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둘기들이 늦가을 오후 햇뼡에 풀씨를 쪼고 있다.
"나 집에 가면 집볼수 있어!" 요양원 90세 할머니의 절규
누구 잘못인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늙음과 죽음 그리고 요양원 입소는 나이든 사람들의
시대적 필연인가
우리 젊은 세대는 무엇을 어떻게 볼것인가?
요즘 자주 연세든 노인분들이 눈에 띤다
그들의 호소가 남일이 아닌 내 일로 다가선다.
부처님께서 그 토록 말씀하신 '생노병사'
늙음이란 이 사바에 태어났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어느 누가 자신을 낳고 길러준 노부모를 요양원에
보내고 싶었으랴. 시대는 핵가족화 되어 더 이상 노쇠한
한 부모를 봉양키 어려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노모의 호소를 뒤로 하고 눈물 지으며 떠나는
60대 아들은 회한과 한탄,고뇌와 슬픔을 금할 길 없었다
날씨가 싸늘해 졌다
세월도 한 점 멈춤없이 비정하게 다가섰다 매몰차게
떠나가니 내 머리는 순간에 백발이 성성한 노년이
되어 있다. 그토록 가볍게 보던 지난 노년들에 대한
시각 '아이고,나이들면 노인 스스로 알아서 판단해
처신을 해야지 뭐!' 하며 가볍고도 단순하게 치부했던
개념이 이미 내 코앞에 닥친 것이다
순수히 수용할 것인가,더욱 용맹심으로 의지를 재충전
해 새로운 다짐과 자기약속을 이어갈 것인가?
늦가을 햇뼡 양지 바른 둔덕에 비둘기들이 가을 풀씨를
쪼고 있다. 먹는다는 것,걷는다는 것,스스로 멀쩡한
정신에 스스로 자기삶을 영위하는 일은 거룩하다
문제는 제대로 한번 즐거운 한 시절도 없이 늙음이
닥쳐 걸을수도,가스를 켤수도 없는 심신 노약의 시간이
속히도 온다는 것이다.심신 쇠약의 초기,도무지 자신의
노년 처지를 받아들일수 없는 분노와 울분,그리고 쇠잔
해 누워 깊은 공상의 나락으로 접어드는 시간 ........
이제 스스로 화장장 장례식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세대가 되었다. 누워 있거나 힐체어에 있는 노인을
돌봐줄 인력 자체가 없어진다.신생아 출산의 절대적
감소속에 우리의 노년을 돌봐줄 중장년의 돌보미 자체
가 없다. 이제 우리는 5년 혹은 7년후에 내 거동이
불편할 시 스스로 스스로 기어가든 앰블런스에 실려
가든 이미 공증해 놓은 '사망 확약서'라는 서류를 들고
화장장 사무장에게 내밀며 안락사의 주사를 한대 맞고
1분후 쓰러질 육신을 보듬고 화장장 불굴로 기어 들어 가야 한다.화덕에 움츠려 몽롱할 시 스스로 화장 점화
스위치를 올려야 한다. 인력과 도우미가 필요하다고?
죽음에 어찌 거룩함이 있을 것이며,죽음에 어찌
초라함이 없을 수 있으랴.
다만 지금,여기서 죽음을 직시하며 아미타부처님,지장
보살님의 가피를 구해 심신의 안락과 일심삼매를 득해
야 한다.부처님께서 해탈법을 주창하셨으니
평상시 심신의 공덕 즉 염불과 108배,일심삼매와 보살
공덕을 쌓아 '오고 감'에 자유로운 기도가피를 입어야
한다. '생사불이'라는 가르침을 되새겨 저 요양원 노모의
호소가 결코 비루하고 슬픈 소리가 아닌 성스러운 우리
선대들의 피눈물 묻은 호소임을 새겨 더욱 자기정진의
꼬삐를 틀어 쥐어야 할 것이다.
"나 집에 가면 집볼수 있어,여기 요양원 답답해 죽겠어
나~ 나 집에 가면 집볼수 있어!"
늦가을 하늘이 연회색 구름으로 뒤덮혀 있었다
나는 공원 모퉁이를 시간 반 서성이며 누운 해가 희미한
서녘을 보다 풀린 다리를 끌며 내려왔다.
불기 2567.11.11 06:06
노부부가 가을 벤치에 앉아 싸 온 도시락을 풀다
관세음보살님 그리고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법무 -대바라
대전십무중 두 연인의 사랑을 풀어 담은 '계족산 노을'
공주 마곡사 지장전 가을 단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