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빠져나와 작은 다리로 코라나강을 건너면 마을 전체를 볼 수 있는 길이 있어서 마을에서 코
라나 강으로 떨어지는 폭포들을 볼 수가 있다. 자그레브 쪽에서 오는 사람들은 이곳에서부터 구경을
하고 마을로 들어오고, 플리트비체에서 오는 사람들은 마을 구경을 먼저 하고 이곳에서 전체를 조
망하고 자그레브로 떠난다.
우리는 플리트비체에서 왔기 때문에 마을부터 구경을 하고 다리를 건너와서 이곳에서 전체 마을을
조망하고 자그레브로 떠나는 코스이다.
왼쪽에 보이는 다리로 건너오게 된다.
길쪽에서 보는 마을의 모습
아래로 흐르는 강이 플리트비체에서부터 흘러온 코라나 강이다.
우기가 되어 물이 많아지면 곳곳에 폭포가 만들어진다....폭포의 흔적들
물이 많을 때는 폭이 넓은 폭포가 여러 곳에서 만들어지니 상상만 해도 그 광경이 그려진다.
이 폭포도 이곳에서는 아름다운 폭포 중의 하나..이름이 있을 것이지만...
여행기를 쓰면 좋은 점이 자신이 여행했던 곳의 경치와 그 감정을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고 카페에
게재를 하게 되면 언제라도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을 다녀오면 그 때 찍은 사진을 집에 와서 한 번 보는 것으로 끝이 나고 그
여행에 대한 기억은 핸드폰 속이나 컴퓨터 속에 고이 모셔 놓기만 하다가 세월이 지나면 세월과 함
께 사라지게 된다.
내가 다녀온 곳을 더 잘 기억하기 위해서 여행기를 쓰게 되었고 나를 위한 여행기다가 보니 시시콜
콜한 과정을 기록하게 되는데 나중에 여행의 과정 전체를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2008년도에 정년퇴직을 하기 전에는 여행을 제대로 다니지 못했었고 2009년부터 여행을 다녀온 곳
은 여행기를 남기게 되었다. 은퇴를 한 사람이거나 시간이 있는 사람이라면 여행기를 한 번 써보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여행기를 쓰면서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가능하면 본인 곧 내가 나오는 사진을
올리지 않는 것이다. 전체 여행기 중에서 한 두 장 말고는 올리지 않는다.
본인은 본인의 얼굴을 보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지만 행여 여행기를 읽는 사람들은 얼굴을 보는 것이
부담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여행기들이 쭈그러진 자신의 얼굴로 도배가 된 것을 보기도 하는데 한창 젊을 때 싱그럽거나
예쁜 얼굴이 아닌 세월을 살 만큼 산 얼굴을 누가 보고 싶어 하겠는가....
자그레브에서 오는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먼저 동네를 보고 플리트비체에서 오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본다.
숲속에 가려진 동네..
이 동네가 슬룬지라는 지방의 라스토케이라서...
버스를 타고 출발하면서 찍은 사진들..
숲과 집들만 보이고 물은 보이지 않는다....이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자그레브로 가는 길의 풍경들...
30여분 정도 가자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토산품 가게가 나오고...꽃보다 누나 때문에 생긴 가게이다.
오늘 저녁에 한국으로 출국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한 시간 반 정도의 구경을 하고 11시에
자그레브로 출발을 한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이곳의 토산품(土産品) 가게를
잠깐 들러서 간다고 하며 자그레브에 가더라도 쇼핑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토산품 가게는 라스토케에서 30여분 거리에 있는데 이 지방에서 생산되는 와인과 올리브유 그리고
발사믹 소스 등 주로 식료품으로 자그레브에 가서도 쇼핑할 시간이 없다고 하니 이곳에 온 기념으로
올리브와 발사믹 소스 등을 산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에서는 한 번도 무엇을 살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자그레브로 가는 도중에는 주로 평원으로 꽤 넓은 평지들도 보인다.
자그레브에 도착하니 1시가 되었다.
한국인을 위한 안내..폭탄세일도 한다고
각자 원하는 상품 앞에서 흥정을 하고...벌써 한 바구니 담은 사람도
앞에 있는 버스가 여행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함께 한 버스이다....가게 앞
코로나로 모든 것이 얼어붙은 지금 이 가게도 무사할 리가 없을 터...안타까운 일이다.
자그레브로 가는 길의 풍경들
생갑보다 숲이 많은 나라이다.
늪지대도 지나고...
왼쪽은 디나르 알프스의 산맥의 일부인 듯 ...오른쪽은 평원이다.
초지...
드디어 자그레브에 도착을 하니 1시가 되었다.
자그레브 가는 길
버스타고 이동하는 중에 가이드에게 들은 크루아상(croissant) 이야기
- 승리를 기념하는 초승달 모양의 빵-
초승달은 이슬람교의 상징이다.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의 국기를 보면 대부분 초승달과 별이 그려져 있다.
터키 국기가 그렇고 이집트,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국기에도 초승달과 별이 있다.
이슬람교에서 초승달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마호메드가 알라로부터 계시를 받을 때 초승달과 샛별이
떠 있었기 때문이다.
신의 말씀이 인간에게 전해질 때 초승달이 지켜봤다는 것이다.
바게트와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빵이 크루아상이다.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일품인 크루아상을 우리말로 옮기면 ‘초승달’이라는 뜻이다.
빵 이름 자체가 이슬람교의 상징인 초승달과 같고 실제로도 빵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가 이슬람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크루아상은 프랑스빵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빵이 처음 만들어진 곳은 프랑스가 아닌 다른 나
라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이야기
가 유력하다.
크루아상의 탄생은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트루크제국과 관계가 있다.
1683년 오스만트루크제국은 유럽을 침공해 전역을 휩쓸면서 중부 유럽의 관문인 오스트리아의 비
엔나까지 진출, 도시를 포위했다.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던 오스트리아와 오스만트루크제국 사이의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져들자, 오스
만트루크제국의 군대는 도시 중심부를 기습 공격하기 위한 전략을 세웠다.
바로 성 외곽에서 도시 중심부까지 통하는 터널, 즉 땅굴을 파기 시작한 것이다.
낮에는 양군이 대치하고 밤에만 굴파기 작업을 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군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때 비엔나에 살던 피터 벤더라는 제과 기술자가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다
음날 팔아야 할 빵을 만들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을 했는데, 그로 인해 오스만트루크제국의 군대에서
땅굴을 파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피터 벤더는 곧바로 이 사실을 군대에 알렸고, 오스트리아 군대는 미리 준비 태세에 들어가 적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결국 오스만트루크제국 군대는 오스트리아 정복에 실패하고 퇴각했다.
전쟁이 끝난 후 황제는 제과 기술자인 피터 벤더를 불러 원하는 것을 물었다.
그러나 피터 벤더는 오스만트루크제국 군대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그들의 깃발에 그려
져 있는 초승달 문양을 본 따 빵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황제는 흔쾌히 피터 벤더에게 초승달 모양의 빵을 독점적으로 만들어 팔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오스만트루크제국 군대를 물리친 기념으로 만든 ‘초승달 크루아상’이었기에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이것이 초승달 모양을 닮은 크루아상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다.
크루아상의 탄생이 1683년 오스만트루크제국의 오스트리아 침공이 아니라, 1686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 침공 때 일어난 일이라는 설도 있다.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732년 프랑크 왕국과 이슬람 사이에 벌어진 투르전투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어떤 기원설이 맞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 유래가 이슬람 국가와의 전쟁에서 비롯됐고, 승
리의 기념으로 이슬람의 상징인 ‘초승달’ 모양의 빵을 만들었다는 것은 공통적이다.
크루아상의 기원설에 비춰보면 크루아상의 원래 고향이 프랑스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크루아상이 프랑스의 전통 빵인 것처럼 알려진 데는 유래가 있다. 루이
16세의 왕비로 프랑스혁명 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투아네트 덕분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제국을 다스렸던 합스부르크가의 딸이다.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16명 자녀 중 막내딸이었던 그녀는 열다섯 살 때 당시 프랑스의 황태자였
던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을 한다.
프랑스로 시집온 앙투아네트는 고향인 비엔나에서 먹었던 크루아상이 너무 먹고 싶었다.
이때만 해도 ‘크루아상’이라는 프랑스 이름 대신에 ‘파이저’라는 독일식 이름으로 불렀다.
앙투아네트는 ‘파이저’를 먹기 위해 친정인 오스트리아에 제과 기술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이
제과 기술자가 만든 파이저가 프랑스 귀족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이후 빵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오스트리아의 ‘파이저’에 마가린과 버터, 효모를 첨가해 현재와
같은 프랑스의 전통 빵 ‘크루아상’이 생겨났다.
문헌상에 ‘크루아상’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06년이다.
다시 말해 이슬람교의 ‘초승달’과 관련이 있다는 말도 이후 만들어진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