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5일(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잘라내서 받는 평화 ‘님 위해 우리를 내셨기에 님 안에 쉬기까지는 내 영혼이 평안하지 않나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고백론』을 시작하는 말이다. 위대한 철학자로도 평가되는 성인이기에 그의 솔직한 고백은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민과 갈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지 않으면 늘 불안하고 목마를 수밖에 없다. 하느님이 사람의 진정한 고향이고, 영원히 머무를 집이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평화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유야무야(有耶無耶) 살아가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내 삶의 절대적 가치로 삼는 이들에게 주어진다. 참 평화는 내 안에서 예수님 이외의 것들을 모두 잘라내야 비로소 주어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칼을 주신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부모자식관계마저 뛰어넘고 자기 목숨까지 버려야 평화가 주어진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무엇을 얻고 채워서가 아니라 비우고 잘라내서 참 평화가 주어진다.
하루 중 가장 평화로운 때는 새벽도 잠잘 때도 아니다. 그것은 지루하고 메마른 기도가 끝난 후 잠시다. 끝없이 일어나는 분심과 잡념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쓰고, 엉뚱한 유혹들을 견디는 기도 시간은 마치 총성 없는 전쟁 같다. 한 분이신 하느님께로 몸과 마음을 향하려는 노력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으려고 애쓴다. 느낄 수 없지만 내 영혼은 하느님 사랑 안에 잠시 머무른다고 믿는다.
소돔과 고모라는 타락한 도시의 대명사다. 그 도시 안에는 사악한 사람들만 살았을까? 선한 사람도 악한 분위기 안에서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면 그도 그렇게 변해간다. 하느님은 그 도시에서 롯을 불러내셨고(창세 19,22), 그의 아내는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소금기둥이 돼버렸다(창세 19,26). 소속감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좋은 사람들과 사귀고, 좋은 공동체에 속함은 행운이고 축복이다. 사람은 어리고 약해서 말 한마디에, 작은 친절 하나에 마음이 움직인다. 안부를 묻고, 등을 두드려주고, 시간을 내서 그를 도와주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짓궂게 장난치고, 함께 기도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모이고, 이런 공동체에 하느님이 안 계시면 그분은 저 높은 하늘 말고는 이 세상에서 계실 곳을 찾을 수 없다. 하느님은 세상 끝 날까지 이런 우리와 함께 계신다(마태 28,20). 내 영혼은 하느님 안이 아니면 쉴 곳을 찾을 수 없다.
예수님, 죽음은 정말 강합니다. 모든 것을 멈추게 하고, 모든 이가 모이게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온 세상 사람들을 모아들였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죽고 다시 살아납니다. 이것저것 잘라내는 작은 죽음들은 참 생명이신 주님, 부활하신 주님과 가까워지게 합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이가 놀다가도 엄마를 찾는 거처럼, 어머니와 자주 눈을 맞추며 마음의 평화를 되찾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