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이나 대형 할인코너에 있는 음식코너 한 켠, 김 모락모락 오르는 호박죽... 끝내주죠.
호박 한 덩이를 얻었습니다. 너무 탐스러웠고 기대가 됐습니다. 달콤한 호박죽 생각하면 당장
숭덩숭덩 잘라 껍질벗기고 보글보글 끓여 죽을 쑤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멀리서부터 무거운
호박을 가져다 준 이의 정성, 그 호박을 키웠을 분의 정성을 생각해 폼나게 모셔놓고 감상 먼저
하기로 했습니다. 더불어 어찌 해야 할지 고민도 해야 했고 일 벌일 시간 또한 필요했지요.
새해들어 결심을 굳히고 일을 벌였습니다.
호박 껍질이 흐물흐물해진 게 좀 그렇지만 겨울이라 건조해져서 그럴 거다, 생각했죠. 여러 개
칼 가운데 용도가 어디에 쓰이는지는 몰라도 폼나는 칼 하나 골라 반을 쭉 갈랐습니다. '아이구~'
^-^
차마 볼 수 없네요. 모습은 상상만 하시죠. [호박 속 한 쪽은 이상한 색깔로 변해 있었고 그 부근
호박씨는 콩나물처럼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또 무슨 벌레인진 몰라도 번데기가 여기저기 숨어
있는가 하면 어떤 놈은 먼저 나와 꼬물대기도 하더군요.] 왠 벌레가 그 단단한 호박 껍질을 뚫고
보금자리를 꾸렸는지 대단합니다.
그러나 아깝지요. 아끼고 아꼈던, 잘난 호박인데... 상한 부분만 잘라내고 썩은 부분, 호박씨 싹난
부분만 파낸 후 조각냈습니다. 단단한 껍질도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열심히 벗겨냈습니다.
맑은 주황빛 색깔이 탐스럽고 먹음직스럽습니다.
생각보다 호박씨가 엄청 많이 나왔습니다. 흥부네처럼 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아이들 많듯이 이 호박은
가뭄과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고생고생 자란 거 같습니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호박씨 까먹는
재미, 꽤 쏠쏠하지요.
드디어 호박죽을 쑬 차례입니다. 하지만 다음부턴 절대 따라하지 마십시오.
호박이 잠길만큼 물을 붓고 고다시피 끓입니다. 뚜껑이 달싹거리며 끓어오르고 호박의 노란 물이 배어
나온지 한참 되지만 쉽게 물러지지 않습니다. 강제성을 띠어보기로 합니다. 국자로 뭉게도 보고...
어느 정도 풀어지긴 했는데 살짝 맛을 보니 영 맹탕입니다.
이럴 때 인터넷 검색은 무엇에 쓰는고? 역시 호박죽 끓이는 법이 나와 있습니다. '으깨 주어야 한다'
'소금을 넣어라' '팥이나 콩을 넣어도 좋고 찹쌀가루나 밥을 넣어도 좋다.'
국자로 대충 으깨고 한참 더 끓이다 보니 덩어리가 걸죽하게 풀어집니다.
우선 소금을 넣기로 했습니다. 콩을 불리고 찹쌀가루가 없어 밀가루를 대신하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역시 맹맹... 먹어봤던 호박죽 맛이 나질 않습니다. '설탕을 조금 넣어봐?' 그래도 밍밍하기는 마찬가지...
다시 소금 조금, 설탕 조금... 다시 소금 조금, 설탕 조금 더 넣었습니다. 그래도 역시 밍밍... '이거야 원~'
너무 조심스럽게 설탕과 소금을 넣은 것 같았습니다. 이번엔 조금 과감히 소금과 흑설탕, 백설탕을
부었습니다. 끓어 오르는 죽을 눌지 않도록 휘휘 저어줍니다. 점점 폼이 납니다. 진짜 호박죽이
완성되어 갑니다. 조금 떠내어 맛을 봅니다.
진땀이 납니다. 짜고 달고 맛이 이상합니다. 다시 조금 더 맛을 봅니다. 역시 마찬가지... 고민은 순간,
물을 더 붓습니다. 그래도 짠 맛은 그대로입니다. 다시 물을 붓습니다. 조금 더, 조금 더... 큰일났습니다.
설탕이 떨어져 찾아낸 백설탕병이 맛소금병이었나 봅니다. 고은 소금과 맛소금을 함께 쏟아부은
것입니다. 점점 더 짠 맛이 납니다.
건강을 생각해 보리와 수수를 섞어 밥을 하는데 미리 불려줘야 합니다. 마침 물에 불린 잡곡이 보입니다.
'에라, 모르겠다.' 호박죽에 툭 털어 넣습니다. 그러나 생쌀인 관계로 익질 않습니다. 쌀알이 익어 퍼질
때까지 다시 끓여줘야 합니다. '아이고, 죽었다.'
다시 맛을 봅니다. 아직 짜고 단 것이 제 맛이 아닙니다. 보리알이 입 안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닙니다.
호박죽이 아니라 보리죽 같습니다. 다시 물을 붓습니다. 부그르르 들통의 호박죽이 끓어오르고 넘칩니다.
온통 가스렌지 주변이 누런 호박죽으로 코팅됐습니다. 얼른 불을 줄이고 다른 냄비에 덜어냅니다.
^-^ 고생을 사서 합니다.
▲ 첫번째 호박죽 사진입니다. 차마 호박잡곡죽 사진은 보여드릴 수 없더군요. 체면 때문에...
뭔가 일이 안 풀릴 때는 쉬어가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죽보다 우선 밥을 먹어야겠습니다. 쌀과 보리쌀을
함께 섞어 대충 씻고 전기밥솥에 넣습니다. 칙... 취사가 완료됐다는 소리가 들리고 밥 먹으라 합니다.
'휴~' 또 기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밥알이 꼿꼿하게 살아 있습니다. 불지도 않은 쌀인데 물을 너무
적게 부은 모양입니다. '안되겠다. 호박죽에 다시 붓자.' 된 밥을 다시 호박죽에 넣고 불을 붙입니다.
부글부글 끓습니다. 또 넘칩니다. 덜어냅니다. 뜨거운 죽물이 튀어 손등에 떨어집니다. 이젠 지쳐서
기절할 것만 같습니다. 하루종일 왠 법석인지...
호박보리잡곡죽... 한 그릇 떠서 시식해 봅니다. 집식구들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안봐도 뻔하다는
투로 라면 끓여 먹습니다. 한두 번 일을 저질렀어야 용서를 빌죠. 정말 걱정입니다. '이 많은 걸 어찌
할꼬?' 맛이라도 있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퍼나르면 되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고민입니다.
이틀째 계속 죽만 먹습니다.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배도 아프고 보기도 싫어진 게 체한 거 같습니다.
할 일 없을 땐 잠자코 티비나 보던가 낮잠이라도 자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첫댓글 ㅎㅎ 너무 재밌어서 막 웃었어요. 용서해 주세요. 저도 오늘 교회 식당 봉사라 일찍 가서 오늘은 꼭 배우리라 하며 호박죽 쑤시는 권사님 옆에 붙어 서서 배웠답니다. 저도 원래 호박죽을 좋아해서 부페 가면 빼지 않고 먹는 것이 호박죽이고 잘 쑬줄도 알아서 국, 죽, 범벅까지 만들기도 하지만 권사님이 수고하는 분들께
서비스로 쑤어 주시는 죽이 맛있어서 배웠고 세 그릇 먹었답니다.(아파서 밥 대신) 제가 지금부터 일러 드릴께요. 귀하게 쑤신 죽을 제게 좀 보내 주세요./ 호박과 단호박을 섞어서 해도 좋구요. 단호박이 색이 예뻐요. 그렇게 조심해서 깍아서(힘드시면 그냥 조각내서 찜통에 찐 다음 벗겨내도 되요.) 물 넣고 끓이세요.
거의 다 익었을때 거품기 같은것으로 으깨 주세요. 다 풀어지면 불린 찹쌀을 믹서에 살짝 갈아서 조금만 넣어 주세요. 저으면서 끓이다가 설탕, 소금 약간만 넣으시면 아주 맛있고 노란 호박죽 완성입니다. (팥을 넣으실땐 완전히 익은 것으로 조금만).
풀씨님~ 제가 들꽃 풍경에 첨 들어와서 읽은게 풀씨님의 요리 이야기였습니다. 그때 얼마나 웃었던지요. 그 후부터 제가 풀씨님 왕팬이 되었습니다. 오랫만에 또! 눈물 질금대며 웃었습니다. 이렇게 짭짜롬한 글을 올려 주신 풀씨님께 주름진 손으로 박수를 힘껏쳐 보냅니다.
풀씨님의 요리솜씨를 한번 풍경에서 만날 수 있으면 참 좋겠어요,, 제가 글을 읽다 갑자기 웃는 소리에 강아지가 놀랐나봅니다, 제 다리를 막 긁네요, 뭔일인가 싶으지요,,// 안나님 말씀에 동감이에요..,,그리고 박수도 쳐 드립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풀씨님 요리강습 언제 또 하세요? 같이사는사람들 넘 행복 하겠당!!
풀씨님의 실패한 요리실습이야기 참 재밌습니다. 달라고 안 할테니 맛나게 먹던 요리 이야기도 해 주세요.
특별한 호박죽을 개발하신 것 같습니다. 실수인 척...이것 저것 첨가하시며 별미 호박죽을 창출해 내신것 같습니다. 그 비법대로 저도 눈총 받고 있는 저 호박댕이, 내일 잡으렵니다.*^^*
참 재미있는 호박죽 잘먹었습니다. 저는 호박죽 쑤기전에 씨를 발라내어 밤에 티비 보면서 먹는 재미도 쏠쏠하답니다. 귀한글 잘보았습니다.
먹다먹다 결국 솜이불 같은 꽃이 뽀얗게 피었습니다. 약 이틀, 그대로 못본척 했더니... 죄진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