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어느날, 전북 완주 이서면 반교리 야트막한 구릉(해발 26~42m)으로 이뤄진 갈동 현장. 전주시 관내 국도 우회도로(17.5㎞) 건설을 위해 지표조사를 벌이던 호남문화재연구원(원장 윤덕향) 조사팀의 고민은 컸다. 지표조사 결과 아무런 고고학적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유적 없음’의 결론을 내리고 일사천리로 도로공사를 진행시켜도 무방했다. 그러나 ‘뭔가 감을 잡았던’ 조사단은 고심 끝에 ‘선(先)발굴’의 결단을 내렸다.
그런데 조사단의 그 ‘감(感)’이 엄청난 고고학적인 성과를 잉태할 줄이야. 지난 7월부터 본격발굴에 돌입한 김건수 연구원 학예실장·한수영 책임조사원은 그야말로 ‘행운의 고고학자’가 되었다.
“처음엔 그저 평범한 돌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살살 파보니 그야말로 깜짝 놀랄 ‘물건’이지 않겠어요. 말로만 듣던 세형동검 거푸집을 직접 보다니요. 얼마나 황홀한지…”. 고고학계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렇게도 풀 수 없었던 고대사 수수께끼를 해결할 단서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감’으로 찾아낸 청동기 대량생산의 역사=공개된 청동 거푸집 1쌍. 거푸집은 용범(鎔范) 혹은 합범(合●)이라고도 하는데 두 개를 붙여 쇳물(청동물)을 부어 청동검(靑銅劍)을 제작하는 틀이다. 이들은 납석돌(蠟石·석필 같은 돌)로 만들어 졌는데, 움무덤(土壙墓)에서 수습된 것이다. 왜 고고학계가 흥분하는가. 바로 이번 거푸집의 발굴이 ‘기록부족, 자료부족증’에 시달려왔던 한국 청동기 문화를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발굴된 거푸집에서 만들어 진 단검은 검의 몸체가 좁고 가늘다고 해서 세형동검(細形銅劍)으로 일컬어진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대부분 확인되고 있으며 위로 만주, 아래로는 일본의 규슈지방에서도 출토 예가 보고되고 있다. 그래서 이 동검을 한국식 동검(韓國式銅劍)이라고도 한다. 이 단검은 우리나라에서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 전후까지 제작·사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단검을 대량제작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틀, 즉 거푸집이 여기 저기에서 발견되었다는 점. 지금까지 한반도내에서 확인된 청동 거푸집은 평양 장천리·용인 초부리·전남 영암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신고품이거나 출토지가 불분명하다는 결정적인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전(傳)영암 출토 거푸집’의 취약점=특히 영암 출토로 전(傳)하는 거푸집은 그 종류가 다양하지만, 학술적인 조사발굴을 거치지 않은 약점을 안고 있다. 이 영암 출토 청동거푸집 세트는 6쌍으로 된 12점과 한쪽만 남은 1점, 반쪽만 남은 1점 모두 14점으로 되어 있다. 이 거푸집 세트로는 청동단검·청동꺾창·청동창·낚시바늘·청동침·청동소형도끼·청동끌 등 8종 24점의 청동제품을 만들 수 있다. 결국 이 거푸집 세트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청동제품 모두를 제작·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다량의 거푸집이 숭실대학교에 소장되게 된 과정을 보면 무척 흥미롭다. 1960년대 초 국립박물관 신참 학예사였던 이난영 선생의 회고.
“한 골동품상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아와서 이 거푸집 세트를 내놓으며 ‘사라’고 했어요. 김원룡 연구과장·윤무병 연구관 등 선생님들은 안달이 나 견딜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당시 박물관에는 유물구입비가 한푼도 없었어요. 그러니 피눈물을 머금고 돌려보냈을 수밖에…. 기가 찰 노릇이었죠”. 말하자면 국립박물관이 돈이 없어 이 귀중한 물건들을 사지 못했다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
◇1급 유물과 골동품의 차이는?=그랬던 거푸집 세트는 한동안 행방이 묘연했다가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설립자인 고 김양선 박사의 손에 돌아갔다. 안타까워하던 김원룡 선생 등은 “해외로 빠져나가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는 후문이다. 당시 골동품상 장모씨로부터 이 거푸집 세트를 구입한 김양선 박사는 구입시 골동상으로부터 발견한 장소와 발견한 사람의 주소와 성명을 알려고 했으나 대답을 얻지 못했다. 다만 전남 영암군 학산면 독천리라는 곳에서 출토되었다는 얘기만 듣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출토지를 확인하기 위해 골동상이 알려준 곳으로 가서 수소문했으나 헛수고였다.
결국 출토지는 확인하지 못하고 김박사는 세상을 떴다. 이 청동 거푸집은 이렇게 되어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었고, 다만 영암 출토로 전한다는 뜻으로 ‘전(傳)영암 출토 청동거푸집’이라 했다. 비록 출토지가 명확하지 않아도 우리나라에서 청동주조기술로 청동제품을 만들었음을 증명하는 물증이 되고도 남았기 때문에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은 1986년 국보 제231호로 우선 지정했던 것이다. 고고학에 있어서 어떤 유물이라도 그 유물 자체의 학술적인 가치는 출토지가 명확하고 어떠한 조건, 즉 무덤 혹은 집터 또는 그 외의 다른 시설에서 출토되었는가, 그리고 어떠한 유물들과 같이 출토되었는가가 알려져야만 학술적인 생명력을 갖게 된다. 그걸 고고학계에서는 1급 유물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학술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것은 파편 1점도 유물이 되지만 발굴조사 되지 않고 도굴된 것이거나 골동상에 거래되는 모든 문화재는 말 그대로 골동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항상 마음에 걸리는 것이 바로 정확한 출토지를 아는 것. 최초 수집자인 김양선 박사 역시 생전에 모든 노력을 쏟았으나 결국 확인하지 못하고 타계했다. 뒤를 이어 제자인 숭실대학교 임병태 교수 역시 스승의 뜻을 따라 출토지 확인 조사를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그 역시 세상을 떴다. 이분들은 그만큼 이 거푸집에 대해 학술자료로서의 생명력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재활용의 지혜’ 실천한 2,200년 전 우리 조상들=그랬기에 이번 청동단검·청동꺾창 거푸집 발견은 가히 혁명적인 성과일 수밖에 없다. 이 거푸집이 갈동의 청동기 후기 움무덤, 즉 토광묘(土壙墓)의 부장품으로 출토된 것은 우리나라 고고학적 발굴사에 있어서 최초의 일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나라에 청동기 제작 기술을 가진 집단이 존재했음을 ‘고고학적 발굴’로 분명하게 증명하게 된 것이다. 출토지(전북 완주)와 유구성격(토광묘), 그리고 출토상태(한 개는 서있고, 한 개는 넘어진 상태)와 공반 유물까지 완벽한 구비된….
이 거푸집은 좁은 단검, 소위 세형동검(細形銅劍)을 만드는 한 쌍으로 된 합범이지만 한쪽의 뒷면에 청동꺾창(청동과·靑銅戈·ㄱ자 형태로 나무에 끼워 낫처럼 말에 탄 적을 낚아 베는 무기)의 한쪽 틀이 새겨져 있음이 확인됐다. 말하자면 청동꺾창은 반쪽의 틀만 발견된 것이다. 이 이유는 발굴자의 견해와 같이 청동꺾창의 합범(2개의 틀을 맞춘 거푸집)이 먼저 만들어져 사용되다가 한쪽이 제작과정에서 파손되고 난 후 나머지 완전한 한쪽을 세형동검 거푸집으로 재사용하게 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틀을 제작하는 돌(납석)을 구하기 어려웠거나, 아니면 규격자체가 세형동검 제작에도 딱 맞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다시 다른 용도로 재사용한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