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 대만 ④·끝
대륙 앞 진먼도 동굴포병진지서
여학생 10여 명 하루 2~3회 공연
‘구닝터우’ 건물 전쟁의 상흔 가득
철거 요청에도 역사교육장 보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항복한 후 중국에서는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1945년 10월 10일 ‘쌍십협정(雙十協定)’을 발표했다. 정치 민주화와 부강한 중국 건설을 위한 양측의 약속이었다. 공산당은 처음부터 이 협정을 이행할 생각이 없었다. 국민당 역시 공산당의 복종을 고집했기에 협상은 진전될 수 없었다. 결국 4년의 치열한 내전을 거처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했다. 장제스는 약 90만의 피란민과 군대를 이끌고 타이완섬으로 건너와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끝까지 유지하고자 했다. 이로써 대륙 앞의 진먼도는 마오쩌둥에게 ‘목에 걸린 가시’와 같은 존재로 부상했다.
일사불란한 군사훈련 시범에 관람객 환호
안내인 진(陳)이 황급히 시간에 맞춰 찾아간 곳은 중국 본토가 보이는 동굴 포병진지였다. 군용 트럭도 출입이 가능한 터널 끄트머리에 도착하니, 8인치 곡사포 앞에 10여 명의 여군이 정렬해 있다. 곧이어 포반장 육성이 마이크로 흘러나왔다. “전방에 적 출현, 사격준비!” 4명의 탄약수가 무거운 포탄을 운반대에 올린 후 낑낑거리며 화포로 이동한다. “장전 완료, 쏴!”라는 사격 명령에 포수는 고개를 뒤로 확 젖히며 힘껏 방아 끈을 당긴다. “꽝!” 하는 공포탄 포성과 함께 흰 연기가 포상을 뒤덮는다. 잠시 후 “좌로 300, 더하기 500, 수정!”이라는 다급한 관측병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장약 교체와 포탄 재장전, 이어지는 폭음은 관람객의 정신을 뺏어놓는다.
“명중, 적 완전 제압!” 방송이 나온 후 일렬로 늘어선 여군들의 “충성” 경례와 함께 시범은 끝났다. 관람객들의 우렁찬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수십㎏ 포탄을 번쩍 들고 동분서주하는 여군들이 믿음직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쓰럽다. 쏟아지는 기념 촬영 요청에 활짝 웃으며 여군들이 포즈를 취해 준다. 알고 보니 이들은 진짜 군인이 아닌 ‘아르바이트 여학생’이란다. 하루 2~3회 열리는 이 행사는 진먼도의 인기 있는 관광상품이다. 여학생들의 일사불란한 군사훈련 시범은 대만인들의 조국 수호를 위한 결의를 나타내는 듯했다.
공산군 상륙 저지 위해 남녀노소 동원
1949년 진먼도로 건너오기 시작한 국민당 군대의 모습을 주민들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오합지졸 형태로 섬으로 건너온 국민당군은 대여섯 명의 병사들이 무기 하나를 함께 사용했다. 많은 이들이 군복을 입지 못했고, 풀로 만든 신발이나 대나무로 엮은 헬멧을 썼다. 병사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공공건물, 헛간, 빈집을 군인들이 차지했다. 나중에는 민가 구석방이나 마당에서 잠을 자며 주민들과 함께 지냈다. 공산군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진먼도의 남녀노소는 진지공사에 동원됐다. 국민당군은 주민 재산을 징발하면서 보상 증명서를 발급했다. 본토가 수복되면 충분한 대가를 준다고 했다.”
1949년 10월 17일 진먼 청년 우차이산은 어머니 심부름으로 식용유와 약품을 사고자 중국 샤먼 항으로 갔다. 오후쯤에 연락선은 항해를 멈췄고, 그가 집으로 돌아오기까지는 40년이 걸렸다. 공산군이 이 도시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샤먼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려던 진먼 주민 7000여 명은 빤히 자기 집을 쳐다보면서도 오지 못하는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섬 안의 읍내에는 1950년대 군인들과 주민이 함께 기거했던 낡은 주택 일부가 남아있다. ‘군민 일치’ ‘본토 수복’의 구호가 적힌 담벼락과 청천백일기가 휘날리는 골목길 자체가 처절했던 진먼도의 옛 역사였다.
중공군 지휘소로 사용된 ‘구닝터우’
진먼도의 작은 마을 ‘구닝터우’에는 서양식 건물이 폭격 맞은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다. 1949년 진먼섬에 상륙한 중공군이 일시적으로 사용했던 지휘소였다. 주민들은 흉측스러운 이 건물 철거를 요구하지만, 신세대의 전쟁역사 산교육장으로 계속 보존되고 있단다. 붕괴 위험성으로 출입문은 폐쇄됐다. 벽면의 숱한 총탄 자국은 당시 치열했던 전투 장면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해변에는 상륙 저지용 쇠말뚝 수천 개가 촘촘히 박혀있다. 밀물 높이를 고려한 견고한 해안 벙커에는 전차포·기관총 진지가 바다 건너 대륙을 노려보고 있다. 유사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데도 쓰레기더미가 쌓여 있을 정도로 버려졌다. 과거보다 진먼도의 전략적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란다. 견고한 구조물 속의 전투원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노출 인원보다 생존 가능성이 높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실증적으로 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 휴전선 축소판 같은 ‘소진먼도’
진먼도에서 떨어진 소진먼도는 2020년 연륙교가 완공되면서 본섬과 연결됐다. “전선 중의 최전선, 낙도 중의 낙도”로 불려 왔지만 지금은 진먼도와 같은 생활권이다. 중국과의 관계가 좋았던 시기에는 소진먼도와 4㎞ 떨어진 중국의 샤먼 섬과 교량으로 연결하는 방안이 거론되기도 했다. 동서로 20여 ㎞에 달하는 진먼도는 마라톤 코스로도 각광을 받는다. 편편한 지형과 바다를 끼고 달릴 수 있는 환경은 좋은 경기기록도 낳을 수 있단다.
샤먼 항이 건너다보이는 소진먼도 야산에는 예외 없이 땅굴 요새가 곳곳에 있다. 7개의 섬이 있는 진먼도에서 민간인이 거주하는 곳은 2곳이다. 나머지는 군 부대가 주둔한다. 바다 가운데 영유권이 불분명한 무인도도 있단다. 한때 군인들이 주인 없는 섬에 서로 자기 나라의 국기 꽂기 경쟁도 있었지만, 지금은 중단됐단다. 야산 언덕에는 48개의 스피커가 빽빽하게 들어가 있는 심리전용 방송탑도 있었다. 한반도 휴전선의 축소판 같은 소진먼도 모습이었다.
고조되는 안보위협과 유비무환의 자세
진먼도는 시내버스를 타고 돌면 거의 1시간 걸릴 정도로 넓다. 이 섬에는 타이완과 중국 본토에서도 많은 학생이 유학을 오는 진먼 국립대학교가 있다. 대만 정부 지원으로 등록금도 저렴하고, 우수한 교수진까지 갖춘 인기 있는 대학이다. 진먼도와 중국의 빈번한 교류로 이 섬 주민들은 정체성에서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단다. 타이완과 멀리 떨어진 진먼섬은 중국으로부터 전기와 수돗물까지 공급받는다. 하루 최대 9000명의 승객이 진먼과 샤먼을 오가는 현실에서도 양안 갈등은 점점 더 고조되고 있다. 외교적 협력으로 평화 유지를 위한 노력은 당연히 필요하다. 진먼 주민들은 이런 긴장 관계에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지혜가 대만인들에게는 점점 더 필요해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