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몇 년을 살아도 뉴욕의 겨울엔 대체 익숙해 질 수가 없을 것 같다.
‘바람이 미친게지…여기가 플로리다야? 지가 허리케인인줄 아나? 쯧.’
미친듯한 루즈벨트 아일랜드(맨하탄과 퀸즈 사이에 있는 작은 섬)의 바람에 맞서 종종걸음으로 F라인 전철역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면 익숙한 뉴욕의 지하철 냄새 –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백년간 쌓인 먼지와 곰팡이, 땀냄새, 비둘기와 쥐의 배설물 등등이 섞인 냄새 – 가 미지근하게 나를 감싼다.
후우…그래, 에어컨 없는 압력밥솥 같은 여름의 지하철 보단 겨울의 지하철이 낫다…적어도 바깥보단 지하가 따뜻하잖아…서울의 겨울이 어땠는지 가물가물해…조금 더 따뜻하고, 촉촉했던거 같은데…
오늘 면접은…후아…갑자기 내 심장이 두근두근 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뉴욕에 온 이유가 바로 이것,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한국서 잘 다니던 외국계 패션회사 홍보부를 과감히 때려치우고, 한국은 나에게 너무 좁아, 나는 세계적인 홍보 우먼이 되버리고 말테야 라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스물 다섯이란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에 그동안 모아둔 적금을 깨서 들고 뉴욕에 온지 어언 4년…
2년간의 마케팅 석사를 마친후, 선택의 기로에서 한국으로 돌아가 그 밥에 그 나물에 하던일로 돌아가 연봉이나 좀 올려받고 어깨에 힘이나 좀 더 주고 쉽게 살아볼까 하는 유혹을 무리치고 수백 군데 이력서를 돌린 후 연락이 온 작은 부티크 체인 ‘클라짓(Closet)’.
뉴욕주에 다섯개의 부티크가 있는 작은 회사라 마케팅 팀이라고 해봐야 디렉터와 어시스턴트, 그 어시스턴트로 입사해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일을 시작해 트레이닝 기간(O.P.T: Optional Practical Traning – 대학 졸업과 함께 주어지는 외국 학생들이 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1년)이 끝날무렵 회사를 구슬려 취업비자를 스폰서 받고, 스타벅스에서 차이티 라테를 사오는 심부름부터 시작해 한해 한해 좀 더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하게 된 지금…
맨하탄 다운타운으로 가는 지하철 F선안의 나는 코트가 구겨질까 앉지도 못하고 이베이에서 반값에 구한 – 디스플레이용으로 쓰였던 - 4인치 굽의 크리스챤 루부탱 부츠를 신고, 샘플 세일에서 산 핫핑크 발렌티노 백에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넣어들고, 지하철 냄새가 베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드디어 23가 역의 문이 열리고…
나는 또 한번의 도약의 기회에 놓여있다…
#1. 너, 얼마만큼 참을수 있니?
스테파니 구벨만은 클라짓 사장 발레리 서머스의 고등학교 – 어퍼 이스트 사이드(Upper East Side)에 위치한 전통의 엘리트 사립 여학교 – 동창이라고 했다. 이 고져스한 은발머리의 여성은 우리 사장과 삼십 오년전 고등학교때부터 라이벌 관계였다고…
그녀는 전통있는 PR 회사 구벨만 앤 어소시에이츠를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비즈니스 우먼이기도 했다.
우리회사의 연말 파티에 초대받은 스테파니는 우아한 오스카 드 라 렌타(Oscar de la Renta)의 드레스에 요즘 보그의 아나 윈투어(Anna Wintour - 전설적인 보그의 편집장)가 밀고 있는 알렉산더 왕의 이번 시즌 가죽 자켓을 코디네이트해 입고 나타나 우리 사장 입술을 파르르 떨게 만들더니 높지도 않은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주위 사람들을 패닉하게 만드는 악명높은 독특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PR 어시스턴트에겐 파티는 악몽이자 환타지 같은 존재 – 항상 이 두가지가 한꺼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나의 별명은 고 투 걸. (Go-to-girl)
문제가 있을 때 마다 사람들이 “Go to Min, she’ll help you out(민에게 가봐, 걔가 도와 줄거야)”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느샌가 이십대 초반 늘씬한 금발 디자이너들의 고민 상담부터 시작해 샘플 제작실의 중국인 아주머니들의 통역 – 난 한국인이라고, 중국어를 못한다고 하는데도 통역을 시키길래 에라 모르겠다 대충 눈치로 통역을 했는데 그게 어떻게 맞아 떨어져서 그 이후론 내가 중국어 통역이었다 – 까지 회사의 소소한 문제가 있을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민’ 을 불러댄다.
그리하야…오늘도 예외없이 스테파니는 내 담당이었다…
그녀는 차갑고 고요한 폭풍이었다.
디너 메뉴는 생선과 스테이크 둘 중의 하나를 고르는 것이었는데 채식주의자인 스테파니는 메뉴에도 없는 채식 앙트레를 주문했고 식은땀이 삐질 나기 시작했지만 나의 대답은 살짝 웃음까지 지으며 “no problem”(문제 없어요).
주방으로 뛰어가 메인 디시를 서빙하기 시작한 미친듯이 바쁜 주방장을 붙잡고 눈물로 사정해 겨우 호박과 두부로 만든 채식주의자용 스테이크를 10분만에 만들어내게 해서 직접 그녀에게 서빙해야 했다.
먹여 놓으면 조용하겠지…라는 바램을 져버리고 그 후에도 스테파니는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 손가락 하나로 나를 부려먹은데다가 떠날 때 즈음 해서는 재킷보관소에서 주는 번호표를 잃어버렸다며 나보고 무작정 재킷을 찾아오라고 하질 않나 – 그녀가 들어올 때 재킷을 유심히 봐둔게 다행이지 – 마지막 순간까지 내 인생을 어렵게 만들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사실은 지금도 잘 모르겠는건…왜 그날 그녀가 파티장을 떠나기전 배웅하러 나온 나에게 명함을 주면서 일주일후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들고 그녀의 사무실을 방문하라고 했는지다…
단지 PR 어시스턴트일 뿐인 나를 라이벌인 사장에게서 뺏어오고 싶었던 건 아닌거 같고… 아니면 나도 모르는 내 능력을 보고 날 스카우트 하고 싶었던 걸까? 그래, 넘겨짚지 말자. 일단 부딪혀 보면 답이 나오겠지.
구벨만 앤드 어소시에이츠가 위치한 건물은 전통의 브라운 스톤(뉴욕 전통의 갈색 벽돌 건물) 이었지만 건물안은 레노베이션이 되어 모던하고 깔끔한 북유럽식 인테리어로 스테파니 구벨만이 연상되는 스타일 이었다.
리셉셔니스트에게 스테파니와 면접 약속으로 왔다고 알린 후 로비에서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면접용 대답들을 열심히 머리속으로 연습하고 있는 그 때였다.
뭔가 소란스러운 일이 일어난 듯 문이 세게 닺히는 소리와 함께 로비로 향한 복도에는 이탈리안 핏(fit)으로 섹시하게 재단된 - 그러나 마구 구겨진 - 바지를 입고 밤새도록 파티를 즐긴듯 군데군데 와인 얼룩과 구김이 후줄근한 재킷을 한쪽 손가락에 걸어들고 셔츠 소매는 반쯤 걷어 부친 옷차림의 덩치큰 남자가 프랑스 억양이 섞인듯한 액센트로 버릇없게 뒤따라 나오는 스테파니 구벨만에게 소리를 버럭지르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게되었다…
“NO , 내가 왜? 난 당신 도움따윈 필요없어요, 내 라이프 스타일은 내 라이프 스타일이야, 그걸 바꿀 생각 하진 말라구요.”
What the hell is going on here…? 대체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얼떨결에 로비의 소파에서 일어선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뻘쭘하게 반쯤 미소를 지어보이려는 순간 헝크러진 머리의 그 후줄근이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펜 있나?”
“어, 있을거예요 잠시만요”
오 – 마이 갇, 눈이 새파란게 외계인같아. 사람의 눈이 아냐, 무서워 무서워 왜 나한테 펜을 달라는 걸까..흑…이 망할놈의 펜은 분명히 아까 챙겼는데 어디있는거야.
간신히 펜을 찾아 건네자 그걸 낚아채듯 뺏어듣 후줄근이는 스테파니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계약서 이리 줘요, 여기 사인 하지만, 이게 당신이 내 인생을 조종 할 수 있는 계약서라고는 생각 하지말아요. 당신이 커트와 맥스를 컨트롤 해서 그들을 로봇처럼 만들걸로도 충분해”
그러고선 나를 향해 한번 더 눈에서 파란 레이져 빔을 쏘아내더니 펜을 내 방향으로 휙 던지고서는 성큼 성큼 로비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순간 로비는 서부영화의 주제가가 흘러야 될것 같은 황량한 분위기가 감돌며 나는 얼굴이 발개진 리셉셔니스트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내가 어디있는지를 깨달았다.
그 순간 이미 침착을 되찾은 스테파니 구벨만은 부드럽지만 차가운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 민? 그게 당신 이름이었죠? 얼마나 인내심이 강한가요? 얼마만큼 참을수 있어요?”
첫댓글 흠...저 남자를 감당해야하는 건가요?...ㅎ 마지막말..무슨 의미일지..ㅋ
저 남자를 비롯해 여러가지를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