湖巖自傳
삼성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이다. 내가 1977년 처음 입사한 ‘D 중공업’은 삼성이 중공업 입지를 세우고 사들인 계열사로 입사 후, 몇 달 뒤에 이병철 회장이 내사하자, 사장이 사무실로 뫼실 때 자주색 상의를 입은 60대의 모습이었다. 그런 연고가 있어 이 책을 들어서 배낭에 넣었다.
이 회장님은 1910년 국권 피탈이 되던 해에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부친 이 찬우 씨, 모친 안동 권씨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주 이씨로 16대조가 의령으로 낙향하여, 10대 이후는 포의다. 조부가 가문을 더욱 크게 일으켜 큰 부자로, 집안에 노비가 5집에 아이 포함 30명인 부자로 잘사는 집인 모양이다. 조부 문산 이홍석이 세운 문산정에서 천자문을 시작하여 한문을 배우는데, 천자문을 1년 남짓 걸리고 5년을 한학으로 통감, 논어까지 마친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집안의 의론을 거쳐 11살에 초등학교에 3학년으로 입학한다. 둘째 누이 시집이 있는 진주 지수면의 지수보통학교다. 방학 때 집에 가니 재종형이 서울에서 귀성 중이라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왕이면 서울로 가자는 생각이 들어 양친에게 서울로 가겠다고 말한다. 모친의 친정이 가회동이라 모친이 거들어 줘서 함안에서 기차를 타고 상경하여 서울 수동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학교 성적은 50명 중에서 35~40등을 오르내렸다. 4학년을 마치고 방학 때 보통학교를 단기간에 마치는 속성과가 중동중학에 있다고 건의하여 중동중학교에 입학한다. 17세 소년 이병철이 방학 때 귀가하여 장가를 든다. 신부는 박팽년 선생 후손인 박기동 공의 4녀였다.
중동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방학에 귀가하여 일본 유학 결심을 아버지에게 건의하는데 “일에는 반드시 본말이 있고 시종이 있는데 너는 19세에 아직도 그것을 모르느냐?” 꾸지람을 듣는다. 유학을 반대한 것은 아니기에 결국 도일한다. 시모노세키에서 기차로 20여 시간 만에 도쿄역에 내린다. 와세다대학 근처 하숙소개소에 부탁하고, 세부 신주쿠역에서 ‘이순근’ 씨를 우연히 만나 같이 자취를 시작한다. 이병철 회장은 자취에 편식이 되어서 각기병에 걸리고 만다. 2학년 때 휴학을 하고 온천 등으로 요양한다, 당시 50원이면 5~6명의 가족이 중류 생활을 하는데, 집에서 보내주는 하숙비가 월/2백 원이었다. 시간은 남으나 병은 기가 허하여 생긴 것이니 결단을 하고 귀국한다. 그러니 이 회장님은 졸업증서가 보통학교, 중학교, 대학교 모두 없는 셈이다. 사전 아무 연락 없이 귀향했으나 부친은 무슨 요량이 있겠지 하면서 몸조리나 잘하라 이른다. 집에 5가구 30명의 노비를 우선 해방할 것을 부친에 건의하자 받아들인다. 그래서 약간의 양식과 돈, 그리고 토지를 나누어 주면서 “이것으로 우리 집과 주종 관계의 인연은 끊는다. 자유롭게 살라” 속박을 풀어줬다. 와세다대학 시절 읽은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던 것이 작용한 듯하단다.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 그것이 사업이며, 사업에는 사회성이 있고 사업을 추진하는 기업 또한 사회적 존재다. 그러면 “사업에 좌우되지 말고, 사업을 좌우하라”라는 선인들의 가르침이다. 결심을 굳히고 부친에게 생각을 말하니” 너의 몫으로 연 3백 석의 재산을 주려던 참이다. 스스로 납득이 가는 일이면 결단을 내려 보는 것도 좋다. “말씀하셨다. 자금은 부족하니 대구, 부산, 평양보다는 가까운 마산을 후보지로 삼았다. 경남 일대의 벼를 도정하여 일본으로 이출하는 곳이었다. 도정료를 선납하고도 상당 기간을 기다리는 시절이라 세 사람과 공동사업을 시작한다. 1만 원씩 투자하여 협동정미소를 차린다. 26세 때다. 그리고 식산은행 마산지점을 찾아가 융자를 얻었다. 1년 영업성과는 자본금 2/3 잠식이었다. 손해 원인을 분석해 보니 쌀값이 오를 때 사고, 내릴 때 판 것이 원인이라 다음에는 반대로 오르면 팔고, 내리면 사는 전법으로 하니 2만 원의 이익이 났다. 마산에 수송물자를 실을 트럭이 부족했다. 마침 ‘마산일출자동차회사’가 매물로 나와 사들이고 새 차로 10대 구입하여 20대 트럭의 회사로 사업을 경영한다. 회사 경영은 지배인에게 맡기고 남아도는 시간과 돈을 주체 못 하듯 요정 나들이를 한다. 마산에 ‘천해관’ 등 한국 요정과 ‘망월’ 등 일본 요정이 8개 있었다. 한국인, 일본인 합쳐 80~90명의 기생이 있었다. 이 무렵 이 회장님은 국악의 취미가 몸에 젖는다. 정미소와 운수회사의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연수 1만석, 2백만 평의 대지가 된다. 당시 토지가격은 평당, 25전 한 마지기는 200평, 투자액 50원, 소출은 26두로 소작인에 13두 주고 남은 13두는 15원인데, 지세 1원, 기타 잡비 1원 융자금 이자 3원 65전을 공제해도 투자액의 16%인 8원 25전의 수익이 한 마지기 논에서 나온다. 이런 원인은 세계적 공항이 원인이었다. 당시 토지는 담보율이 80%로 이자는 7푼 3리였다. 토지투자사업은 순조로웠으나 부채가 너무 많았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일본은 비상조치를 내린다. 대출을 중단한다는 통보다. 시가보다 싸게 전답을 방매하고 정미소와 운수회사도 남에게 넘겨주고 모든 부채를 청산하고 나니, 남은 것은 전답 10만 평과 현금 2만 원이었단다. 30세도 못 된 청년에게 만감이 스치는 얘기다. 3 利가 있으면, 반드시 3 害가 있다. “교만한 자치고 망하지 않은 자 아직 없다. “사업은 반듯이, 시기가 정세에 맞추어야 한다.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자기 능력과 한계를 냉철히 판단하고 요행을 바라는 투기는 절대로 피해야 하고, 직관력을 연마하는 한편 제2, 제3의 대비책을 미리 강구해야 한다. 기울어 실패라 판단되면 未練을 청산하고, 차선의 길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切感한다.
‘비스마르크’ 시대의 ‘포로이센’군 원수 ‘몰트케’는 이런 명언을 남긴다. “나는 항상 청년의 실패를 흥미롭게 지켜본다. 청년의 실패야 말고 그 자신 성공의 척도다. 그는 실패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리고 어떻게 거기에 대처했는가, 낙담했는가, 물러섰는가, 아니면 더욱 용기를 북돋아 전진했는가, 이것으로 그의 생애는 결정되는 것이다. “이병철은 반년 후 대구에서 ‘삼성상회’라는 새로운 사업에 착수한다. 마산의 어음은 최대 20만 원이 고작일 때, 중국에 가보니 3~4백만 원이다. 2달의 조사 여행을 마치고 청과물과 건어물과 잡화 등의 무역이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근거지는 대구 서문시장 수동에 잡고 250평의 점포를 사서 삼성상회 간판을 건다. 三은 큰 것, 많은 것, 강한 것이고, 星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와세다대학 유학할 때 만난 이순군씨를 지배인으로 맞이했다. 모든 일을 일임했다. 疑人勿用, 用人勿疑 의심이 가거든 사람을 고용하지 말아라, 의심하면서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 삼성상회가 순조로워지자, 대구의 일본인이 경영하던 청주양조장 ‘조선양조’를 인수한다. 당시 양조업은 할당량의 술을 빚기만 하면 잘도 팔리는 구조였다. 어느덧 삼성은 대구의 굴지의 납세자가 된다. 하루 요리값이 1인당 10원, 기생 화대도 1시간 1원이면 후한 편이다. 대구, 서울, 서울, 부산, 벳부, 교토로 원정을 하며 돈을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무 절제한 일상에 충고를 서 숨지 않았던 친구가 ‘채현병’ 씨란다.
중국, 대륙 깊이까지 군화로 짓밟았던 일본 군국주의는 되돌아올 길이 없는 험준한 산에 올라, 내려오려야 내려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맨손으로 호랑이와 맞서고, 대하를 헤엄쳐 건너려는 暴虎馮河의 무모한 짓을 일본은 자행하고 있었다. 이런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파멸은 자명한 일이다. 식량난에 대비해 왜관에 1만 평의 과수원을 사들이어 식량난에 대비한다. 그리고 고향 의령에 들어앉았다. 여기서 해방을 맞이한다. 이제부터는 자주독립국과의 경제 선정에 합당한 소임을 다해야 한다. 민생의 안전에는 결제 질서 확립이 선행되어야 하고, 정상적인 경제활동의 보장을 위해서는 정치의 안정이 불가결하다. 그 정치의 안정을 확고하게 만드는 기반은 우선 경제의 안정에 있고, 거기에 수반하여 민생도 안정된다. 민생과 경제와 정치는 삼위일체의 것이어서 서로 적절하게 보안 결합하여야 국가. 사회의 발전이 비로소 약속되는 것이다. 이과 같은 이 회장님의 각성은 그 후 삼성의 사업보국의 기업관이 성립된다. 그러나 일반 사회인들에게서, 때로는 돈벌이 주의자라는 비난까지 사면서 고난의 길을 가는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2022.08.14.
호암자전
이병철 지음
나남 편찬
첫댓글
될성 싶은 것은
떡잎부터라든가...
좋은 글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즐거운 추석명절 되세요.
김경환 지회장님
풍성한 추석 명절 쇄시기바랍니다
애정 어린 댓글 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