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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 내 장래 희망은 아나운서였다. 사실 ‘장래 희망’과 ‘아나운서’ 둘 다 잘 모르는 단어였으므로 엄마를 비롯한 주변 어른들에게 주입당한 것이 분명했다. “유진이는 아나운서 하면 잘할 거야.” 설명을 들어보니 제법 폼나는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뭔지도 모르는 것치고는 초등학교 시절 장래 희망은 꽤 오래 유지되었다.
중학교 때 내 꿈은 여느 또래들처럼 가수로 바뀌었다. 가수는 아나운서보다 개연성이 있었다. 어른들 증언에 따르면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무대를 그렇게 좋아했단다. 할아버지가 틀어놓은 뉴스 오프닝 음악이 흘러나오면 무조건 몸을 흔들었다던 그 시절 나는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아기였다. 유치원 때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인형극 재료를 만들어 반 친구들 앞에서 극을 올렸고, 교회 찬양팀이나 크리스마스 공연에서 솔로를 도맡았다. 어린 나이에 음악으로 성공한 보아나 지드래곤을 보면서 왜 우리 엄마는 나를 데리고 오디션을 보러 다니지 않았는지 진지하게 원망했던 시기도 있었다. (엄마 고마워.)
노래를 꽤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같은 반에서 나보다 노래를 훨씬 잘하는 친구를 만났다. 내가 듣기에도 너무 잘했던 그 친구에게 겸허히 패배를 인정하고 얼마 안 있어 내 꿈은 싱어송라이터로 우회되었다. 나는 그래도 피아노도 치고 기타도 치고 노래도 쓸 줄 아니까. 노래 자체로는 2등이어도 경쟁력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당시 ‘싱어송라이터’라는 개념이 유행했던 것도 한몫했다.
내가 알던 세계에서 노래 순위가 3등, 4등, 5등…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면서부터 내 꿈은 그냥 작곡가로 후퇴했다. 제일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으면 안 된다더라는 지혜로운 말에 설득된 것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다니던 음악 학원에서 보컬보다 작사와 작곡에서 훨씬 더 많은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 시기를 지나며 내게는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다. 가사로 쓰고 싶은 좋은 소재나 괜찮은 멜로디가 떠오르면 바로 핸드폰을 켜 메모장에 쓰거나 녹음했다. 괜찮은 아이디어라 생각했던 것들이 몇 분만 지나도 기억에서 휘발되는 경험을 몇 번 한 후에 생긴 습관이었다. 아무리 확실하고 강력한 아이디어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렇게 나를 떠난 가사와 멜로디는 어디로 가는 걸까, 아까웠다. 아까운 만큼 이 꿈에는 진심이었다.
정말 진심이었다. 생각보다 오래가지 못했을 뿐. 제대로 배우지 않았을 때는 ‘배운 적도 없는데 제법 잘하는 사람’이었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점점 더 그다음 단계로 올라가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내가 어떤 것을 못해서 더욱 연습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냥 잘하는 것만 하고 싶었다. 조금 한다고 해서 실력 향상이 바로 보이지 않는 지루한 연습이나 화성학 공부보다 피아노를 뚱땅거리며 노래나 하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 어떤 날은 학원에 가서 종일 부르고 싶은 노래만 실컷 부르다 온 적도 있었다. 당연히 실력은 늘지 않았고, 후퇴와 우회에 강했던 나는 ‘대학교는 일반 학과에 가고 음악은 따로 하라’는 주변 어른들 말에 어쩔 수 없이 넘어간 것처럼 음악 입시를 포기하고 일반대에 진학했다.
대학교에 다니면서도 계속 노래를 썼지만 상황은 비슷했다. 나는 계속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만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들인 시간에 비해 ‘짜치는’ 나의 실력이 싫어졌다. 음악 앞에서 나는 초라해졌고, 음악은 듣기도 싫은 것이 되었다. 노래가 되지 못하고 메모장 어딘가에 묻힌 단어들처럼, 어느 순간 작곡가로 살고 싶다는 내 꿈도 다 쓴 일기장 여기저기 흩어져 방구석에 처박혔다. 가끔 사람들이 나와 함께 내 꿈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냥 슬쩍 웃고 말았다. 그때쯤부터 슬슬 가세가 기울기 시작해 수입이 불확실한 음악에 허송세월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꿈으로부터 도망치는 내 마음을 조금 편안하게 해주었다.
꿈은 돌아오지 않았다. 바라던 바였다. 생각해보면 늘 짝사랑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음악을 그렇게 잘하던 것도 아니었다. 정직하게 노래 부를 줄은 알았지만 기교가 부족했고, 멜로디와 가사는 좀 썼지만 연주나 편곡에 자신이 없었다. 이 반쪽짜리 재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 알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인사치레로 하는 “유진이 음악 잘하지 않아?” 같은 말을 들으면 매번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기 객관화에서 비롯한 열등감이 연습하게 만드는 에너지원이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애매한 재능에 감염돼, 한계에 부딪혔을 때 노력하여 극복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탓이었다.
이착륙을 반복하는 고장 난 비행기
중학교 때까지는 그럭저럭 뭐든 잘하는 애였다.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어른들은 나를 칭찬했다. 가끔 못하는 것들을 마주쳤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못하는 것은 조금만 노력하면 꽤 잘하게 되었고, 안 되면 안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외고 입시에 실패했다. 결과가 나온 날, 엄마는 나를 위로했지만 나는 내가 불합격할 줄 알고 있었다. 공부할 내용이 조금씩 어려워지면서, 나는 열심히 노력했지만 붙을지 안 붙을지 모르는 상황 대신, 재능은 있지만 노력을 안 해서 불합격하기로 진작에 결정을 내렸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힘들면 노력하는 방법을 몰랐다.
솔직히 고등학교 때 음악 입시 준비를 시작한 것도 내신 성적이 점점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음악을 좋아하던 것도 맞지만,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와 달리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음악 입시를 포기하고 다시 일반 입시를 시작했을 때도, 재수하며 수능보다 논술을 더 열심히 준비했을 때도 그냥 그때그때 더 쉬워 보이는 길을 선택했던 셈이었다. 무엇이든 어려워지는 것을,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뭔가 대단히 잘못됐다고 느낀 것은 대학교 신입생 때였다. 믿었던 논술은 다 떨어지고 하향 지원해 입학한 대학이었다. 당연히 남들보다 좋은 성적을 받아야만 했다.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재수생 시절 읽었던 책에서는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좀 방황하는 시간을 가져도 된다고 했고, 나는 그 말들을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대학교에서는 성실함이나 노력 같은 것을 더 요구했다. 이럴 수가. 그렇게 나보다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동기들은 과제나 시험, 출석 점수에서 이미 나를 한참 앞서 있었고, 그냥 그렇게 뒤처질 수는 없었기에 아예 학교를 안 나가는 날이 많아졌다. 나의 필승 카드, 열심히 노력하는 것 대신, 노력하면 잘할 텐데 안 해서 점수를 못 받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설상가상 당시 진행 중이었던 우울증도 그런 삶의 태도에 기름을 부었다. 그렇게 나는 대학교 첫 학기에 학사 경고를 받았다.
학사 경고를 받은 학생들은 학교에서 심리상담을 받아야 했다. 그때 받았던 상담을 통해 처음으로 내가 노력해서 무언가를 성취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작게라도 일상에서 꾸준히 성취하는 경험을 하면 자존감이 높아진다는데, 나는 정반대로 살았다는 결정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20년 인생에 대한 회한의 시간을 가졌지만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평생 가져온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걸 너무 늦게 깨달은 나 자신과 나를 이렇게 만든 어른들을 원망하기가 더 쉬웠다.
대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며 비슷한 상황을 마주했다. 이미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대학교 학점은 바닥이었고, 따라서 남들보다 대단한 준비를 해야 했다. 하지만 스펙을 쌓거나 포트폴리오를 만들거나 하는 실질적인 노력은 내게 너무 어려웠다. 그렇다고 잘 맞는 진로를 탐색하는 데 에너지를 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전자는 오랜 관성 탓이었고, 후자는 꿈을 잃은 데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그사이 내 인생에서 존재감이 커져버린 가난 탓도 조금 할 수 있었다. 어차피 한가하게 꿈이나 좇을 수는 없었고, 꿈은 없는 편이 더 나았다. 공교롭게도 취업 준비를 시작하면서 터진 코로나 핑계를 대며 나는 그냥 가장 빨리 시작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아쉽게도 그런 일들은 대부분 내 성향과는 전혀 맞지 않는 직무였다. 모교 학사 조교를 몇 개월 하다가 월에 20만 원 더 주는 곳으로 직장을 옮겼다. 노인 기관의 사무원, 그것도 육아휴직 중인 직원의 대체 계약직이었다.
아무런 열정이 생기지 않는 일들을 하며 나는 시들어갔다. 이 직업으로, 직무로 나를 소개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나를 정의할 수 있는 다른 말은 없었다. 특별한 무언가를 준비하는 중도 아니었고, 뭘 준비해야 하는지도 몰랐으니까.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아 불안한 채로 계약 기간이 끝났다. 비슷한 입사와 비슷한 퇴사를 한 번 더 겪고 불안한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진하고 찐득한 감정이 왈칵 쏟아졌다.
‘지겹다.’ 계속 되풀이되는 입사와 재직 기간의 괴로움, 퇴사 후의 불안정함이 지겨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지난 몇 년간 근무 형태나 직무를 불문하고 모든 직장을 그만두기 몇 주 전부터 매일 밤 출근 생각으로 괴로워했다. 얼마간은 화가 나고 또 얼마간은 슬프다가 지옥 같은 곳으로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꺽꺽 울던 많은 밤이 있었다. 사람들 다 월요일을 싫어하고 내일 또 출근하네, 입버릇처럼 불평하면서도 잘만 일하며 사는데 나는 도대체 왜 이런가. 나는 내가 비행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라고 생각한 곳에 착륙했지만 거기는 제대로 된 목적지가 아니었고, 그래서 이륙했지만 곧 다시 방향을 잃고 헤매는 비행기. 연료가 부족하니까 그냥 가까운 곳에 어중간하게 착륙하고 또 이륙하기를 반복하는, 계기판이 고장 난 고물 비행기.
비행기 소리 같은 아빠 목소리
어떤 단어에서는 냄새가 난다. 겨울, 숲, 책 같은 것들이 그렇다. 어떤 단어에서는 온도가 느껴진다. 분노, 도시, 고양이 같은 단어들이다. 어떤 단어는 아주 긴 서사를 불러일으키고, 어떤 단어는 그저 나를 통과한다. 비행기를 떠올린 순간 나에게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오래된 아빠 목소리.
‘아버지는 언제든 폭발할 작정으로 사는 사람처럼 다혈질에, 목소리는 비행기가 이륙할 때 나는 소리만큼이나 컸다.’ 퇴사 후 뭐라도 해볼까 싶어 들었던 소설 창작 수업 첫 시간 과제로 난생처음 써본 소설은 폭력적인 아버지 아래서 자란 남자가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이야기였다. 물 흐르듯 이런 문장을 써놓고는 잠깐 고민했다. 옛날에 들었던 에세이 모임 때도 아빠를 묘사하며 비슷한 문장을 썼기 때문이다. ‘우리 아빠는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서도 비행기가 이륙할 때나 나는 데시벨의 목소리로 가장 심한 욕을 했고, 나랑 내 동생을 자주 때렸다.’ 다른 새로운 표현을 생각해내려고 노력하다가 그만뒀다. 역시 폭력적인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비행기가 이륙할 때 내는 소리 같은 목소리는 필수 요소라고 느껴서였다.
아빠는 많은 종류의 소리를 냈다. 대부분 주변에 대한 무심함과 선천적으로 좋지 않은 청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늘 아랫집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도 발뒤꿈치로 쿵쿵 소리를 내며 걸었고, 천천히 걸을 때는 건조하고 거친 맨발이 바닥을 스치며 쓱 쓱 소리가 났다. 만성 비염과 지나친 흡연 때문에 코를 킁킁거리거나 커억 커억 가래를 끓어 올려 삼키는 소리도 자주 냈다. 변기 뚜껑을 내리거나 올릴 때는 변기가 깨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자는 동안에도 코를 골거나 이를 갈았다.
그래도 그중 최고는 목소리였다. 아빠 목소리가 비행기 소리 같다고 처음 느꼈던 것은 초등학교 6학년, 잠깐 방화동에 살 때였다. 김포공항과 아주 가까웠던 그 집에서는 비행기 소리가 자주 들렸다. 다른 소리와는 조금 달랐다. 소리라기보다 진동에 가까웠다. 새 소리, 티브이 소리, 윗집 발소리 같은 것들은 귀를 통해 들어오지만, 비행기 소리를 가장 먼저 포착하는 것은 심장이 아닐까 생각했다. 밤에 우리 아파트 위로 비행기가 지나갈 때면 심장 밑바닥에서부터 쿠구구궁 진동이 울리는 듯했다. 심장을 흔들어 잠들기 어렵게 만드는, 아빠 목소리 같은 비행기 소리.
살면서 만나본 어떤 사람과 비교해도 아빠 목소리가 가장 컸다. 굳이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원래 목소리가 컸는데, 화가 나면 천둥처럼 소리를 질렀고, 빈도도 잦았다.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하다가도 뭔가 수틀리면 왁 소리 지르고 욕하는 아빠 때문에 아빠가 집에 왔을 때는 늘 불안했다. 소리를 지르다가 제 분을 못 이겨 나와 동생을 많이 때렸고, 엄마랑 싸울 때는 집안 물건을 부쉈다. 아빠 방문 안쪽 면에는 둥근 모양으로 팬 자국이 두 개 있었고, 안방 문 바깥쪽 면에도 하나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찍었던 가족사진조차 제물이 되었다. 나와 내 동생은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서로의 잘못을 아빠한테 고자질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빠가 집에 있으면 싸울 때도 조용히 싸웠다. 아빠가 소리 지르는 대상이 내가 아니더라도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비행기 소리 같은 아빠 목소리.
내 기억 속 아빠는 어느 회사에서든 근속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린 나에게는 누구도 직접적으로 정확한 이유를 이야기해주지 않았지만, 엄마가 다른 어른들과 통화하는 소리를 엿들으며 대충 짐작하고는 했다. 직무를 바꾸며 이직한 적도, 상사와의 갈등 중 제 성질을 못 이겼던 적도 있는 것 같았다. 중간중간 사업을 하기도, 그만두기도 했다. 아빠의 잦은 퇴사와 이직이 아주 일반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결국 이직도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고, 학력도 경력도 화려한 아빠가 적어도 취업에서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 믿는 듯했다. 나는 그런 엄마의 느긋함을 따르기로 했다.
퇴사와 이직이 전보다 너무 잦아졌다 싶던 어느 날부터 아빠는 아예 출근하지 않았다. 마지막 퇴사 직전, 병원 경영을 위주로 일하던 아빠는 난데없이 글을 쓰겠다고 했다. 병원 경영과 관련된 책을 먼저 내놓고 커리어를 살려보겠다는 말이었다. 반년에서 1년을 잡고 시작한 글쓰기는 6년이 넘게 이어졌다. 방 안에 틀어박힌 아빠에게 글 쓰는 건 어떻게 되어가냐고 묻지 않기 시작한 건 2년 정도 지나고부터였다. 그전까지는 가족 구성원이 돌아가며 가끔 근황을 물었지만 뚜렷한 대답은 없었고 목표 기한은 점점 늦춰졌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합리적이었다. 아주 좋았던 것도 아닌 가세가 기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타이밍이 영 별로였다. 하필 내가 대학교 졸업을 앞둔 시기. 졸업 후에 찬찬히 진로를 탐색하고 준비할 여유가 있을 줄로 착각하고 마음대로 살아왔는데 그럴 수가 없어졌다.
기분 나쁜 기시감
자꾸 스스로 자랑스럽지 않은 일을 하던 어느 날, 무언가 즐거운 일을 하고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했던 글쓰기 모임을 통해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 생겼다. 가사 쓰는 것을 좋아했던 만큼, 책 읽는 것을 좋아했던 만큼 글쓰기에는 늘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돈을 벌 수 있을 정도로 글을 쓰지 못하니까, 글 쓰는 건 돈이 안 될 것 같아 꿈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오랜 바람 같은 것이었다. 어차피 내가 죽기보다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도 돈을 잘 못 번다는 걸 깨달은 어느 귀갓길에 본격적으로 글을 써봐야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내가 쓴 글을 갖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이 퍽 즐거웠다. 숨통이 트였다.
반복되는 불시착이 지겨워서 미칠 것 같던 그날도 나는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폈었다. 마지막 퇴사를 한 지 두 달, 모아놓은 돈은 없는 데다 갚아야 할 빚도 많았지만 구직 활동을 철저하게 외면하던 중이었다. 치명적인 실패를 마주하는 일을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친구와 함께 글쓰기 모임을 재개하기로 한 후 첫 글을 쓰는 중이었다. 이제껏 글쓰기 모임들을 통해 내가 마감 기한을 지키는 데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토해내고 싶은 글감들도 많았다. 물론 쓸 수 있는 시간도 넘쳐났고. 짧은 에세이 하나 쓰는 것이 크게 문제 될 리 없었다. 그런데 웬걸. 나는 짧은 글 하나를 못 쓰고 버벅대는 중이었다. 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잘 해내야만 하는데, 첫 두 문단을 쓰고 지우다 한동안은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기를 반복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체증은 더욱 심해졌다. 기분 나쁜 기시감. 아빠 생각이 난 것이 딱 이때였다.
나는 지금 너무나 아빠 같았다. 주여, 아빠를 만나 인생이 꼬인 것같이 보였던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말 그대로 노래를 불러놓고는 그 원흉인 아빠처럼 살고 있다니. 그것도 아주 정확한 루트를 따라. 치명적인 거울 치료를 당해 진부한 프로이트적 부모 원망을 다시 시작하려던 차에 낯설게도 내 마음은 그 반대를 택했다. 택했다기보다는, 그냥 저 깊숙한 곳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한 군데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부표하면서 아빠도 많은 불시착을 거쳤던 거였구나. 지금 있는 곳이 가라앉는 중임을 알면서도 이제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이륙하기 무서운 거구나. 나처럼. 내가 그러는 것처럼.
아빠가 정말 잘 해냈으면 좋겠다
아빠가 마지막 시도라 생각하고 준비해보려던 일 위에 주저앉은 후 몇 년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오피스텔을 팔아 우리 집 생활비를 대주었고, 아빠는 그렇게 몇 년 동안 처가에 못 갔다. 그 와중에는 아빠에게 당했던 폭력 때문에 곪았던 것이 터진 나와 내 동생의 살기 어린 반항과 그에 따른 유혈 사태도 몇 번 있었다. 그러면서 아빠는 점점 순해졌다. 더구나 내가 본가에서 나와 자취를 시작해 아빠를 마주칠 일도 별로 없어서 아빠가 화를 내고 소리 지르는 장면을 본 지도 꽤 되었다. 물리적 거리가 뚫어놓은 숨구멍 덕분인지, 이제는 가끔 본가에 가면 아빠 방에 대고 “이리 오너라! 어디 따님 왔는데 밖에 나와보지도 않고!” 하기도 한다.
후줄근한 모습으로 반갑게 나를 맞이하는 아빠는 내가 자주 본가에 가지 않는 만큼 쪼그라드는 중이다. 근육이 다 빠져 볼품없는 아빠의 몸이 참 작다고 느낄 때면 순간 안쓰러운 마음이 들곤 한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아빠의 이기적인 성격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동생이 얼마나 오랜 공황으로 힘들어했는지, 내가 성인 남자의 조금이라도 높은 언성에 아직도 얼마나 불안한 마음이 드는지 떠올린다. 저 왜소하고 나이 많은 아저씨보다, 그 아저씨에게 당한 피해자들이 더 안쓰럽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하려고 노력한다. 정신 차려, 누가 누구를 불쌍하게 생각한단 말이야.
얼마 전 아빠는 오랜 히키코모리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후배를 통해 얻은 야간 파트타임 자리에서 몇 달 만에 해고당하고는 어느 사회적 기업에 취직했다. 엄마 말로는 은퇴한 사람들을 고용하는 정부 지원 정책의 일환이라 월급은 아주아주 적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옛날 아빠가 한창 잘나갈 때(이것도 엄마의 말이다)의 경력과 연결된 일이라 커리어에 재진입하게 될지 누가 아느냐며 다행스럽게 여기는 눈치였다. 나는 그러게, 잘됐다 맞장구치면서도 조금 걱정스러웠다. 이것도 결국 또 다른 불시착이고, 이번 실패 후에 완전히 고장 나면 어떡하지. 그러면, 얼마 전 그나마 잘 맞는 일을 새로 시작해 약간 희망에 차있는 나는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하지.
내 서른한 번째 생일에 아빠는 새 직장으로 첫 출근을 했다. 다음 날, 하루 늦은 생일 축하 통화를 하며 직장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내게 이제 막 출근해서 뭘 알겠느냐고 둘러대는 아빠의 목소리는 약간 상기돼있었다. 앞으로 잘해보려고. 그래, 아빠, 잘해봐.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는 아빠가 정말 잘 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빠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닌 나를 위해서. 아마 나는 그런 아빠를 계속 닮아있을 테니까. 반년이 지난 며칠 전, 아빠는 회사에서 맡은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일이 많다며 푸념했다. 투덜대는 아빠 목소리는 이상하게 힘찬 느낌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환갑이 넘도록 아빠 목소리는 여전히 우렁차다. 그 사실 때문에 아빠를 덜 불쌍히 생각할 수 있다. 내가 계속 아빠에게 동정심을 덜 가질 수 있게 아빠 목소리는 계속 비행기 같았으면 좋겠다. 아주 나중에, 결국에는 아빠 목소리가 힘을 잃고 쉬어갈 때는 내가, 우리 가족들이, 아주 잘 살고 있었으면. 그래야 아빠를 가엾게 느껴도 어린 날의 나에게 덜 미안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