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어지는 선
성경 말씀: 시편 23편; 로마서 12:14-21
요약
선과 악의 혼탁한 세상에 사는 사람은 악으로부터 선을 분별하려 합니다. 따라서 그는 초월적 선을 순수한 사고로 추구합니다. 그러나 선과 악의 혼탁으로부터 선으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성경은 창조된 선으로부터 선과 악의 혼탁으로 가는 타락을 서사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상은 선하지만, 타락된 사람이 사는 세상은 선과 악의 혼탁입니다. 성경은 선으로부터 선과 악의 혼탁으로 가는 길을 타락으로 보입니다. 타락된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길이 없기에, 선과 악의 혼탁으로부터 선으로 향한 길은 없습니다. 선과 악의 혼탁한 세상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선으로 가는 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 불러집니다.
판단의 선
성령님의 열매로 선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에서 다루어집니다. 선은 하나님과 함께로 맺어지는 것으로 말해집니다. 언약의 삶에서 선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함께로 맺어지는 내용으로 말해집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은 선합니다.
그에 대조되어, 세상의 선은 있는 상태로 판단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을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혜택은 상반될 수 있음으로, 그들은 초월적 영역에서 선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초월적 영역에서 선도 있는 상태로 말해집니다.
사람은 세상을 사는 한, 세상에 있는 것에 대해 좋음이나 나쁨을 의식합니다. 그는 세상에 속하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것과 상호작용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에 대해 좋음이나 나쁨을 의식합니다. 선과 악은 혜택의 시각에서 주위에 있는 것에 대해 의식됩니다.
혜택으로 의식되는 선은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객관적 선이 말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객관적 선은 다루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인 것 자체가 주관적인 것의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초월적 사고의 선이 다루어지게 됩니다. 어떤 것이 선이라고 말해지면, 선의 의식이, 그것이 선인지 판단되기 전,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의식되는 선의 뜻이 탐구되게 됩니다. 그런 탐구의 시도는 사고의 순수한 초월적 영역으로 갑니다.
구체적 경우가 선이냐 아니냐 판단되기 전, 선의 의식의 근거가 찾아져야 합니다. 그 근거는 순수한 사고의 영역에 깔려있습니다. 선의 의식이 선이 판단되기 전 누려지는 점에서, 선의 의식이 탐색됩니다. 사람들이 선의 의식을 갖지 않으면, 선과 악을 분별하지 않고 살 것입니다.
선의 판단은 상대적이라 하더라도 선의 의식은 상대적일 수 없다는 견해를 갖는 것이 초월적으로 선을 탐구하는 뜻입니다. 물론 어떻게 초월적 이상의 선이 실제의 영역에 명시적으로 적용될지는 의문입니다. 그렇지만 선의 의식을 탐구하는 점은 뜻이 있습니다.
사람은 선의 기본 의식 없이 선의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사는 사람에게 선의 의식은 전제됩니다. 선과 악이 혼탁 된 상태 가운데 선은 가르쳐지게 되지 않습니다. 선의 표본이 보이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알게 되지만, 선은 알게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것이 좋은지 아닌지 판단되기 위해 선의 의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어떤 것이 명목상 선이라고 말해지더라도, 선의 의식은 누려집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혼탁한 세상에 그들의 선택으로 산다고 말해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든 선한 것을 추구하기 위해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쁘다고 여겨지는 것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선한 것이 알게 되지 않더라도, 선택 되는 것은 그것의 좋음의 의식을 수반합니다.
이루어지는 전
성경에 선의 출발점은 이와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하면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은 하나님께 보이기에 좋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선이 내재됩니다. 어떻든 창조의 뜻은 선을 전제합니다. 아무도 나쁜 것이 창조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창조는 언약의 시각으로부터 전개됩니다. 언약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 그분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그분 말씀으로 이루시니, 세상은 그분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은 좋습니다.
예수님은 한 분, 즉 하나님 외에 아무도 선하지 않다고 하십니다(막 10:18). 언약의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언약의 삶을 사는 언약의 백성은 기본적으로 선을 그들의 하나님의 선으로 의식합니다. 그들은 선을 자신들의 생각으로 탐구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선하신 언약의 하나님이 그분 말씀으로 이루시는 것은 선합니다. 즉 언약의 삶은 선합니다. 창조된 세상에서 언약의 삶을 사는 것은 선합니다. 언약의 백성은 기본적으로 선한 삶을 삽니다. 선은 언약의 삶을 사는 언약의 백성에게 전제됩니다.
언약의 백성은 선에 근거한 언약의 삶을 삽니다. 그리고 그들의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된 좋은 세상입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처럼 선과 악의 혼탁 된 세상을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 같이 선을 항시 판단하거나 혹은 틀린 길을 택해서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습니다.
언약의 삶은 선에 근거해서 선으로 펼쳐집니다. 언약의 선은 함께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함께의 선은 판단되지 않고 이루어집니다. 언약의 삶 자체는 하나님의 백성과 그분 함께로 이루어집니다. 언약의 삶은 하나님과 함께로 선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에 하나님을 선하다고 말해집니다. 하나님을 서사하는 내용은 언약의 함께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함께로 말해집니다. 이 경우 선은 하나님에 대한 서술이 아닙니다. 선한 언약의 삶을 사는 언약의 백성은 언약의 하나님을 선하시다고 고백합니다.
언약의 선이 함께로 선이라는 건 바울의 로마서에서 잘 보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6-28).
언약의 삶에 성령님의 열매로 선은 함께로 펼쳐집니다. 언약의 삶은 함께하기에 선합니다. 세상 삶에 이 함께의 선은 말해질 수 없습니다. 선과 악의 혼탁한 세상에, 선을 악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혼탁한 세상에서 함께는 무의미합니다.
언약의 삶은 성령님에 의해 인도되기 때문에, 선의 열매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맺어집니다. 이 경우 선은 영적으로 분별되어 함께의 삶으로 펼쳐집니다. 판단이나 추구되는 선이 아닌 인도되는 선은 성령님에 의해 인도되는 새 언약의 삶으로만 보입니다.
언약의 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이 진술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선한 목자로서 죽음인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선하다고 말해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선하다고 말해질 수 없습니다. 사람을 죽음에 처형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선하다고 말해질 수 없습니다. 물론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의 율법을 따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보이는 것은 선이 아닌 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세상의 시각으로부터 선으로 보아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약의 시각으로부터 선으로 보아지게 됩니다. 언약의 선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이루어짐으로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선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점에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그분의 이어지는 십자가 죽음을 언약의 시각에서 보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의 뜻의 이루어짐일 것을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 기도에 따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 언약의 이루어짐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그분 목숨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양들은 언약의 삶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언약의 삶의 이루어짐을 위해 예수님은 그분 목숨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언약의 삶을 위해서입니다. 언약의 삶의 이루어짐이 선하니, 예수님의 죽음 또한 선합니다.
여기 다루어지는 선은 언약의 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선은 언약의 선을 떠나 다른 뜻으로 도입되는 선으로 말해질 수 없습니다. 즉 선은, 하나님의 뜻과 언약의 백성이 설정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개인의 죽음을 다루는데 말해질 수 없습니다.
개인의 죽음은 다른 이들에게 희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으로 다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 희생 또한 상황적으로 말해집니다. 즉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은 희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그런 희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언약의 십자가입니다. 세상의 십자가로 다루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상 삶에 다루어지면, 단지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해집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세상의 혁명을 도모해온 많은 혁명가들 가운데 한 분으로 보입니다.
언약의 선은 개인의 존속으로 말해질 수 없습니다. 개인들로 전개되는 삶은 언약의 삶이 아닌 세상 삶입니다. 언약의 삶은 개인들의 목숨의 존속으로 이루어지게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이 점을 직접 보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려 하는 한, 그는 십자가로 향해진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언약의 선으로 새로운 시각을 엽니다. 즉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바라보지 않으면, 언약의 선에 근거될 수 없습니다. 즉 그는 선의 근거에서 살 수 없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에 의해 인도된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삶을 삽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선을 추구하기보다 선으로 인도되게 하옵소서.
저희로 선이 열매 맺어지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영에 의해 인도된 저희로 선이 열매 맺어지게 하옵소서.
저희로 선이 세상에 맺어지게 하옵소서.
선한 목자 예수님이 세상에 보이신 선이
선한 목자 예수님을 따르는 저희로 세상에 맺어지게 하옵소서.
교회로 맺어지게 하옵소서.
교회로 펼쳐지는 선이
구원의 선으로 세상에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