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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시 '청풍호 이름찾기 범시민운동본부' 는 10월 10일부터 제천시청 홈페이지(www.okjc.net) 내 팝업창에 <하나뿐인 청풍호 이름찾기 10만인 서명운동>을 운영한 결과, 1주일만에 200 여 명이 동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청풍호 이름은 반드시 찾아야 한다" 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또한, 운동본부는 15일부터 열린 '2007제천한방건강축제' 행사장에서 일반시민들을 대상으로 서명 운동을 펼치고 1,000명으로부터 서명을 받는 등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운동본부는 앞으로도 다각적인 홍보와 서명운동으로 10만명의 서명을 받아 청풍호의 명칭을 되찾아 청풍명월의 고장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한편, 명칭 자체가 브랜드인 충북의 명맥을 상실한 과오를 바로잡고 미래지향적인 제천과 충북의 상생 발전을 도모할 방침이다.
아울러 '2008년 선상해맞이 행사' 와 시 전역에 청풍호안내 시설물 등을 설치하여 청풍호를 찾는 전국의 관광객에게 적극 홍보할 게획이다.
'청풍호 이름찾기 범시민운동본부' 는 위원장인 제천문화원장을 비롯해 시도의원, 정치인, 변호사, 학계, 시민단체, 공무원 등 50 여명으로 구성되어 위원장 1명, 2명의 부위원장 아래 기획분과, 대외협력분과, 소송청원분과, 홍보분과 등 4개 분과와 실무추진단 4명을 두고 있다.
한편, 충주호의 명칭은 법적근거는 없으나, 하천 부속물로서 충주댐 건설시 완료고시문에 충주호라 기재되었고, 통상적으로 댐 이름과 같이 사용하고 있는 실정으로 형평에도 어긋나고 있다.
제천시는 충주댐 수몰로 인해 전체면적의 64%(충주 27.5%), 수몰 인구는 18,693명으로 48.3%(충주 18.6%)를 차지하여 수몰로 인한 면적과 인구면에서 최다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주호' 로 불리는 불이익을 감수하고 있다.
1.청풍호수
청풍명월의 본향, 청풍호(제천에선 충주호를 청풍호로 부름)는 산과 계곡, 호수와 하늘이 어우러진 자연의 멋과 동양 최대 인공호수, 문화재단지, 사극 촬영장 세트, 각종 리조트 등 인공의 멋이 알맞게 버무려져 있다. 또한 계절마다 꽃, 신록, 단풍, 물안개, 설경 등의 독특한 빛깔과 자태로 이색적인 풍광을 뽐내니 이곳을 대표적 4철 기행지라 칭해도 손색이 없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굽이굽이 펼쳐진 잔잔한 호수에서 평상심을 되찾는 주말여행은 더없이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청풍호는 1985년 충주시 종민동과 동량면 사이의 계곡을 막아서 조성한 충주 다목적댐으로 인해 생겨났다. ‘내륙의 바다’로 불릴 만큼 담수량이 큰 호수로 댐 조성 후 충주, 제천, 단양 일대의 2개동, 15개 읍면, 총 81개리가 수몰되었다. 총길이 97.2km에 면적 67.5km2, 높이 97.5m, 길이 464m, 저수량 27억5000t의 거대한 호수이다.
청풍호를 끼고 월악산, 금수산, 감악산, 구학산, 비봉산, 용두산 등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청풍호반의 수려한 절경은 한폭의 동양화를 눈 앞에 마주한 듯하다. 물결이 너울거리는 청풍호반과 맞닿은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를 가다 보면 마치 아름다운 풍경화 속으로 미끄러지듯 신비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청풍문화재단지 아래에 위치한 청풍나루에서 유람선을 타고 장회나루로 가는 길에선 비봉산, 취적대, 학현계곡, 망월산 등 단양팔경에 취하며 선상관광의 극치를 맛볼 수 있다. 또한 청풍호리조트에는 각종 놀이기구와 수상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다양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130리 뱃길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시원스레 물줄기를 뿜어올리는 동양 최대 162m 높이 수경분수가 연출하는 장관이다.
충주댐 담수와 더불어, 청풍면은 27개리 중 25개 마을의 1,665가구가 수몰되고 9,514명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났다. 청풍호 주변의 수려한 절경이 유독 아름다운 것은 이처럼 실향민의 애환이 곳곳에 서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2.청풍 한벽루
종 목 보물 제528호
지 정 일 1971.01.08
소 재 지 충북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산6-20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고려 충숙왕 4년(1317) 당시 청풍현 출신 승려인 청공이 왕사가 되어 청풍현이 군으로 올려지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객사의 동쪽에 세운 건물이다. 원래 위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으나 충주댐을 세우면서 1983년 청풍면 물태리로 옮겨 세웠다.
구조는 앞면 4칸·옆면 3칸의 2층 누각과 앞면 3칸·옆면 1칸의 계단식 익랑건물이 이어져 있다.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하였으며 사방에 난간을 둘렀다. 건물 안에는 송시열·김수증의 편액과 김정희의 ‘청풍한벽루’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밀양의 영남루(보물 제147호), 남원의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함께 본채 옆으로 작은 부속채가 딸려 있는 조선시대 누각 건물의 대표적인 예이며, 세 건물 가운데 가장 간결하고 단아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3.장락리 칠층모전석탑
종 목 보물 제459호
지 정 일 1967.06.23
소 재 지 충북 제천시 장락동 65-2
시 대 통일신라
모전석탑이란 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쌓은 탑으로, 흙벽돌을 쌓아 올린 전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탑이라고도 한다. 탑이 서있던 절터가 논밭으로 변하여 절의 규모는 알 수 없고, 7층에 이르는 거대한 이 탑이 주위를 압도하듯 버티고 서 있다.
회흑색의 점판암을 사용한 탑으로, 탑을 받치는 기단만은 점판암이 아닌 자연석으로 1단을 마련하였으며, 그 위로 벽돌로 이루어진 7층의 탑신을 올렸다. 탑신은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셔두는 곳으로, 1층의 네 모서리에는 점판암 대신 화강암을 다듬은 기둥을 세워 그 모습이 특이하다. 또한 남쪽과 북쪽면에 사리를 두는 감실(불상이나 사리 등을 모시는 방)을 설치하여 문을 달아 놓았는데, 현재 남쪽의 것은 없어졌다. 1층의 남쪽과 동쪽면이 몹시 부서져 있는데 이러한 피해는 2층의 지붕돌까지 이르고 있다. 각 몸돌을 덮는 지붕돌은 재료가 벽돌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경사면 위아래 모두 층급을 두었으며 처마도 짧고 수평을 이룬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에는 아래위로 구멍을 뚫어 풍경을 달도록 하였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머리장식이 없어지고 장식받침인 노반만이 남아 있는데, 그 윗면 한가운데에 동그란 구멍이 있고 구멍둘레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1967년 무너지기 직전에 탑을 해체하여 보수했는데, 7층 지붕돌 윗면에서 꽃무늬가 조각된 청동조각이 발견되어 혹 탑의 머리장식이 아닐까 한다.
탑신 전체에는 표면에 회를 칠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주목된다. 만드는 형식이나 돌을 다듬어 쌓아올리는 수법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4.청풍 석조여래입상
종 목 보물 제546호
지 정 일 1971.07.07
소 재 지 충북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산6-20
시 대 통일신라
충주댐 건설로 수몰된 청풍면 읍리에서 현재의 청풍강 옆 대광사 입구로 옮겨진 이 불상은 전체적인 조각양식을 볼 때 10세기 무렵의 작품으로 보인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매우 작아서 우뚝해 보이며 사각형의 얼굴은 후덕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가늘면서도 두툼한 눈, 넓적한 코, 뚜렷한 인중은 자비로운 부처의 풍모를 잘 나타내고 있다. 두 귀는 양 어깨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고 목에는 3개의 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옷주름이 두껍게 처리되어 신체의 윤곽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다. 허리에는 치마를 묶은 띠매듭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아래로는 U자형의 주름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흘러 내리고 있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서 손가락을 구부렸고, 왼손은 늘어뜨려 손가락을 펴서 밖으로 내보이고 있다. 불상으로부터 3m쯤 떨어진 곳에 방치되어 있는 원래의 대좌는 8각의 연화좌로 각 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이 석불입상은 당당한 어깨, 양감있는 표현 등에서 통일신라 불상의 힘을 느끼게 하고 있지만, 목의 형식화된 주름이라든지 비사실적인 손의 표현과 괴체화된 신체 등을 볼 때 고려시대의 작품이 확실하다.
5.신륵사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1296호
지 정 일 1999.06.23
소 재 지 충북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 803-5
시 대 고려시대
신륵사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하나씩 본떠 새겼고, 탑신에서도 역시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층마다 4단이며, 빗물을 받는 낙수면은 경사를 약하게 두었고, 네 귀퉁이에서 약간씩 치켜 올려진 상태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지붕모양의 장식) 등이 올려져 있으며, 머리장식부의 무게중심을 지탱하기 위한 쇠꼬챙이(찰주)가 뾰족하게 꽂혀 있다.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는 고려 전기의 탑으로, 특히 이처럼 머리장식이 잘 남아있는 예는 드문 편이며, 각 부재를 만든 솜씨도 세련되어 보인다. 1981년 탑을 해체하여 복원할 때 기단 내부에서 흙으로 빚은 소형 탑 108개와 사리함 조각이 발견되었다.
6.금남루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호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북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산6-20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순조 25년(1825)에 부사 조길원이 세운 관청의 정문으로 고종 7년(1870)년에 고쳐 지었고, 1985년에 청풍문화재단지 안으로 옮겼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1층은 3개의 문으로 되어있는데, 가운데 문은 부사가 출입했고 양쪽 문은 평민이 출입했다고 한다. 2층에는 난간을 둘렀으며 사방이 탁 트여 멀리있는 적의 동정을 살필 수 있도록 하였다. ‘도호부절제아문’이라는 현판은 건물을 세울 당시에 부사 조길원이 썼다고 한다.
7.청풍 금병헌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북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산6-20
시 대 조선시대
집회 및 집무를 처리하던 동헌이라고 전해지는 이 건물은 명월정이라고도 한다. 조선 숙종 7년(1681)에 처음 지어졌으며, 영조 2년(1726)에 다시 옮겨 짓고 이름을 금병헌으로 바꾸었다. 광무 4년(1900)에 전체적으로 보수하였는데,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198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앞면 6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건물의 오른쪽은 대청이고 왼쪽은 온돌방이다. 죄인을 가두어두던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조선 말기에 없어졌다.
8.청풍 팔영루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북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산6-20
시 대 조선시대
옛 청풍부를 드나드는 관문이었던 누문으로 고종(재위 1863∼1907) 때의 부사 민치상이 청풍 8경을 노래한 팔영시로 인하여 팔영루라 불리게 되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부사 이기홍이 현덕문이라고 한 자리에 고종 7년(1870) 부사 이직현이 다시 지었다.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1983년 지금 위치로 옮겨 지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의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안에는 마루를 깔고 난간을 둘렀다.
9.청풍향교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4호
지 정 일 1980.01.09
소 재 지 충북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산6-5
시 대 고려시대
훌륭한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며 지방백성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던 지방국립교육기관이다. 고려 충숙왕(재위 1313∼1330, 1332∼1339) 때 처음 지었다고 하는데, 원래 물태리에 있던 것을 조선 정조 3년(1779)에 교리로 옮겼다가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
지금은 대성전과 명륜당, 동재와 서재, 내삼문 등이 남아있다.
건물의 배치는 교육공간이 앞에, 제사공간이 뒤에 배치된 전학후묘의 형식을 하고 있다.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학생들의 생활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교육공간을 이루고 있다. 뒤쪽으로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어 제사공간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서적·노비 등을 지급 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기능은 없어지고 제사기능만이 남아있다.
10.제천향교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5호
지 정 일 1981.12.26
소 재 지 충북 제천시 교동 86
시 대 고려시대
고려 공양왕 1년(1389)에 지어진 제천향교는 원래 마산 서쪽에 있던 것을 선조 23년(1590)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쇠퇴하였다. 그 뒤 순종 융희 1년(1907)에 대성전과 명륜당이 불에 타 없어졌고 1922년에 대성전을 다시 지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명륜당·동재·서재 등이 있고 그 밖에 부속건물이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제사 공간을 형성하는데 중심이 된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공부하던 곳으로 배움의 공간을 이루며, 그 앞에 학생들이 거처인 동재·서재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 받아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 2차례에 걸쳐 제사만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