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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린 예수님
누가복음 1:1-4
하나님의 은혜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주현절 여섯째 주일이다. 제주도는 유채꽃이 활짝 피었다고 한다. 어느덧 절기는 점점 봄을 맞이하고 있다. 꽃이 없는 봄은 상상하기 어렵다. 어젯밤에 오늘 아침에 눈이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보고, 정말 눈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땅만 젖어 있었다. 올해는 눈을 맞아 보지도 못한 채 봄을 맞이하는 모양이다.
눈이 없는 겨울은 가능해도, 누가복음이 없는 예수님의 생애는 상상하기 어렵다. 누가는 주후 1세기경의 봉준호처럼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지난주에 아카데미영화 거장 반열에 오른 봉준호가 예수님 이야기를 드라마화 한다면 아마 누가복음을 배경으로 할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는 어떻게 영화를 만들까?
수요일 저녁에 올해의 주제성경인 누가복음을 때늦게 시작하였다. 누가복음의 제목을 ‘누가가 그린 예수님’으로 하였다. 네 권의 복음서 중에서 누가복음의 특징은 ‘이야기’(내력, 눅 1:2)를 서술하는 능력에서 탁월하다는 인정을 받고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 돌아온 탕자 이야기,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 이야기는 오직 누가복음에만 있는 명장면들이다. 만약 구유에 누인 아기와 목자가 없는 성탄절, 엠마오 이야기가 없는 부활절, 성령강림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성령강림절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누가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영화기법이다. 후이징은 “어떤 내용을 눈앞에 그리는 것”이라고 하였고, 호라즈는 “말씀으로 그리기”라고 정의하였다.
이런 이유로 누가는 교회의 전통에서 화가들의 성인으로 대접을 받고 있다. 화가들은 누가복음에서 거룩한 영감을 얻었고, 상상력이 풍부한 작품을 그렸다. 한마디로 누가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리는 예술의 달인인 셈이다.
오늘 설교의 주인은 예수님이다. 과연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그리는가? 정말 그리기 어렵다면 그리스도인답게 그리워하는가?
1)
본문은 누가복음의 서문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같은 기록자 누가가 썼는데, 그래서 서문이 닮은꼴이다. 데오빌로(‘하나님의 친구’)에게 헌정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3)
탁월한 복음서 기록자인 누가는 기록 목적을 한마디로 말한다.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4)이다.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하기 전에 마가복음 등 이미 기록된 복음서들이 있었다. 이미 누가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알고 있었고, 이전에 단편적으로 전하는 기록들도 살펴보았다.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2) 기록하면서, 누가는 더 깊이 예수님의 생애를 헤아렸다.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3) 것이다.
누가는 자신이 무언가를 새로 발견하여 다시 써보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전 저작들을 순서대로 기록하려는 강한 의지를 밝힌다. 다만 새로운 복음해석과 이해의 눈을 통해 예수님을 더욱 잘 알기를 원하였다.
그 결과 누가는 자신이 또 한편의 복음서를 기록하는 이유를 이렇게 요약한다. 그것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다. 많은 사람이 이미 예수님에 대해 들었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공동체 안에 웬만큼 믿음도 생겼다. 그런데 누가의 차원은 다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다시, 번번이 복음서를 읽는 이유는 분명하다. 내 믿음을 굳게 하고, 알고 있는 것을 확실하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복음의 서론에서 확인한 그 기록목적은 지금 내게도, 우리 시대에도 필요하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많이 듣고, 또 배웠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더 확실하게 하고, 더 굳게 하려는 열심이 요청된다. 오늘의 교회 안팎에서 예수님의 복음이 심각하게 오염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더욱 긴박한 심정으로 그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해야 할 것이다.
2)
독일의 수도사 안셀름 그린은 ‘50가지 예수 모습’이란 책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50가지로 표현하였다. 그렇게 다양한 얼굴을 한 까닭은 복음서에서 느낄 수 있는 예수님의 이미지가 그만큼 다양하고, 또 사람마다 예수님에 대한 경험이 각별한 때문이다.
사실 모든 사람이 고백하는 예수님은 똑같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표현하는 예수님은 사람의 얼굴만큼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네 권의 복음서 말고도, 수 천 종류의 예수전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지금도 내 주변에서 좋은 믿음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예수 전’(傳)을 쓰려는 거룩한 욕심을 부린다.
그러기에 누가의 복음서 프로잭트는 오늘도 계속되기 마련이다. 오늘 우리시대가 처한 환경과 예수님의 증인으로 존재하는 교회가 처한 환경은 지금도 ‘이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요청하고 있다. 그것은 믿음과 실천의 차원이다. 한마디로 진실한 제자 됨이다.
아마 누가가 지금 다시 복음서를 기록한다면 똑같은 긴급함으로, 변함없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를 향해 이야기를 던질 것이다.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 위험을 감수하는 치유, 십자가를 향한 용기 있는 행진, 진리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승리를 증언할 것이다. 누가복음이 오늘 우리를 향해 여전히 감동적으로 이야기하는 배경이다.
이런 목적을 품고 복음서를 기록한 누가는 누구인가? 그는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에 목숨을 걸고 동행했던 동역자요, 비서였다. 본래 누가의 직업은 의사로 알려져 있다. 또 누가는 역사가로서 누가복음 안에 역사적 연대서술과 함께 의미부여를 한다.
특히 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누가는 화가들의 성인으로 불린다. 누가의 서술 방식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상상력 있는 작품을 그리도록 하였다. 스페인의 화가 엘 그레코는 복음서를 쓴 누가를 화가로 그렸다.
복음서를 기록한 4인 가운데 누가는 가장 따듯한 시선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조명하고 있다. 또 가장 연약한 사람들에게 연민의 마음으로 다가서고 있다. 그는 예수님을 가리켜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 이방인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지닌 분으로 설명한다. 그 소외된 자 중에는 여성과 사마리아인이 포함되었다.
누가는 예수님을 페미니스트로 그렸다. 무엇보다 세 차례 반복하여 언급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관심은 당시의 인식으로 볼 때 파격적이다. 과연 오늘 우리가 만난 예수님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사도 베드로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 1:8)라고 말하였다. 그 시대 그리스도인을 향해, 당장 박해와 희생 가운데 인내하게 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후안 아리아스(Juan Arias)의 ‘내가 믿지 않는 하나님’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행여 그 본질을 잊어버린 채, 엉뚱한 신앙행태를 보이고 있음을 자성하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심각하게 오염된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리아스는 왜곡된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역설적인 주장을 통해 진실한 예수님의 정신과 사랑을 회복하려고 한다. 그 역설을 통해 진정한 믿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교리에 갇히고, 형식주의와 매너리즘에 빠진 신앙을 개혁하려는 것이다. 그가 믿지 않는 하나님과 그가 믿지 않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나약이라는 죄악 안에 인간을 붙들어 매어 놓는 하나님. 물질을 죄악시하는 하나님. 사람의 이성과 감정을 빈약하게 만드는 하나님. 카인의 후예들을 계속해서 축복하는 하나님. 전쟁을 정당화하고 축복해 주는 하나님. 특정교회, 특정 품목, 특정 문화, 특정 계층이 자신을 독점하도록 하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은 그가 믿지 않는 하나님이다.
‘사람의 서툰 실수를 보고 미소 지을 줄 모르는 하나님. 사람들에게 개성과 자유를 선사한 일을 후회하는 하나님. 무릎을 꿇고 바치는 기도만을 원하고, 교회 안에서만 만나 주는 하나님.
당신의 창조세계를 위한 임무를 포기하고, 자기 형제자매들의 역사현장에 무관심한 제자들을 양성하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은 그가 믿지 않는 하나님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이런 분이 아니신데, 오늘의 교회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오해하도록 만들지 않았던가?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과 두터운 담을 쌓도록 만들지 않았던가?
3)
예수님은 내게 어떤 의미의 분인가?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한다. 흔히 말하는 교인과 그리스도인(예수쟁이)은 다르다. 교인은 교회와 교리를 믿지만, 예수쟁이는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 교인은 교회에 속하나, 예수쟁이는 세상 속에 존재한다. 교인과 예수쟁이는 같으나 또 다르다. 나는 교인인가? 예수쟁이인가?
한국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야소’(耶蘇) 곧 그런가 ‘야’, 깨어날 ‘소’의 뜻으로 불렀다. ‘의심과 방황에서 깨어나게 하시는 분’ 그 분이 나의 주님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깨어나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세대와 장소,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늘 나와 관계 속에서 느끼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늘 이런 물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 믿음이 늘 성장한다. 내 안에 믿음이 깨어있고, 그 믿음을 남에게 증거 할 수 있다.
며칠 전에 영화 ‘카잔차키스’를 보았다. 보름 전에 개봉했으나 한국 관객이 철저히 외면한 그리스 영화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대표작 중 ‘그리스인 조르바’, ‘미할레스 대장’, ‘최후의 유혹’이 있는데, ‘최후의 유혹’은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의 변으로 찬사를 보냈던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이 1988년에 영화로 만들었다.
로마 카톨릭은 소설 ‘최후의 유혹’을 한때 판금 조치하였다. 여기에서 다룬 그리스도의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 때문이다. 영화도 교회의 반발을 불러 올 만큼 핫이슈였다. 비슷한 시기에 젊은 시절을 보낸 이들은 그의 소설을 통해 더 많은 자유로운 영감을 얻었다.
내 생각에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정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살면서 늘 그들과 씨름한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검은 옷 사제들과 누가 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지 경쟁하는 듯하였다. 아마 작가의 초현실과 공교회의 현실 사이에서 사랑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 갈등했을 것이다. 작가와 교회는 장례식장에서 겨우 화해하였다.
영화를 본 후 후유증으로 작가에 대한 이런저런 검색어를 살펴보면서 위키피디아에서 알맞은 결론 하나를 찾아냈다.
“니코스 카찬자키스는 교회로부터 반기독교도로 매도되는 탄압을 받았어도, 평생 자유와 하느님을 사랑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비록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할지라도 성경은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그리고 우리에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라고 권한다. 누구나 표현을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빛은 예외가 없이 한결같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언제나 간직하고, 고백해야 한다.
색동교회 주제성경인 ‘누가가 그린 예수님’은 올해 40주 동안 계속된다. 수요성경공부를 통해서다. 누구보다 여러분의 참여를 통해 예수님의 모습은 더욱 풍성해 질 것이다.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누가가 그린 예수님을 우리도 내 삶의 자리에서 그리려는 것이다. 우리말로 ‘그리다’는 ‘그리워하다’는 뜻도 있다. 예수님을 그림으로써, 예수님을 사랑하려는 이유이다.
만약 예수님이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내가 예수님의 사랑과 관계가 없다면, 그 때는 분명 신앙의 위기일 것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믿을 때, 그 위기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 믿음의 시작이요 마지막인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풍성함이 있는가? 예수님을 바라보라. 그를 닮아 가는 일, 배우는 일, 믿는 일은 어렵지만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나 내 삶 속에서 ‘참 좋은 예수님’과 만나게 하시고, 그 분을 뜨겁게 사랑하게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서로의 삶의 자리에서 다르게 표현하는 것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지. “니코스 카찬자키스는 교회로부터 반기독교도로 매도되는 탄압을 받았어도, 평생 자유와 하느님을 사랑한 그리스도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