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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와 법제法製
(입력: 2023.04.05 /서해진)
아래는 2017년 차의 대중화를 위한 새로운 티-네트워킹 사업을 준비하며 진행되었던 박현 선생님의 이야기마당 내용 일부입니다. 앞으로 3회에 걸쳐 법제에 대한 이야기를 실을까 합니다.
지유(地乳)라는 브랜드가 있습니다. 그 이름은 차사(茶事)의 지향성은 물론 정체성도 담고 있을 것입니다. 차예사(茶睿士)라는 역할도 지유라는 내용을 풀어가려는 사람의 일에서 찾아졌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차를 매개로 하고 싶은 일, 차를 매개로 해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2002년 지유명차, 2012년 티쿱과 차예사 그리고 2017년 차의 대중화를 위한 새로운 티-네트워킹 사업 등 여러 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리할 것이 늘어나고, 풀어갈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과제도 되지만 즐거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은 차사와 관련한 사람의 역할에 대한 박현 선생님의 이야기마당 일부를 옮겨 봅니다. 차와 법제(法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차와 음식 그리고 차사 관련 밝은 생각을 실어다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실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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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法製)라는 것
대개 특수용품은 우리에게 성분상 더 유용하지만, 과정상에는 무리하게 가까이 있습니다. 특수용품은 우리와 만나기 위해서 일정한 시간의 거리를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진화가 아직 안 된 것입니다.
진화가 안 되었다는 이야기는 원래 지구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성분을 거의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대로 남아 있기 위해서 자기변화라는 흔적도 없고 성분도 원시적인 화학 성분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몸에 이로운 것은 여기 다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직접 섭취하면 몸에 이로운 게 아니라 엄청 해롭다는 것입니다. 진화라는 것은 인간이 걸어온 길 만큼 자기들도 주변에서 괘도를 같이하면서 같이 걸어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걸어온 과정 속에서 지구 본래가 가지고 있는 것을 많이 버린 것이었고 버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곧 진화였던 것입니다.
진화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버리는 과정이고 한편으로는 집중하는 과정입니다. 진화라는 것은 다양한 요소를 골고루 평균적으로 가지고 있다가 일정한 모습으로 집중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가운데 집중한 부분이 결국 마지막에 와서 하나의 종(種)이 됩니다.
하나의 종이라는 것은 어떤 분야에 집중해 있느냐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집중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구조를 가지고 종을 볼 수도 있고, 종의 기본적인 특징은 지구의 어떠한 한 부분이 집중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인간에게 특수용품은 종적인 개념보다는 지구 보편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는 그렇습니다. 일상용품과 특수용품을 동일선상에 놓고 영양소 분석에 들어가면, 훨씬 더 다양하게 훨씬 더 원초적으로 영양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수용품들입니다. 그런데 먹으면 죽기도 하고, 잘못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특수용품들을 경우에 따라서는 일상용품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법제라고 합니다.
법제는 순리를 따르는 것
법제라는 것은, 특수용품을 일상용품으로 전환시키고,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있는 것으로 등치 시키는 일입니다. 우리 삶의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신체의 기능을 확장 시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체기능은 그대로 두고 이 특수한 물건들을 우리 신체와 친한 것으로 바꾸는 것을 법제라고 합니다. 차도 어떻게 보면 이 ‘법제’를 통해서 만들어진 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쌀을 한번 보겠습니다. 쌀은 처음에는 벼에서 시작합니다. 벼에서 시작해 탈곡을 해서 그 다음에 정미를 합니다. 정미를 한 다음에 도정을 하고, 도정을 한 다음에 밥을 만듭니다. 식품화를 시키는 것입니다. 이 과정도 크게 보면 법제일 수 있습니다.
다만 법제가 아니라고 보는 것은 탈곡을 했을 때, 낟알들도 껍데기만 벗기면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껍데기 벗기는 것은 법제로 보지 않습니다. 과일을 먹을 때 껍질을 벗기는 것을 법제로 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껍데기를 벗긴 다음에 그냥 먹어도 식품화를 한 이후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단 먹기 편하게 소화에 편하게 했을 뿐이지 그냥 꼭꼭 씹어 먹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법제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식품화 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차예사 시간에 예를 많이 들었는데 구리가 있습니다. 구리는 직접 먹을 수가 없습니다. 직접 먹을 수 없는 인간에게 먼 것에 속합니다. 유황도 마찬가지이고, 유황오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황오리는 잘 먹으면 좋을 수 있지만 잘못 먹으면 해롭습니다. 법제된 유황을 먹을 수도 있지만 법제가 안된 유황을 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리를 못 먹으니까 구리를 처음에 개구리한테 주고, 개구리가 소화를 못 시키니까 개구리를 다시 잡아 뱀에게 먹입니다. 그리고 뱀에게서 다시 닭에게 갑니다. 사람은 닭을 통해서 이미 법제화된 구리를 먹게 됩니다. 저 멀리 있었던 구리를 가까운 구리로 바꾸는 것, 이것도 나름 법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엄밀하게 법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법제라고 했을 때에는 이 ‘법’에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법이라는 자체는 동양적 의미에서 순리대로 가는 것이 법제입니다. 원래 구리는 자연스럽게 드러나 자연계 속에서 수 억 년 또는 수 천만 년의 진화를 거쳐서 먹을 수 있는 구리로 바뀌는 것입니다. 지하에 있는 구리가 일정한 물을 만나면서 조금씩 산화가 되고, 그러면서 분해가 돼서 흙의 성분처럼 가까워지고 이 성분의 흙이나 암반의 성분을 식물이 받아 가고, 식물은 뿌리를 통해서 줄기를 거쳐서 잎으로 옮겨옵니다. 이 과정이 순리입니다.
그러므로 순리를 어겨서 잔꾀를 부리는 것은 법제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마치 법제처럼 보이지만 유사 법제입니다. 유사 법제가 된 것은 효과를 낼 수 있고 부작용을 최소화 시킬 수도 있지만, 부작용이 없지 않고 때로는 부작용이 매우 클 수도 있습니다.
법제 검증을 거치지 않고 쏟아지는 요즘의 건강식품
오늘날의 건강식품에 문제가 있는 것이 바로 법제를 거쳐야 되는 것과 법제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것 사이의 애매한 경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로니아는 법제를 거쳐야 우리가 먹을 수 있고, 포도는 그냥 일상용품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상당수 식품들이 그 경계에 있습니다. 특히 법제를 해야 되지만 안 해도 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 일정 경계에 모여있습니다. 이것이 하나씩 하나씩 현대사회의 건강식품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현대사회의 건강식품은 인간의 몸을 망치는 식으로 가고 있습니다. 법제를 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법제가 되지 않은 경계라인에 있는 것들이 자꾸 들어오는 이유는, 얼핏 먹어보니까 먹을 만 하기 때문입니다.
먹을 만은 한데 먹고 나니 다음날 괜찮은 것입니다. 이것을 현대과학이라는 장치가 있는 영양분석을 해 보니 기존에 법제할 필요가 없는 일상식품보다도 훨씬 더 다양한 무언가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먹기 위해서 법제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할 만큼 경계라인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꾸 내 몸에 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전문 쌈밥집에 가면 상추와 깻잎 이외의 것들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절반은 법제를 하지 않으면 먹어서는 안 되는 식물들이 있습니다. 요즘 들어 향이 좋고, 영양에 좋다 하면서 자꾸 식품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식품의 영역에 들어와서 법제라는 것이 작용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연구가 필요하고 일정기간이 지나서 비로소 먹을 수 있다는 식품으로 결론이 내려집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라 그냥 일단 먹어봅니다. 누군가는 신농씨가 되는 셈입니다. 먹고 죽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누군가는 탈이 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위험성을 수 많은 사람들에게 분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법제는 사회적으로 보면 매우 혁명적으로 이뤄지지만 사물이 우리 생활 속에 들어오는 것은 보다 앞서서 꾸준히 들어옵니다. 현재 한국이라는 영역 속으로 다양한 비일상적 특수용품이 식자재로 유입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이것만 가지고 장사를 해도 장사가 됩니다. 일상용품은 빼버리고 해도 건강식품으로도 충분히 장사가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특수용품들은 결과적으로는 누군가 어떤 세력에 의해서든 법제가 되어야 됩니다. 법제가 되기 이전에는, 이 식품에 대한 법제의 가능성과 법제의 필요성을 깨달은 것과 아직 법제화가 진행되지 않는 과도기 시기에서는 이것을 견뎌낼 수 있는 무언가의 장치가 필요합니다.
정체불명의 음식문화에 차의 필요성
여기에 차가 가장 좋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낯선 음식들이 안정화되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일상의 식생활 문화가 바뀌어야 되고, 사회문화가 바뀌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하게 사회가 안정기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안정기가 없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기존의 봉건제 또는 고대 노예제 사회와 달리 안정이라는 것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직선의 발전을 해 나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또 하나 자본주의의 특징 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는 결코 안정기라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안정기를 허용하는 순간 자본주의는 죽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금융자본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쉬지 않고 이율이 나와야 하고, 쉬지 않고 이율에 붙여서 이윤이 나와야 합니다.
이율과 이윤이 나오려면 안정된 자본주의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앞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 속에서 조금씩 과도기를 허용할 뿐이지 결코 안정기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안정기는 곧 경제적 쇠락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경제적으로 늘 불안정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안정된 인간적인 어떤 존재양식을 만들어가야 되는 이중의 요구가 존재하는 사회입니다.
이 생존의 힘든 쳇바퀴 속에서 살아가려면 무언가 남과 다른 것을 받아들여야 될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활은 경제활동에서만 창의적인 것이 아니라 식생활에서도 창의적이고 싶어합니다. 남이 안 먹는 것을 먹고 싶어하고 남이 안 먹는 방식으로 먹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또 다른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그 자체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영원히 법제화를 혁명적으로 만들어낼 시기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과도기와 진입기로 머물게 할 뿐입니다. 대책이라면 과도기가 안정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도기가 어쨌든 안정기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차는 자본주의 특성상 영원한 과도기에서 오는 위험성을 막아주는 어떤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법제와 비(非)법제 사이에 있는 제차
공급이라는 면에서 보면 차는 법제와 비법제의 중간쯤에 있습니다. 차는 한편으론 법제이고, 한편으로는 법제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찻잎도 그냥 먹어서 안될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찻잎을 쪄서 나물처럼 먹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법제영역에 속하기도 하고 굳이 법제 안하고 먹어도 되는 애매한 경계에 있어서, 차도 경계식품이라 합니다.
차가 경계식품이라는 것 때문에 경계로 진입하는 과정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됩니다. 어떤 위험성이 있는 것을 막아서는 방어선 역할입니다. 법제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그 무엇으로 있는 차가 경계식품 즉 과도기의 음식이 하는 위험성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법제를 하는 것은 한자 의미와 발음하고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엄’자가 들어가는 것은 전부다 법제와 상관이 매우 많은 한자어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과거에 ‘엄치’들이었습니다.
‘엄치’라는 사람은 법제를 하는 사람입니다. ‘엄’이라는 것이 바로 ‘법제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엄나무도 방어나무였습니다. 무언가 사람의 영역을 보호해 주는 것으로 이름이 붙었습니다. “엄나무를 걸어 놓으면 집에 귀신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도 문화적으로 확장 되어서 나온 것입니다. ‘엄’이라는 것은 우리 주변을 방어해주는 방어 테두리인 셈입니다. 그런 면에서 법제를 다른 말로 ‘엄치’라고 불렀습니다.
법제하고 난 뒤 그것을 복용 하게 됩니다. 즉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먹을 수 있는 직전 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법제한 것을 어떻게 해서 이제 먹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먹기 직전 상태로 만드는 것을 한자로 ‘조리’라고 표현합니다. 지금은 식품도 음식도 조리라고 하고 조리사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조리’라는 것은 그냥 쉐프의 개념이 아닙니다. 먹는 사람에 맞추어서 부분적으로 조정하고 이치에 따라서 먹일 수 있도록 만들어 놓는 것이 조리의 일입니다. 그것이 조리하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법제사가 우리말로 ‘엄치’ 이고, 조리사는 우리말로 치면 ‘다리치’입니다. 다리라는 것은 약이라는 것입니다. 법제를 통해 비일상용품인 특수용품을 일상용품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렇게 전환시켜 놓은 것을 실제 복용하게끔 직접 만들어주는 것을 ‘다리’라고 하고, 이것을 ‘약’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법제화됐다고 해서 모두 약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약은 다리는 과정을 거쳐야 되고, 이것이 명사화되면 ‘다리’가 됩니다.
‘다리다’는 오직 2개의 사물에만 쓰입니다. 약을 다리다, 차를 다리다 외 나머지에서는 절대 안 쓰이는 것이 ‘다리다’입니다. 국이나 찌개를 다리다 하지 않고 끓이다 라고 합니다.
다리는 것은 약과 차에만 있습니다. 약은 완전한 특수용품 식품으로써 법제가 절대로 필요 한 것인데, 차는 애매한 경계식품이긴 합니다. 그래도 차는 약과 같은 영역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엄치’가 있어야 했,고 ‘다리치’가 있어야 했습니다.
‘허준’같은 드라마를 보면 사실인 것도 있지만 구조에 대한 이해부족도 많이 보입니다. 정조대왕 이전이면 기본적으로 의사가 세금을 내고 병원을 할 수 없던 시기였습니다. 물론 그 시기에도 서원들과 결탁해서 양반과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이른바 상업적 의학세력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 일부가 시험을 봐서 국가 의학기관에 취직을 하면 내의원의 내의가 되고 나아가 어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업적으로 조선시대 성리학 세력과 결탁이 되어있거나 돈 있는 사람들과 부분적으로 결탁이 되어있는 사람들을 뺀 나머지 모든 의사들은 공동체 의사들이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이상의 사람들이 수도 없이 있었고, 이 사람들 중에는 ‘다리치’도 있고, ‘엄치’도 있고, ‘옥두시’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옥두는 의사를 말합니다. ’시’가 붙으면 병원장 정도의 의사를 말합니다. 이렇게 요즘 용어로한다면, 병원장과 의사 그 다음에 약사와 제약사가 있었던 셈입니다. 여기서 ‘다리치’는 약사라 할 수 있고, ‘엄치’는 제약사 그리고 ‘옥두’는 의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역할은 옥두시의 지휘를 받으면서 삼위일체로 존재했던 셈입니다.
지금은 이런 시스템이 없습니다. 지금도 엄밀하게 환자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병원 안에 제약기관도 있고 약사도 있고 약국도 있고 의사도 있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삼위일체를 시키는 것이 효율적인 건 알지만 그렇게 하면 더 큰 감당할 수 없는 부작용 때문에 안 하고,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하게 되었습니다.
허준이라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유의태는 다리치와 엄치를 데리고 있는 옥두시였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봤을 때 돈만 밝히는 의사 특히 국가 최고 의사인 어의가 우습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치맛자락 두르고 나서 겨뤄본 것이고, 겨뤄보니 옥두시의 실력이 훨씬 더 위에 있었습니다.
엄치가 되는 후보자는 처음부터 약초꾼하고 약초 캐러 다닙니다. 다리치가 될 사람은 처음부터 물 따르는 사람으로 시작합니다. 다리치 후보자는 어느 날은 물 길어오고 어느 날은 약초 캐러 가고 하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분업화 되었습니다.
법제를 해제하는 일
어쨌든 약은 법제이고 차는 법제된 약과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바라보면 역시 다리는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이 법제한 것을 다시 해제해야 합니다. 법제한 것은 우리가 못 먹는 것을 무언가 성질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성질을 변화시켜서 얻으려고 한 것은 우리 일상에서 진화된 일상용품에서는 없는 것을 얻는 일입니다. 바로 약을 만들기 위해서고, 그것이 바로 약입니다.
밥은 보약이 아닙니다. 약은 약이고 밥은 밥입니다. 매일 먹을 수 있는 약은 약이 아닙니다. 약으로써 매일 먹을 수 있는 것은 차 밖에 없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매일 먹는다면 그것은 유사 식품이거나 아니면 약에 해당됩니다. 이렇게 엄밀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그 구분의 경계에 있는 경계식품으로써 이미 법제화 돼서 인정되는 것은 차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성질과 형질의 전환을 시켜 얻은 것을 다시 인간이 먹여야 됩니다. 바로 다리는 것입니다. 법제에 해당하는 엄한 것은 성질과 형질의 전환이고, 이렇게 성질과 형질이 전환된 것에서 무언가를 얻어내는 일이 필요합니다. 원래 그 형질과 성질이라는 것을 다시 복원시키는 것은 다리치가 하는 것입니다.
엄치가 변환시키고, 그러면 이것을 다시 복원시켜 필요한 것을 얻는 것이 곧 다리는 것입니다. 차는 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해제 시키는 것입니다. 다리는 것은 법제를 해제 시키는 것입니다. 해제 시켜서 그 안에 필요한 것만을 취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버리는 것입니다. 해제해서 원래 것을 얻고 나머지 법제하며 생겼던 찌꺼기들, 즉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은 제거합니다.
법제된 차는 건조한 상태로 있는 고체 모습의 찻잎입니다. 이것이 법제된 차입니다. 법제된 차를 액체로 만들면 이것은 법제를 벗어나 이미 해제된 것입니다. 따라서 해제의 역할은 원래 법제과정 속에서 생긴 불필요한 불순물을 달이는 과정 속에서 제거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법제를 통해서 온전하게 보호해 놓은 원시상태의 형질과 성질을 특수약품으로 복원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생활에 편의성 있는 물건으로 전환시켜야 합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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