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수박 그리고 책상
어머니가 승천하신지 벌써 20년이 지났다.
세월의 흐름을 백구과극(白駒過隙)이라 했던가.
인생이란 백마가 달리는 것을 문틈으로 내다보는 것처럼
삽시간에 지나간다는 뜻이다.
문득 문득 어머니가 미치도록 그립고 보고 싶다.
언제이고 보고 싶지 않은 때가 있을까 만
내 나이 이제 8 순을 넘기고 보니
요새는 어머니 생각에 걸핏하면 눈물이 앞선다.
이야기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1947년의 이야기이다.
이야기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내 고향 이야기를 잠시 해야 할 것 같다.
내 고향은 금강(錦江)이 흐르는 곳에서 10 여 리 (4킬로미터)쯤 들어가면
출성 산(出聖山)과 용천 산(龍天山)이 나란히 솟아 있는 가운데에 자리 잡고,
30 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다.
어머니는 부잣집 막내딸이었는데
가난한 집 둘째 아들인 우리 아버지와 일찍 결혼하셨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지만
불과 17세에 같은 동갑이었던 아버지와 결혼하신 거다.
나이도 그러셨지만 부잣집 막내딸이 가난한 집 우리 아버지와 결혼하셨으니
고추보다 맵고 삭풍보다 애리다는 시집살이가 그 어린 어머니에게 안긴 것이다.
우리 할머니는 얼마나 엄하셨던 분인지
최 성준(우리 할아버지 함자) 마누라라면 온 면(面)이 다 알아보시는 분이셨다 한다.
그런 시 어머님을 모시고 가난한 집 둘째 며느리로서 사셨으니
하루라도 숨어 울음을 그친 날이 없으셨으리라.
더구나 가난한 집에 살다 보니 매일 매일 계속되는 고된 일에 온 몸이 녹초가 되어야 하셨다 한다.
그런 와중에 19세에 첫 아기를 낳으시기 시작하여 6 남매를 낳으셨다니
두 살 터울의 자식을 보셨으니 우리 어머님 몸이 철이 아니고 선 어떻게 견디셨겠는가!
그런데 6 남매 중 4 남매는 두 살 이전에 다 저 세상으로 갔으니
먼 훗날 어머님께서 치매로 고생하실 때 잠시 잠시 정신이 돌아오시면
"어머니 왜 그러셔요?" 하고 물을 때마다
"네 형제 저 세상으로 보낼 때 내 정신 다 가서 그런다" 하셨다.
그렇게 해서 누나와 나 둘만이 어머님과 함께 살았다.
이제 이야기를 옮기려 한다.
나는 해방이 된 다음 해에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들어갔다.
그때 나이 9 살이었지만 자식을 일찍 넷이나 보낸 어머니께서는
살아있는 나와 누나가 언제 또 저승으로 갈지 걱정을 놓으신 적이 없으셨다 한다.
그래서 9 살이 되어서 겨우 초등학교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것도 동네에 사시던 6학년 누나께서 학교에 보내라고 안내해도
늘 어머니께서는 "저 어린 것을 어떻게 학교에 보내?" 하시며 거절하시던 것을
누나의 계속된 권유로 입학을 하게 되었다.
시골 두메 산골이다 보니 집에서 학교까지는 6킬로미터나 되는
어린 나에게는 벅찬 거리였지만,
한 면(面)에 하나 밖에 학교가 없던 때이니 어찌 다른 도리가 있었겠는가.
그렇게 해서 학교에 들어갔지만 가난한 집이다 보니 편히 공부할 여건이 되었겠는가?.
엎드려 공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어머니는 그게 그렇게 안쓰럽게 보이셨었나 보다.
우리 마을 이름은 숯골이다.
당시만 해도 땔감이라고 해서 나무를 베어다 때고, 잘라낸 나무 뿌리(등걸)를 캐서 장작을
만들어 집에서 8킬로미터나 되는 지경(대야)이라는 장에 가서 팔던 때이다.
아버지는 그런 일을 하셨고 어머니는 밭에 오곡을 심어 가을에는 추수하여 먼 거리의 장에
팔아서 얻는 돈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마을 이름과는 거리가 있는 우리 마을은 왕골을 심어 돗자리를 만들어 팔고,
대부분의 가정이 수박을 심어 군산 이라는 도시 집에서 12킬로미터가 더 되는 곳에 파는
것이 큰 수입원이었다.
우리 집도 수박을 심어 여름이면 그것이 수입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하루는 어머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아가, 엄마가 수박을 팔아 너 책상 하나 사주어야겠다.
그러니 넌 텃밭에 난 풀을 좀 뽑아라" 하시는 것이었다.
한 여름이었다.
밭은 열 평 정도 되는 작은 텃밭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더구나 한 여름 뙤약볕이 내리 쬐니 얼마나 땀하고 싸웠겠는가.
힘이 들었다. 잠시 잠시 쉬어가며 해질 무렵에야 텃밭의 풀을 다 뽑았다.
어머니께서는 수박을 한 광주리 따서 이고 군산 장에 새벽같이 출발하셔 가셨다.
그런데 군산 까지 가시려면 집에서 창감 재라는 산을 넘어야 한다.
그 산이 빈 몸으로 넘기도 어려운 산이다.
그러나 그 산을 넘지 않고는 군산에 가실 수가 없으니 어찌 하겠는가.
우리 어머니는 키가 작으셨다. 한 1미터 50 센티 정도 되시는 분이셨다.
그런 여린 몸으로 어떻게 그 무거운 수박 광주리를 이고
그 산을 넘으셨을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나중에 군산중학교를 다니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산을 넘어 3년을 다녀 보고서야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넘어 다녔다.
나는 나의 일을 마치고 어머님 오시기를 학수고대 하고 기다렸다.
다행히 수박이라도 잘 팔리면 모르지만 팔리지도 못하면
책상을 사오시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해가 넘어가려 할 때 쯤에는 조바심마저 들기 시작했다.
나는 집에서 나와 어머님 오시는 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어떤 책상을 사 오실까?
얼마 만한 책상을 사 오실까?
새 책상일까 아니면 돈이 되지 않으면 헌 책상을 사오는 것은 아닐까?
여러 생각에 점점 붉어져 가는 저녘 노을 바라보며 어머님 오시기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저 멀리에서 어머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단숨에 뛰어가 어머님께서 사 오시는 책상을 보았다.
어머님께서는 기진맥진 하셔서 매우 힘들어 보이셨다.
대신 들어드리고 싶었지만 워낙 큰 책상이라 어머님 뒤를 졸래졸래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도착하셨다.
어머님은 책상을 내려 놓으시며
"우리 아들 수고했구나.
엄마가 좋은 새 책상을 사 주고 싶었지만 새 책상은 너무 비싸 이 책상을 사왔어.
이제 우리 아들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시며
허기진 배에 찬 물 한 사발 벌컥벌컥 마시는 것이었다.
책상은 아주 컸다. 헌 책상이지만 검은 색으로 새로 칠하여 멋 있었다.
비스듬히 기우는 책상이어서 책상 위에 책을 올려놓고 공부하는데 아주 좋았다.
내 어린 나이에 너무 커서 방석을 놓고서 앉아야 했다.
그간 엎드려 팔꿈치가 아파서 뒤척이며 공부하던 내가
어머님의 간절한 소망이 깃든 책상을 만났으니 내 마음 속에 다시 다짐하였다.
"그래 열심히 공부하자.
그래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이 가난도 극복하고
어머님 은혜를 생각해서 열심히 공부하자"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나는 그 책상으로 내가 대학을 들어갈 때까지 공부했다.
대학을 나와 군대에 갔다 와서 직장을 들어가기 위해 공부할 때까지 이용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촛불이 넘어져 하마터면 책상은 물론이요 집마저 태울 뻔한 그 책상,
우리 어머니 수박을 이고 30 리가 넘는 군산에 가셔 팔아 사오신 그 까만 책상,
텃밭 풀을 뽑으면 사다 주시겠다며 그 먼 거리 군산에서 이고 오신 그 큰 책상,
어머니와 자식으로 약속하며 사오신 그 책상,
어머니 생각이 떠오르며 그 책상도 보고 싶다.
나는 먼 훗날 서울 생활하면서 직장을 다녔지만 어쩌다 고향을 가도
내가 3년을 걸어 왕복 80 리 거리에 있던 그 거리.
우리 어머니 수박 한 광주리 이고 가셔 책상을 사오셨던 그 거리.
그때를 생각하며 택시를 타고 그 고향을 가지 않았다.
그때 그 생각들이 나를 붙들어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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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창감재 하니 창안이라는 동네가 저의 할머니(채 氏) 친정이였습니다.
군중 대 선배님 되시고 10년 나이차가 됩니다.
피부에 와 닫는 글 잘읽고 가슴이 뭉클 합니다.
뚝배기 님! 고향 분이시네요. 창감재 다 넘어가다가 옆길로 가면 창안이지요.
창안이 할머님 고향이시라니 그 동네에 사범학교 다니시던 선배 님이 채 씨였습니다.
그 형님과 하교 시에 있었던 기막힌 추억이 있는데 같은 채 씨이시니
혹시 할머님과 인연이 있는 분 아니신지 모르겠네요.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