견 지식인, 무인, 농민과 변경의 힘없는 주민들이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한 반란의 선두에 선것은, 그녀가 살았던 통만진을 포함한, 수탈에 시달리던 북방의 주요 군사거점인 '육진(六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반란은 결국 북위조정을 붕괴시켜버렸죠. 목란의 비극과 같은 비극이 계속해서 반복되자 결국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조정을 뒤엎어버린 것입니다.
이후에 들어선 수(隋)-당(唐)제국은, 결국 이러한 민의 요구를 진정시키기 위해 여러 개혁적인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앞서 다룬 모순들을 시정하기 위하여, 제도적으로 명시된 일정량의 토지를 일정한 기준을 따라 분배해주는 균전제(均田制)의 실시, 그리고 부병제(府兵制)의 실시를 통하여 병역 기준과 기한을 명시화하고, 동시에 병역복무에 따라 기타 사회적인 혜택을 부여해주는 조치 등을 취하죠. 동시에 과거제의 실시로 귀족제사회 내에 어느 정도의 신분적 유연성을 주려 시도하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제도들이 다시 무력화 됨으로서 당 제국도 무너지게 됩니다만-_-;;)
여하간에. 뮬란의 모티브가 된 목란시는, 디즈니 만화가 그리는 것보다는 훨씬 구체적이면서도 사실적이면서, 슬픈 세계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란시에서의 등장인물들이 가진 고민,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문제...지배층의 사회적 책무 이탈과 정부조직의 이완, 그리고 빈자의 부담 증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아직은 해결이 요원한 것 같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과연 이런 '목란시'가 없다고, 혹은 지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첫댓글 오랫만이십니다.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 오랜만입니다. ^^ 무녕하신지요? 그리고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잘 읽고 퍼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오히려 제가 드려야 할듯 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요즘 화목란이란 중국 드라마를 보는데 그것 역시 조금 괴리감이 느껴지더군요...
화목란..저도 요즘 보고 있습니다만, 뮬란보다 더한 해피해피 모드라는;;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하마님 정말 오랜만에 보는 닉이군요.^^
재미나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저 역시 오랜만에 뵙는것 같습니다...^^ 그간 무녕하셨는지요? ^^
삭제된 댓글 입니다.
우와~ 선지원님~ 진짜 오랜만입니다~ ^^ 그간 글도 안쓰시고 하시기에 많이 허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