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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5일 [대림 제2주일]
루카 3,1-6
길들여지는 사람은 길을 내지 못한다. 지금의 행복에 길들지 않기를.
오늘 복음엔 세례자 요한의 직무가 소개됩니다.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그분의 길을 미리 닦아놓는 역할입니다.
이를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라고 합니다.
‘회개’란 무엇이 행복인지 아는 것입니다.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사람이 회개했다고 하면 이제 술을 덜 마시는 것이 행복임을 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집을 나온 아이가 회개했다고 하면 그래도 집에서 부모님과 사는 것이 행복임을 안 것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안성에서 있을 때 길거리 아이들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에 아이들은 다시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살 때 입었던 더럽고 냄새나는 옷을 다시 줍니다.
그리고 입어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코를 막고 억지로 입고는 자기들 손으로 내다 버리고 샤워를 두 시간씩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길거리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그리스도 없이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하지 않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간신히 주일미사에 나오기는 하겠지만 일상을 살아갈 때는 그리스도께서 동행하심을 까맣게 잊고 삽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기보다는 뱀의 뜻에 따라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채우는 것을 더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회개는 그리스도를 부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런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돈도 없고 먹고 마실 것도 없고 명예도 없는 광야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임을 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삼구를 포기할 때 하느님의 어린양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광야로 나오지 않으면, 곧 삼구를 포기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사랑이신데 삼구는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불과 물처럼 한 공간에 공존할 수 없는 욕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것이 세상 즐거움을 다 포기하는 것보다 행복함을 믿지 못한다면 누가 광야로 나오겠습니까?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이 필요한데, 그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일단 믿고 광야로 나와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삶 자체가 무엇이 행복인지 증명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삶이 그랬고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그랬습니다.
이분들의 삶을 보며 많은 사람은 ‘저런 삶이 진짜 행복일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고 그 광야의 삶으로 나아올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삶을 살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이분들이 먼저 세상의 행복에 길들지 않은 누군가를 만났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회개의 세례는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이 가지 못한 사람에게 길을 내주는 것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히말라야’(2015)는 엄홍길 대장과 박무택과의 우정을 그립니다.
엄홍길 대장으로부터 산을 배우고 싶었던 박무택은 지옥훈련을 거쳐 엄홍길 대장과 극한의 어려움을 견뎌내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엄홍길 대장은 세계 최초 16좌 등정을 코앞에 두고 더는 산을 타서는 안 된다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이에 박무택이 대장이 되어 에베레스트를 등정합니다. 이 과정에서 박무택 대장은 동료들을 구하려다 조난당합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악천후에 베이스캠프에 있었던 어떤 누구도 그들을 구하러 오르지 않았습니다.
책도 쓰며 가족과 삶을 즐기고 있었던 엄홍길 대장은 이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마지막 산을 오르기로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쓸데없는 도전이라며 말립니다. 명예가 따르지 않는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시체를 찾는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후배를 추운 그곳에 홀로 둘 수 없었던 엄홍길 대장은 아픈 다리에도 그들의 시신을 찾아 내려옵니다.
어떤 명예도 없는 도전. 다만 우정을 지키기 위한 두 달이 넘는 도전이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엄홍길 대장은 박무택 대장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6좌 등반을 완주합니다.
살다 보면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길을 낼 것인가의 선택이 참으로 많이 찾아옵니다.
이때 현실에 안주하는 삶은 아무런 길도 내지 못하지만,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을 지닌 사람은 새길 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이 세상으로 내려오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세상으로 내려오게 만드는 길이 됩니다.
길을 내는 사람들의 특징은 지금 여기에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더 높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항상 이렇게 묻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행복인가?”
이 질문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길을 개척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 ‘메이즈 러너’(2018)는 실험용으로 기억이 삭제되어 한 공간에 갇혀 살아야 하는 젊은 청년들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토마스만이 길을 알 수 없는 미로와 무서운 괴물을 무릅쓰고 그곳을 탈출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또 자신들의 세상에서 계급을 정하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둘의 투쟁은 끝이 없습니다.
다만 희생이 따르더라도 나가는 길을 찾게 된 토마스는 다른 이들도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는 길을 만들어줍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세상의 틀에 갇혀 사는 학생들에게 책상 위로 올라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왜 이 위에 섰을까? 이 위에선 세상이 무척 다르기 보이지. 잘 알고 있는 거라도 다른 시각에서 봐라.
틀리거나 바보 같아도 반드시 시도해라.”
키팅 선생님이 쫓겨나자 학생들은 교장 선생님의 위협에도 책상 위로 올라섭니다.
누군가 길을 내주지 않으면 아무도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없습니다.
지금 세상이, 그리고 대부분이 쫓고 있는 돈이 왜 행복의 정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 이해할 수 없다면 행복할 수 없다고 여기십시오.
그래서 행복에 대해 다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은 결국엔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하니까 다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사람이 다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것과 반대되는 광야의 삶에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지금의 행복이 최선인지를 끊임없이 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복을 위해 찾아간 그 길로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그 길은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라는 행복을 만나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5일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루카 3,1-6
진정한 회개의 잣대는 다름 아닌 삶의 변화입니다!
대림 제2주일이자 인권 주일입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피조물임을 자각하는 주일입니다.
인간은 첫째가는 하느님 피조물이기에 그 어떤 제도나 이데올로기보다 우선해야 하는 가치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신분, 국적, 빈부 여부를 떠나 생명을 지닌 한 그 어떤 인간이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특별히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 등 경제적 파탄으로 인해 깊은 수렁 속에서 고생하시는 분들, 너무도 막막해
앞길이 전혀 안 보이는 분들, 희망을 상실한 분들을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기도가 필요한 주일입니다.
직원을 소중히 여기는 경영 마인드로 유명한 한 경영자의 외침은 어려운 이 시대 모든 경영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소중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해고를 통한 인원 감축! 우선 인건비를 대폭 줄여보자는 마인드인데, 결코 바람직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서로를 위해 피해야 할 유혹입니다.
그로 인해 예견되는 피해자들의 고통과 국가적 손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희 회사는 인원 감축이라는 뼈아픈 해결책이 아니라 3교대를 4교대로 늘리는 고용 증대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잉여시간을 직원교육과 재충전에 투자한 결과 생산성 향상, 안전사고 감축, 노사화합이란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이 회사 경영자의 인본주의적 사고방식, 근로자들과 고통을 분담하려는 마음 씀씀이가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 회사에서 사직서를 쓰면 최고 책임자와 면담을 거쳐야 한답니다.
그리고 최고 책임자로부터 "도대체 왜 사직서를 썼느냐? 좀 더 함께 일할 수는 없겠냐?"는 듣기 행복한 만류의 말을 들어야 한답니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 무리한 방법보다는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 함께 나누고, 함께 협력하는 방법을 통해
우리 앞에 놓인 이 난관을 함께 견디고 함께 안개 속을 헤쳐나가는 우리 가정, 우리 직장,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은혜로운 대림 시기도 어느덧 두 번째 주일로 접어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자비로운 아버지의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 주변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웃들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그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도록 합시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 앞에 망연자실하게 넋을 잃고 앉아있는 이웃들 삶을 개선시키는 구체적 "구원의 손길"이 됩시다.
진정한 회개의 잣대는 다름 아닌 삶의 변화입니다. 억압받는 이웃들을 향한 적극적 투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관대한 나눔, 그것은 회개의 가장 좋은 표시입니다.
우리 삶이 그저 단순한 하나의 반복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들을 향한 끝없는 개선의 길, 나날이 성장하고 쇄신되는 참된 회개 생활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12월 5일 대림 제2주일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기에 결혼한 조카도 많고 또 자녀를 낳아 저로서는 이른 나이에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조카들이 모두 열심히 살고 있기에 다들 자기 자리에서 나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카 중 한 명이 조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법정 분쟁까지 가게 되어 큰 손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무척 속상했습니다. 조카에게 큰 손해를 안겨 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괜히 미워졌습니다. 무엇보다 사제인 제가 조카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것이 없다는 사실이 더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기도 중에 이런 생각이 떠올려졌습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을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조카의 일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은 기도이기에 열심히 기도로만 함께하는 것입니다. 걱정은 되지만, 굳이 걱정에 휘말려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세속적으로는 솔로몬 왕 이후로 한 번도 두각을 드러낸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가 세계를 통치하고 있었고, 유다 땅은 로마인의 총독 본시오 빌라도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본시오 빌라도 밑에서 로마에 아부하는 헤로데 일가의 3형제가 유다 땅을 나누어 영주로 있었습니다. 또한 종교적 지도자 구실을 하던 이스라엘의 대제관직도 카야파의 손에 들어가 하느님의 백성은 세속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죄를 뉘우치고 세례를 받으라는 구원의 소리가 광야에서 들려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요르단강 주위의 지방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하면서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을 시도해 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합니다.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는 것,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받도록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이가 정치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하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더 큰 가치 안에서 참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또 반드시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오늘의 명언: 용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일이다(자크 데리다).
갈등의 해소를 위해….
어떤 부부가 커다란 갈등에 빠졌습니다. 남편이 아내 몰래 투자했는데 큰 손실을 본 것입니다. 물론 미리 아내와 상의할 수도 있었지만, 평상시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에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 주제에 무슨 투자야?”라는 식의 무시하는 말을 할 것이 뻔해서 한번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기대와 달리 역시 큰 손해를 본 것이었지요.
아내에게 투자 실패를 말했습니다. 아내는 더 남편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가장으로 여겼고, 아이들에게도 남편의 무능을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런 아내에 대한 미움이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한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말합니다.
“좋아요. 주님 때문에 당신을 용서하겠어요.”
이 말에 남편이 기뻐했을까요? 아내가 용서하겠다는 말은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모든 문제의 책임이 남편에게만 있다는 행동에 더 마음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는 갈등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상대방보다 우의에 둘 때 진정한 용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같은 위치에서부터 용서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용서하려면 먼저 자기 잘못부터 찾아서 고백해야 합니다. 서로 자기 잘못을 고백해야 용서도 가능하고 갈등도 해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