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당신 누구야?
그 후의 2주는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스테파니에게서 계약서와 고용 서류를 받았고, 고용 서류에는 업무 내용과 방법이 심하다 싶게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컨피덴셜리티(confidentiality – 비밀 지키기) 와 프라이버시에 관한 내용을 미디어에 팔아 넘기지 않겠다는 것에 사인을 해야했지만 연봉에 관련된 부분에 대해 읽을 땐 믿을 수가 없어 침대 위에서 폴짝 폴짝 뛰기도 했다.
루즈벨트 아일랜드의 스튜디오(한국의 원룸)에 운좋게 찾은 한국 유학생에게 6개월간 월세를 놓고 옷가지만 주섬 주섬 세개의 트렁크에 쑤셔넣고 택시를 불러 어퍼 이스트에 있는 타운 하우스로 향했다.
펜트하우스엔 여섯개의 방이 있는데, 고용 조건에 의하면 나는 웨스트 윙(West Wing – 서쪽 건물) 가장 끝쪽의 방을 배정받았다. 내가 원하면 요리를 할 수 있는 커다란 주방이 웨스트 윙에 있다고 한다. 야호! 사년간의 자취 생활로 는건 요리 실력, 요리가 취미가 되어버린 나에게 커다란 주방은 보너스였다.
드디어 도착한 파크 애비뉴의 타운하우스는 예상했던대로 고풍스럽고, 센트럴 파크까지 삼분 거리인,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건물이었다.
도어맨(경비)에게 미리 준비한 서류를 보여주고 펜트하우스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세개의 수트케이스를 이고 지고 밀고 도착한 펜트하우스는 복도부터 나를 주눅들게했다.
맨발로 걸어다니는 것 만으로도 더러워 질 것 같은 하얀 카페트 – 대체 왜 하얀색을 깐거냐고, 실용성을 생각이나 하는거냐!! - 생화가 잔뜩 꽃혀져 있는 중국풍의 도자기가 빅토리아 시대 영국 앤티크가 분명한 콘솔의 위에 올려져 있었고 앤티크 로드쇼(Antique Roadshow – 진풍명품과 비슷한 미국의 앤티크 감정 티비쇼)에서나 본듯한 로코코풍 거울은 병아리 노란색 쥬시 쿠튀르 운동복 위에 통통한 거위털 파카를 입고 방울달린 모자까지 쓰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트렁크를 끌고 있는 나를 비추고 있었다.
무슨놈의 망나니 독신남 집구석이 이렇게 생겼어…주눅들게시리…
게다가 현관문이 복도 양쪽으로 두개가 있었다.
이놈의 집구석…쉬운게 없네.
웨스트 윙이라고 했으니 왼쪽이겠지 하고 미리 받아 놓은 열쇠를 꽂아 돌리니 ‘철컥’하는 소리가 들렸다.
빙고! 이 문이 맞나보네…
육중한 현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60인치 플랫 티비 스크린과 당구대, 그리고 마호가니 색의 가죽 소파들과 게임 테이블, 와인잔들이 주렁주렁 천장에 걸린 코너 바였다.
뭐야 이건…클럽 라운지야?
그런데 다른쪽 벽은 또 천장까지 닫는 움직이는 책꽂이에 책들이 가득 꽂혀있다.
흥...책도 읽나보네…
그러고 보니 벽난로도 눈에 띄었다. 와…벽난로가 있는 펜트 하우스라…
순간 이런 곳에서 육개월간 생활할 수 있는 기회를 – 게다가 집세도 내지 않고 – 잡았다는게 믿어지지 않아 폴짝폴짝 뛰고 싶은 기분이었다.
일단 짐부터 풀고…적어도 앞으로 육일간은 아무도 없을 테니 이 럭셔리를 맘껏 혼자 만끽하자…크크크
웨스트 윙의 끝에 있는 내 방은 센트럴 파크가 한눈에 들어오는 뷰와 맨하탄에 있는 아파트라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커다란 붙박이 옷장과 퀸사이즈 침대, 그리고 개인 전용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처음 유학와서 2년이나 살았던 렌트비 600달러의 스튜디오가 생각나서 쓴 웃음이 지어졌다.
화장실도 없어 층에 하나 있는 공용 화장실과 샤워실을 써야했고 부얶도 없이 전기 버너와 전자레인지 하나를 책상위에 두고 써야 했던,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가 들어가면 오십센티정도 활동할 공간이 남았던 콩알만한 스튜디오…백년 넘은 건물이라 쥐가 파이프를 타고 히터를 통해 들락날락 거리고 바퀴벌레가 미니 냉장고 안에서까지 나왔던 그곳…
쥐나 바퀴벌레가 나올 때 마다 심장이 발 밑으로 떨어질만큼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내 자신에게 약속하곤 했다. 두고봐…오 년 안에 꼭 성공해서 도어맨이 있는 깨끗한, 구멍 하나 없는 새로 지은 아파트로 이사갈거야!
뭐…2년쯤 살다보니 익숙해져서, 나중엔 자주 방문하던 쥐들에겐 이름도 지어주고 오랫동안 안나오면 걱정이 되기까지도 했지만…ㅋ
지금 내가 서있는 이 곳은 내가 나 자신에게 약속한 그런 곳이었다…하…이런곳에서 계속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때 방안에 문이 하나 더 있는걸 발견했다.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 열고 들어가니 컴퓨터 모니터가 세개나 올려져 있는 커다란 책상이 창문을 등지고 있고 그 책상 대각선으로 노트북이 놓여져 있는 작은 책상이 보였다. 벽에는 여섯개의 플랫 스크린 티비가 달려 있었다.
여긴 사무실인가 보네…헤지펀드 사장이라더니 집에서도 일을 하나봐…
뉴욕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직업 중의 하나가 투자 은행가였고, 그중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는 사람들이 헤지펀드 매니져들이라는건 뉴욕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두들 아는 사실이었다.
대신 그들은 사생활을 포기해야 할만큼 바쁜 삶을 살았고 대신 조금의 시간이 날 때엔, 잃어버린 사생활을 이백퍼센트 만회하고 싶은듯 흥청망청 돈을 써대거나 모델, 여배우들과 광란의 파티를 해대는 등 뉴욕의 배드 보이들로 비춰지기도 했다.
이 방에도 역시 문이 두개 있었다. 왼쪽에 있는 문은 복도를 향한 문일테고…오른쪽에 있는 문은?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들어갈 준비를 하던 발이 문에 부딛혔다.
뭐야…잠겨있나? 여기가 알렉스 브레슬린의 방인가?
왼쪽의 문을 열고 나가자 웨스트윙과 이스트윙을 이어주는 복도였고 복도쪽으로 난 문을 열고 그의 방을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왠지 프라이버시 침해 같아서 그 방은 건너뛰고 나머지 손님방과 따듯한 느낌의 정상적인(?) 거실까지 구경하고 나니 배가 고파졌다.
일주일에 세번 메이드가 온다더니 집 안은 깨끗했고 냉장고는 요리 재료들로 가득차 있었다.
흠…한국 슈퍼마켓에 가서 된장이랑, 고춧가루랑 간장만 사다 놓으면 되겠는데…
간단히 저녁을 먹고 나서 샤워를 하고 폭신한 침대에 누워 주방에서 발견한 와인을 한잔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니 반짝거리는 뉴욕의 야경이 나를 감쌌다…그리고는…하암….
자동차 소리와 반짝이는 햇살에 눈을뜬 나는 순간 너무 낯설은 풍경에 깜짝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아침 아홉시, 서서히 뇌에 피가 돌기 시작하면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기지개를 켜고 나서 침대 밖으로 나와 바쁜 아침의 뉴욕이 창밖에 펼쳐지는걸 잠이 덜 깬 눈으로 바라보다 터벅터벅 주방을 향했다.
목이 말랐다.
어제 저녁을 만들면서 주방에 뭐가 있는지는 이미 익힌지라 익숙하게 컵을 찾아 정수기에서 차가운 물을 받아 반쯤 벌컥벌컥 마시고 있을때였다.
“Who are you – 당신 누구야?”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물컵을 입으로 기울인채로 얼굴을 소리나는 방향으로 돌렸고, 물이 컵에서 가슴으로 쏟아지는 차가운 느낌과 화가난 듯한 파란눈에서 나온 레이져빔 둘 중에 어떤 것이 나를 더 놀라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꺄아-----------“
내 비명은 그를 놀라게 한듯 했다.
“헤이, 잠깐만, 비명을 질러야 할 사람은 나라고”
그의 얼굴을 한번 보고 고개를 돌려 아직도 얼음장 같은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컵을 바로 잡고난 후 물이 쏟아져 내린 내 가슴을 바라고보는 나는 다시한번 비명을 지를수 밖에 없었다.
“까야----------“
누가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나는 잠잘 때 입은 그대로 노브라에 탱크탑, 그리고 보이쇼트(boyshort – 남자 사각 팬티) 스타일의 팬티만 걸치고 주방까지 왔었다.
게다가 물까지 쏟아 가슴 윤곽까지 드러난 상태였다.
“그만 – 그만 소리질러, 당신 누구야 대체??”
이성을 잃은 상태의 나는 내 방을 향해 도망치려고 한발을 딛었고 미끈한 느낌과 함께 중력이 나를 놓친듯 온몸이 공중에 가볍게 떴다가, 천장의 샹들리에가 눈앞에 보이더니 둔탁한 부딛히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널부러졌다.
“아-악!”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수백만가지의 감정과 통증이 한꺼번에 나를 거쳐갔다.
어느샌가 내 옆으로 다가온 그의 파란눈과 마주쳤다.
방어기제로 나는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부드럽지만 힘있는 손이 내 양팔을 얼굴에서 떼어냈다.
다시 그 눈과 마주쳤다.
“너…누.구.냐.고.”
첫댓글 ㅋㅋㅋㅋ이를 어째ㅜㅜ 근데 전 왜이리 잼있죠?ㅋㅋㅋ앞으로 여주의 생활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듯...
여주, 고생 좀 할 것 같아요. 그쵸? ㅋㅋ
와~ 재밌을 것 같아요ㅋㅋㅋ 앞으로 기대할게요~~~~ㅎㅎㅎ
감사합니다. ^^
ㅎㅎ...알렉스군요..ㅋㅋ 담편 너무 기대요~../빨리 나왔으면..ㅋ
담편 방금 올렸어요~ ^^
캬하하 재미있네요.ㅎㅎㅎ
캄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