而倭不軌侵入帶方界 [和通殘]□□石城□連船□□□
'대방(帶方)'에 2가지의 실체가 있다.즉 요동을 지배하던 공손(恭孫)氏가 3세기초에 설치하였다는 원래의 대방군(帶方郡)과, 313년에 고구려에 의해 중국이 지배하던 낙랑군이 쫓겨나면서 대방군도 선비족(鮮卑族) 모용(慕容)氏가 지배하던 요서지역으로 함께 옮겨져 그곳에 다시 설치된 대방군이 바로 그것이다.
광개토왕은 후연(後燕)의 모용보(慕容寶)로부터 "요동·대방 2국왕"으로 책봉(冊封)되었다.
영락14년(404년)에 왜가 침입하였다는 '대방계(帶方界)'라 함은 지금의 요하(遼河) 내지 혼하(渾河) 부근을 가리킨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지요.
而倭不軌侵入帶方界 [和通殘]□□石城□連船□□□
석성의 위치에 대하여 이도학氏는 "위의 기사에 보이는 석성의 위치는 전후문맥을 살펴볼 때 지금의 황해도 방면인 대방계의 해변에 소재한 성으로 짐작된다"[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지명比定의 재검토, p. 192]라고 한다거나, 박진석氏가 "이렇게 볼 때 당시의 전투지점은 대체로 오늘의 평양이남∼황해도지방에 이르는 조선반도의 서해안지대였을 것이며, 비문에 나오는 석성도 대체로 이런 지방에 있었을 것이다"[好太王碑와 古代朝日關係연구, 延邊大學출판사, 1993, p. 219]라고 하였다.
석성이 나오는 사료들
『일본서기』천지(天智)천황 2년(663) 5월조에는 "견상군(犬上君)이 달려가 (일본이) 출병(出兵)한 사실을 고구려에 알리고 돌아왔다. 규해(=의자왕의 왕자인 餘豊璋)를 석성(石城)에서 만났다.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文武王) 11년(671) 6월조에는 "장군 죽지(竹旨) 등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 가림성(加林城)의 화곡(禾穀=벼와 같은 류의 곡식)을 짓밟게 하여 드디어 당나라의 병사들과 석성(石城)에서 싸워 적의 머리 5천3백급(級)을 베고, 백제의 장군 두사람과 당나라의 과의(果毅; 郎將 중의 한 직책) 여섯 사람을 사로 잡았다"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寶臧王) 6년(647) 7월조를 보면 당나라가 다음과 같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당시 고구려의 영토 내에 석성(石城)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진달(牛進達)과 이해안(李海岸)이 우리 경내에 들어와서 무릇 백여 차례 싸워 석성(石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내키어 적리성(積利城) 아래에 이르므로, 우리병사 만여명이 출전하자 이해안이 이를 쳐서 이기니 아군(我軍)의 전사자가 3천명이었다."
신라본기의 기사에서 석성보다 먼저 보이는 백제의 가림성(加林城)은 지금의 충남 부여군 임천면(林川面)에 있는 성흥산성(聖興山城)을 가리키므로, 7세기 후반의 위와 같은 기사에 등장하는 석성(石城)은 모두 지금의 부여군 석성면 현내리에 있는 '부여석성산성(扶餘石城山城)'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신문화연구원 발행) 권10, p. 294의 <부여석성산성> 참조]
고구려에 있던 석성(石城)의 위치에 대하여, 한진서(韓鎭書)氏는 《해동역사(海東繹史)·속(續)》권6 고구려 지리고(地理考)/성읍(城邑)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즉 석성(石城)·적리성(積利城)이라는 항목을 두어 "석성은 마땅히 압수(鴨水)의 입해구(入海口)의 서쪽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石城當在鴨水入海口之西不遠之地.) 적리성도 또 그 가까이에 있다.(積利城又其相近者也.)"라고 기술함으로써, 석성이 압록강 이북의 요동지방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또 『삼국사기』권37 지리지4의 '압록이북(鴨綠以北)도성(逃城)七'이라는 조(條)에 적리성이 명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나라의 우진달(牛進達) 등이 적리성보다 먼저 공격한 석성(石城)의 위치도 압록강 이북, 즉 요동지방에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해동역사·속》에 인용된 성경통지(盛京通志; 청나라 때 편찬된 지리지)를 보면 "석성산은 개평성(蓋平城) 동북13리에 있으며, 일명 고(구)려성의 산이라 한다.(石城山在蓋平城東北十三里, 一名高麗城山)"라고 하여, 고구려에 속한 석성(石城)의 위치를 좀 더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외에,『신당서(新唐書)』지리지3에 "평주(平州)북평군(北平郡), … … 현3(縣三). 노룡(盧龍)·석성(石城)·마성(馬城)"이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처럼, 지금의 요녕성 건창현(建昌縣) 서쪽으로 비정되는 석성도 있습니다
석성(石城)이 개평현 동북에 있었다는 점을 종합해 보면, 영락14년(404년)에 왜가 침입하였다는 '대방계(帶方界)'라 함은 지금의 요하(遼河) 내지 혼하(渾河) 부근을 가리킨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지요.
-윗글은 임채길님의 글을 옮겨적은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