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와 2022사이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1919년은 우리 민족에게는 말할 수 없이 의미 깊은 해이다.
2월에 동경에서 당시 일본 유학생들이 독립을 선언했고
3월 1일에 전국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고,
곧 만주와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4월 14일에서 16일 까지는 필라델피아에서 미주지역에 거주 또는
유학 중인 한인 청장년 약 150인이 모여서 제 1회 한인자유대회를 열었다.
목하 광림아트센터에서 5월 1일까지 상연중인
“1919 필라델피아”는 이 한인대회를 소재로 한 음악극이다.
이 음악극의 공고를 보고, 필라델피아 한인대회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냥 한 방에서 사흘간 진행된 회의에 극적인 재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지난 주말에 관람해 보니 의미심장하면서도 즐거운 연극이었다.
중간중간에 적절히 삽입된 애절한 또는 우렁찬 노래와 악기연주 역시
극의 효과를 크게 높였다.
무대 위의 분위기는 지극히 엄숙하면서도 활력이 넘쳤고,
배우들은 모두 1세기 전 나라의 지도자들 역할을 긍지와 열의를 갖고 연기하는 것 같았다.
모두들 인물도 좋았지만 자세가 당당해서 좋았다.
극중에서 서재필은 회의의 의장으로서 품격있게 그러나 권위적이지 않게
미국 전 지역과 유럽에서까지 모인
내로라하는 한인사회 리더들의 지혜와 식견을 이끌어내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선언문, 미국 대중에게 한국의 상황과 한인들 투쟁의 명분을 알리는 호소문,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에 대한 결의문, 그리고 양식 있는 일본인들에게 보내는 서한문을 작성토록해서 민주적인 토의과정을 거쳐 선포되도록 했다.
이 회의는 당시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던
서재필박사와 유태교의 랍비이면서 미국인 신문기자였던 조지 베네딕트가
기획하고 프로그램을 짜서 조직한 것이었다.
서재필은 20세의 약관으로 갑신정변을 주도한 6인의 한 사람이었다가
거사(擧事)실패 후 참담한 심정으로 머나 먼 미국에 망명하여
고학으로 의사자격증을 따고 10여년 후 더욱 위태로워진 고국에 돌아와 독립협회를
조직해서 국권강화와 국민의식계몽에 애쓰다가 다시 신변위협을 느끼고
도미해서 필라델피아에 거주하고 있었고
베네딕트기자는
한국민족의 수난사를 그즈음에 처음 알게 되었으나
자신의 동족 유태민족의 수난사에 비추어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한국민족의 자주독립을 목숨을 걸고라도 지원하기로 했던 것이다.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대회 마지막 날,
미국 독립기념관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미국 건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앉았던 자리에 앉은 당시 이승만 대표.
오른쪽 사진은 당시 한인대회에 참석했던 대표자
두 사람이 조직한 한인대회는 잘 짜여진 회의순서와 명문의 선언문들,
미국사회 저명인사들의 격려사와 기도, 그리고 종결 후
필라델피아 리버티 홀까지의 시가행진 등 모든 면에서 지극히 성공적인 회의였다.
회의 참석자들은 이승만박사를 비롯해서 조병옥, 유일한, 임병직, 민찬호, 정한경,
조안 우, 노디 킴 등 후일 쟁쟁한 한국의 리더가 된 인물들이었고
미국 빌라노바 대학총장, 오하이오 주립대 총장, 헨리 버코비츠 랍비 등은 외빈으로 축하, 격려사, 기도를 해 줌으로서 한국의 독립운동이 전 세계 여러 분야와 종교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증빙해 주었다. 몇 미국언론은 회의 내용을 당일로 보도했다.
회의의 주 어젠다였던 결의문과 호소문은 각각 3인의 그룹이 작성해서
공개적으로 낭독하고 전체의 의견을 물어서 수정/보완을 거쳐서 공표하는 식이었다.
당대 한인사회 최고의 지성들이 작성해서 너무도 훌륭한 문서들이었지만
서재필의장은 적정 절차 준수가 민주주의의 필수요소임을 강조하면서
참석자 전원의 의사가 반영된, 그리하여 명시된 수신인들 뿐 아니라
전 인류를 감동시키고 한국인의 독립의지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낼
불후의 명문으로 완성하기에 힘을 쏟았다.
첫날 오후 회의에서 채택된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은 후에
한국이 독립을 회복하고 나라를 세웠을 때 나라의 근간이 될
평등보통선거권, 의회제도, 자유무역, 의무교육, 후생사업, 언론/출판의 자유를 천명하고 참석자 전원이 생명이 남아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이 원칙들을 실행할 것을 엄숙히 맹세한다.
회의는 좌중이 그들이 채택한 ‘독립선언서’를 합창하며 종료된다.
‘독립은 시대의 뜻/ 정당한 우리의 권리/ 자유는 하늘의 뜻/ 존엄한 인류의 행진.’
이 선언문을 대하고 통곡하지 않은 한국 백성이 있었겠는가.
이 대회는 삼 일간 회의의 종료 후에 모든 참석자가 (필라델피아 시 당국의 협조 하에)
회의장에서부터 미국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미합중국 헌법이 논의되고 선포된
리버티 홀까지 행진했고,
서재필박사는 미국의 헌법을 논의할 때 조지 워싱턴이 의장으로서 앉았던
그 의자에 이승만을 앉게 했다.
일행은 모두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자유의 종’을 쓰다듬었다.
이 진지하면서 경쾌함도 가미된 기분 좋은 음악극을 보면서
그토록 어려웠던 시절에 저토록 훌륭한 지도자들이 염원하여 이룩한
주권회복과 민주주의 체제가
오늘날 어떻게 이렇게 처절하게 골병 든 부패공화국이 되었을까,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는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모두 붕괴되는 중이고 민주주의는 이제 개표부정이 심각히 의심되는 선거제도로 겨우 허울만 유지되고 있다.
참으로 호부견자(虎父犬子)가 아닌가. 이렇게 부끄럽고 죄스러울 수가!
1919년 한인대회 참가자들이 국기문란사범을 수사할 검찰마저
여야 공모로 생매장하려는 한국을 보면 그 슬픔과 노여움이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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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언론회(대표 이억주 목사)가 에스더기도운동(대표 이용희 교수)에서 주관하고 있는 음악극 ‘1919 필라델피아’를 소개하는 논평을 발표했다.
‘1919 필라델피아’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뿌리로 여겨지는
1919년 4월 14-16일 미국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자유대회(First Korean Congress)’를
재현한 다큐멘터리 음악극이다. 다음은 그 구체적 내용.
한국의 독립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다
‘1919 필라델피아’에서 자유 대한민국의 서막이 오르다
우리나라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해방을 맞게 된다.
그리고 1948년 독립된 대한민국이 건립된다.
그러나 이런 해방과 건국,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세워지기까지는
하나님이 크리스토교인들을 통하여 준비케하심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모든 과정을 보면 굽이굽이마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셨음을 보게 된다.
우리나라는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병합이 되면서 국권을 잃게 된다.
그리고 9년 후 전국적으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다.
국민들은 수천 년 동안 왕이 다스리는 전제주의 국가체제에서 수동적으로 살았는데,
이런 대대적인 만세운동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교회의 역할이 컸다. 한국에는 1885년 크리스토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활동했고,
크리스토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전체 국민 가운데 약 2%가 되었다.
이들이 주도적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6인이 크리스토교인이었다.
그리고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날 때, 각 교회들이 거점 역할을 하였다.
이 만세운동은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독립의 의지를 분명히 한 사건이었다.
그 이후 임시정부도 수립되고, 본격적인 독립 국가로의 발돋움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자유 대한민국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
한반도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
미국의 필라델피아( 미국이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을 선포한 곳)에서는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 동안 제1차 한인자유대회(First Korean Congress)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서재필,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미주 한인 150여 명이 참석하여
자유민주주의 의회 성격으로 모여
조국의 독립과 새 나라의 건국 비전을 온 세계에 알렸고,
크리스토의 정신으로 인류 문화 및 평화에 공헌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때에 독립된 국가의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의와 법치국가,
크리스토교 정신에 따른 천부인권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때 3일 동안 토의하고, 작성되고, 선포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선언문(민찬호 박사)과
미국 대중에게 한국의 상황을 알리는 호소문(이승만 박사)과
한국인들의 목표와 열망을 알리는 결의문(유일한 청년)과
양식 있는 일본인에게 보내는 서한문(윤병구 청년) 선포가 있었다.
또 미국 정부와 국제연맹에 보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요청서(정한경 청년)도 포함되었다.
이 대회의 특색 가운데는 노·장·청년층이 골고루 참여하여 세대를 뛰어넘어
독립 국가로의 비전을 함께 하였다.
당시에 의장을 맡은 서재필 박사가 55세, 이승만 박사가 44세, 민찬호 42세,
이대위 41세, 윤병구 39세이었으며, 정한경 29세, 조병옥 25세, 유일한 24세,
노디김(김혜숙) 21세였다.
100년이 넘은 이 시점에서 제1차 한인자유대회(First Korean Congress)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법치국가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국가의 정체성을 다시금 되돌아보고 살피는 것은
작금의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국가 정체성 흔들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이를 후대에 교육하며, 전해야 할 국가적 사명이 있기도 하다.
당시 한인들은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일제에 의하여 무참하게 고국이 유린되고 비참하게 죽어간 동포들을 보면서 비탄에 빠져 있었는데,
유대인 랍비 조지 베네딕트(기자도 겸함)의 도움으로 이런 대회까지 열리게 되고,
한국이(당시 조선)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을 뿐만이 아니라
국가 정체성을 이루는 중대한 사건이 되었다.
이 대회 기간동안 종교지도자들도 참여하여 격려했는데,
성공회 사제 톰킨스, 장로교 목사 메카트니, 천주교 신부 딘, 유대인 지도자 버코비치,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가 밀러,
러시아 공산주의 볼셰비키와 싸운 샤트 선교사가 참석하여 응원하였다.
이때의 회의 원형(原形)이 오늘의 자유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이루고,
이 대회에 참석했던 이승만 박사가 독립된 조국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건국 대통령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향하신 섭리의 결과로 본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당시 이 대회에 참여했던 150여 명은
대부분 크리스토교인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역사적 중요한 사건을 역사 되새기기와 문화적 기념으로 그리고 신앙인의
고백으로, 국가의 소명으로 알리기 위해서 다큐멘터리 음악극으로 만든 작품이 있다.
아트플랫폼(대표 이혜경 교수)에서는
“1919 필라델피아”(극복 이혜경, 연출 홍정민, 음악 김종균)라는 작품을 만들어,
지난 4월 14일부터 5월 1일까지 서울 강남의 광림아트센터에서
1주일에 6번씩 공연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 음악극의 자료는 당시 제1차 한인자유대회(First Korean Congress)의 회의록과 당시 이 회의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유대인 랍비 조지 베네딕트의 개인 회고록으로 각색되었다.
이 다큐멘터리 음악극이 들려주는 메시지는 우리의 독립은 1919년 선각자들의 뜨거운 가슴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 역사에서 전에는 없었던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의
정체성을 하나님이 인도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혜경 대표는 ‘역사적인 1919 필라델피아가 중요한 것은 자유민주주의 뿌리를 찾는 것이고, 민족 지도자들의 건국 비전이 어떠했으며, 국가 서사(序詞)의 필요성,
그리고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에는
크리스토교와 자유민주주의가 작용하고 빚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작품을 많은 국민들이 접하도록 돕는 역사문화나눔운동을
에스더기도운동(대표 이용희 교수)에서 앞장서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