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슬픈 자화상
고난의 길을 걸어 온 우리 조상님들의 실상을 색다른 각도에서 조감해보는 글입니다. 읽는 분들마다의 생각은 다를 수 있지만 일독을 권합니다. 아랫글은 길지만, 고난의 길을 걸어 온 우리 민족의 여정을 총체적으로 통찰할 수 있게 하여 세상을 넓은 시야에서 보도록 돕는 글이라 생각합니다.
<노예 제도와 한반도 수난의 역사적 고찰>
1,800년대 말 콩고가 벨기에의 식민지였을 때 있었던 실화입니다. 벨기에 식민지 시작 전에 2천만 명이었던 콩고 인구가 식민지가 끝날 때 850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전 인구의 60% 이상인 1,250만 명의 인구가 죽어야만 했던 이유는 벨기에 사람들이 양 손목을 잘라 버렸기 때문에 밥을 먹을 수가 없어 굶어 죽었습니다. 벨기에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은 콩고 사람들의 손목을 잘랐을까요?
콩고에서 고무가 많이 났는데 벨기에 사람들은 콩고 사람을 노예로 부리면서 나무에 흠집을 내고 고무 채취를 시켰습니다. 고무 채취량이 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채찍으로 마구 때렸습니다. 채찍에 맞기 싫어서 콩고 사람들은 나무를 잘라서 목표했던 고무 채취량을 쉽게 늘렸습니다. 그런데, 고무 채취량이 늘어서 좋기는 한데 벨기에 사람 눈에 숲속의 고무나무가 마구 잘라 없어져 버려서 조만간 고무 채취량이 대폭 쪼그라들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래서 고무나무를 자르는 콩고인들의 양 손목을 잘라 버리면서 그 아이들의 손목까지 다 잘랐습니다.
이 세상에서 식민지가 가장 많았기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 인도에서 목화를 재배하고 전 세계로 제일 많이 수출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습니다. 물론 인도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며 목화를 재배했고, 방적기로 실을 짜고 베틀로 면제품을 만들었지요.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할 때 베를 짜던 기계는 다 부수고 인도 사람들의 양 손목을 다 잘랐습니다. 식민지 때 노예 생활하면서 영국인에게 배운 기술로 면제품 만들어 수출하고 돈을 버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지요. 그 당시에 실크와 양모 외 저렴하고 착용감이 좋은 천은 없었습니다. 면제품은 지금의 반도체처럼 최신기술이고 첨단 산업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문익점이 붓뚜껑에 목화씨를 숨겨 가져왔겠습니까.
1,250만 명을 죽인 벨기에 보다는 너그럽지만 인도인 면직공의 양 손목을 자른 영국도 잔혹하기는 그지없습니다. 식민지 착취를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착취라고 부를 수 있고, 식민지 사람들 학대하고 잔인하게 죽이려면 이 정도는 해야겠지요. 식민지착취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벨기에와 영국이 보여줍니다.
일본은 조선에서 착취해 갈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석유도 안 나고, 고무도 없고, 식량은 모자라서 굶어 죽는 조센진이 널려 있었습니다. 도박에 알코올 중독에 딸자식을 팔아먹는 일은 다반사였지요. 산이란 산의 나무는 다 패서 난방용 땔감과 밥할 때의 불쏘시개로 사용했기 때문에 100여 년 전 사진에 조선의 산은 벌건 민둥산이었습니다. 산에 나무가 없기에 비가 오면 나무 뿌리가 물을 머금지 못해 홍수가 나고, 산과 언덕의 황토가 하천에 쓸려 와서 강바닥이 높아졌습니다. 조금만 비가 와도 넘쳐서 홍수에 사망자가 발생하고 굶어 죽는 일은 다반사였습니다. 큰 비가 와도 농사를 망쳐 굶어야 했고, 가뭄이 와도 굶어 죽었습니다. 치산치수는 간 곳 없고 오로지 농사지을 때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에서 무식하고, 못난 조선인에게 가난과 굶주림은 피할 수 없는 생지옥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조선에 수 억 그루의 나무를 심은 것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습니다.
하수도 시설이 없어서 음식물 쓰레기는 담 밑에 구덩이를 파고 그냥 버렸기에 여름이 오면 파리가 들끓고 썩은 냄새가 온 마을에 퍼졌고, 태풍과 장마가 들면 썩은 음식물 국물이 우물로 흘러들어 수인성 전염병이 창궐하여 떼죽음을 당하면서 죽었지만, 당시 미개한 한방에서는 치료약도 없었고 병들어 죽는 이유도 몰랐습니다. 그냥 "역병이 돌았다"였습니다.
식민지 시대 이전에는 도로는 좁고 포장되어 있지 않았기에 비만 오면 뻘로 변해 짚신이 푹푹 빠졌지요. 대부분의 길이 좁아서 마차도 못 다니니 가마가 유일한 운행 수단이었지 않습니까? 가마는 바퀴가 없으니까 좁은 길도 가능했지요. 조선 시대 가마에 바퀴 달려 있는 모습 보셨나요?
착취를 통해 잘 먹어서 무거운 양반을 두 명 내지 네 명이 가마를 손으로 들고 실어날랐습니다. 바퀴가 있으면 편하게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을 알지만 도로는 도로가 아니었습니다. 일제시대에 와서야 전국적으로 新作路가 생기기 시작했지요.
그 당시 중국과 일본엔 손수레에 바퀴를 달고 사람을 실어날랐습니다.
양반 6-10%, 중인 20%, 상놈과 노비가 70%의 인구 구성이었던 조선에는 일자 무식자가 전 인구의 70%를 넘었습니다.
훈민정음을 창시한 위대한 세종대왕은 어디로 갔나요? 1443년에 훈민정음을 창제했지만 상놈과 노비에게 가르쳤던 적이 없기에 그들은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양반가의 아녀자가 배운 정도였지요. 양반은 죽어도 천박한 언문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인은 이들을 포함한 모든 조선인에게 공교육을 도입해서 일본어뿐 아니라 한글을 보급했습니다. 일제시대 이전까지는 양반만 동네 서당에 가서 한자를 배웠지 한글을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상놈과 노비는 서당 근처도 가 본 적이 없구요.
조선 반도 전역에 국민학교를 만든 일본인들은 안 가겠다는 조선인의 손목을 이끌고 국민학교에 입학시켜서 일본어와 한글, 산수 등을 가르쳤습니다. 일본인이 조선에 초등학교만 지었나요? 중고등학교와 대학도 세웠고 이들에게 영어와 과학도 가르쳤습니다. 경성대학이 지금의 서울대이지요.
저수지를 만들고, 상하수도를 건설했고, 철도를 놓고, 도로를 닦고, 다리를 놓고, 빌딩을 짓고, 병원을 짓고, 발전소를 짓고,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 민초 조선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에게 물도 떠주고 밥도 지어주며 적극 협력했습니다. 이씨 조선 왕족과 양반의 가렴주구에 진절머리를 냈던 상놈과 노비는 차라리 일본의 지배가 더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왜군에게 친절했던 조선인의 기록이 남아 있겠지요.
1910년 한일 합방이 되기 전 150년간 조선의 인구는 거의 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과 35년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 인구는 거의 두 배로 늘었습니다. 저수지와 상하수도의 보급, 치료해 주는 의료와 양반의 착취가 없었기에 질병을 예방ㆍ치료하며 저수지 물로 가뭄 걱정없이 농사지어 먹고 살 수 있었고, 아이 낳고 키우면 죽지도 않아 인구 증가는 폭발적이었습니다. 당연히 조선인의 평균 수명이 늘어났지요. 저절로 조선인 평균 수명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일본인이 의대를 설립하여 의사를 양성하고 조선인의 병을 고쳐주고 수명을 늘려 준 결과였습니다.
일본이 조선에 이렇게 투자한 것은 나중에 식민지에서 착취하기 위한 선투자라구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조선을 식민지로서가 아니라 중ㆍ러 대륙으로 들어서기 위한 관문으로서 우리와 합방 하여 우리를 일본에 편입시키려는 목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천연자원을 수탈하려는 목적을 위해 식민지 삼고 철도를 건설했다고 보는 지엽적인 해석도 있으나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관점입니다. 일본이 조선에 35년여간 투자한 몇십억 달러의 자산가치에 비하면 수탈액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으므로 식민지의 목적을 자원수탈로 볼 수가 없지요.
첫댓글 시각을 바꾸어 살펴보면 전혀 다른 사실을 알 수 있게 되는군요. 저의 선고께서도 일본에 오래 사시다가 나오셨는데, 일본인에 대한 긍정적 생각과 부정적 생각을 다 가지고 계셨습니다. 무엇이나 싸잡아서 일률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편견일 수도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벨기에와 영국의 '식민지 사람 손목 자르기 ' 같은 야비한 짓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됩니다.